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0화 (10/103)

<10화>

“오늘따라 초콜릿 냄새 죽이네요.”

아르바이트생 김희상이에요.

루나커피의 하루는 원두, 크림, 초콜릿의 향연으로 시작되지요. 원두는 하루에 세 번 가는 것이 기본이지만 장사가 잘되면 중간에도 몇 번 더 갈아야 해요.

플럼버에서는 손님이 오실 때마다 새 원두를 볶아서 갈고 손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내려서 서브하곤 했지만 여기서는 불가능해요. 초능력을 쓰면 간단하게 해낼 일이지만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지구인처럼 행세하려면 말이에요.

그럼 플럼버인에게는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플럼버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단위로 순간이동 및 파워 증폭이 가능하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특정한 공간을 한정하면 그 안에서는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가 있어요. 얼마큼의 시간일지는 공간의 넓이에 비례하고요.

더 쉽게 말해볼까요? 예를 들어, 루나커피 가게라는 공간에는 루나커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담겨있어요. 루나커피에 속한 시간인 거죠. 그 시간은 이 루나커피 안에서라면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어요.

따라서 바쁜 시간에는 시간의 속도를 좀 늘이고 순간이동의 능력을 적절히 조합해 손님들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거죠.

루나커피에 속한 시간은 오직 이 가게와 루나 블랑슈에게만 국한된 시간이기 때문에, 루나커피를 나가면 외부 공간의 다른 시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답니다.

물론 루나커피 밖에서도 가능해요. 하지만 공간이 넓어지면 어디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더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하고 자칫 실수할 수도 있으니 자제하는 편이 좋아요.

또 그 능력을 사용할 때 행위의 주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지구인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큰일이지요. 자칫 초능력자로 분류되어 뉴스에 나오게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로저 말로는 외계인이라는 게 들통나면 FBI한테 납치되어, 나사 같은 단체와 연계된 외계인 연구소로 끌려가 실험 대상이 된대요.

그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외계인을 잡아다 각종 실험을 했대요. 일단 뇌와 장기의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 머리를 쓱싹쓱싹 자르고, 뱃가죽도 쓱싹쓱싹….

아니, 또 얘기가 삼천포로 샜네요.

아무튼 그래서 지구에 있는 동안은 지구인처럼 느릿느릿 일해야 하기에, 플럼버에서처럼 나 혼자 가게 일을 커버할 수가 없답니다.

대신 빵이나 케이크 같은 것은 오픈 전에 혼자서 미리 구워놓을 수 있답니다. 아침 일찍 많이 구워놓으면 하루 정도는 신선한 상태로 팔 수 있어요.

“와! 오늘은 머핀 구우신 거예요?”

희상은 커피숍이나 빵집만 골라 알바를 해왔을 정도로 빵돌이랍니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외모를 가진 희상은 근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에요. 지난 여름방학부터 일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방학 때만 한다고 했었는데, 개강 후에도 오전 강의가 없는 날엔 도우러 와주기로 했어요. 일을 아주 잘하는 친구라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

“응. 먹고 싶은 걸로 골라서 아침 먹고 시작해.”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초코칩 머핀 먹어볼래요.”

희상은 자취를 하기 때문에 신경 써서 식사를 잘 챙겨줘야 한답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이고 일을 시작해야 해요. 한참 먹을 때라 식욕이 왕성하거든요.

아침 피크타임이 되려면 3, 40분 정도 남았기에 카페 안은 아직 한산한 편이었어요. 그래도 꼬마가 있으면 조금 번잡스럽죠. 저는 은별이를 향해 몸을 숙이고 가능한 친근한 어조로 말했어요.

“꼬마, 아니 은별아. 이제 올라가서 필립이랑 놀고 있으렴. 착하지?”

“뭐라고요?”

그때 카운터 공간으로 들어오던 희상이 은별이를 발견했어요.

“엇! 이 꼬마는 누구예요?”

은별이는 입을 꾹 다물고 희상이를 올려다봤어요.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데, 다친 눈이 아직 부어있어서 확실치는 않았어요. 무엇보다 은별이가 희상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친…척 아이인데, 잠깐 우리 집에 있기로 했어.”

“귀엽다! 그런데 얼굴이…? 다친 것 같은데요.”

“그게, 사고가 좀 있어서.”

“진짜요? 꼭 누구한테 맞은 것 같아서요.”

“응? 그, 그런가….”

희상의 그 말에 새삼 또 은별이의 찌그러진 얼굴이 마음에 걸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는데….

응? 방금은 분명 눈을 부릅뜬 것처럼 보였어요.

조금 놀라서 손을 떼니 노려보는 느낌이 없어졌어요. 은근 비위 맞추기 힘든 꼬마네요.

“이름이 뭐니?”

그 기류를 미처 읽지 못한 희상이도 은별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기에 말리려고 손을 뻗었는데….

“머리 만지지 마십시오!”

이런, 늦었네요. 은별이가 소리를 빽 질렀어요.

목소리가 꽤 크네요. 깜짝 놀란 희상이 얼른 손을 뗐어요. 저는 은별이를 반짝 안아 들었어요.

“애가 크게 충격받은 적이 있어서 아직 좀 불안정한 상태야. 잠깐 집에 데려다 놓고 올게.”

제게 안긴 은별이 몸을 배배 꼬면서 칭얼거렸어요.

“이러지 마세요.”

“뭘 이러지 마?”

“사람 막 들었다 놨다 하지 말라고요.”

“아…!”

그래요, 자립심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실례.”

내려놔 주자 은별이는 나와 희상일 한 번씩 올려다보고는 돌아섰어요.

분명 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는데 들리지는 않았어요. 제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면 잠꼬대에 가까운 말일 거예요.

그런데, 순순히 올라가나 했더니 이번엔 창가 테이블 앞에 앉는 거예요.

“후유….”

진짜 말 안 듣는 꼬마네요.

할 수 없지. 어디 있든 얌전히만 있으면 상관없을 것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아침에는 매장 이용 손님보다 테이크아웃 손님들이 더 많으니까요.

그래도 희상이는 은별이가 귀여운 모양이에요. 내내 지켜보다 눈을 떼지 못하고 웃네요.

“꼬마가 독특하고 귀여워요.”

“이름은 은별이야. 정은별.”

“은별이? 저기 가서 함께 아침 먹어도 될까요?”

“그러고 싶어?”

“저도 저만한 조카가 있거든요.”

“진짜? 희상 씨도 어린데 저렇게 큰 조카가 있어?”

“제가 형이랑 나이 차가 많이 나서요.”

“그렇구나. 아, 잠깐만. 머핀 내가 꺼내줄게.”

“엇, 괜찮은데. 제가 할게요.”

“희상 씨는 커피 뽑아.”

“네, 그럼.”

커피는 희상에게 맡기고, 저는 빵을 넣어두는 쇼케이스에서 초코칩 머핀을 네 개 꺼내 접시에 담았어요. 그리고 은별이 좋아할 것 같은 쿠키맨 과자도 두 개 꺼내 놓았죠.

가만, 이것도 애 취급한다고 싫어하려나?

제가 그러는 사이에 희상이 커피와 우유를 준비해 쟁반에 담아가지고 창가 테이블로 향했어요.

은별이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

쳇,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눈곱만한 게 거만해 봤자지. 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기는 하지만 희상이 말대로 귀엽기는 하네요.

알바생 아침을 챙긴 후, 머신에서 뽑아낼 커피 액상과 원두를 준비하고 드립용 원두까지 준비해놓으면 오픈 준비는 대충 끝나요.

머핀과 쿠키가 담긴 트레이를 가져다주고, 오픈 준비를 마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제 귀는 둘이 앉은 창가 테이블로 향해 있었어요. 아직 나조차도 적응하지 못한 은별이가 희상과 어떤 말을 주고받을지가 궁금했거든요.

“이 집 빵 진짜 맛있다? 이 근처에 꽤 소문났어. 사장님이 직접 구우시는데, 알아?”

“당연히 압니다. 샌드위치랑 토스트, 음… 수프도 먹어봤어요. 엄청 맛있어요.”

“이 초코칩 머핀은 그냥 초코칩 머핀이 아니야. 사장님 스펀지케이크는 실크처럼 부드러워.”

“짭짭… 실크보다 더 부드럽네요.”

“이 쿠키맨 과자 귀엽지? 너 먹어.”

“그건 애들이나 먹는 과자입니까?”

“맘에 안 들어? 그럼 내가 다 먹을게.”

“아, 아니. 마음에 쏙 듭니다. 제가 먹을게요.”

“후후.”

“지금 웃으셨습니까?”

“웃기는 누가. 넌 은별이라고 했지? 어느 학교 다녀?”

“금성 초등학교요.”

“이 근처에 있는 학교야?”

“모르셔도 돼요.”

“알았어. 어서 쿠키 먹어.”

“어느 학교 다니세요?”

“나? 한국대학 컴퓨터공학과야.”

“컴, 컴퓨터공학과가, 뭐 하는 관데요?”

“아, 말 그대로 컴퓨터에 관한 모든 걸 배우는 학과야.”

다행히 대화는 그 이상 진행되지 않았어요. 희상이 머핀을 다 먹었거든요.

은별이도 머핀을 다 먹고, 쿠키맨 과자도 맛있게 잘 먹었어요. 말은 까칠하게 해도 음식은 곧잘 먹으니 다행이에요.

테이블을 치우고 한숨 돌리니 아침 손님들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아침에는 모든 테이블이 꽉 찰 정도로 붐비지는 않기 때문에, 저는 은별이 그 자리에 그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간간이 카운터 쪽을 째려보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손님이 한차례 빠지고 한가해졌을 때, 저는 은별에게 다가가 최대한 아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말을 건넸어요.

“은별아, 착하지? 뒷마당 구경이라도 하지 않으련? 아마 필립이랑 아기고양이들도 거기 나가 있을 거야. 정자에서 책이라도 읽으려무나. 거실 책장에 보면 만화책도 많이 있단다.”

“저기요.”

“응?”

“태어나서 지금까지 않으련, 려무나, 있단다, 그런 말 쓰는 사람 처음 봐요.”

“응…? 내가 그랬어?”

“네. 근데 그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저 동화책은 아주 오-래 전에 다 뗀 나이거든요.”

“그, 그래. 그렇구나. 조심할게. 그런데 내가 신경이 쓰여서 그러니까, 부디 들어가서 놀고 있어. 이따 네 문제를 의논하자.”

“제 문제 뭐요?”

“네 학교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일이 많지.”

“난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어요.”

그 말은 또 저를 뜨끔하게 만들었어요.

“그래, 안 쫓아낼게.”

“진짜요? 그럼, 나 여기 계속 있어도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데 여기 계속 있는 게 너에게 최선은 아니야. 더 좋은 방법을 함께 의논해보자는 거야.”

“아뇨.”

“응?”

“전 이 집에서 살아야 해요. 그건 의논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꼬마, 아니, 은별아.”

“그것부터 결정하고 나머지 의논해요.”

“은별아.”

“안 그럼, 여기서 막 울 거예요.”

“그렇게 떼쓰면 못 쓴다고….”

“우우우….”

“아, 알았어!”

한산하기는 해도 손님이 아예 없지는 않았기에 진땀이 주르르 흘렀어요. 어유, 이래서 지구 속담에 애는 봐주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나 봐요.

겨우 은별이를 달래 복도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니 희상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어요. 여자 손님 둘이 프라푸치노를 주문해서 크림을 만들고 있었어요.

루나커피는 시판되는 휘핑크림을 쓰지 않고 신선한 크림을 매일 배달받아 블렌더로 거품을 올려 사용하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어제 정신이 없어서 못 챙긴 바람에 크림이 배달되지 않은 것을 방금 깨달은 거예요.

남은 걸 탈탈 털어 방금 주문받은 두 개는 겨우 서브했지만, 이젠 정말로 크림이 똑 떨어지고 말았어요.

“크림을 사 와야겠어요.”

희상이 막 앞치마를 벗으려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몰려들었어요. 다행히 크림이 들어가는 음료를 시킨 사람은 없었지만, 주문받는 내내 조마조마했답니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크림이 없다고 써 붙여야겠다.”

그때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어요. 동시에 크림 상자도 눈앞으로 불쑥 끼어들었어요.

“크림 사 왔어요!”

“엄마야…!”

잘못하면 밟을 뻔했지 뭐예요!

놀라서 시선을 내리니 은별이 제 밑에서 크림 상자를 내밀고는 방긋거리고 있었어요.

“바로 옆에 슈퍼 있던데요. 거기 아줌마가 루나커피에서 종종 이걸 사간다고 알려주셨어요.”

“너… 여기 계속 있었어?”

“또 사 올 거 없어요?”

“그렇게 막 나가서 돌아다니면 안 돼. 이 근처 길도 잘 모르잖아.”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은별이 인상이 험악해지는 듯했어요. 아차 싶었죠. 그때 다행스럽게도 세윤이가 들어왔어요.

허세윤. 루나커피의 또 다른 알바생이에요. 지금이 가장 바쁜 시간대라, 이때쯤 알바생 두 명의 타임을 한 시간 정도 겹치게 배정했답니다.

“안녕하세요!”

세윤은 상당히 잘생긴 아이랍니다. 이 아이도 근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에요. 장래 희망이 영화배우고, 전공도 연극영화과예요. 워낙 시선을 끄는 미남이다 보니 루나커피의 다크호스랄까, 세윤이 오면 우연인지 어떤지 여자 손님들이 많아지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제가 뭘 잘못 본 걸까요?

은별이가 말리다 만 황태처럼 입을 쩍 벌린 채 세윤을 쳐다보고 있네요. 설마, 저 눈곱만한 게….

…세윤이한테, 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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