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6화 (16/103)

<16화>

은별이가 루나커피에 온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어요.

“야옹- 우냐?”

꼭두새벽이었어요. 저는 보통 새벽 5시에 일어나는데 오늘따라 새벽 2시쯤 잠에서 깨서는 다시 잠들지 못했어요. 그래서 테라스로 나가 플럼버의 달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죠.

“아뇨. 내가 왜 울어요.”

“울상인데?”

“아빠는 왜 안 주무세요?”

“나 예민한 거 몰라? 네가 부스럭거려서 깼잖아.”

필립은 툭하면 억지를 쓰는 걸 너무 잘 아니까 더 대꾸하지 않았어요. 사실 대꾸할 기분도 아니었어요.

“왜 청승이야?”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주무세요.”

“내가 이 분위기를 잘 알아서 그래. 넌 지금 욕구불만이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그쪽으로는 내가 전문가다. 왜, 고구마가 마음에 안 드냐?”

“고…? 은별이 말이에요?”

“그래. 밤고구마.”

“은별이가 마음에 안 들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귀, 귀여운 조카 같은 아인데.”

“퍽이나.”

“아, 아무튼 그런 거 아니니까 말 시키지 말고 가서 주무세요.”

“넌 그게 문제야.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아무 말이나 막 던져봐. 그럼 속이 좀 시원해져.”

“후우….”

저는 필립을 안아 들고 테라스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았어요.

“야옹- 날 네 무릎 위에 앉히지 마라.”

무릎 위에 필립을 앉힌 다음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었어요. 필립은 그릉거리면서도 꼬리를 흔들었어요.

“아빠랑 엄마는 어땠어요?”

“뭘?”

“처음부터 아빠가 바람피우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내가 언제 바람을 피웠다고?”

“이 꼴이 되어서도 시치미나 떼실 거예요?”

필립은 야옹거리더니 이내 꼬리를 내렸어요.

“맹세컨대, 내 평생 네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쳇.”

“진짜야. 지금 이 순간도 네 엄마를 사랑해. 내 마음속에는 오로지 네 엄마뿐이라고.”

“헤헤.”

“이 녀석이.”

“알았어요. 그래서, 그다음은요?”

그제야 필립이 본색을 드러냈어요. 음흉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몸을 비비 꼬기 시작하는 거예요.

“선악과라는 것은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지.”

그럼 그렇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탄생한 것이 바로 금단의 열매라는 말씀이다.”

“심오하다는 말은 생략할게요.”

“사랑하는 네 엄마가 있으니 금단의 열매도 생긴 것이지.”

“뭐가 어째요?”

“너처럼 독신이면 불륜을 저지를 마음 자체가 안 생기는 거야. 그게 바로 자유의 함정이란 말씀이야.”

“그것도 개똥철학이라고 읊는 거예요?”

“저기 저 애들을 봐라.”

“어떤 애들, 지금 저 텐트 안에서 새근거리는 아빠의 새끼들 말이에요?”

“너의 이복형제들이기도 하지.”

“이마에 라벨이라도 붙여놓으시지 그래요.”

“불륜이란 게 없었으면 인류는 이렇게 번성하지도 않았어. 남자의 바람기란 그것 자체로 인류애란 말이야.”

“어유, 어유! 아빠랑 말을 섞은 내가 미련했지!”

“이눔의 시키가….”

이런 걸 고양이도 웃을만한 궤변이라고 하는 거겠죠. 저는 필립을 던져버리고 일어났어요.

“야옹- 이눔 자식이 애비를 막 던져?”

“고양이는 탄력성이 좋잖아요.”

“나한테 고양이라고 하지 마라!”

“따라오지 마세요.”

“밤고구마랑 뽀뽀 좀 했다고 불륜은 아니야.”

“뭐, 뭐야. 그걸 봤어요?”

“아주 그냥 낯간지러워서 오금이 다 저리더구나.”

“아기가 애교 좀 부린 거예요!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세요!”

“누가 뭐랬나.”

“제발 저 좀 내버려 두고 가서 주무세요.”

“아, 그러려고 했어! 자식이, 애비 알기를 개똥으로 알아. 요새 불면증이니까 또 깨우지 마!”

필립은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텐트가 있는 벽난로 쪽으로 가버렸어요. 텐트 옆에는 커다란 새장이 있는데, 그 안에서 미오가 야옹거렸어요.

아, 동생 고양이들은 플럼버의 말을 몰라요. 물론 필립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잠재된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치는 않답니다. 또한 잠재 능력을 어떻게 발굴할 수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미오는 자기 의사를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고양이 말을 거의 다 알아듣는답니다. 못 알아듣는 게 있으면 필립이 통역해주지요. 지금 미오는 내보내 달라고 사정하고 있어요. 이건 좀 야비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녀석의 머릿속을 읽었어요. 그 유부녀 생각뿐이네요.

“쬐끄만 게 발랑 까져가지고! 조용!”

제 험악한 얼굴에 기가 질린 미오가 시무룩한 얼굴을 다리 사이에 묻고 꼬리로 제 몸을 돌돌 말았어요.

“야옹! 인정머리 없는 놈.”

텐트 안에서 필립이 투덜거렸어요. 저는 흥! 콧김을 내뿜고는 제 방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얄밉기는 하지만 필립은 늘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기곤 해요. 그렇다고옳은 말을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요.

제 마음이 심란한 건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랍니다. 말했듯이 저는 늘 운명을 꿈꿔왔고, 그래서 제 어깨의 네임을 발견했을 때 무척 황홀했답니다. 드디어 제게도 운명의 짝이 생겼구나. 어디에 계신가요, 나의 님이시여. 저 아리따운 달을 보며 미지의 그 사람을 그리워하곤 했지요.

그런데 이게 뭔가요. 은별이와 제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라는 뜻일까요? 혹시 네임이란 게 운명의 ‘짝’이 아니라 운명의 ‘베이비’를 점지해주는 의미도 있는 걸까요? 가령 업둥이와 같은…?

“으악!”

헉! 거기까지 생각하던 저는 침대에서 떨어질 뻔하고 말았어요. 그야말로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지 뭐예요! 침대로 막 기어 들어간 참이었는데 뭔가 꿈틀거리지 않겠어요? 뱀인 줄!

“엇! 은별아?”

“으응….”

“뭐, 뭐야!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은별이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악몽이라도 꾼 걸까요? 자다 깬 모양인데 퉁퉁 부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네요.

“루나….”

“왜 울어? 나쁜 꿈꾼 거야?”

“루나가 나를 막 구박해서….”

“뭐? 내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뒈지라고….”

“내가 언제?”

“꿈에….”

이 녀석이, 능청스러운 게 가끔씩 필립과 같은 부류처럼 여겨지지 뭐예요. 엇, 제가 기막혀하는 사이 또 저를 얼싸 끌어안았어요. 틱틱거리는 말투와는 달리 은근 애교 만점인 것까지 필립이랑 닮았어요.

“너무 슬퍼서 막 울면서 뛰다가 넘어졌는데 홍수가 나가지고, 돼지랑 헤엄치다가 슈퍼 간판에 두들겨 맞아가지고, 타이어에 매달려서 떠내려가다가 회오리를 만나가지고….”

이건 도입부만 빼고 실제 일어난 일이었어요. 왜 도입부만 바뀐 걸까요?

은별인 훌쩍거리며 제 목에 얼굴을 마구 비벼댔어요. 약간 소름이 돋았지만 아이 특유의 보드라운 살결과 우유 같은 냄새가 뭔지 모를 애틋함을 느끼게 해주었어요. 열두 살이나 된 녀석이 우유 냄새가 나고 난리야.

그런데… 뭘까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어요. 제 마음속에 숨어있던 건 맞는데 은별이가 아니면 그대로 묻혀있었을 것 같은 묘한 감정. 탄산의 기포 같은 것이 제 안에서 살짝살짝 터지는 것 같았어요. 뭔가 뭉클했어요. 뭔가 따뜻했어요.

저도 모르게 은별이가 하는 것처럼 똑같이 아이에게 얼굴을 맞붙이고 비벼대고 있었어요. 아, 보드라워라.

“은별아.”

“우웅….”

한 번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생각할 일도 없었을 것 같은 행위가 그 순간 못 견디게 해보고 싶어졌어요.

“형이 업어줄까?”

“웅…?”

은별이 제게서 얼굴을 떼고 제 표정을 살폈어요. 잠이 완전히 달아난 얼굴인데 어딘지 찜찜해 보이네요. 저는 그 순간 너무나도 격렬히 은별이를 업어주고 싶었어요.

그런 의지가 제 눈에 담겨 불타오르기라도 했던 걸까요? 아이가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살살 저었어요.

“싫어요.”

“괜찮아!”

“아니아니! 싫은데?”

“거절하지 않아도 돼!”

“으앙!”

은별이는 끝내 거절했지만 제 불타는 의지를 꺾지는 못했어요. 이건 좀 비겁하지만, 저는 어른이고 은별이는 아이니까요.

결국 은별이는 제 등에 업혔고 아이답게 칭얼거리기 시작했어요.

“내려줘요.”

“쉬잇… 자장-”

“어우 씨! 자장이라니, 왜 그래요?”

“재워줄게.”

“잠 안 와요!”

“자장가 불러줄까?”

“하지 마세요.”

“달 보고 싶지?”

“아뇨.”

아니라는 대답에도 저는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어요. 칭얼거리던 은별이도 아름다운 달빛에는 사르르 녹아드는 모양이에요. 이내 조용해져서는 제 등에 조그만 머리를 기대왔어요.

아이의 보드라운 볼이 목에 닿자 좀 전의 그 달콤한 충만감이 또 밀려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어요.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죠.

“플럼버의 달에는 인어가 산다네, 달의 바다에 풍덩 빠져 호호 웃는 그녀♬♫”

“…….”

“식탐이 많아서 물고기가 남아나질 않는다네♬♫”

“헐….”

“그녀가 낳은 아이들은 무지갯빛 비늘을 가졌다네♬♫”

“오….”

“반짝이는 것에는 죄가 없으니 물고기는 그만 잊고 그녀를 칭송하자♬♫”

“헤?”

“마음에 들어?”

“그게 원래 있는 노래예요?”

“응. 플럼버에 노스독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의 오렌지라는 지방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노래야. 민요 같은 거.”

“가사가 이상한데.”

“어때. 너 같으면 인어를 칭송하겠어?”

“아뇨. 탐욕스러운 인어 같아요.”

“그러니까, 이건 반어법 같은 거야.”

“반어법?”

“플럼버에는 범죄도 거의 없고 악한 사람도 많지 않아서 플럼버 아이들은 악을 잘 몰라. 하지만 악이 어떤 건지 전혀 모르면 느닷없이 그것에 부딪혔을 때 굉장히 당혹스럽잖아. 아마 나도 악을 배우지 못하고 지구에 떨어졌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이런 노래를 들려주면서 잘못된 생각과 싸우게 만드는 거야.”

“오오.”

“은별아.”

“네?”

“난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는 알다시피 천방지축이었고, 할머니가 날 키워주셨거든.”

“박바라 님이요?”

“응? 으응. 형제도 없고, 일찍부터 커피숍 일을 거드느라 또래 친구도 많이 사귀지 못했어. 그래서 내가 너한테 많이 서투를지도 몰라.”

은별이 괜찮다는 듯이 제 목에 코를 킁킁거렸어요. 귀여워요. 저도 모르게 또 웃었어요.

“섭섭한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알겠지?”

“냄새 너무 좋아요.”

“형 말 듣고 있어?”

“우웅….”

집중력은 좀 떨어지는 아이 같지만, 잘 보면 그게 은별이 매력 같아요. 저는 ‘인어의 바다’를 또 흥얼거렸어요.

어느새 잠이 오는 모양이에요. 잠시 후 등 뒤에서 잠꼬대가 흘러나왔어요.

“씨발… 때리기만 해, 썅…. 다 죽여 버릴 거야….”

욕을 좀 많이 해서 심란하기는 하지만, 마음이 아팠어요. 늘 이렇게 악몽을 꾸는 걸까요? 지난번에 본 바로는 마음에 깊은 상처는 없던데 그래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거겠죠.

마음도 마음이고, 몸도 마찬가지예요. 열두 살인데 업고 있으니 여덟 살 정도밖에 안 된 아이처럼 가벼워요. 진정으로 아이가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라면 은별이를 어떻게 기르셨을까요? 아직 제겐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예뻐… 루나…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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