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루나커피는 대학가와 상업가의 중간쯤인 애매한 위치에 있어요. 이 근처 가게들은 일요일에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아서, 루나커피도 처음에는 일요일을 휴무로 정했었답니다.
그런데 휴무인 줄 모르고 일요일에 찾으신 손님들이 문을 두들기기에 열어드리곤 하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일요일에도 그냥 영업을 하게 되었어요. 어차피 저는 루나커피 일 말고 개인적인 용무가 거의 없으니 따로 휴일이 필요하지도 않고 해서, 어쩌다 보니 연중무휴가 되어버렸지요.
그런데 은별이가 온 후로는 정식으로 쉬는 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선 아이를 위해 할 일이 꽤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것도 지속적으로요.
그 예상은 정확했어요. 은별이는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어요. 집안일에 사촌 동생 유모 노릇까지 해야 했으니 공부할 틈이 없었던 거죠.
성적이 바닥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었어요. 특히 영어 실력은 상당히 좋아서 감동스럽기까지 했어요. 그 상황에 정말 기특하지 뭐예요.
아무튼, 제가 직접 공부를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은별이를 봐주는 시간이 필요해질 것 같아서 이제 일요일은 휴무일로 정했어요.
그래서 유리창에 안내 포스터를 한 장 붙이고 문을 닫아걸었는데요…. 헉?
“야옹- 왜 손님들을 밖에다 가둬놨냐?”
정말이지 당황스럽네요. 가게 안을 정리하느라 열중하고 있었는데 손님들이 밖에 줄을 서 있는 거예요.
“오늘부터 일요일에 휴무라고 써 붙였는데 포스터를 못 보신 걸까요?”
“야옹, 이제 일요일에 쉬는 거야?”
“네. 은별이 때문에 개인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야옹, 벌써 둘이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고?”
“뭐, 뭐, 뭐예욧! 필립, 제발 농담이라도 그런 악담 좀 하지 마세요!”
“야옹, 아니면 그만이지 왜 소리는 질럿!”
“어유, 어유!”
저는 서둘러 출입문을 열었어요. 손님들이 작게 탄성을 질렀어요. 저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정중히 설명했어요.
“죄송해요. 오늘부터 일요일에는 쉬려고요.”
“모처럼 케이크 포장하러 왔는데.”
“밥하기 귀찮아서 여기 샌드위치 먹으려고 했는데….”
“하루라도 루나커피 안 마시면 손이 떨린단 말이에요.”
“이런 건 한 달쯤 전부터 미리 공지해주셔야 착오가 없는데.”
“맞아요. 그런 의미로 오늘만 장사하시면 안 되나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을까요? 루나커피를 이토록 사랑해주시는 손님들을 내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지금 와계신 분들에게만 필요한 것을 해드리기로 했어요.
“그럼 지금 줄 선 분들만 주문해주세요.”
“저 티라미수 홀케이크 포장해주세요. 초는 다섯 개요.”
“우리는 클럽 샌드위치요. 먹고 가면 안 돼요? 안 된다고요? 그럼 커피도 주세요. 아아 두 잔.”
“저는 양파 빵 다섯 개랑 카페라떼 두 잔요.”
“저는….”
“헉헉! 아니, 잠깐만요. 계속 들어오시면 곤란한데. 그 뒤에 문은 닫아주세요. 죄송합니다만 걸쇠까지 걸어주실래요? 네네.”
후유, 그럭저럭 끝내고 손님들을 보낸 다음 셔터까지 닫아걸었어요. 그제야 주위를 좀 둘러볼 수 있게 됐죠.
“아빠. 은별이 어디 있어요?”
“야옹- 좀 아까 나가던데.”
“나가요?”
“응.”
“혼자요?”
“미오랑.”
“아, 네에.”
아니, 가만…!
“뭐라고요?”
“이크.”
“아빠! 바른대로 말하세요.”
“야옹- 싸가지 없는 놈. 애비한테 바른대로 말하래.”
“어서요!”
“너도 생각 좀 해봐라. 한창 피가 뜨거운 청춘 아니냐.”
“누구, 은별이가요?”
“미오 말이야, 미오.”
“미오가 무슨 피가 뜨거운 청춘이에요? 미오는 아직 어린애예요!”
“인간 나이로 치면 한창 사춘기야.”
“됐고! 은별이 핑계 대지 말고, 이실직고하세요. 아빠가 풀어준 거죠?”
“야옹! 아니거든! 아, 진짜 억울하네!”
“아니면 은별이가 왜 미오를 데리고 나가요? 어디로?”
“그 녀석이 그러더라.”
“미오가요?”
“어유, 은별이가! 젊은 놈이 말귀를 못 알아먹어.”
“참 나. 은별이가 뭐랬는데요?”
“미오 마음이 느껴져요.”
“무슨 헛소리예요? 괜히 꾸며대지 마시고 사실대로 말해요.”
“야옹! 진짜 그랬다니까. 그놈 눈이 포도알 같잖아. 그게 그냥 촉촉해져가지고, 미오랑 한창 얘기를 하는 것처럼 쳐다보더니 그렇게 말했다고!”
“미오 마음이 느껴져요.”
필립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된 거예요.
은별이는 아침 설거지를 하고는 거실에서 고양이들과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미오 요 말썽꾸러기가 자꾸 처량하게 우니까 은별이가 관심을 두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은별이가 새장의 자물쇠를 풀어주고는… 아니, 이것도 가만!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야옹- 볼펜으로 열던데?”
“헐!”
저는 꺼내 들었던 열쇠를 앞치마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어요. 아무튼 은별이가 새장 문을 열고는 미오를 꺼냈대요. 미오가 불쌍했는지 꼭 끌어안고는 그대로 테라스 계단을 통해 뒷마당을 지나서, 아예 집을 나갔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만 있었어요?”
“야옹, 아직 점심 먹을 때는 안 됐잖아.”
“어유, 내가 진짜! 그래서, 어디로 갔는데요?”
“그야 모르지.”
저는 고개를 저으며 창밖에 좌표를 띄워봤어요. 은별이, 미오….
“저기 있네요.”
우리 동네 골목이에요. 반대편 시장으로 통하는 뒤쪽 골목 같아요.
‘라이프주택’이라는 이름의 연립건물 앞에 은별이 멈춰 섰어요. 미오가 은별이 품에 안긴 채 날카로운 소리로 울고 있네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그 유부녀 이름이 라라로군요. 쳇! 라라 좋아하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야옹- 루나! 가지 마! 잠깐….”
저는 이미 라이프주택 앞에 와있었어요. 바로 뒤에 서 있는데 은별이는 아직 눈치를 못 챘나 봐요.
역시나 곧 삼층 창문에 그 회색 고양이가 얼굴을 내밀었어요. 은별이가 미오에게 물었어요.
“네가 올라갈 거야?”
“야옹.”
이때다. 저는 재빨리 은별이 품에서 미오를 빼앗았어요.
“엇!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게… 미오가 너무 불쌍해서.”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해? 저 뚱보 고양이랑 불륜을 못 저지르는 게 불쌍해?”
은별이는 대답하는 대신 우울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더니 눈동자만 살살 굴렸어요. 미오는 제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어댔지요.
저는 삼층 창문을 올려다봤어요. 그리고는 고양이 말로 으름장을 놓았죠.
“야옹- 아줌마. 남의 순진한 동생 꼬시지 마!”
저는 고양이 말이 능숙하지 않아서 상대가 알아들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따라와!”
이건 은별이에게 한 말이었어요. 저는 화가 나서 성큼성큼 걸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 속도를 늦추고 보니 은별이가 혀를 빼물고 뛰어오고 있더라고요.
“흥!”
잠시 후 마당으로 들어온 저는 요란스레 울어대는 미오를 안은 채 정자의 벤치에 털썩 앉았어요.
“닥쳐!”
“야옹….”
그제야 미오가 울음을 그쳤어요. 은별이가 뒤따라 헐레벌떡 마당으로 들어왔어요.
“헉헉, 형.”
“앉아.”
은별이는 제 앞 벤치에 다소곳하게 앉았어요. 잘못한 건 아는 얼굴이었어요.
저는 미오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 등을 쓰다듬었어요. 미오도 더 칭얼거리지는 않았어요. 은별이 제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미오가 너무 슬퍼해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은별이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아이니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죠. 언젠가 은별이가 했던 말도 떠올랐어요. 고양이를 사람의 잣대로 대하면 안 된다고 했죠. 어떤 면에서는 옳은 얘기지만 솔직히 저는 그대로 인정하기는 힘들었어요. 미오는 그냥 고양이가 아니라 제 동생이니까요.
은별이 우물쭈물하면서도 제 할 말을 마쳤어요.
“사랑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인 관계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미오에게도 사랑할 권리는 있는 거잖아요.”
요즘 애들은 다 이러나요? 눈곱만한 게 사랑이 뭔지 알기는 해? 라고 말할 수도 없고. 뭘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난감하네요.
“은별아. 사랑이란 건 말이야, 어른들의 감정이야.”
“뭐라고요?”
“음, 그러니까 사랑이란 말이다. ‘어린이’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왜요?”
“사랑은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부터 떠안을 수 있는 감정이니까.”
“말도 안 돼.”
“말이 된다니까 그러네. 사랑은 책임이라고.”
“루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형이라고 불러.”
“형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당연히.”
“어린 나이에도 책임감은 있을 수 있어요.”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은 남도 책임질 수 없어.”
그 말에는 은별이도 더 반박하지 않았어요.
트라우마까지는 아니지만, 제게는 사랑에 대한 상처가 있답니다.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상처이지요. 엄마는 아빠 때문에 늘 마음 아파했어요. 남편이 아내를 두고 딴짓만 하는데 어떤 여자가 괜찮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도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답니다. 그것도 끔찍할 정도로요.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게 아빠 탓이라고는 않겠어요. 하지만 완전히 상관없다고도 않겠어요.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지 몰라도, 만약 아빠가 엄마를 성실하게 대했더라면 병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엄마를 떠나보낸 후에도 아빠의 바람기는 잦아들 줄을 몰랐죠. 아마도 아빠가 만난 여자들을 한 줄로 세워놓으면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이어질걸요. 그 모든 관계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어린아이에게 할 수는 없으니 그냥 으름장만 놓을 뿐이에요.
“아무튼 앞으로 미오 일에 상관하면 안 돼. 이건 형으로서 명령이야, 알겠지?”
“아무리 그래도 미오는 포기 안 할 거예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알 수 있어요. 미오의 괴로운 마음이 전해지는걸요.”
“헛소리 마.”
은별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두들겼어요.
“그래도 새장에 가둬놓는 건 너무해요. 루나 동생이라면서요.”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해. 난 딴 건 몰라도 불륜만큼은 절대 용서 못 해.”
그제야 은별이 눈을 빛내며 저를 보았어요. 제 표정을 읽으려 하는 그 아이의 노력이 보였기에 저는 근엄한 얼굴을 했어요. 은별이 마치 제 생각을 리딩하려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물론 착각이겠지만요.
관찰이 끝났는지 은별이 원망하는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 줄 몰랐어요. 알겠어요.”
뭘 그런 줄 몰랐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어요. 제 기분이 조금 울적했거든요. 모처럼 엄마 생각을 해서 그런가 봐요.
플럼버인들은 장수하는 편인데 엄마는 단명하셨어요. 너무 어릴 때라 엄마에 대한 추억이 많지는 않지만,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이 너무나 감질나서 괴로울 때가 있어요.
지금도 그렇답니다. 지금 저는 미오 문제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아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아빠에 대한 분풀이를 미오에게 하는 걸까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래요.
이건 제가 부당한 인간이라는 증거겠지요. 은별이 말대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든 작든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결론을 말하면, 이 문제에 있어서 저는 ‘미스터 오류’라고 불려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한 사람이에요. 무슨 문제냐면, 사랑 말이에요.
저에게 사랑은 일종의 결정체여야 해요. 완벽한 케이크 같은 것이죠. 재료, 측량, 시간, 거기에 섬세한 노력이 더해져야 제대로 된 케이크가 완성되잖아요. 하나라도 실수하면 균형이 깨지고 마는 거예요.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나요?
하지만 저는 틀린 것을 깨닫고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고집불통은 아니랍니다. 인정하겠어요. 은별이 말이 맞았어요. 필립 말도 맞았어요. 저만 빼고 다 맞았어요. 얼마 후 미오는 애 아빠가 되었으니까요. 청소년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