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느새 여름이네요. 하늘은 쾌청하고 아침 공기는 상쾌해요.
창문을 열자 부지런한 새 한 마리가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월계수 가지 위로 날아올랐어요. 나뭇잎들도 깜짝 놀라 깨어나네요.
저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돼요.
아침에 판매할 빵과 케이크를 반죽하고 그것들이 구워지는 동안 아침 장사 준비를 해요. 빵과 케이크가 구워지면 냉장고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고 2층으로 올라와 식구들 먹을 아침을 준비하지요.
식구들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식사를 하는 건 저뿐이고 고양이 다섯 마리는 사료를 먹으니까 준비라고 할 만한 건 없어요. 전 아침을 든든히 먹는 편이지만 그래봤자 토스트나 와플, 과일과 밀크커피 정도랍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갑자기 고민스러워졌어요.
“은별이는 한참 자라날 나이이고 한국 아이니까 한국 음식을 먹여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저는 한국 음식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답니다.
그래서 생소한 레시피를 열심히 검색해 한국 음식 준비에 착수했어요. 오늘 아침 메뉴는 미역국과 두부조림, 오이무침과 겉절이로 정했어요. 미역에는 무기질과 칼슘, 두부에는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하다고 해서요. 채소를 챙겨 먹기 위해 오이무침과 겉절이도 끼니때마다 넣는 게 좋겠어요. 성장기에 꼭 필요한 영양소를 고려한 아침 식단이지요.
“훌륭해.”
잘만 된다면 말이죠.
“우선 미역을 찬물에 담가야 하네.”
그다음 겉절이 채소를 소금에 절여놓아요. 그다음은 두부조림 양념을 만들고, 두부를 썰어 냄비에 넣고 기름에 지진 다음….
“헐… 무지 복잡하네.”
하지만 제가 누군가요. 루나 블랑슈는 딴 건 몰라도 요리만큼은 자신이 있답니다.
오늘 한번 해보고 나면 미역국과 두부조림은 평생 레시피를 보지 않고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야옹, 뭐하냐?”
“아빠. 마침 잘 왔어요. 이거 맛 좀 봐주세요.”
“안 돼.”
“싫은 것도 아니고 안 된다고요?”
“한식이잖아. 먹으면 입에서 마늘 냄새난다고. 작업에 지장 있어.”
“작… 아직도 작업을 걸고 다닌단 말이에요?”
“죽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작업을 안 해?”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났는데, 미오가 자기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고양이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걸 어제 은별이랑 발견하고 잡아 왔어요.”
“야옹, 그래서 걔가 새장에 들어있는 거냐?”
“네.”
“아무튼 천사 같은 얼굴을 해가지고 가끔 잔인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렇다고 동생을 가둬?”
“별 수 없어요. 아직 미성년자인데 이성 교제는 불안해요.”
“지금이 어느 시댄데 미성년이라고 이성 교제도 못 하게 해?”
“미오가 아빠 아들만 아니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거예요.”
“크크크. 그나저나 미오 이눔 자식, 날 닮아서 위아래 2백 살까지 커버를 한다니까.”
“농담 마시고, 아빠가 모범을 보여야 애가 깨닫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게. 내가 생각이 짧았다. 위아래 2백 살이라니, 위아래 3백 살로 수정하마.”
“고양이는 수명의 기준이 달라요.”
“냄새 근사하네. 하나 줘봐.”
필립은 조리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오더니 두부조림을 날름 삼켰어요.
“야옹! 뜨거웟!”
필립이 개수대로 뛰어 들어가 수도꼭지에 입을 벌려 불타는 목젖을 식히고 있는데 은별이가 주방으로 들어왔어요.
“안녕하세요.”
“은별아. 벌써 일어났어?”
“형은 몇 시에 일어났어요?”
“5시쯤.”
“와… 나도 내일부터 5시에 일어날게요.”
“뭐 하러. 그럴 필요 없어.”
“그러고 싶어서요.”
“이거 하나 먹어볼래?”
“엇! 두부다!”
“두부 좋아해?”
“네!”
“잘됐네. 성장기에 아주 좋은 음식이야. 네 또래 아이들은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던데 다행이다.”
은별이가 발꿈치를 바짝 들고 입을 아 벌렸어요. 두부 한 조각을 후후 불어 입에 넣어주니 오물거리며 잘도 먹네요. 조그만 입이 정말 귀여워요.
“우와! 진짜 맛있어요!”
“그래? 처음 해보는 거라 걱정했는데.”
“야옹- (야, 그거 잘하면 목젖 떨어진다.)”
“잘못하면, 이겠죠. 아빠.”
“저 때문에 한국 음식 하고 계신 거예요?”
“뭐 겸사겸사. 이제 우리도 슬슬 한국 음식에 정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야옹- (너무 뜨거워.)”
“전 뭐든 잘 먹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한식이 영양 밸런스가 더 좋은 것 같아.”
“저도 도울게요.”
“그럼 식탁 차리는 거 도와줄래? 수저 놓고 주전자에 물도 좀 채워주고.”
“네. 그런데 형.”
“응?”
“나… 어때요?”
“응?”
은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빤히 올려다봤어요. 뭔가 잔뜩 기대하는 눈인데, 뭘까요…?
“야옹. (이 녀석 머리에 포마드 발랐어.)”
“아!”
“야옹. (등에 용 그림 넣은 티셔츠도 입고, 저 불량한 가죽바지는 뭐야? 이런 옷은 네가 사서 넣어둔 거냐?)”
“아… 네.”
“야옹. (도대체 왜?)”
“그게… 옷가게 매니저가 남자애들이 무척 좋아하는 패션이라고….”
제 말에 은별이 히죽거리며 웃었어요. 그러고 보니 오래된 가수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
“맞아요. 맘에 쏙 들어요.”
“이런 취향이야?”
“몰랐는데 그런가 봐요. 어때요?”
“귀, 귀여워.”
그러자 히죽거리던 웃음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은별이 험악하게 눈을 치뜨는 게 아니겠어요? 뭐죠…?
“왜…?”
“야옹. (귀엽다 말고, 섹시하다고 해줘라.)”
“네에?”
어린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요!
제가 질색하자 은별이 부루퉁한 얼굴을 해가지고 팩 돌아서더니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약간 벙찐 기분으로 아이를 쳐다봤어요. 까만 민소매 티셔츠에 가죽 쫄바지, 올백 머리에 아직 붓기가 남은 눈탱이까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어요. 솔직히 귀엽기는 귀엽네요. 이런 기분일까요? 아이를 키우는 기분은. 애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더니 리딩 한 번 더 해보고 싶을 정도로 엉뚱하네요.
그런데 무심코 주방 테라스 쪽을 돌아본 제 눈에 좌표 하나가 들어왔어요.
“누가 새장을! 필립! 미오 잡아욧!”
“야옹- (이제 아비를 막 부려먹네.)”
은별이가 어리둥절해서는 물었어요.
“어? 새장 문 내가 열어줬는데.”
“일부러 가둬놓은 거야.”
“왜요?”
“너도 어제 봤잖아.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 유부녀한테 빠져서.”
“헐! 어제 그 회색 고양이가 유부녀예요?”
“애가 셋이나 딸린 유부녀야!”
“고양이도 결혼해요?”
“어쨌거나 불륜, 금단, 아니 뭐가 됐든,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고!”
“야옹! (내가 지금 네 말을 듣는 건 오로지 시끄러워서다!)”
필립은 투덜거리면서 뛰어나갔어요.
“어유! 진짜 내가 못 살아. 필립이 말썽을 안 부리니까 이제 미오가 부리고 있네!”
“하지만 고양이잖아요. 불륜이면 어때서요?”
“뭐라고?”
“고양이가 사람처럼 결혼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저 애들은 원래 고양이로 태어날 애들이 아니야. 필립이 인간이었으니까 저 애들도 정상적인 아버지를 만났다면 인간으로 태어났을 거라고.”
“헤?”
“왜?”
“어쨌든 지금은 고양이잖아요.”
“넌 이해 못 하겠지만 이 집의 고양이들은 나와 피를 나눈 형제들이야. 아빠가 같으니까 말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고양이인데 인간처럼 살아야 해요? 고양이로 사는 게 나쁜 건 아니지 않아요?”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날 때부터 고양이인 미오를 인간이랑 똑같이 취급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할 말이 없었어요. 은별이 말이 절대적으로 옳았으니까요.
어쩌다 보니 저는 한 가지 방법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나 봐요. 은연중에 고양이의 삶이 인간의 삶보다 못하다고 단정 짓고 있었으니까요.
편견이란 습관과 같아서 어느덧 살과 뼈에 스며들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도저히 떼어버릴 수 없게 되는 거예요.
할머니는 제게 그걸 가르치려 했던 걸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할머니는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셨고 길냥이들에게 늘 먹이를 주셨지만 직접 기르지는 않으려 하셨어요.
인간에게는 동물을 사육할 권리가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기르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그 길냥이에게 파테(운명)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은별이 조리대에 팔꿈치를 올리고 맑은 눈으로 저를 올려다봤어요.
저도 모르게 외면하고 말았어요. 왠지 아이의 눈이 제게 뭔가를 종용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식탁 앞에 앉아. 국 퍼가지고 갈게.”
“앞으로 고양이는 제가 돌볼게요.”
“다음 주부터는 학교 가야 돼. 고양이 돌볼 새 없어.”
“에이,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요. 나 고양이 진짜 좋아해요.”
“알았으니까 어서 앉아.”
“넵!”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았어요. 은별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어요.
“와! 미역국이 이런 맛이구나.”
“응…?”
“저 미역국 처음 먹어봐요.”
“뭐? 하지만 미역국은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먹는 메뉴라던데.”
“급식비 못 내서 급식 먹어본 적이 없어요. 이모는 제대로 밥해준 적이 없었고.”
“세상에.”
급식비를 못 내서 밥을 못 먹다니, 제 가슴이 또 미어졌어요.
그런 저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은별이는 히죽거리며 열심히 밥을 먹었어요.
어떻게 된 걸까요?
아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제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어요. 왜 그 모습에 제가 무아지경이 된 걸까요? 어떤 재미있는 영화도 지금 이 아이만큼 저를 몰입시키지는 못할 것 같았어요.
할머니는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늘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셨죠.
“누군가에게 밥을 주면 주는 내가 행복해져. 그러니 규칙적으로 누군가에게 밥을 주기 시작하면 나는 매일 행복해지지.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나는 그게 그 어떤 운명보다도 강한 유대감을 준다는 걸 깨닫게 돼.”
“형은 왜 안 먹어요?”
“어? 어어, 먹어.”
“자!”
은별이가 두부조림 하나를 제 밥 위에 얹어주었어요.
“진짜 맛있어요.”
“그래.”
은별인 제가 그걸 입에 넣을 때까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응시했어요.
저는 수저를 들어 두부조림이 올라앉은 밥을 한 술 크게 떠서 입에 넣었어요. 그제야 은별이가 배시시 웃으며 식사를 계속했어요.
“형은 몇 살이에요?”
“나 420살.”
“콜록콜록!”
마시던 물이 목에 걸렸는지 은별이가 한동안 콜록거렸어요.
“사사사, 420살이요?”
“정확히는 420.8세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플럼버에서는 지구 시간으로 대략 20년이 지나야 한 살을 먹거든.”
“헐…!”
은별이 조그만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더니 다른 손도 들어 또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어요.
“그럼 지구 나이로는 스물하나?”
“대충 그럴 거야.”
그리고 곧 깨달았는지 놀란 얼굴로 물었어요.
“그럼 20년이 지나야 한 살 먹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뭐야. 그럼… 내가 스무 살이 되어도 형은 여전히 스물한 살인 거네요?”
“응…?”
“와! 끝내줘!”
“뭐, 뭐가.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서….”
“와우! 짜릿해.”
짜릿하다니, 대체 뭐가 짜릿하다는 걸까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서 가서 놀아. 형은 장사해야 해.”
“설거지 제가 할게요.”
“정말?”
“그럼요! 이깟 설거지는 일도 아니죠.”
“그래? 그럼 부탁한다.”
“부탁은 무슨요. 우리 사이에.”
은별이 눈을 찡긋해 보였어요. 아직도 눈이 부어서 잘되지는 않았지만 윙크를 하려던 것 같아요.
저는 왜인지 약간 굳어가지고 은별이 휘파람을 불며 식탁을 치우는 모습을 잠시 지켜봤어요.
좀 전에 한 생각을 수정하겠어요. 밥을 주면 운명을 느끼게 된다고요?
아뇨, 할머니. 밥은 그냥 밥이죠. 운명은 얼어 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