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집안 여기저기에 달맞이꽃 화병이 놓여있었다. 층계참에도 있었고 욕실에도 있었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첫날의 그 느낌이 정확했음을 알았다. 그날 밤 내가 맡았던 향기의 정체는 달맞이꽃과 향초 냄새였다.
세면대 옆에 빨래 바구니가 놓여있기에 얼른 옷을 벗어 거기에 넣어두었다. 이 공간에 더러운 옷을 놓을만한 곳은 거기뿐인 것 같아서였다.
욕조 안에 들어와 머리 위로 샤워기를 들어 더러운 몸을 씻어낸 다음 물을 받았다.
“하아….”
따뜻한 물에 폭 잠기니 그제야 온몸이 쑤셔왔다. 노곤해진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보드라운 물이, 달맞이꽃 향기가, 일렁이는 촛불이 그만 잠들어도 좋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헉!”
나도 모르게 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지! 멋대로 잠들면 안 돼!”
어제도 이러지 않았던가.
그 남자 곁에서라면 기절해도 괜찮겠다고, 다음날 그 남자를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말짱 황이었잖아.
“흥!”
나는 발딱 일어났다. 잔뜩 부어서 잘되지는 않았지만 야무지게 눈도 부릅떴다.
“루나 블랑슈.”
천사 같은 얼굴을 해가지고 내가 잠든 사이 나를 이모네 집 골방에 데려다… 아니 가져다 놨지?
오늘도 그는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시종일관 나라는 존재가 영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잠들면 또 요술을 써서 어딘가 내다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래서 얼굴에 속지 말라는 말이 있는 거겠지.
“절대 잠들지 않아!”
오늘은 절대 잠들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아니, 내일도 모레도, 절대 안 잔다. 이 순간 이후 나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잠들면 안 된다.
*
“드르렁- 쿠울-”
헐… 이게 무슨 소리지…? 설마 내 코 고는 소리일까?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젠장! 또 잠이 들고 말았다니.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시야가 온통 하얗다. 설마 또 이모네 집… 아니, 거긴 홍수에 떠내려갔을 테니 그건 아닐 테고.
준이는 무사하다고 했는데 이모는 어떻게 됐을까. 마음 같아서는 이모와 이모부는 뒈졌으면 딱 좋겠지만 준이 생각을 하면 또 마음이 약해졌다. 그 어린 것이 부모도 없이 살 생각을 하면.
아니… 내 코가 석 잔데 지금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자 주위 풍경이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내 시력에 이상이 생겨서 시야가 하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거의 모든 것이 하얀 방이었다. 하얀 침대, 하얀 이불, 하얀 커튼, 하얀 벽. 그렇다고 병실 같은 느낌은 아니고, 뭔가 청결한 아침을 방에 가둬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가구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다. 이렇게 예쁘고 쾌적한 방에 누워본 건 처음이라 한동안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이런 방에서 사는 놈은 도대체 전생에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렇게 복 터진 놈들이 많은데 나란 놈은….
아니, 가만.
혹시 이거 내 방인가?
“야옹-”
“뭐야…?”
웬 울음소리에 봤더니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녀석이 있었다. 가게에서 본 그 하얀 고양이였다.
“왜 내 침대 속에 있는 거야?”
“야옹- (여기 우리 집이거든.)”
“예쁘게도 생겼네.”
“캬악- (한 번만 더 나한테 예쁘다고 해.)”
털이 수북하지 않은 걸로 보아 브리티시쇼트헤어일 것이다. 학교에 비치된 과학책에서 고양이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푸른 눈은 이 녀석이 난청이라는 뜻일 텐데.
“쯧쯧, 귀가 안 들리지? 그래서 네 눈이 큰 거야.”
“야옹? (뭐, 인마?)”
“킬킬, 보자마자 날 좋아하는 걸 보니 암컷이네.”
“야옹! (미친!)”
“알았어, 알았어. 사장님은 어디 계셔? 루나, 아니 월영 씨가 사장님 맞지?”
“야옹- (뭐? 월영 씨이-?)”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꼬박꼬박 대답 같은 게 들려오니 왠지 고양이와 대화하는 기분이라 좀 떨떠름했다. 그러고 보니….
“응…?”
이불만큼이나 말쑥한 잠옷이 내 몸에 입혀져 있었다. 파자마였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파자마는 말할 필요도 없이 머리털 나고 처음 입어봐서 매끄러운 감촉마저 생소했다. 그런데….
“씨발, 또 내 알몸을 본 거야?”
“야옹? (밤톨만 한 게 뭐래?)”
잠결의 기억을 최대한 더듬어보았지만 이렇게까지 생각나는 게 없을 수가 있나. 절대 잠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주 그냥 푹 잤나 보다.
“몇 시지?”
침대 옆 탁자 위에 전자시계가 놓여있었다. 07:26.
그 옆에는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있었다. 침대에서 나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니, 여전히 한심하게 부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제의 그 돼지감자 같던 꼴보다는 나았다.
어서 나아서 내 잘생긴 얼굴을 루나한테 보여줘야 할 텐데. 아마 내 원래 얼굴을 보면 그 떫은 표정이 쏙 들어갈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인물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잘 타고났다.
“어…?”
화장대 위에 꼬깃꼬깃해진 것을 열심히 펴놓은 것처럼 보이는 5만 원권 지폐가 있었다. 이모 지갑에서 훔친 그 돈이었다. 내 전 재산인 셈이다.
돈을 접어 주머니에 넣으려고 보니, 아무리 훌륭한 파자마라도 잠옷인데 이걸 입고 밖을 싸돌아다닐 수도 없고.
그때 화장대 옆에 얌전히 놓인 하얀 옷장이 내 시선을 끌었다. 양쪽 문이 달린, 클래식한 디자인의 옷장이 마치 이 문을 열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열어봐주기로 했다.
“우와!”
다섯 벌쯤 되는 옷이 걸려있었는데 모두 내게 맞을 법한 사이즈였다. 하나같이 고급지고, 하나같이 새 옷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일까? 어느새? 하긴, 요정이었지. 마법으로 만든 옷인지도 모르겠다.
“이거, 내가 입어도 되는 건가?”
“야옹.”
나는 하늘색과 노란색이 섞인 체크 남방과 베이지색 바지를 꺼내 보았다.
한번 몸에 대본 다음 서둘러 걸치고 엉망인 머리를 쓸어 넘기고 보니, 누더기 차림일 때는 몰랐는데 그럴듯하게 입고 나니까 맨발이 심하게 거슬렸다.
그렇게 생각할 내 마음까지 읽은 것일까?
“와! 양말도 있어.”
철제 바구니로 된 서랍 안에 막 사서 포장만 까놓은 것 같은 양말이 한 다스쯤 들어있었다. 제대로 된 양말을 신어본 기억이 없어서 솔직히 옷보다 이게 더 반가웠다.
나는 노란 양말을 골라서 신고 서둘러 방을 나왔다. 이런 걸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나? 귀머거리가 축하라도 해주는 것처럼 내 다리 사이를 쓰윽 지나쳐 앞서 걸었다.
방문을 열자 복도였다. 오른쪽은 꽃 그림 액자가 걸린 막다른 벽이었다. 왼쪽을 향해 걷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복도를 빠져나가니 거실이었다.
“와, 예뻐!”
거실은 집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대편으로 금방 나온 복도와 똑같은 복도가 있었으니까. 거기에도 방문이 두 개 있었다. 거실에는 아늑해 보이는 소파 세트와 웅장한 벽난로가 있고 정면에 천장까지 통으로 이어진 격자 창문 너머로 둥근 테라스가 시선을 끌었다. 묘한 거실이었다. 꼭 그림책에 나오는 집 안 풍경 같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창밖 풍경이 끝내줬다. 분명 지금은 아침인데 보름달이 떠 있었다. 달 아래 월계수 나뭇가지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테라스 지붕 위로 근사한 그늘을 만들었다. 뾰족한 이파리 사이로 시야에 채 잡히지도 않을 만큼 거대한 달의 일부가 보였다.
“우와….”
그 기묘한 풍경이 내게는 조금도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근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이 퍼뜩 나서 계단으로 향했다. 거실 맞은편으로 이어진 공간에는 주방과 세탁실, 다용도실, 욕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층계참에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쌍둥이처럼 닮은 얼룩 고양이였다.
“우와, 귀요미!”
나는 고양이를 무척 좋아한다. 이모네 집 마당에도 가끔씩 도둑고양이가 숨어들어올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내 배도 못 채우는 주제에 뭐든 줄 게 없을까 주방을 뒤지고는 했다.
그래도 이렇게 어린 고양이들을 보는 건 처음이라 어느새 쪼그리고 앉아 또 넋을 잃고 말았다.
“네 새끼들이야?”
귀머거리에게 물어본 것인데 녀석은 흥미 없다는 듯 한껏 우아한 태도로 계단 난간 위를 거닐었다.
나는 미끄럼 장난을 치는 귀머거리를 내버려 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왠지 긴장됐다. 새 옷을 입은 나를 보면 루나가 뭐라고 할지도 궁금했다.
계단 아래에는 신발장이 있었다. 나에게 맞는 신발은 없을 줄 알았는데 딱 내 발 사이즈의 운동화가 있었다. 설마 운동화까지 준비해놓은 것일까? 새 운동화까지 장착하고 나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모락모락 샘솟았다.
‘직원 전용’이라는 팻말이 붙은 문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그가 있었다. 하늘색 줄무늬의 하얀 블라우스, 그린 민트 빛깔의 앞치마, 눈부신 금발에 꽃처럼 하얀 얼굴.
그런데 문제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주시하는 이가 나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체 이건 뭔가, 이곳은….
“진짜 커피숍이잖아.”
그렇다. 그곳은 진짜 커피숍이었다.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커피숍.
엄마와 서울에 살 때 종종 보았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창밖에 거인 달이 떠 있지도 않고, 바람산 자락이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바삐 걷는 행인들이 창밖을 스쳐 지나가고, 출근길 자동차 행렬과 건너편 건물들이 마주 보일 뿐이었다.
마침 루나가 나를 발견했다. 손님들을 향해 있던 산뜻한 미소는 나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나를 보자 저걸 어떡하지? 하는 얼굴로 잠시 보다가 마지못한 것이 분명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이리 와.
다리가 조금 아파서 절뚝거릴 뻔했지만, 자칫 그가 나를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볼까 봐 허리를 꼿꼿이 펴고 걷느라 진땀이 났다.
어제 샌드위치를 먹었던 그 카운터 안은 상당히 넓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내 키로는 카운터 너머가 보이지도 않았다. 슬쩍 자존심이 상했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한껏, 그야말로 한-껏 몸을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이제 보니 은빛 눈동자 깊숙한 곳에 푸른 동공이 들어앉아 있었다. 종일 그것만 쳐다보고 있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바쁜 시간이니까 필립이랑 놀고 있어. 날씨가 좋으니까 뒷마당을 구경해도 좋을 거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험악해졌던 것 같다. 어린애 다루듯 하는 그의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손님이 아니라 알바생인데요.”
그렇게 답하자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도 이 얼굴을 본 것 같은데, 어쩐지 이 표정은… 음, 날개 없는 선풍기 같은 표정이랄까. 약간 민짜 같은?
설마 웃음을 참는 건 아닐 테고, 대체 무슨 뜻의 얼굴인지 도통 감을 못 잡겠다.
“어제도 말했잖아.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니까. 안 그럼 법에 걸려.”
“경찰이 잡으러 오면 날아가면 되잖아요. 루나커피 통째로.”
“꼬마야.”
“은별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은별아. 떼쓰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야.”
나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그걸 떼를 쓴다고 생각하다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섭섭했다.
그래도 뭐,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백번 양보해 ‘제안’을 해보기로 했다.
“간단한 거라도 시켜주시면 안 돼요?”
“일손이 부족해 보여서 그래? 좀 이따 알바생 올 거야.”
“알바생이, 와요?”
“응. 두 명이나 온단다.”
와. 알바생이 두 명이나 오는 것도 왠지 기분 나쁘지만, 이 말투 뭐지? 온단다? 지금 옛날얘기 읽어주심?
그때 머리 위 먼 곳에서 청아한 종소리가 울리더니, 그보다 더 청아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루나가 굽혔던 몸을 반짝 세우고 높고 높은 카운터 너머 어딘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요, 희상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