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2화 (12/103)

<12화>

하루 중 가장 바쁜 점심시간이 지났어요. 그제야 우리도 식사할 틈이 생긴답니다.

뒷마당으로 나가보니 정자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네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기분이 좋아졌어요.

“다들 즐겁게 놀고 계시네요.”

“야옹- (노는 거 아닌데.)”

“은별아. 배고프지? 우린 점심을 좀 늦게 먹는단다. 뭐 먹을래?”

“저한테 그런 거 묻는 사람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요. 주시는 대로 먹을게요.”

오…. 이 아이는 제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나 봐요.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이번에는 로저에게 물었어요.

“로저. 오늘은 간단하게 카레라이스나 할까 봐요.”

“뭐든 좋지. 내가 도울게.”

“제가 돕겠습니다.”

은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났어요.

“몸도 안 좋은데 좀 쉬지 그러니?”

“저 하나도 안 아파요. 원래 맞고 살아서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아요.”

아이의 말에 저뿐 아니라 로저와 필립도 말문이 막힌 것 같았어요.

철모르는 아기고양이들만 치고받고 싸우고 있네요. 뭉크와 나나가 한 덩어리가 되어 소파 밑으로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우리 모두 잠에서 깬 듯 고개를 흔들었어요.

“그, 그래. 미안하다.”

“뭐가요?”

“응? 으응, 그냥.”

“형이 미안할 일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미안하시면 돕게 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은별이 무척 기쁜 듯이 제 손을 잡았어요.

저는 아이를 데리고 테라스로 통하는 실외 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올라갔어요.

주방은 식당과 겸해서 사용하는 공간이에요. 조리용 공간이 있고, 중간에는 조리대 겸 간이 식탁으로 쓰는 아일랜드 카운터가 있고, 창문 쪽으로 6인용 식탁이 있지요.

“감자껍질을 까줄래?”

“네!”

카레라이스를 만드는 데는 대충 10분 정도 걸려요. 혼자 한다면 말이죠. 은별이가 도와주는 바람에 30분쯤 걸렸네요.

하지만 아이가 성취감을 느끼고 있으니 잘한 일 같아요.

카페에서는 너무 바빠서 조금 짜증이 났지만 아이가 진정으로 절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기특하네요. 훈련이 돼서 그런 건지 천성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은별이는 무척 부지런한 아이 같아요.

“잘한 건가요?”

“아주 잘했네. 감자껍질을 얇게 벗겼어.”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

“로저는 사람 머릿속을 들여다보나요?”

“아….”

은별이 리딩에 대해 눈치챈 걸까요?

하긴, 로저는 그쪽으로는 저와 생각이 달라요. 리딩에 대해 별 거리낌이 없지요.

“우선 식사부터 하자.”

은별이 5인분의 식사를 쳐다보며 물었어요.

“고양이들도 카레라이스 먹어요?”

“아, 이건 알바생들 거. 가져다주고 올게.”

“제가 가져다줄게요.”

“그러다 넘어져.”

그 말에 은별이가 인상을 썼어요.

“저 동생 업고 밥 짓기도 해요. 지금보다 훨씬 더 작을 때도 넘어진 적 없어요.”

“그, 그러니? 그럼 부탁할까? 오는 길에 로저랑 필립한테도 식사하시라고 전해 줘.”

“네!”

은별이가 2인분의 카레라이스가 담긴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갔어요.

“후우….”

대체 어디까지 말을 해줘야 할까요?

아무튼 은별이 말마따나 루나커피에서 저 아이를 떼어놓는 일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솔직히 볼수록 마음에 드는 아이예요.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한 면모가 어릴 적 제 모습을 보는 듯했죠.

제게는 동생이 없기 때문에, 아니 고양이 동생 말고는 없기 때문에 은별이를 보니 조금 탐이 나기는 했어요. 네임으로만 얽히지 않았다면 진짜 동생 삼고 싶은 아이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동생처럼 데리고 사는 것 말이에요. 아이는 갈 데가 없고, 저는 일손이 필요하고.

카페 일을 시키긴 어렵더라도, 하다못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필립과 아기고양이를 돌보는 일이라도 도울 수 있겠죠.

어차피 우리는 언젠가는 플럼버로 돌아갈 거고, 그 부분만 은별이에게 이해시킨다면 별 문제없을 것 같았어요.

잠시 후 다들 주방으로 들어왔어요.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고 필립과 아기고양이들은 사료통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어요.

“로저. 이 아이 우리가 데리고 있기로 했어요.”

로저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카레라이스만 꾸역꾸역 먹었어요. 로저 옆에 앉은 은별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저와 로저를 번갈아 쳐다봤어요.

“우리에 대해 은별이도 어느 정도 알아요.”

은별이가 여전히 방실거리며 로저를 올려다봤어요. 로저는 은별이를 흘긋 보고는 밥만 퍼먹었어요.

“혈혈단신이나 마찬가지이니 우리 비밀을 발설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니.”

로저가 티슈로 입을 닦으면서 정색했어요.

“아까 발설한다고 협박하던데.”

그 말에 은별이가 언제 방실거렸냐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썼어요. 필립이 끼어들었어요.

“야옹- (걔 협박꾼이다. 조심해.)”

“정말이야?”

제 질문에 은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어요.

“우리 일 발설하면 우린 외계인 연구소에 보내질지도 몰라. 감금되고, 생체 실험 대상이 되고.”

“헐, 외계인이에요?”

“음… 일종의… 그렇단 말이지. 우리는 플럼버라는 행성에서 표류한 사람들이야.”

“어쩌다가요?”

“좌표 이동에서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우리도 정확한 원인은 몰라.”

“외계인이 정말 있었어….”

“나는 널 믿어.”

제 말에 은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어요.

아침보다 붓기가 많이 빠져서 원래의 눈 모양을 제법 알아볼 수 있었어요. 상처와 붓기가 다 빠지면 상당히 예쁜 눈이 될 거예요.

무엇보다 아이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고 맑아요. 저렇게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아이였던 시간을 완전히 잊지는 않을 거예요.

“너도 우리를 믿어주면 좋겠고. 그래서 나는 너한테 모든 걸 다 말해줄 거야.”

은별의 까만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들었어요. 무엇에 감동을 받은 걸까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전 이 아이가 얼마나 다정한지 알 수 있었어요. 은별인 모든 게 다 고픈 아이예요. 정도 고프고 밥도 고프고.

“지금부터 나는 네 보호자로서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 능력껏 다 해줄 거야.”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제 말에 집중했어요. 가끔 종잡을 수 없기는 해도 산만한 아이는 아니에요.

아, 지금 아이를 분석하고 있는 건 아니랍니다. 다만, 저에게도 이 아이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다 보니, 저 자신의 성향에 맞춰 제 나름대로 살필 필요는 있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 기회만 닿으면 플럼버로 돌아가야 해.”

아이의 눈에 불안감이 서렸어요. 저는 아이가 많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서둘러 말을 이었어요.

“그때가 언제일지는 우리도 몰라. 하지만, 우리가 사라지고 나서도 네가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해줄 거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 콜롬보 행성이 어디 있는데요?”

“콜롬…? 아, 플럼버? 플럼버는 지구에서는 관측조차 되지 않는 은하계에 속해 있어.”

“그렇게 먼데 어떻게 돌아가요?”

“아까 언뜻 말했지만 우리는 좌표 이동을 할 수 있거든. 지금 이 위치에서도 좌표를 맞추면 플럼버의 달을 볼 수 있어. 달이라는 거울로 원하는 곳을 비추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다만 좌표를 맞출 수 있어도 그 시기는 불확실해서 늘 관찰해야 하고, 정확한 시기가 언제일지 코앞에 닥치기 전에는 몰라.”

“잘 모르겠어요. 과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 돼 보여요.”

“지구의 과학은 플럼버의 과학과 맥락 자체가 다르단다. 플럼버에는 모든 자연을 현상이 아니라 물질로 파악할 수 있는 고도의 과학 체계가 완성되어 있거든.”

“그게 무슨 말인데요?”

“음, 이 이상은 나도 전문가가 아니라서. 하지만 여기 로저는 거의 전문가야. 로저. 설명해줄래요?”

탄산수만 홀짝이고 있던 로저가 간단하게 설명을 덧붙였어요.

“플럼버의 과학은 10차원까지 증폭되어 있어. 또한 매우 행동 중심적이지. 지구인들이 가속기를 만든 것처럼 플럼버인들은 차원 증폭기를 만들었어. 세 개의 차원에 존재하는 세 개의 달은 서로를 비추며 자연을 제어하지. 좌표 구간이란 이 세 개의 달이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 시간의 틈을 뜻하는데, 차원 증폭기를 이용해 그 틈을 건너면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거지.”

은별이 애써 집중하려는 듯 눈썹을 바짝 모았어요. 로저가 말을 이었어요.

“그 순간 우리는 나노 입자 정도로 분리돼. 그렇게 가상에 가까운 상태로 이동 후, 도착한 곳에서 해체된 실체를 재빨리 합체하는 거지. 물론 이런 부분에서 지구인과 플럼버인의 자연적 능력 차가 있다는 점을 함께 설명해야겠구나.”

“역시 뭔가 마법 같아요.”

은별이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영리한 아이니까 조금이나마 맥락은 잡았을 거예요.

“야옹- (내 신분도 까. 그리고 나를 고양이 취급하면 쫓아낸다고 해라.)”

“필립, 조용히 해요.”

은별이는 저와 필립을 번갈아 봤어요.

“플럼버인들은 고양이 말도 하는 거예요?”

“아… 그게….”

젠장,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야옹-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까라고. 쟤가 날 업신여긴단 말이야.)”

“알았으니까 가만 좀 계세요, 아빠.”

“아빠?”

“실은, 필립은 내 친아빠야. 자초지종은 차차 설명해줄게.”

“헐….”

은별인 뭔가 굉장히 착잡해보였어요. 하긴, 지구인의 머리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니까요.

“아니. 어리니까 더 잘 이해할 거야.”

로저의 말이었어요. 은별이가 혼란스러워할 걸 걱정하는 제 생각을 읽은 모양이에요. 저는 눈살을 조금 찌푸렸어요. 로저는 저처럼 리딩에 대한 자각이 그다지 없는 사람이거든요.

물론 저처럼 성인이라면 자동잠금장치가 시동된 상태니 타인의 리딩으로 깊은 속마음을 들킬 걱정은 없지만, 별것 아닌 생각 정도엔 아예 잠금이 걸리지 않는답니다. 예를 들어 배고파, 피곤해, 졸려, 기분 나빠 같은 것들요.

하지만 그런 일차적인 생각도 리딩하면 안 된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게다가 이 장치에도 시효가 있기 때문에 더욱이 탐탁지 않았어요. 자동잠금 칩의 유효기간이 지나면 지구에서는 재접종을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저는 로저를 향해 조심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조금 저었어요. 언제나처럼 로저는 눈썹을 쓱 올리고는 시선만 피할 뿐이었어요.

“이 아저씨더러 내 마음 함부로 읽으면 루나커피에 대해 다 폭로해버린다고 했어요.”

역시나 눈치 빠른 은별인 로저의 리딩에 대해 이미 파악한 모양이에요.

“야오옹- (배은망덕한 놈이다. 조심해.)”

“은별이는 그러지 않아요. 말만 험하게 하는 거예요.”

“야오옹- (얼쑤, 제 짝이라고 벌써….)”

“조용히 해욧!”

로저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지는 걸 저는 놓치지 않았어요.

아직 로저를 비롯해 남에게 네임에 관해 떠들고 싶지는 않아요. 당연하잖아요? 아무튼 아빠 때문에 내가 못 살아.

최대한 간략하게 리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어요. 은별인 로저를 슬쩍 흘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플럼버로 돌아갈 때가 되면….”

은별이 침울한 얼굴로 말을 꺼냈어요.

“나한테도 미리 알려주는 거죠?”

저는 씁쓸하게 웃었어요. 아이는 벌써부터 이별을 생각하는 걸까요? 아마도 정이 고픈 아이라 그렇겠죠.

“그럼.”

“약속해줄래요?”

“약속해.”

은별인 그제야 조금 웃었어요.

쓸쓸하고 외톨이 같은 웃음이지만, 그래도 웃었어요. 그 천진난만하고 눈부신 웃음이 저는 좋았어요. 아이가 늘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아이를 위해 뭐든 해주겠다고 결심했어요.

힘들었던 만큼 다 보상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마음속 어디에도 어두운 생각이 자리하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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