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배가 고파요.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아이가 그 말을 했을 때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어요.
동시에 정신이 번쩍 났어요. 제가 무슨 짓을 하려던 걸까요?
아이를 그 지옥에 다시 데려다 놓다니. 저 참혹한 모습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모른척하려 했다니. 저 역시 그 짐승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따….”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 망설이고 있네요. 지금까지 저는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따라와.”
그 말에 아이는 정말 행복하게 웃었어요.
파렴치한 제 행동을 그 말 한마디로 다 용서해주겠다는 듯이 방긋방긋 웃었어요. 그 천진난만한 얼굴에 저는 할 말을 잃고 말았어요.
“내 이름은 정은별이에요.”
게다가 아이는 이미 네이밍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잔뜩 찌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눈동자가 너무나 명민하게 빛났어요. 하지만 아무리 영리해도 지구인인 어린아이가 이름의 의미까지 알고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 지구에는 네이밍에 대한 사례가 없는데 말이죠.
아무튼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저와의 문제는 차치하고, 배가 고픈 아이를 모르는 척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우와!”
아이의 손을 잡고 루나커피 앞마당으로 순간이동을 했더니 아이가 깜짝 놀라네요.
가게로 들어온 저는 서둘러 카운터 주방으로 들어갔어요. 아이가 가게 한복판에 서서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동안 저는 스티머로 우유를 끓이고,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꺼내고 양송이 수프를 데웠어요.
“이리 와서 좀 먹어.”
아이는 뭔가 어설픈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높은 바 의자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어요. 의자가 아이에게는 너무 높은 거였죠. 저는 카운터 밖으로 뛰어나가 아이를 들어 올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엇! 괜찮아요!”
아이가 소리를 지르기에 깜짝 놀랐지 뭐예요.
“응? 뭐가?”
“혼자 앉을 수 있어요.”
“응…? 그래.”
아이는 혼자서 굉장히 힘들게 바 의자에 올라앉았어요. 혹시 아이 취급받는 게 싫은 걸까요? 쳇, 눈곱만한 게.
아무튼 존중하기로 하고.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어서 먹어.”
아이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쓰윽 보고는 무뚝뚝하게 말했어요.
“그럼, 조금 먹어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나머지도 벌컥거리며 원샷해 버렸어요.
아이는 곁눈질로 제 눈치를 흘긋 보고는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어요. 음식이 들어가자 아이의 뱃속에서 잠들어있던 개구리가 일제히 깨어나 개골거렸어요.
좀 전의 무뚝뚝한 태도와는 딴판으로 와구와구 샌드위치를 먹는데, 얼마나 굶주렸으면 두 입으로 끝장났을 정도였어요.
저는 아이가 수프를 후룩거릴 동안 우유를 더 채워주고, 머핀을 꺼내 오븐 토스터에 살짝 데워 햄과 치즈를 올려 내놓았어요. 아이는 그것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어요.
“컵케이크도 있는데 먹을래?”
아이는 미약하게 트림을 하고는 고개를 살살 저었어요.
“배부릅니다. 잘 먹었습니다.”
명백히 어른 흉내를 내는 말투였어요.
아이가 갑자기 거드름을 피우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 귀여웠어요. 하지만 마냥 귀여워하기엔 엉망진창인 얼굴과 몸 상태가 걱정되었죠.
“아프지 않아?”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어. 씻고 상태를 좀 봐야겠다. 올라가서 따뜻한 물로 목욕부터 하자.”
“오, 오늘은 제가 혼자 씻을 수 있습니다. 첫날은 본의 아니게 실례했습니다만.”
저는 잠시 아이의 표정을 살폈어요. 리딩은 하지 않았답니다. 어제는 상황이 다급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까요.
게다가 이 아이는 그런 일을 당하면 굉장히 싫어할 것처럼 보였어요.
거듭 말하지만, 상대가 싫어하건 좋아하건 저는 타인의 마음을 리딩하는 것 자체를 찜찜해하는 사람이랍니다.
“그래. 그럼 저기 안쪽 복도 보이지? 복도 끝 계단으로 올라가서 첫 번째 문이 욕실이야. 거길 사용하도록 해.”
“저기요.”
“응?”
“루나 블랑슈. 그게 당신 이름이죠?”
“당신…?”
당신이라는 호칭 때문에 아이가 건방지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뭣보다 아이의 부은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으니까요. 사실 이 상태로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있는 것만 해도 기특한 일이었어요.
어쨌거나 올 것이 왔으니 조심해야겠어요. 아이가 이름에 대해 물어본다면 의연하게 대꾸해야 해요. 네이밍의 의미를 아이가 알 리 없을 테지만 몹시 궁금하겠죠. 처음부터 제 이름을 물어봤던 아이니 온갖 상상을 다 해봤을 거예요.
그럴듯한 답을 해줘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솔직히 말해 저는 거짓말에 소질이 별로 없답니다.
“내 이름은 우월영이야.”
“한국인처럼 안 생겼는데요.”
“머리는 염색했어. 눈은 컬러렌즈고.”
“거짓말.”
저는 여전히 아이의 상태에 가슴이 아프답니다. 다만, 아이는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저 불쌍하기만 한 아이는 아닌 것 같아요.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왜 거짓말이라는 거야?”
“한국인처럼 안 생겼다니까요.”
“호, 혼혈이야. 아무튼 내 이름은 우월영이니까 그렇게 알면 돼.”
“그럼 루나커피라는 카페 이름은 누가 지었어요?”
“우리 할머니가.”
“할머니 이름… 아니, 성…함이 뭔데요?”
“바…악, 바라.”
“박바라?”
“응.”
“특이한 이름이네요.”
“그렇지. 그럼 이제 올라가서….”
“제 어깨 뒤에 루나 블랑슈라는 이름이 있어요. 어제 보셨죠?”
“아니.”
“거짓말.”
“너 몇 살이야?”
“열두 살이요.”
“어른이 얘기하면 믿어야지. 사사건건 거짓말이라고 하는 건 아이의 태도로서 바람직하지….”
“원래 어른들은 거짓말을 잘하거든요.”
저는 그 말에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어제 리딩으로 제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 아이에게 어른이란 깡패나 마찬가지였어요. 거짓말은 물론이고 아이에게 폭언, 심지어 폭행을 일삼는 인간쓰레기들.
또한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저는 조금 우울해져서 시선을 내리고 말았어요. 어른으로서 아이를 보기가 미안해졌거든요.
아이는 팔짱을 끼고는 키들거렸어요. 사실 아이 얼굴이 하도 찌그러져서 무슨 표정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요. 다만 아이의 부은 입술 새로 피식피식 소리가 흘러나오네요.
“당신 정체가 뭐예요?”
또 당신이라니, 이번에는 정말로 기분이 상했어요. 눈곱만한 게 아까부터….
“꼬마야, 당신이라는 호칭은 좀 거슬리는구나. 아저씨라고 부를래?”
“헐, 아저씨라는 호칭이 좋아요?”
“썩 좋은 건 아니지만….”
아이는 부어터진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를 살살 굴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어요.
“좋아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니까, 백번 양보해서 형이라고 부를게요.”
“내가 어디를 봐서 네 형….”
“어제 저 구해주시고, 오늘도 저 구해주시고, 이렇게 먹을 것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야 제 마음이 다시 밝아졌어요. 그럼, 그래야지. 착한 어린이는 그렇게….
“루나 블랑슈 님.”
“응?”
아이고…. 이 어린이는 탐정일까요? 무심결에 대답해버리고 말았어요.
좀 전의 피식거리는 소리가 또 아이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어요. 어쩔 수 없네요. 어차피 이름을 오래 숨길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 좋아. 내 이름은 루나 블랑슈야.”
“왜 감추려고 했어요?”
“그, 그게 아니라, 한국 이름이 우월영인 것도 사실이야.”
“그럼 사는 곳도 한국인 거죠?”
“응.”
아이는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드는지 이번에는 정말로 환하게 웃었어요. 무심코 나도 웃을 뻔했는데….
“알바 자리 하나 주세요.”
“응?”
“이왕 이것저것 주신 김에 알바 자리도 하나 달라고요.”
“헐….”
이거야, 물에 빠진 사람….
“한국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란다는 말이 있거든요.”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왕 구해주셨으니 주세요. 알바 자리도.”
제 입이 떡 벌어졌어요.
이 발칙한 꼬마 녀석을, 제가 왜 불쌍하다고 여겼을까요?
아니, 어제 리딩할 때 어째서 이런 녀석이라는 걸 알아내지 못했을까요?
아니, 아니에요. 저는 알고 있었어요.
이 아이는 원래 이런 녀석은 아니었어요. 거짓말이나 일삼은 어른들이 이렇게 만든 거죠. 아이는 악당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에서 조그만 몸으로 살아남기 위해 영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겠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저는 또 우울해져서 시선을 미끄러뜨리고 말았어요.
사실 그건 제 약점이에요. 필립은 늘 제가 똑똑한 척하지만 마음이 형편없이 약하다고 놀려댄답니다.
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영악한 요 꼬마 녀석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왔어요.
“평범한 커피숍은 아니잖아요?”
이번에는 진짜 어른이 조그맣게 변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로 아이가 가게 안을 이리저리 휘둘러봤어요. 무슨 감별사 같은 태도로요.
“비밀이 많은 것 같은데, 내가 어디 가서 발설이라도 하면 곤란하신 거 맞죠?”
순간 저는 약간 화가 났어요.
“사람을 협박하는 건 좋은 어린이의 자세가….”
“어른들은 협박이 일상이던데요.”
저는 또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고 말았어요.
이 아이가 아이만 아니면 이렇게 자주 말문이 막히지는 않을 텐데, 아니, 이 아이와 네임으로 얽히지만 않았어도 저는 아이가 협박하기 전에 뭐든 다 해줬을 텐데요.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또 시선을 피하고 말았어요. 아이가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다 제 탓인 것만 같았거든요.
그런 저를 지켜보던 아이는 꼬마 악마처럼 킬킬거렸어요.
“에이, 일손 필요하시잖아요. 나 일 잘해요.”
“넌 너무 어려.”
“상관없어요.”
“아니, 한국에서는 미성년자가 이런 데서 일하려면 부모나 친척의 동의서가 필요해.”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싸아 사라졌어요. 웬일인지 아이는 조금 동요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게 그렇게 충격적인 말인가? 저는 좀 의아했어요.
표정이 굳은 것도 모자라, 급기야 아이는 의자에서 뛰어내리다가 와당탕 넘어지고 말았어요.
“어엇!”
서둘러 카운터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계단에서 엿듣고 있었는지 필립이 야옹거리며 뛰어왔어요. 당연히 그의 작은 몸은 이런 상황에 별 도움이 되지 않지요.
저는 아이를 부축해 일으켰어요. 이마에 혹이 하나 생긴 것도 같았는데 워낙 다친 데가 많아서 방금 생긴 혹인지 아닌지는 식별해내기 어려웠어요.
“왜 그래?”
“준이…!”
“준이?”
“내 동생요.”
그 아이가 누군지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이 아이가 뭘 걱정하는지도 알았어요.
저는 창 너머로 플럼버의 달을 내다보았어요. 좌표를 구분하던 제 눈이 어느 공간에 닿았어요.
“네 동생은 무사할 거야.”
“그걸 어떻게 아세요?”
좌표를 비춰주는 달은 아이의 사촌 동생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빽빽 울어대는 장면을 보여주었어요. 그러니 최소한 그 아이가 물에 잠겨 죽은 것은 아닐 거예요.
“나를 믿어. 무사해.”
아이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저는 보았어요.
“역시 인간이 아닌 거죠?”
“차차 얘기해줄게. 일단 올라가서 씻어. 너 치료해야 해.”
“준이 정말 무사해요?”
“그래.”
그제야 아이는 눈에서 힘을 풀었어요. 그리고는 제 표정을 슬슬 살피더니 발치를 알짱거리는 필립을 슬쩍 내려다봤어요.
“예쁜 고양이네요.”
제 뺨이 살짝 경련을 일으켰어요. 웃음을 참는 것은 아니랍니다.
다만 필립은 예쁘다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예쁜 고양이’라는 말을 들으면 발광하죠.
“캬오옹-!”
“귀여워. 앞으로 얘 밥은 제가 줄게요.”
“야옹- (올챙이 주제에!)”
“어, 대답한다. 날 좋아하나 봐요.”
“야옹! (웃기고 있네.)”
저는 터지려는 웃음을 꿀꺽 삼키고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손을 뻗었어요. 아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발딱 일어났어요.
“혼자 일어날 수 있어요.”
아이가 저를 한 번 더 올려다보더니 계단으로 향했어요. 그렇게 몇 계단 올라가더니 갑자기 멈춰서 저를 돌아보았어요.
여전히 퉁퉁 부은 눈꺼풀 때문에 눈 모양이 어떤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눈빛은 훤히 읽을 수 있었어요.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의심이었어요. 그것을 안 순간 저는 또 우울해졌어요. 정말 아무도 믿지 못하는 아이구나, 싶어서요.
“오늘 밤에는 나 내다 버리지 않을 거죠?”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안심한 듯 방긋 웃고는 올라갔어요.
제 눈에서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그야말로 철철 쏟아졌어요.
“야옹! 루나, 우냐?”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아빠.”
“야옹, 용서해줄게.”
“아니, 아빠 말고 저 아이한테요. 잠시나마 저런 아이를 버려두고 올 생각을 했다니 저도 악마가 된 걸까요?”
“응.”
“좀 진지해지면 안 돼요?”
“왜?”
“흐윽, 흑!”
“어우, 시끄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