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로저의 말에 의하면, 그날은 좌표가 뜨는 날이었어요.
월식은 아니지만,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라 좌표 이동이 가능할 거라는 게 로저의 설명이었지요. 과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하니 꼭 월식 때처럼 달은 자취를 감췄어요. 달이 가려져야 하는 이유가 있답니다. 지구의 달이 너무 밝으면 플럼버의 달을 비출 때 혼선이 올 수 있거든요.
우리가 좌표 이동, 전문용어로 도킹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시간은 자정이었어요. 그즈음 좌표 구간으로 이동해 대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날 우리가 지정하려던 좌표 구간은 ‘금성시’라는 소도시였어요. 원래 좌표 구간은 산지나 구릉 부근인 게 대부분인데, 이번에도 그런 곳이었지요. 우리는 한 시간 전쯤 좌표 근처로 루나커피를 옮겨놓고 도킹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야말로 장대비였어요. 원래도 굵은 비였는데 점점 더 심해졌고요. 천둥 번개도 심심찮게 울려 여러모로 좋은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었죠.
번개는 우리에게 필요한 전파를 충분히 공급해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전파가 충분해지면 좌표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어요. 표류할 확률이 줄어드는 거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눈물이 나올 것처럼 기쁜 밤이었어요.
루나커피에는 로저도 와있었어요. 그는 특별히 가져가야 할 집이 없고 몸뚱이만 이동하면 되었거든요. 조건만 맞는다면 그 혼자서도 좌표는 맞출 수 있지만, 그가 우리와 함께 여행하고 싶어 했어요.
다른 회원들도 루나커피로 오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파티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번에도 말썽꾸러기 아빠, 아니 고양이 필립 때문에 사달이 일어난 거였어요. 쓸데없이 귀만 밝아가지고. 무슨 소리가 들린다며 갑자기 계단을 뛰어 올라가더니 가게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빽 질러대지 않겠어요?
“아기다! 아기!”
저는 좀 심드렁해서 뭉그적거리며 계단을 올라갔어요.
“아기가 뭘 어쨌다는 거예요?”
우리 가게 구조에 대해 잠시 말씀드려야겠네요. 1층은 영업점이고요, 2층은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이랍니다.
건물 뒤쪽에는 마당이 있어요. 원래대로면 가게 앞쪽에도 마당이 있어야 하지만 서울 하늬로에서의 루나커피는 앞에 마당을 둘 만한 입지가 못 된답니다.
원래 앞마당에는 거대한 월계수와 달맞이꽃 화단이 있고, 손님들이 앉아서 일광욕을 하기에 좋은 잔디밭도 있었어요.
지금 그 앞마당은 어쨌냐고요? 월계수와 달맞이꽃 화단은 뒷마당으로 옮겨갔고, 잔디밭은 보도블록으로 살짝 감춰뒀답니다.
가끔 좌표가 열려 루나커피가 이동할 때면 잔디밭이 스르르 올라오고 월계수와 달맞이꽃 화단도 슬금슬금 앞으로 나옵니다.
참고로, 플럼버에서 태어난 모든 생명은 회귀본능이 대단해서 어떻게든 자신이 태어난 위치로 복귀하려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에 따른 전설도 아주 많답니다.
뒷마당에는 키 작은 관목으로 꾸며진 작은 정원이 있어요. 담장 근처에는 각종 채소를 키우는 텃밭이 있고, 식구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정자가 하나 있어요. 플럼버에서는 흔한 구조의 집이에요. 여기까지라면 지구에서도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겠죠.
다만 특별한 것이 딱 하나 있는데, 테라스 방향에 플럼버의 달이 항상 떠 있어요.
물론 그것은 정말로 플럼버의 달은 아니랍니다. 거울에 비친 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할까요.
플럼버인은 나침반만 있으면 대부분 좌표를 열 수 있어요. 수억만 광년의 거리를 역으로 계산해 루나커피의 테라스 창문에 설치해놓은 반사경에 플럼버 달의 상이 맺히게끔 맞춰놓는 거예요.
그러다가 지구인에게 들키면 어쩔 거냐고요? 어차피 3차원만 인식하는 지구인의 눈에는 좌표가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 좌표에 비친 달도 보이지 않지요.
1층 영업점은 일반적인 카페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상당히 현대적인 시설이랍니다. 알다시피 우리 플럼버 행성은 고도로 문명화된….
아니, 그런데 지금 가게 구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죠. 어디까지 말하다 말았더라…?
“엇! 얘들아,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오늘 밤에는 텐트 안에 들어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어느새 꼬물꼬물 기어 나와 돌아다니고 있네요.
누가 꼬물거리냐고요?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제 동생들이랍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복동생들이죠.
모두 네 마리, 이름은 나이순대로 나나, 뭉크, 베리, 미오예요. 필립을 쏙 빼닮아 온통 하얀 미오만 빼고 모두 암청색의 고등어 얼룩 고양이예요.
아, 또 얘기가 샛길로 샜네요.
“야옹! 루나, 빨리 오지 못해?”
“필립! 여기 아빠 아기들은 안 보이세요? 이동 중에 나가면 위험하잖아요. 애들 밖으로 나가지 않게 창문을 닫아야겠어요.”
“야옹, 저기를 봐.”
필립은 테라스 난간 위에 올라앉아 앞발로 정면을 가리켰어요.
황량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어요. 야트막한 산이 길게 이어져 지역 전체를 감싸고 있는 소도시였어요. 그 사이에 주택과 농지, 약간의 상업 시설이 뒤섞여 있었어요. 그날 밤 그것들은 모두 폭우가 만든 호수로 변했지만요.
세상이 암흑이었어요. 루나커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가끔씩 떨어지는 번갯불만이 간간이 사물의 형태를 가늠하게 해줄 뿐이었죠.
그 가녀린 빛과 짙은 어둠 속에, 이 세상 단 하나의 생명체인 듯 그 아이가 서 있었어요.
“야옹, 저 애 보이지?”
이상한 일이었어요. 제가 그 아이를 발견한 순간 연약하게 떠돌던 빛의 찌꺼기들이 반딧불 이처럼 그 아이를 향해 몰려들었어요. 마치 그 아이를 제게 보여주려는 듯이, 조명을 비추듯이 말이에요.
우악스럽게 쏟아지는 빗줄기마저 잠시 속력을 줄이는 것 같았어요. 느려진 빗발 사이를 빛의 입자들이 하늘하늘 넘나들며 그 아이의 주위를 날아다녔죠.
고작해야 200살, 그러니까 지구 나이로 열 살이 좀 넘었을 것 같은 꼬마였어요. 하도 작고 비쩍 말라서 여덟 살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려 보였지만요.
허리까지 물에 잠겨있었는데도 아이는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홍수가 났다는 사실을 몰랐는지도 몰라요. 얼빠진 표정이 그렇게 말해줬어요.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아이는 루나커피를 똑바로 보고 있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때 루나커피는 좌표 구간에 있었는데 말이죠. 말했듯이 지구인의 눈에는 좌표 구간 안에 들어간 땅은 보이지 않거든요.
겉으로 보기에 플럼버인과 지구인은 그다지 차이가 없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답니다. 일단 혈액과 체내 단백질, 신경세포의 구조나 성분이 달라요. 당연히 시신경에도 극명한 차이가 있어요.
나중에 로저가 말한 바에 따르면 지구인 중에도 가끔 희귀한 인종이 있다고 해요. 어쩌면 그 아이도 그런 인종 중 하나일 거라고 했고,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지요.
어쨌거나 저는 그 혼돈 속에 어린아이를 내버려 둘 만큼 매정한 사람은 못 되어요. 그러나 말했듯이, 그날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날이었어요. 그날을 놓치면 또 기약 없이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거죠.
그래서였어요. 그토록 절박해 보이는 아이를 외면해 버릴까, 잠깐이지만 망설인 이유는요.
제가 그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아이가 비틀거렸고, 필립이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쓰러진닷!”
“깜짝이야…!”
그날따라 대체 왜 안 떨던 오지랖을 떨고 난리였는지 모르겠어요.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 아니 고양이 같으니.
“야옹! 저 아기 저러다 죽을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아이는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보였어요. 얼굴이 퉁퉁 부어서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죠.
게다가 걸치고 있는 누더기에는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 선연했고, 비에 젖어 반투명해진 티셔츠 아래로 해골처럼 마른 몸 여기저기에 시퍼렇게 맺힌 멍 자국이 엿보였어요.
걸음걸이는 지켜보기가 힘들 정도로 아슬아슬했지만, 불굴의 정신이랄까요. 아이는 이를 악물고 앞을 향해 걸었어요. 정확히는 루나커피를 향해서였죠.
이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얼굴과 몸의 상처는 더 참혹하게 제 눈길을 끌었어요. 그걸 보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고 말았죠. 그때만 해도 저는 이 푸른 행성에 잔혹한 생명체들이 우글거린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어요.
어느새 저는 앞마당에 서 있었어요. 그때 루나커피는 좌표 안에 들어와 있었기에 본연의 모양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지요.
지구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상태로 자기부양을 하고 있으니, 폭우 속에 만개한 달맞이꽃과 큼지막한 보름달을 포함해 루나커피의 모든 것이 아이의 눈에 얼마나 기이하게 보일까요.
그때 낌새를 알아차린 로저가 카페에서 황급히 뛰어나와 저를 말렸어요.
“왜 그래, 루나? 지금 여기서 나가면 안 돼.”
“저 아이를 데려와야 해요.”
“아니아니, 저 아이를 여기에 들여도 안 돼. 알잖아?”
저는 잠시 망설였어요. 플럼버의 그리운 광경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어요.
제가 고민하자 불안해진 로저는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어요. 저도 고개를 저었어요.
“지금 데려오지 않으면 저 아이는 오늘 밤 안으로 죽을 거예요.”
로저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지만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어요. 그도 모진 사람은 못 되거든요.
저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어요. 아, 우리 플럼버인들은 짧은 거리라면 별 장비 없이도 순간이동이 가능하답니다.
눈앞에 나타난 저를 아이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쳐다봤어요. 조그만 턱이 온통 떨리는 것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어요.
어떻게 이렇게 작은 아이를 이렇게까지 때릴 수가 있을까요? 그들은 짐승일까요?
아니, 짐승은 이유 없이 생명체를 공격하지 않아요. 짐승들이 공격성을 드러내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지요. 배가 고프거나 위협을 느꼈을 때. 그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혹은 이유 없는 적대감으로 같은 종족을 괴롭히는 것은 인간뿐이지요.
플럼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랍니다. 플럼버에도 범죄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과실치사나 상해죄 따위에 국한되어 있어요. 플럼버에서 범죄는 실수와 비슷한 용어예요. 즉, 남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실수한 경우가 대부분이랍니다.
아이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었을 때 저는 그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뜻밖의 질문을 했어요.
“천사님… 루나…세요?”
그 순간 번개가 한바탕 하늘을 찢었고, 부서진 불꽃이 검은 호수 위로 쏟아졌어요. 저는 그 불꽃이 제 어깨를 강타한 줄 알았어요. 네임이 있는 그곳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거든요.
그건 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어째서 그곳만 아픈 것인지, 그 순간의 저에게는 떠오르는 정답이 없었어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이 내게 뭔가를 알려주었어요.
“설마…?”
‘그것’일까요?
앞서도 말했지만,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가끔 얼토당토않은 상대의 이름이 몸에 새겨지기도 한다고 해요. 말하자면 이미 다른 이와 결혼한 사람이라든가, 혹은 종교적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신부님이라든가….
아이는 더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어요. 저는 재빨리 아이를 안아 들었죠. 그리고 루나커피 이층으로 올라와 벽난로가 있는 거실 소파에 아이를 눕혔어요. 로저와 필립, 새끼고양이들까지 따라와 몰려들었어요.
“로저, 서두르세요. 회원들이 움직이기 전에 연락을 취해주세요. 그리고 로저도 어서 다른 회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도킹하도록 하세요. 이 동네엔 폐가가 많으니까 장소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로저는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가 사라진 후 저는 서둘러 아이를 데리고 욕실로 향했어요. 필립이 눈치 없는 척하고 따라붙었어요.
“아빠. 따라오지 말고 애들 좀 지키세요.”
“야옹, 이미 창문 닫았다.”
“그래도 따라오지 마세요.”
“야옹, 안 데려오려고 할 때는 언제고 애를 숨기냐?”
“숨기는 게 아니라 씻기려는 거예요.”
“야옹, 나도 볼래.”
“보, 보기는 뭘 봐요?”
“야옹!”
저는 욕실 문을 쾅 닫고 아예 잠가버렸어요. 야옹거리며 문을 긁는 소리가 났지만 이내 조용해졌어요.
아이를 욕조에 눕히고는 조심스럽게 옷을 벗겼는데, 참혹할 만큼 상처가 많았어요. 짐작했던 것보다 더 많았죠. 또 한 번 분노가 차오르고 가슴이 미어졌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어요.
저는 아이의 몸을 살폈어요. 오래 찾을 필요는 없었어요. 정확히 저와 쌍을 이루는 곳, 왼쪽 어깻죽지에 ‘그것’이 있었으니까요. 보란 듯이, 작지만 또렷한 글씨가.
Luna Blanc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