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3화 (13/103)

<13화>

다음 날이었다.

뒷마당으로 통하는 대문 앞에는 흰색 미니밴이 주차되어있었다. 옆구리에 ‘루나커피 1호점’이라는 로고가 새겨져 있는 차였다. 올라타고 보니 뭔가 묘하게 생소했다. 뭐지?

“이게 뭐예요?”

내가 가리킨 기계를 쳐다보며 루나가 되물었다.

“내비게이션 말이야?”

“아니, 화면에 떠 있는 이 모눈종이 말이에요. 그리고 이 숫자들 막 움직이잖아요.”

“응…?”

내 말에 루나가 그 어여쁜 은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보았다.

“그게, 보여?”

“네.”

“신기하네.”

“왜요?”

“지구인의 눈에는 잘 안 보이는데.”

“그거 확실해요?”

“지금까지는 그랬어.”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넌 좌표 구간의 루나커피도 발견했던 애니까.”

“내 눈에만 보이는 걸까요?”

“그런 것 같아.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그 말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참, 물어볼 게 있었는데. 이 옷, 제가 입어도 되는 거 맞아요?”

“그럼. 당연하지.”

“방도 제가 써도 돼요?”

“당연히 네가 쓸 방이고말고.”

“와.”

“마음에 들어?”

“전 태어나서 제 방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어요.”

루나는 미안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루나의 성격을 대부분 파악했다. 인정 많고 마음씨 고운 이 남자는 남 불쌍한 꼴을 못 보는 게 분명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내가 겪은 고통에 대해 죄책감까지 가지는 것 같았다. 역시나 은회색 눈동자가 그새 촉촉해졌다.

“그 방은 네 거고 그 방에 있는 모든 것도 다 네 거야.”

“침대랑 책상이랑 옷장이랑 화장대도요?”

“그럼.”

“그 안에 든 물건도요?”

“그럼.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그렇게 예쁜 물건이 많은데 필요한 게 또 있겠어요? 아마 평생 더 필요한 물건은 없을걸요.”

“그렇지 않아. 뭐든 필요한 게 생기게 될 거야.”

내가 웃자 루나도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미니밴이 골목을 빠져나가 도로로 진입했다.

“마법도 쓸 줄 알아요?”

“음…. 무슨 뜻이니?”

“제가 왔던 날 말이에요. 저 밤에 왔잖아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눈 뜨니까 제가 필요한 게 모두 갖춰져 있었고요. 마법이 아니면 어떻게 그래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플럼버인들의 일상적인 행동이 지구인에게는 마법으로 보일 수도 있을 거야. 우리는 모든 일을 아주 빠르게 할 수 있거든. 지구인의 눈에는 녹화한 영상을 빨리 감기 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우와. 플럼버인은 다 그럴 수 있어요?”

“거의 그래. 물론 플럼버인 중에도 아픈 사람이나 장애인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은 좀 힘들겠지만.”

“그래서, 아무튼 옷을 직접 사 오신 거예요?”

“급하게 사 온 거라 마음에 들지 걱정되더라. 일주일 안에는 교환할 수 있으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해.”

“몽땅 다 맘에 쏙 들어요. 사이즈도 잘 맞고요. 플럼버인은 한 번 보기만 해도 사이즈나 취향을 척척 맞히나요?”

“그렇지. 널 기록한 눈으로 가게에 가서 상품을 훑어보면 적합한 옷이며 신발이 한눈에 보이거든.”

“하지만 어제는 늦은 밤이었잖아요.”

“명동엔 자정까지 영업하는 가게가 많더라.”

“저 때문에 그 시간에 명동까지 갔다 왔다고요?”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저도 배울 수 있어요?”

“뭘? 이런 능력을?”

“네.”

“아까 로저도 말했지만, 플럼버인과 지구인은 생체 구조와 구성 성분이 달라서 어려울걸.”

“네에….”

나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나도 마법을 써보고 싶은데. 그렇게 빨리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완전 슈퍼맨 같을 거야!

“형.”

“응?”

“제 몸에 있는 형 이름 말인데요.”

“아아,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별 의미 없어. 신경 쓰지 마.”

“별 의미가 없다고요?”

“그냥… 그렇지! 아마도 네가 전생에 내 아들이었나 봐.”

“네에?”

“왜?”

“진짜 그런 뜻이에요?”

“당연하지. 그럼 무슨 뜻이겠어?”

“형도 잘 모르는 거예요?”

“그, 그럼. 나라고 뭐, 세상 일 다 아는 건 아니잖아?”

뭐야. 전생에 아들? 정말 그런 뜻이라고?

그러는 동안 미니밴은 어느 건물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는 빈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내가 아는 지구인의 방식으로 주차했다. 나는 그가 왜 마법을 쓰지 않고 지구인처럼 평범하게 운전하는지 궁금해졌다.

“왜 그냥 순간이동하지 않아요?”

“아무 때나 그런 기술을 써먹으면 사람들 눈에 띄잖아. 어제는 급한 상황이었고, 또 늦은 밤이라서 눈치껏 했지만.”

“아항.”

“자, 내리자.”

치료는 금방 끝났다.

치료는 금방 끝났다. 대신 각종 검사를 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CT 촬영도 했다. CT 결과가 나오려면 하루 정도 걸리지만, 엑스레이 촬영 결과는 바로 나왔다.

“다행히 골절은 없어요. 그런데 혈액이…?”

“네?”

“아뇨. O형이네요.”

“네에. 그 외에 이상한 점은 없나요?”

“자세한 건 CT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종이에 뭔가 체크를 하던 의사가 루나를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아이가 폭력을 당한 것 같은데요.”

의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루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때 루나의 얼굴은 울적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본 의사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누구든 천사 같은 루나를 두고 의심 비슷한 걸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의사의 눈에도 루나가 외국인처럼 보일 테니 호기심을 느끼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랑 어떤 관계이신지는 몰라도, 이런 건 신고해야죠.”

그 말에 루나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나는 이모 부부를 신고하고 싶었지만 동생 준이가 걸렸다. 그리고 외계인 이야기도 마음에 걸렸다. 루나가 경찰에게 직접 연락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루나가 수긍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 이모거든요. 얘가 신고를 바라지 않네요. 그쪽도 어린 자식이 있어서.”

“저런! 아주 몹쓸 사람들이로군요.”

병원에서 나올 때는 부어터진 내 이마에 붕대가 감겨있었다.

하도 맞고 살아서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데 붕대가 감기자 아픈 기분이 되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처방받은 약을 사러 약국에 들렀다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건물을 빠져나올 때쯤 루나가 말했다.

“전학도 와야지. 이번 주 쉬고 월요일에 학교에 가자.”

“이 동네 학교에 다니는 건가요?”

“그럼.”

“학교에 같이 가줄 거예요?”

“당연하지.”

“신난다!”

루나는 잠시 말이 없더니 차창 밖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꽤 넓은 공원이 있었다.

“날씨 좋은데, 우리 잠깐 저기 내려서 얘기 좀 할까?”

“좋아요.”

공원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붉은 타일을 박은 산책로가 이어졌다. 평일 어정쩡한 시간이라서 공원 안은 한산했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간간이 지나쳤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 아래에는 연못 주변을 따라 나무 벤치가 놓여있었다. 연못에는 청둥오리 한 무리가 유영하고 있었다. 여름이 되려면 멀었는데 벌써 매미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리딩에 대해서인데, 내가 딱 한 번만 네 마음을 읽어봐도 될까?”

“네?”

“음, 그러니까… 사람은 몸에 상처를 입듯이 마음에도 상처를 입거든. 몸에 난 상처는 약 바르고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풀지 못하면 병이 되는 법이야.”

“내 마음에 병이 생겼을까 봐서요?”

“그렇지.”

“로저는 그런 거 허락 안 받고 막 읽던데요.”

“로저는 그쪽으로는 별로 깊이 생각을 안 해.”

“인성이 썩은 거죠?”

“응? 아, 아니. 로저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것만 빼면.”

나는 떨떠름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걸 빼면 안 되죠. 아주 중요한 문젠데. 그거 해킹이랑 비슷한 거잖아요. 허락 없이 정보를 훔쳐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그, 그렇지만 플럼버에서는….”

“여긴 지구잖아요.”

“그래….”

“그래도 뭐, 좋아요. 읽으세요.”

“괜찮아?”

“루나는 뭘 해도 괜찮아요. 리딩을 하든 해킹을 하든.”

“고맙다.”

“고마울 건 없어요. 그런데 읽고 나서 화내면 안 돼요.”

“뭘?”

“나도 잘 모르지만 내 마음이 그다지 깨끗하지는 않을 거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해?”

“속으로 욕 존나 잘하거든요. 이모한테도 썅X이라고 욕하고.”

루나는 자그맣게 웃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순간 내 숨이 막혀왔다.

높아진 태양 빛이 나뭇잎의 틈을 비집고 비처럼 쏟아졌다. 그의 금발이 정말로 황금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짝였다. 은회색 눈동자는 별처럼 빛났고 또렷한 동공이 내 눈을 꽂을 듯 응시했다.

공원 밖 소음은 저 멀리 물러났고 시끄러운 매미 소리도 고요해졌다. 세상이 온통 조용해졌다. 얼마나 고요한지 빛의 비가 쏟아지는 소리마저 들렸다.

내 가슴은 뛰는 것이 아니라 부풀어 올랐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전생에 아들? 천만에.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생각을 계속했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이게 부모 자식의 인연 탓이라고요? 절대 아니에요. 처음에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우리는 운명이 맺어준 짝이라고요.

하늘이 알려준 것 같은 확신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세계 안에 있었다.

마법 같은 순간이 지나고 봉인이 해제된 것처럼 풍경과 소리들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잠들었던 매미가 요란스레 울어댔다.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눈은 조금 찌부러졌는데 입은 웃고 있었다. 저런 걸 쓴웃음이라고 하던가.

좀 전과는 달리 그가 약간 불량한 태도로 벤치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는 길고 가느다란 다리를 척 꼬았다.

“…괜, 괜찮구나.”

“뭐가요?”

“네 마음. 트라우마나 뭐 그런 게 생길 정도로 상처가 깊지는 않아.”

“이제 내 옆에는 루나가 있으니까.”

그가 한층 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갈매기 눈을 해보이며 웃었다. 귀여우라고. 헤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한동안 내 ‘귀여운’ 웃음을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형이라고 해야지. 월영이 형이라고 해.”

“그냥 형이라고 할게요. 월영이라는 이름은 루나랑 도통 안 어울려.”

“…그만 가자.”

“네!”

그는 울적한 얼굴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앞장서 걸었다.

나는 재빨리 뛰어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가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잡아주었다.

“형.”

“왜.”

“나 빨리 클게요.”

“뭐라고?”

“무럭무럭 자라겠다고요.”

“그, 그러려무나.”

“그러려무나그러려무나.”

“시끄러워.”

“엇! 미오다!”

“헐, 저 녀석이!”

미오는 필립을 꼭 닮아서 유일하게 나도 구별할 수 있는 아기고양이였다.

그런데 보는 것만큼 어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혼자서 집을 나와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큰 회색 고양이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루나가 재빨리 달려가 미오를 안아 들었다. 미오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날카롭고 시끄러운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우리는 서둘러 미오를 데리고 미니밴에 올라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