<25화>
훗날 내가 어른이 되어 그날을 돌이켜볼 때면, 좀 비겁하기는 하지만, 그냥 루나한테 해결해달라고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선호 말이 맞았다. 교장 쌤 친구의 조카를 건드리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았다.
3대 1의 싸움은 11대 1로 끝났다. 내 편을 들어주는 애는 한 명도 없었다. 이선호와 개나리가 담임을 불러올 때까지 3명이 11명이 되어 나를 패는 바람에 겨우 회복했던 내 얼굴은 이제 밤고구마도 호박고구마도 아니고 군고구마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러게 눈곱만한 게 왜 최지환에게 대들었냐며 놀림 반 비웃음 반 비난을 쏟아냈다.
“질 게 뻔한 싸움을 왜 걸어?”
“이선호. 내가 당하는 걸 봤으면서 그런 말을 해?”
“어딜 감히 맨주먹으로 대들어? 네가 150cm만 돼도 내가 이런 말 안 한다.”
“씹, 왜 키는 갖고 물고 늘어져!”
“너 덩치들한테 당하는 거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코끼리 한 다스가 달팽이 한 마리 가지고 놀고 있다는….”
“닥쳐!”
“어유, 쪼꼬만 게 목소리는 커요.”
“친구가 당하는데 보고만 있는 비겁자 주제에!”
“생각해봤는데, 새우튀김 하나 줬다고 친구라고 우기기는 좀 그런 것 같아. 친구 얘기는 없었던 일로 할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제 친구도 아니니까 옆에서 지저귀지 말고 꺼져!”
“하, 꽈리고추만 한 게 성질만 드러워요.”
“너 덤벼!”
“덤비라면 못 덤빌 줄 알고!”
“야! 이선호. 왜 다친 애한테 자꾸 시비 걸어?”
“계나리 넌 빠져!”
그때 우리는 보건실에 있었다.
“너희들 왜 그래?”
마침 보건 선생님이 들어왔기에 투덕거리던 이선호와 나는 서로를 집어던졌다.
“쳇!”
“흥!”
최지환 패거리들은 다친 데가 없었다.
고소하려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어야 했다.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재빨리 몸을 움직였기에 큰 통증은 없었다. 하도 맞고 살아서 어디를 맞아야 덜 아픈지는 도통한 나였다.
치료를 끝내고 보건실을 나왔다. 투덜거리면서도 이선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고소할 거야?”
찜찜한 것이 있었다. 루나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이다.
“우리 일 발설하면 우린 외계인 연구소에 보내질지도 몰라. 생체 실험당하고, 감금되고.”
아무래도 경찰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의사에 따라 학교폭력위원회가 소집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루나를 불러야 한다. 그가 귀찮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를 곤란하게 할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나와 그의 관계에 대해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괜히 긴 설명을 늘어놔야 할지도 모른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고 싶었을 뿐인데 아직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분하다. 이선호 말대로 내 키가 150cm만 되었어도 이렇게 패배감은 안 들 텐데. 진짜로 기분 더러웠다.
담임이 의무실로 찾아와 내 의사를 물었다. 나는 고소도 하지 않을 거고 학폭위도 소집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담임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무슨 큰 선심이라도 쓰듯이 조퇴하라고 했다.
그러고 교실로 돌아와 소지품을 챙기려는데 최지환이 의기양양해서 떠들어댔다.
“난쟁이가 주먹밥이 됐네!”
패거리들이 왁자지껄 웃어댔다. 나는 눈을 부라리며 노려봤지만 잘 보이지는 않았다.
가방을 챙겨 들고 교실을 나서는데 또 한 번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선호가 잽싸게 쫓아 나왔다.
“잘했어.”
“뭘?”
“저런 녀석들하고는 안 얽히는 게 좋아. 조용히 넘어가는 게 상책이야.”
내 머릿속에는 갖가지 복수극이 활개를 쳤다.
뒷산에 구덩이를 판다, 나뭇잎으로 덮는다, 최지환 패거리들을 유인해 빠뜨린다, 흙을 덮어 묻는다. 어우,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동네에는 뒷산도 없고 최지환 패거리를 유인할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들키면 경찰에 잡혀갈 테니 또 루나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경찰과 엮이지 않고 살기가 참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엮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자꾸 엮이는 것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이상하게 경찰과 엮일 일이 생기니 말이다.
아무튼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루나를 위험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저 조용히 살아야겠다. 그나저나 이 군고구마 같은 얼굴은 어떡하지?
“이선호. 나 얼굴 많이 이상하냐?”
“이상하냐고? 응.”
“막 맞은 것처럼 보여?”
“응.”
“자식이, 성의가 없어.”
“거울을 봐. 성의고 뭐고 쥐어짜다 만 빨래 같아.”
“씨….”
“아프지는 않냐?”
“어때 보여?”
“자식이, 질문하면 즉답하는 법이 없네. 보기엔 굉장히 아플 것 같은데 너 하는 짓거리 보면 별로 안 아픈 것 같아서 그래.”
“별로 안 아파.”
“대단하네.”
“이제 알았냐?”
“데려다줄까?”
“죽을래?”
“그럼 내일 보자. 조심해 가라.”
이선호는 건너편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교차로에서 헤어졌다.
스쿨버스가 오는 시간이 아니라서 루나커피까지 걷기로 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혼자 개폼을 잡으며 터덜거렸다.
루나한테 얼굴을 안 들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가게 말고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는데 정자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아시다시피 얼마 안 됐거든요.”
루나 목소리가 들리기에 화단 아래로 몸을 숙였다. 대문 주위에는 풍성한 꽃나무와 채소들이 자라나고 있어서 130cm가 조금 넘는 나는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도로 나가서 가게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로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제적인 문제는 나도 도움을 줄 수 있어. 어차피 플럼버에서는 쓰지도 못할 돈이니까.”
“돈이라면 저도 은별이 하나 도와줄 정도는 있어요.”
“그럼 됐지 뭘 그래? 그동안 살아본 바로는 지구는 돈이 최고인 곳이야. 특히 이 나라는 최근 100년간 물질만능주의에 가장 많이 찌들었어. 안 그런가, 필립?”
“야옹.”
“내 생각도 로저랑 같아요, 루나. 그 아이 때문에 미적거리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엘리아. 네임이 있다잖아. 그 아이 네임.”
“에릭, 그게 잘못된 거죠. 눈곱만한 꼬마라면서요?”
“아이는 금방 자라.”
“그게 문제가 아니죠, 아치볼트. 플럼버인은 플럼버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야 해요. 난 여기에 온 후로 단 한 번도 두 다리 뻗고 자본 적이 없어요. 플럼버에서는 불안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아요.”
“그건 엘리아 말이 맞아. 아무리 플럼버인이 지구인보다 강한 체력과 항체를 가지고 있다 해도 평생 중병에 걸리지 말란 법 있나?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체가 들통 나는 건 시간문제야.”
“아치볼트. 플럼버인은 절대 아프지 않아.”
“플럼버인이 신은 아니에요, 워튼 씨.”
“엘리아. 루나에게도 입장이 있는 거니까.”
“자긴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아치볼트?”
연인이나 부부로 생각되는 남녀가 토닥거리는 동안 로저 목소리가 들렸다.
“루나. 나는 진정으로 자네가 걱정돼. 이번에는 오로지 자네와 고양이들 생각만 하도록 해.”
“야옹! 로저! 지금 고양이라고 했나?”
“아, 미안.”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생각 좀 해볼게요.”
“생각이라니, 루나. 뭘 망설이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로저. 이제 막 거둔 아이예요. 애가 고등학생만 됐어도 전혀 망설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어려요. 이건 네임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순전히 어른으로서 힘없는 아이를 순수하게 걱정하기 때문이에요.”
몇 마디 잡담이 더 오갔고, 어느새 손님들은 일어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인사말을 주고받더니 뒷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내 조용해졌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앉아있었다. 화단 가득 핀 달맞이꽃 향기가 루나의 것인 양 코끝을 간질였다.
대화를 엿들은 결과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루나에게 내 이름이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귀로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뭔가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네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여자도 ‘눈곱만한 꼬마라면서요’라고 반문했다. 내 짐작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너무 기뻐서 팔짝팔짝 뛰었을 것이다. 그런데 듣고 말았다.
둘째, 루나가 떠날지도 모른다.
나도 데려가 달라고 할까? 그 생각은 획기적이었다. 그래, 같이 못 갈 이유가 뭐지? 내가 여기에 무슨 미련이 남아있다고, 난 루나의 이름을 가진 남자잖아. 충분히 같이 가도 되는 거 아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있는 줄도 몰랐는데 달맞이꽃 화단 한가운데에서 뭉크 혹은 베리, 나나가 야옹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셋 다 얼룩 고양이라서 아직 제대로 구별이 안 된다.
막 뛰어 들어가려는데 뒷문 유리창에 내 엄청난 얼굴이 비쳤다.
“헉!”
이 얼굴을 루나가 보면 굉장히 곤란했다.
그때 휴대폰이라는 물건이 생각났다. 냉큼 꺼내서 전화를 걸자 신호가 가더니 곧 루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 은별아.
“나도 플럼버에 갈 수 있어요?”
- 뭐라고?
“나 지구에서 살아야 할 이유 없는데, 나도 플럼버에 가도 되죠?”
-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지금 쉬는 시간이야?
“아… 네.”
- 그게 말이다. 그건 안 돼.
“왜요?”
- 지구인의 몸으로는 좌표 이동을 할 수가 없어.
“네…? 왜요?”
- 플럼버인과 지구인은 생체 구조가 조금 다르다고 했지? 좌표를 건널 때 먼지보다도 작은 입자로 분해된다는 말도 기억나? 이동이 끝나면 다시 결합하고 말이야. 그런데 지구인은 그 결합 능력이 없기 때문에 좌표를 건널 때 산산조각이 난 채로 끝나고 마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청천벽력이었다.
어째서 루나가 건널 수 있는 좌표를 나는 건너지 못한단 거야? 우린 네임으로 연결된 사인데.
- 은별아?
“하, 하지만 순간이동은 되잖아요.”
- 좌표 이동과 순간이동은 물리적으로 시스템이 전혀 달라. 나중에 설명해줄게.
태어나서 이런 충격은 처음인 것 같았다. 엄마가 날 버리고 떠날 때도 이렇게 충격받지는 않았는데.
“알겠어요. 이따 봐요.”
- 그래. 공부 잘하고 와.
흠씬 처맞았을 때도 멀쩡하던 다리에서 힘이 풀려버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까 들은 말로 미루어 보니 곧 도킹 날짜가 다가오는 모양이던데, 언제일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별이란 말인가.
“어떡하지…?”
가지 말라고 떼를 써볼까? 못 가게 할 방법을 생각해보자. 루나가 밤에 마시는 차에 잠 오는 약을 탈까?
“루나….”
아니, 나는 알고 있었다. 루나를 보내줘야 한다는 것을.
가지 않으면 루나가 위험해지는 것 같았다. 로저도 걱정된다고 했고 다른 회원들도 우려하고 있었다. 루나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충격을 넘어 나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를 붙잡으면 안 된다. 더욱이 그 누구도 아닌 나는 절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이곳에 그를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가진 남자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겨우 이걸로 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