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초여름의 아침은 늘 환희롭네요.
플럼버의 초여름은 이보다 훨씬 더 아름답지요. 거리의 가로수에도 어여쁜 꽃과 먹음직스러운 과실이 주렁주렁 열리고, 누구나 원하면 원하는 만큼 따서 먹을 수도 있어요.
또한 플럼버에는 빌딩도 없고 자동차도 없어요. 그럼 뭘 타고 다니냐고요? 웬만한 플럼버인은 지구의 자동차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고, 그보다 더 빨라야 할 때는 태양열 모터로 움직이는 전차와 택시를 타고 다녀요. 택시는 항공 겸용이랍니다. 개인소유의 탈것은 허용되지 않아요. 원래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굳이 개인 소유의 이동 수단을 원하는 사람도 없지요.
그런데 지구는 볼 때마다 어지러울 정도로 고층빌딩과 자동차가 늘어나고 있네요. 저도 루나커피의 미니밴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걸 탈 때마다 탐탁지는 않아요. 도로가 너무 복잡하거든요.
여전히 플럼버가 그립기는 하지만 어느새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도시에도 정이 붙은 것 같아요. 플럼버 클럽 회원들은 그런 제가 신기하다고 해요. 로저는 그게 루나커피 때문일 거라고 했어요. 손님들과 어울리며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래요. 플럼버나 지구나 제 생활에는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니까요.
저는 지금 완만한 경사로를 거닐고 있어요.
이 경사로는 하늬 초등학교의 등굣길이랍니다. 학교는 제법 괜찮은 편이에요. 집에서도 가깝고요. 특히 이 오솔길은 꽤 아늑하네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무들이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주어요. 앵두 같은 열매들도 더러 열렸네요.
아마 이 길 때문에 플럼버 생각이 더 났던 것 같아요. 에일로의 하니 스트리트에는 오렌지 나무로 이루어진 산책로가 이어져 있답니다. 바로 루나커피 앞을 지나는 산책로지요.
학교 앞은 고즈넉한 편이에요. 건너편은 아파트 단지네요. 교문 앞에 교차로가 있지만 스쿨존이라 지나는 자동차가 속력을 내지는 않아요. 은별이가 걸어 다녀도 크게 위험할 일은 없어 보여요. 그래도 지구는 안전한 곳이 못 되니 웬만해서는 스쿨버스를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졸지에 학부모가 된 기분이 어떠냐고요? 솔직히 얼떨떨해요. 요즘 지구의 아이들에게는 뭐가 필요한지도 아직 잘 모르겠고요.
“검색을 해보자…. 검색.”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들고 보니 오, 은별이에게도 휴대폰을 사줘야겠네요.
플럼버에는 휴대폰도 없답니다. 플럼버인의 머릿속에는 휴대폰과 비슷한 기능이 내장되어 있거든요. 웬만한 일은 뇌 저장소에 기록되어 필요할 때 검색을 하면 되고요, 일부러 삭제하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아요. 그 외의 정보는 개인 좌표를 열면 언제 어디서든 얻을 수 있지요.
그러나 아무리 플럼버인이라도 지구에 관한 지식은 전무하다 보니 우리에게도 이곳에서는 이 휴대폰이라는 장치가 꽤 쓸모 있는 편이에요.
교문 앞에서 집까지 미니밴으로 이동하니 15분도 채 걸리지 않네요. 집 대문 앞에 차를 세워두고 큰길로 나왔어요. 교차로 앞에 휴대폰 대리점이 있거든요.
판매원의 추천에 따라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기종으로 골라봤어요. 그걸 고르고 나니 또 눈에 들어오는 게 있네요.
“이건 손목에 차는 건가요?”
“워치요? 네. 애들이나 노인들이 차고 다니면 안심이 되니까 부모님들이 많이 사주세요.”
“그런가요? 그럼 이것도 주세요.”
“네에.”
가게를 나와 슬슬 걷고 있자니, 뭐죠? 뭔가 또 사고 싶네요.
그때 내 눈에 전자제품 판매점이 보였어요. 그러고 보니 은별이 방에 아직 컴퓨터를 놔주지 않은 게 생각났어요. 요즘 아이들에겐 필수품인데 말이죠.
“이런! 큰일 날 뻔!”
서둘러 가게로 들어갔어요.
잠시 후 최신형 노트북과 소형 태블릿이 든 쇼핑백을 들고 괜스레 싱글거리며 거리로 나왔더니, 이번엔 바로 옆에 자전거 대리점이 있었어요.
“흠…. 슬슬 자전거 타고 싶을 나인데.”
자전거는 운동도 되니까 주말에 가까운 공원으로 타러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았어요. 잠시 후 저는 하늘색 자전거를 끌고 거리를 걷고 있었어요.
가게 걱정이 되어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교차로 앞에 꼬마 손님들이 바글거리는 분식집이 보였어요. 떡볶이와 튀김, 김밥 같은 것을 파는 식당이었어요. 소문난 맛집이라는 건 알았지만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는 가게였죠. 우리는 아직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음…. 간식으로 떡볶이와 튀김을 만들어주면 좋겠네.”
루나커피 옆 슈퍼에 잠깐 들러 떡볶이 재료를 사야겠어요. 그런데 이까짓 게 다 뭐라고 저는 휘파람을 불고 있을까요?
“플럼버의 달에는 인어가 산다네♬♫”
“안녕하세요, 루나 사장님.”
슈퍼 사장님이 인사를 하시네요. 이 근처 가게 분들은 대부분 저를 루나 사장님이라고 불러요.
“안녕하세요. 혹시 떡볶이에 뭐가 들어가는지 아세요?”
“알죠. 골라드려요?”
“네.”
친절하게도 사장님은 손수 재료를 골라주시네요. 장바구니를 보니 재료가 무지 단순한 것 같아보여요.
“떡볶이 하시게요?”
“네, 우리 집에 꼬마가 왔거든요.”
“그런 것 같더라. 지난번에 우리 가게에도 왔어요. 얼굴에 상처가 많던데.”
“아… 네.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동생은 아닐 거고, 누구?”
“그냥 아는 아이예요. 친척이요.”
“아하.”
사장님은 눈치가 있는 분이라 더 묻지는 않았어요.
슈퍼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들어왔어요. 뒷마당에 자전거를 놓아두려니 뭔가 깜짝 쇼 비슷한 걸 하고 싶어졌어요. 은별이 방 테라스에서 보일 만한 곳에 세워두면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해놓고 나니까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어요.
“야옹-”
정자에서 놀고 있던 고양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하나둘 자전거에 올라가고 있어요.
“얘들아! 안 돼.”
“야옹-”
동작 빠른 미오가 어느새 자전거 앞쪽 바구니 안에 쏙 들어갔어요. 뒤에 올라탄 뭉크와 베리, 나나는 페달에 매달려 놀고 있어요.
“내려와. 안 돼. 어유, 얘들이 진짜.”
한 마리 떼어놓으면 다른 애가 올라가고, 미오는 아예 터를 잡았어요. 안됐지만 결국 슈퍼 봉투와 쇼핑백에 고양이들을 넣어가지고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왔어요.
겨우 데리고 들어온 고양이들을 소파 위에 내려놓은 다음 은별이 방으로 갔어요.
“실례합니다.”
아직 비어있는 방에 들어와 노트북과 태블릿, 휴대폰 등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나니, 이런 게 바로 뿌듯함이라는 기분인 걸까요. 은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해지네요.
그나저나 방이 너무 깔끔해요. 침대 정리도 완벽하게 되어있고 파자마도 가지런히 개서 이불 위에 놓아두었네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말투며 태도로 볼 때는 천방지축일 것 같은데 매사에 똑 부러지는 아이예요.
“성적은 어떠려나…?”
아이참, 성적이 무슨 상관이람. 뼛속까지 학부모가 된 걸까요?
괜스레 쑥스러워져서 방을 나오려는데, 뭔가 느낌이 싸해서 돌아보니 창문 밖 달 위에 좌표가 떠 있었어요.
“헉!”
정말이지 안구가 튀어나올 뻔했지 뭐예요.
대체 저게 뭘까요? 분명 하늬 초등학교 급식실 같은데요, 혹시 요즘 지구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레슬링 같은 것도 배우나요? 검색해…볼 시간은 없었어요. 놀라서 부들부들 떨기도 바빴거든요.
그때 열린 방문으로 필립이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기어 들어왔어요.
“하아암-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방에서 뭐 하냐?”
“아, 아빠! 저것 좀 보세요!”
저는 좌표를 방으로 옮겼어요. 은별이가 어떤 아이와 싸우고 있었어요. 덩치가 산만한 아이네요!
“야옹! 신난다! 누굴 응원해야 해?”
“저건 시합 아니고 실제 사건이에요. 은별이 학교라고요!”
“쯧쯧, 얼굴이 이제 겨우 쓸 만해졌는데 또 밤고구마 되게 생겼네.”
“대체 왜 저러는 거죠? 오늘 전학 첫날인데!”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는 거지 첫날이고 백 날이고가 무슨 상관이냐.”
“꺄악!”
제가 비명을 지른 건 은별이가 자기보다 두 배는 큰 녀석한테 한 방 맞았기 때문이에요. 필립 말대로 겨우 아문 상처가 또 터지게 생겼어요.
“야옹! 흥미진진!”
“시끄러워요! 아빠는 걱정도 안 돼요?”
“사내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
“은별이는 아직 어린애예요!”
“너 같은 쑥맥은 모르겠지만 사내는 어릴 때도 사내야. 그런 걸 본성이라고 하지.”
“지금 개똥철학 듣고 있을 상황이 아니거든요.”
“야옹! 잘한다!”
이번에는 은별이가 덩치를 때렸어요. 덩치는 은별이 주먹에 맞고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더니 또다시 주먹을 휘둘렀어요. 다행히 은별이 잽싸게 피했어요.
“대체 다른 애들은 뭐 하는 거죠? 빨리 선생님을 모셔오든지 해야지!”
“야옹, 너무 재밌잖아.”
“아무래도 가봐야겠어요.”
“가게는? 알바들 퇴근할 시간이야.”
“로저한테 좀 와달라고 해줘요!”
“로저 좀 아까 사우나 간댔는데?”
그러나 저는 이미 거기에 가 있었어요. 하늬 초등학교요.
순간이동은 웬만하면 안 하는데, 특히 이렇게 훤한 대낮에는 말이죠.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은별이가 또 밤고구마가 되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요!
어느새 저는 텅 빈 복도를 뛰고 있었어요. 급식실 위치를 몰라서 정확한 위치에 떨어지지를 못했거든요.
저도 모르게 이까지 갈고 있었어요.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분노가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어요. 그건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거였어요. 아니, 처음인가?
솔직히 저는 플럼버인 중에서도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에요. 당연히 이렇게 격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순간 눈이 뒤집히는 것처럼 화가 났어요.
‘우리 은별이를 때렸어? 그 덩치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다!’
도착해보니 급식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어요.
“은별아!”
제 외침을 들은 은별이 덩치의 몸에 깔린 채 저를 향해 시선을 돌렸어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덩치의 주먹이 또 날아왔어요.
저 괘씸한 녀석을! 저는 재빨리 낫(time knot)을 걸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