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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커피 2호점-23화 (23/103)

<23화>

루나가 나를 번쩍 안아 들거나 업거나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솔직히 보호자가 있다는 건 좋은 거였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늘 바랐던 일이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해서 얼떨떨하면서도 너무나 빨리 적응이 되었다. 편안하고 좋은 것에는 빨리 적응하게 되는 모양이다.

급식실에 루나가 나타났을 때 나는 그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라고 잔소리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나보다 더 화가 난 얼굴로 최지환을 밀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때 내가 느낀 기쁨은 좀 묘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파악한 루나의 이미지와는 다른 면을 발견해 신기하기도 했고, 감히 루나를 파악했다고 생각한 내가 성급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나는 꼭 보물섬 같다. 나는 그 섬을 앞으로도 계속 탐험하고 발굴할 생각에 즐겁기까지 했다.

아무튼 보호자가 생겼다는 안정감 말고도 내 가슴은 뜻하지 않은 환희로 새삼 두근거렸다.

다음날 나는 루나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루나가 사준 옷을 입고, 루나가 사준 휴대폰을 손에 들고, 고급진 워치까지 손목에 차고 발걸음도 당당하게 마당으로 내려왔다.

뒷마당에 새침하게 서 있는 자전거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바구니 안에서 놀고 있는 고양이들도 한 번씩 토닥여주었다.

“잘들 놀고 있어. 형아 학교 다녀올게.”

“야옹-”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은 시간이라 대문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 내 발치로 필립이 쓰윽 빠져나왔다.

“필립. 나 배웅하는 거야?”

“야옹! (조막만 한 게 건방은. 루나가 너 스쿨버스 잘 타는지 보고 오라더라.)”

“가만. 루나 아빠라고 했지? 그럼 반말하면 안 되는 건가?”

“야옹-. (알면 됐다. 올챙이.)”

“필립 님. 제 말씀도 알아듣는 거죠?”

“야옹-. (당연히.)”

“아! 내가 사진 찍어줄게요.”

“야옹. (싫어.)”

“자, 포즈-. 아, 이거 휴대폰이 최신기종이라 사진이 굉장히 잘 나오네.”

“야옹-. (뭐야? 루나가 사줬냐?)”

“잠깐요. 이번엔 우리 둘 셀카예용.”

“야옹! (나를 집어 들지 마라!)”

“와, 끝내주죠? 역시 최신기종이라 장난 아니네.”

“야옹. (이씹.)”

필립은 뭔가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졸졸 쫓아왔다.

암컷인 줄 알았는데 루나 아빠라니. 그런데도 나를 엄청 따르는 걸 보니 기특… 아니, 눈이 높으신 듯.

루나커피는 모퉁이에 있고 그 옆 건물에는 슈퍼와 약국, 치킨집이 있는 큰 건물이 있었다. 그 옆에 편의점이 있고, 그 앞이 스쿨버스가 서는 버스정류장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들어서자 나는 굉장히 과장되게 팔을 휘둘러 손목의 워치를 보았다.

“1분 남았네.”

“야옹- 그것도 루나가 사줬냐?”

“흐흐. 온몸에 돈을 처바른 기분이에요.”

필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거리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거 안 사줘도 난 루나가 좋은데.”

“야옹?”

“내 생각을 얼마나 하는지 피부로 막 느껴진다고 할까요. 기분 짱 좋은 건 어쩔 수 없네요.”

“새삼 애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진 거다.”

“뭐라고요?”

“버스 왔다.”

“하던 얘기 이따 다시 해줘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바보.”

“다녀올게요.”

“야옹.”

스쿨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버스에 탄 아이들이 모두 나를 주시하는 느낌, 뭐지?

“아항.”

돈을 처발라서 그러는구나.

나는 괜스레 손목을 번쩍 들어 머리를 한번 넘기고 ‘고급’ 셔츠 윗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뭔가 확인하는 척했다.

“응…?”

그런데 뭐냐? 이 녀석들, 내가 아니라 창문 밖의 루나커피를 보고 있나? 이것들이 왜 이리 루나한테 관심이 많은 거야?

내 표정이 상냥할 리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쓰고 버스 안 아이들을 둘러보니 크큭, 자식들이, 쫄아가지고 재빨리 눈을 피하네. 이럴 때는 폼 좀 잡아주면서 주머니에 손도 찔러 넣고….

“학생. 출발하니까 빨리 좀 앉아요.”

운전사 아저씨의 말이었다. 아이고, 넘어질 뻔. 그냥 날아가는 척하고 빈자리에 착석. 창밖을 보니 필립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앞발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가만….”

버스 왔다.

하던 얘기 이따 다시 해줘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바보.

설마… 나 방금 필립 말 알아들은 건가?

시계 방향으로 눈을 굴리며 생각해봤는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때려맞춘 거였나?

“저기….”

“응?”

통로 건너편에 앉아있던 아이가 앞쪽 눈치를 슬쩍 보더니 내 옆자리로 옮겨왔다. 운전사 아저씨가 즉시 주의를 주었다.

“운전 중에 움직이면 안 돼요.”

“죄송해요.”

옆에 와서 앉은 아이는 명랑하게 외치고는 나를 보며 키들거렸다. 왜 웃는 거야?

그런데 같이 웃어주지 않아서 그러는지 아이는 금세 샐쭉해져서 조그만 입을 삐죽이더니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꺼지지 않은 화면에 필립의 사진이 있었다.

“그거 루나커피에 사는 고양이지? 이름이 필립.”

“헐, 알아?”

그런 것까지 아는 거야? 잘하면 내 옷장에 양말이 몇 켤레 있는지까지 알게 생겼네.

“응. 너무 귀여워. 필립 새끼들도 네 마리나 있잖아.”

이제 나는 필립이 루나의 아빠라는 걸 알기에 함부로 귀엽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그 말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내 이름 알아?”

“내가? 아니.”

“우리 같은 반이야.”

“어제 전학 왔거든.”

“나 좀 유명한데.”

“그래?”

“계나리라고 해.”

“풉.”

“너… 웃었어?”

“아냐. 예쁜 이름이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새침한 표정이던 개나리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나를 빤히 보았다.

“어제 너 정말 멋있었어.”

“응?”

“너보다 세 배는 큰 최지환을 넘어뜨렸잖아. 진짜 깜짝 놀랐어.”

“넘어… 아! 그런데 세 배가 크다니 그 정도는….”

“운동이라도 했니?”

“그런 걸 왜 물어?”

“운동하는 남자 멋있잖아.”

“넌 멋있는 걸 참 좋아하는구나.”

“당연하지!”

그때 내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운동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이 제일 멋있냐?”

“음, 다 멋있지만… 농구나 축구? 야구도 좋고.”

“그건 너만의 생각이니,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이니?”

“에이, 다들 이렇게 생각하겠지.”

“그래…?”

그날 나는 학교에서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생각도 못 한 채 미래의 나를 그려보느라 황홀경에 빠졌다.

덩크슛을 날리는 나, 눈에 별을 담고 내 모습을 지켜보는 루나.

“으흐흐흐.”

“왜 웃어?”

“어? 아무것도 아냐.”

“스쿨버스 매일 타는 거지?”

“응? 응.”

“나도 엄마 아빠가 직장 다니셔서 데려다주지 못하실 때가 많아. 그럼 우리 아침마다 볼 수 있겠다.”

“뭐, 그래.”

“그 사진 나 보내주면 안 돼?”

“뭐, 필립 사진?”

“응.”

필립은 그냥 고양이가 아니라 루나의 아빠니까 필립 역시 함부로 초상권을 침해당하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한번 물어보고.”

“누구한테?”

“필립한테.”

그러자 개나리가 숨넘어갈 듯이 웃어댔다.

“너 정말 재미있다!”

*

버스로 학교까지는 기껏해야 10분 정도 거리라서 금방 학교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교문 앞에 있어서 운동장을 끼고 나 있는 산책로를 걸어 올라가야 했다. 개나리와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이선호가 끼어들었다.

사실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개나리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던 참이었으니까.

“정은별! 어제는 왜 나가버린 거냐?”

“몰라도 돼.”

“자식이, 제법 쿨해.”

“어제 어땠는데?”

“어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 최지환이 너 찾는다고 학교를 이 잡듯이 쑤시고 다녔어.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니까 미리 인사할게. 널 알게 되어서 반가웠다.”

“미친놈.”

어제저녁 루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굉장히 싸늘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는 그가 의외라서 나는 무척 흥미로웠다.

“죄송합니다만 선생님. 이건 명백히 학교 폭력입니다. 근절해야 할 악행이죠. 사회정의와 아이들의 안전한 학교생활을 위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뭐라고요? 쌍방과실? 절대 아닙니다. 최지환 학생이 먼저 식판을 던졌습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건 아니지만 급식실 아이들이 다 봤겠죠.”

전화를 끊고 루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내게 물었다.

“혹시 학교에서 이 문제로 왕따 당할까 봐 걱정되니?”

“난 늘 왕따였어요.”

“혹시 조용히 넘어가길 원해?”

“절대 아닌데.”

“그럼 진짜 법대로 할게. 괜찮지?”

“초상권침해도 꼭 걸어주세요.”

“응? 응.”

“그런데 그러면 경찰이랑 엮이는 거 아니에요?”

“경찰과는 상관없어.”

나는 조금 망설였다. 문제가 커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사실 어른들 주먹에 얻어터지는 것보다는 최지환 주먹에 터지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절대 안 터질 자신이 있었다.

막 본관 현관을 통과하는 참에 이선호가 대뜸 물었다.

“너 무섭지 않아?”

“뭐가?”

“최지환이 교장쌤 친구의 조카라니까.”

“그래서?”

“어머. 너 정말 멋있….”

개나리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하얀 눈이 쏟아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때는 여름이니까.

눈도 채 못 뜨고 있는데 이번에는 점액질의 뭔가가 머리 위로 흘렀다. 잠시 후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밀가루와 계란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무해!”

이선호와 개나리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그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루나의 향기와 목소리가 들렸다.

“이 나쁜 놈들!”

나는 셔츠를 끄집어내 얼굴을 대충 문질렀다.

갑갑한 이물질을 걷어내자 흥분으로 상기된 루나의 얼굴이 보였다. 앞치마에 바게트 빵 하나를 들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를 보여주었다.

“어떻게 애들이 이렇게 사악할 수가!”

“루나, 아니 형. 잠깐만…!”

“괜찮아? 아니, 괜찮을 리가 없지! 저기 키들거리는 애들 보이지? 그래! 사진을 찍자.”

“형!”

“왜?”

루나가 나의 보호자이고 나를 걱정해주는 건 좋았다. 행복하고 설렜다. 인생이 환희로 가득한 기분이었다. 복권 당첨된 기분도 이만큼 벅차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 정도까지 보호받아야 할 정도로 나는 곱게 자라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의 이름을 갖고 있는 ‘남자’다.

“그냥 돌아가세요.”

“응…?”

“형이 내 생각 해주는 거 너무 좋고 고마워요. 하지만 어제로 충분해요. 이제 학교생활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게 당하는데 알아서 한다고?”

“아니, 난 당하지 않아요.”

“공부해야지, 싸움만 하면 안 되잖아. 내가 보호자로서….”

“내가 직접 해결할게요. 그러고도 해결이 안 되면 그때 이야기할게요.”

내가 설득하자 루나의 얼굴에서 금세 분노가 빠져나갔다.

역시, 루나에게 분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얼굴에 안심한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나 이모네 집에서 샌드백으로 살았어요. 이 정도는 껌이라고요.”

그러나 그 말에 루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큼지막한 은회색 눈동자가 금세 촉촉해져서 나는 또 배시시 웃었다.

그가 앞치마 자락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몸을 굽혀 나와 눈을 맞추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대신 필요하면 불러. 네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올 테니까.”

감정이 복받쳐서 와락 안아주고 싶었지만 밀가루 반죽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씩씩하게 말했다.

“가요. 가게 바빠질 시간이잖아요.”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교실의 시간이 깨어났다.

나는 머리를 훑어 넘기면서 키들거리고 있는 최지환 패거리들에게 곧장 걸어갔다. 손에 묻은 반죽 덩어리를 최지환의 얼굴에 철퍼덕 눌러주고는 녀석이 팔을 휘두를 새 없이 박치기를 해버렸다. 엄청난 함성이 교실 밖까지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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