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5화 (15/103)

<15화>

새로운, 엄청난, 근사한 사실을 알아냈다!

루나는 20년 주기로 한 살씩 먹는단다. 내가 스무 살이 되어도 루나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라는 뜻이다.

“열둘, 열셋, 열넷….”

그러면 대충 스무 살을 기준으로 그 이후부터는 내가 더 나이가 많아진다는 뜻인가? 오, 대단해!

이 부분에서 밝혀두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여든이 넘어도 루나는 고작 스물여섯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열두 살의 나는 그 정도로 생각이 깊지는 못해서 그저 루나보다 내 나이가 많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하며 흥분했던 것 같다.

그게 왜 그리도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저 나는 루나와 나 사이에 오로지 나이 말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무튼 그날 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서 꽃미남 알바생들과도 썩 잘 어울렸다. 알바생 두 사람은 내가 얼마나 센스가 뛰어나고 손이 빠른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런 건 너무 가까운 사이보다 조금 먼 사이여야 더 정확하게 보게 되는 것 같았다. 루나는 내 진가를 아직도 몰라주니까. 그는 내가 두 알바생을 도와 커피숍을 분주하게 누비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해했다.

“은별아. 누가 너더러 일하래. 다음 주면 학교 가니까 좀 쉬어.”

“이 정도는 저한테 일도 아니라니까요. 이게 쉬는 거예요.”

“너 같은 꼬마가 카페 일을 하고 있으면 손님들이 불편하시지 않겠어?”

“엇! 손님들이 엄청 귀여워해주시는데. 좀 전에 팁도 받았어요.”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5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루나는 그런 걸 받는 게 아니라고 나무랐다. 어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뭘 그렇게 꼬장꼬장하담. 예쁘면 다야? 훗.

나는 루나가 잔소리하는 것도 좋아서 마냥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오…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고개가 아파서 그의 배꼽 근처를 보며 졸고 있었는데 마침 종소리가 들렸다.

“어! 손님이다! 어서 오세요!”

루나의 잔소리에서 해방된 것이 반가워서 재빨리 손님에게 인사하고는 카운터로 내뺐다.

김희상이 나를 거들어주었다.

“사장님. 은별이가 정말 일을 잘해요. 얼마나 센스가 있는지 거치적거리지도 않고 제법 손을 덜어주네요.”

나는 루나가 보지 못하는 카운터 안쪽에서 김희상에게 엄지를 들어보였다. 그가 윙크를 해보였다.

점심때라 손님이 점점 몰려들었으므로 루나도 더 이상 잔소리할 틈이 없었다. 그가 분주하게 주방을 들락거리며 빵과 케이크 나르는 것을 허세윤이 능숙하게 거들고 있었다.

나는 심기가 무척 뒤틀려서 재빨리 따라붙었다.

“세윤이 형! 내가 도울게요.”

“어? 안 돼. 이거 생각보다 무거워.”

“저 힘 세요.”

실수였다.

바게트와 치아바타라는 빵이 산처럼 쌓인 쟁반이었다. 빵이 그렇게까지 무거울 거라는 생각을 못 하고 통째로 빼앗으려던 나와 허세윤과 키가 맞지 않는 바람에 쟁반이 홱 기울어져 한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어어!”

갓 구운 빵들이 쏟아져 바닥에 막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몸을 날려 그 빵들을 끌어안으려고 공중을 허우적대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것이 또 찾아왔다.

이모가 내 뺨을 때리려고 손을 쳐들던 그 순간 말이다. 얼음 바위처럼 굳어버린 시간의 틈.

루나커피의 모든 것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손님들은 다양한 얼굴로 딱딱하게 멈춰 섰다. 쏟아지는 빵을 보며 경악하는 허세윤도,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김희상도, 김희상이 내리고 있던 커피 방울도 공중에서 멈췄다.

나 역시 점프한 채로 멈춰있었지만 조금 달랐다. 눈동자마저 멈춰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의식도 감각도 그대로였다.

다만 스톱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내 몸은 둥실거리는 느낌으로 천천히 가라앉더니 이윽고 누군가의 팔 안에 안겼다.

반짝이는 금발과 그보다 더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내 뺨이 발그레하게 물이 들었다.

“정말 말썽이네.”

“형. 나 때문에 마법을 쓴 거예요?”

“어쩔 수 없잖아. 그대로 두면 훈장 하나 더 달게 생겼는데.”

그는 빵이 아니라 나를 걱정한 걸까.

그랬다. 이모에게 맞게 생겼을 때 순간이동으로 날아와 마법을 썼을 때처럼 오로지 나를 걱정한 것이다. 그의 눈이 다 말해주었다.

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핑 돌았다. 그에게 통째로 안겨있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포옹이라는 행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 황홀할 정도로 좋았다.

나도 그를 안고 싶어서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길고 가느다란 목덜미에서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다. 그대로 코를 묻으니 요람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평화였다.

“훌쩍….”

“너 울어?”

“안 울어요.”

“그래. 씩씩한 아이는 울지 않는 거야.”

“맞아요. 씩씩한 남자는 울지 않아요.”

그가 나를 내려놓고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은별아. 그렇게 일을 돕고 싶어?”

“네.”

“솔직히 말해 봐. 이유가 뭐야?”

“루나, 아니. 형한테 꼭 도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네 마음 알아. 그 마음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 고맙기도 하고.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거야. 넌 아직 어린아이야.”

“나 어린애 아니에요.”

“네가 우긴다고 사실이 아닌 게 되는 건 아니야.”

그 말은 정곡을 찌르는 거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우기고 있었다.

그 말은 새삼 나조차 모르던 내 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우기는 걸까.

어쩌면 나는 행복해지는 법을 모르기에 초조했는지도 모른다. 또다시 불행의 늪으로 빠져 버릴까 봐, 미움받거나 쓸모가 없으면 버려질지도 모르니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루나를 못 믿는 것은 아닌데 그것과는 또 달리 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동정이 아닌 사랑을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루나가 내 네임을 갖고 있는데도 나를 반기지 않는 이유가 오로지 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장에 대한 강박증이 생겼던 것 같다. 나는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넌 지금 어린아이야.”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루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단호했다.

“게다가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않았어.”

“괜찮은데.”

“나를 걱정시키는 일을 도움이라고 우긴다면 형도 어쩔 수 없지만.”

그건 정말로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린아이답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잘 자라면 돼. 형을 돕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잘 자라고 나면 돕게 해줄 거예요?”

“그때도 돕고 싶다면.”

“당연히 그때도 돕고 싶죠. 난 루나도 좋지만 루나커피도 좋아요. 그래서 더 돕고 싶은 거예요.”

“루나커피가 좋다고?”

“네. 루나가 얼마나 이 가게를 아끼는지 잘 아니까요. 그리고 박바라 님도 좋아요.”

“응…?”

“이 가게를 창조하신 분이잖아요. 루나커피가 없었다면 우린 만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말은 루나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나 보다. 그의 입가에 어여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가 어찌나 예쁘던지 나도 모르게 그걸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건 맹세컨대, 진짜로 정말로 완전 나도 모르게….

그 입술에 입을 초옥, 맞췄다.

일을 저지르고 나서야 내가 한 짓이 루나가 말한 ‘금단’ 비슷한 짓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저지른 거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폭신한 감촉이 정말로 좋았다. 루나가 구운 초코 컵케이크보다 더 보드랍고 달콤했다. 내가 이런 걸 상상했었나? 사실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더 폭신폭신 달달해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건 내 첫 뽀뽀였다. 태어나서 뽀뽀도 한번 해본 적 없었다. 갓난아이일 때 기억은 없지만 아무리 아기라도 엄마가 뽀뽀씩이나 해줬을 것 같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살짝 눈을 감았었나 보다. 눈을 뜨니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큼지막한 눈이 왕방울만 해졌는데, 정말 볼만했다. 뭐랄까, 평소의 그 어여쁜 눈과는 달리 귀엽고, 사실 조금 웃겼다.

그래서 배시시 웃었더니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가 뭔가 잊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 그, 그래. 나와 루나커피를 예뻐해 주니 고맙구나.”

“고맙구나고맙구나고맙구나.”

“하지 마.”

“네.”

“너 형 말 알아들은 거야. 이제 커피숍에서 이러면 안 돼, 알겠지?”

“알겠어요. 대신 집안일 도울게요.”

“정 그러겠다면.”

“그런데 저 사람들, 형이 마법 쓴 거 눈치채면 어떡해요?”

“몇 초 정도 기억을 지우면 돼.”

“우와! 그런 것도 해요?”

루나는 또 특유의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하면 안 되지만… 별수 없잖아.”

“에이, 고작 몇 초인데 뭐 어때요? 그걸로 무슨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은 위험한 거야.”

“알겠어요. 안 그럴게요. 대신 형도 죄책감 갖지 마요.”

“알았어. 자! 이제 올라가!”

“넹!”

나는 휘파람을 불며 팔짝팔짝 뛰어 계단을 올라갔다. 흘긋 돌아보니 루나는 마법을 푸는 중이었다.

그가 고갯짓을 하자 떨어지던 빵들이 쟁반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쟁반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둥실둥실 날아가 냉장고 안으로 들어갔다. 굽기 힘든 케이크들도 모두 무사했다.

“후유….”

나는 안도의 한숨을 포옥 쉬었다. 소중한 빵을 망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루나가 마법을 쓴다고 해도 빵을 굽는 일은 썩 쉽지만은 않아보였다.

루나가 또 한 번 고갯짓을 하자 모두가 깨어났다. 순간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 늘 듣던 수준의 소음이라도 완벽한 적막 다음에 접해보니 거의 재난 수준이었다.

그래도 활기가 넘치는 루나커피는 보기 좋았다. 삶이란 것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루나도 금세 일에 파묻혀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잠시 계단 벽 뒤에 숨어서 그를 지켜보았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루나가 있는 루나커피, 그처럼 완벽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 수업 시간에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내게 가장 필요한 것만을 콕 집어 루나커피라는 집에 담아 길 잃은 나에게 인도한 것 같았다. 루나커피야말로 나에게 노아의 방주 같은 장소였다.

루나는 내 마음에 병이 생겼을까 봐 걱정했지만, 아무리 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학대와 멸시를 당했다 한들 어떤 고통이건 오래 끌어안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처럼 큰 운명의 수혜자가 되었으니까.

내 영혼의 성소 루나커피에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기가 흘렀다. 루나가 만들어낸 따뜻하고 향긋한 삶의 공기, 달맞이꽃만큼이나 향기롭고 커피 향기만큼이나 정겨운 공기 말이다.

“박바라 님. 고맙습니다.”

이곳에서는 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졌다. 친엄마의 사랑도 받아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그것부터 기적 같았다.

어쩌면 루나커피만의 이 독특한 공기는 박바라 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지만, 점점 살아가면서 사랑이 많은 한 사람에게 꽤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 번 느꼈다.

루나커피의 그런 기운 때문일까, 나는 루나의 생각은 물론이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내 불행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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