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 이름이 내 어깨에 나타난 후 나는 조금이나마 행복해졌다.
그 후 나는 읍내 공공도서관에 가서 또 한 번 검색해보았다.
⌕ 어깨 뒤에 이름이 나타났어요
⌕ 몸에 이름
⌕ 갑자기 생겨난 이름
⌕ 글씨가 몸에
결과는 엉뚱했다.
⌕ 어깨 뒤에 이름이 나타났어요
└ 어깨의 이름
⌕ 몸에 이름
└ 신체 부위의 명칭
⌕ 갑자기 생겨난 이름
└ 갑툭튀
⌕ 글씨가 몸에
└ 유성펜 지우개
관련된 정보를 찾을 수 없으니 상상은 무한정 가지를 뻗어 나갔다.
그러나 온갖 가설을 세우는 와중에도 과연 그게 진짜 사람 이름인지, 사람 이름이라 해도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문도 품지 않았다.
루나 블랑슈는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몸에 그 이름이 새겨질 이유가 없다고 단정했다.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나 블랑슈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보다 어째서 그 이름이 내 몸에 나타났는지가 일단 중요했다.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어떤 종류의 운명인지는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이름의 주인인 그 혹은 그녀는 답을 알고 있을까?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내 운명의 주인이니 말이다.
어쩌면 요술쟁이나 마법사일지 몰라. 자기가 나를 찜했으니 아무도 건들지 말라는 뜻으로 자기 이름을 새겨놓은 거야.
그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종의 징표처럼 루나가 마법을 써서 내 몸에 자신의 이름을 몰래 새겨 넣고, 일정 시간이 되면 겉으로 나타나도록 한 것이 아닐까?
예전에 TV에서 본 영화 생각이 났다. 중간에 이모가 오는 바람에 다 못 봤지만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자기 몸에 문신을 새겨 넣는 영화였다.
한 몸과 다름없는 ‘나의 루나’가 자기 이름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특수마법을 써서 내 등에 새겨 넣었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우리는 열두 살에 슬픈 이별을 한 것이다.
⌈루나가 말했다.
‘은별, 나는 틀렸어. 이제 죽을 거야.’
‘루나,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죽는다.’
루나가 은별의 손을 잡았다.
‘은별. 넌 다시 태어날 거고, 열두 살이 되면 네 어깨에 내 이름이 나타날 거야.’
‘진짜?’
‘응. 그 이름이 나타나면 나를 찾으러 와.’
‘어디로?’
‘그건 나도 잘알못.’
‘그럼 루나 네가 와.’
‘뭐임?’
‘네 어깨에도 내 이름이 나타날 거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다.’
‘안녕, 루나.’
‘은별. 다시 태어나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나야말로.’
루나가 픽 쓰러졌다. 은별도 픽 쓰러졌다.
둘은 이루어질 수 없는, 열정적이고 지독하고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에 빠진, 굉장히 슬픈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비극적이고 아름다우나 괴롭고 힘겹고 피곤한….
음, 그렇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연인이었다.⌋
“대박!”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다가 무심코 소리를 내지르고는 입을 턱 막았다. 장소가 도서관인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벌렁거렸다.
상상이지만 너무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 생각대로 연인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루나’라는 이름만 중얼거려도 온몸이 화끈거렸다.
동시에 그 혹은 그녀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미칠 것처럼 안달이 났다. 그를 만나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언제쯤 그가 나타나려나? 아니면 나를 기다리고 있나? 내가 그에게 갈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그래! 어쩌면 테스트인지도 몰라. 게임에 나오는 퀘스트 같은 것.
루나 블랑슈를 찾아라! 어떤가, 무슨 영화 제목 같지 않은가?
그런데 도대체 이 시골구석에서 어떻게 루나 블랑슈를 찾아내지? 나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았다.
경찰서로 달려가는 건 어떨까? 루나 블랑슈라는 사람을 찾아주세요. 라고 말하면, 경찰이 순순히 찾아줄까?
저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열두 살 남자애가, 그것도 거지꼴로 나타나 한국 이름도 아닌 프랑스 이름을 대면서 이런 사람을 찾아달라면, 십중팔구 얻어터져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리고 내 상처를 발견하고는 이모를 체포하고, 나를 고아원으로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어쩌지? 어디 가서 루나 블랑슈라는 사람을 찾을까?
내 생각은 당연한 결과에 도달했다.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도망쳐야 해.”
누군가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그냥 직접 찾으러 떠나면 되는 거였다. 학교 가는 길에 그대로 도망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어른들은 나를 때리기만 할 뿐 제대로 도와주지도 않으니까.
물론 나도 인간이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거지 같은 집구석이지만 집은 집이었다. 이모와 이모부가 아무리 괴롭혀도, 집에는 비를 막아줄 지붕이 있고 몸을 눕힐 바닥도 있었다.
뉴스에 나오는 범죄 이야기도 떠올랐다. 노숙하다가 납치되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 팔려 가지는 않을까. 나보다 힘이 센 어른들도 무서운 일을 당하는데 하물며 나 같은 꼬마는 더더욱 나쁜 일에 이용당하지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나 결국 루나 블랑슈를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넘었다.
“그래! 이런 집구석에 갇혀있으면 루나 블랑슈가 나를 어떻게 찾아내겠어?”
이제 키도 부쩍 커졌으니, 잘만 하면 그를 찾을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마냥 어린애가 아니니까. 루나 블랑슈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몰라도 나는 분명히 뭔가 느꼈다. 딱 맞는 표현을 찾을 수는 없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보이지 않는 끈이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당장 수중에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돈 몇 푼이라도 훔쳐가지고 나갈 생각에 이제나저제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다.
준이 밥을 먹이고 재운 다음, 남은 밥을 물에 말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우유병이 어찌나 매력적으로 보이던지,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대고 말았다.
딱 한 모금만 마시자.
그런데 입을 채 대기도 전에 들키고 말았다. 이모부였다. 부엌으로 쿵쿵 걸어 들어온 그가 무자비한 주먹을 날렸다.
우유는 엎질러졌고, 나는 그 위에 엎어졌다. 이모부는 내 멱살을 잡아 구석방에 던졌다. 그 방은 곰팡이가 잔뜩 슬었고 못 쓰는 물건으로 가득한, 창고 같은 방이었다.
“안 돼! 문 열어! 씨발, 문 열라고!”
내 아우성에 문밖에서 이모부의 투덜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절대 내보내지 마. 제 부모 닮아서 도둑 새끼야.
그렇게 나는 그 방에 만 하루 동안 갇혀있었다. 왜 진작 도망치지 않았을까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있는데, 밖에서 준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준이는 내가 안 보이면 울었다. 그 때문에 학교에 못 갈 때가 있어서 미워한 적도 많았는데, 이번엔 도움이 되었다.
“그래, 준아! 더 울어, 더!”
이모가 아이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이는 더 악을 쓰고 울어댔다. 그래, 저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이모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이모를 힘껏 밀치고는 그대로 달려 나왔다. 대문을 박차고 나와 정신없이 뛰었다. 이모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어서야 속도를 늦췄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꼴은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원래도 넝마를 걸치고 다녀서 옷차림이 거지 같은 건 새로울 게 없었지만, 맞아서 부어터진 얼굴에 피딱지가 엉겨 붙고 한쪽 눈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작아진 지 오래라 뒤축을 꺾어 신던 운동화는 그나마도 신고 나오지 못해 맨발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샌가부터 비가 오고 있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 머리통이 따가울 정도였다.
그 마을은 외진 산골짜기 변두리로, 바람산이라 불리는 반원형의 산이 농가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주위로 보이는 건 논과 산뿐이었다.
물이 차오른 논두렁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발이 쑥 빠져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한참 허우적거린 직후였다.
‘저게 뭐야…?’
하늘에 ‘그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억수 같은 비 때문에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마 위로 빗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세수하듯 얼굴 전체를 훑어 빗물을 걷어내려 해보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헛것인가?
흠씬 처맞고 만 하루를 굶은 상태로 골방에 갇혀있다가, 있는 힘껏 달리고 비까지 맞았다. 헛것을 봐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면 나는 이미 이 논두렁에 널브러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기절한 상태로 꿈을 꾸는 것이다.
그 생각에 반기를 드는 것처럼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뭔가 잔뜩 박힌 게 느껴졌다. 갑자기 처맞은 부분들이 아파 왔다. 생생한 고통이었다. 동시에 한기도 몰려들었다. 모든 것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이건 절대 꿈이 아니야.
그래, 꿈이 아니구나. 너무나 꿈같은 현실이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이끌고 흙탕물을 첨벙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시도 ‘그것’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집이었다. 그림책 삽화처럼 예쁜 이층집.
지붕 위에는 보름달이 떠 있고, 앞마당에는 월계수가 있었다. 테라스에는 파라솔이 딸린 테이블이 있고, 그 앞에는 달맞이꽃이 만개한 화단이 있었다. 이 폭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 집은 조금도 젖지 않고 둥실 떠 있었다.
“둥실…?”
그랬다. 둥실둥실.
스푼으로 폭 떠낸 케이크처럼 그 집은 한 덩어리의 땅 위에 살포시 얹혀있었다.
그때 내 눈이 지붕 아래의 글씨를 발견했다. 뭐라고 써 있는지 읽어내기 어려워서 잠깐 집중한 후에야 그것이 간판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나커피… 1호점…?”
루나커피.
“루나…?”
그리고….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을까?
달맞이꽃이 만발한 화단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달빛 같은 머리카락에 새하얀 얼굴, 사슴 같은 목선을 가진 남자였다. 멀리서 봐도 자그마한 얼굴에 가느다란 몸 선을 가진 미인이었다.
환영인가…?
루나 블랑슈에 대한 생각만 하다가 급기야 환영을 보고 있는 걸까? 만약 환영이 아니라면 저 사람은 진짜 루나 블랑슈가 틀림없었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자 그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녹색 에이프런을 두르고 있었다. 환영이라면 앞치마까지 두르지는 않았겠지.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는 그를 주시하며 ‘루나커피 1호점’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다친 발은 감각조차 없어져 더 이상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몸에서 기력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쓰러질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때 눈앞에서 번개가 터졌다. 무심코 내지른 비명과 함께 무릎에서 힘이 풀렸다. 벼락을 맞은 듯 놀란 탓에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동시에 강한 꽃향기가 밀려들었다. 그게 달맞이꽃 향기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덜덜 떨리는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그제야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적어도 백 미터는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다가와 눈 깜짝할 사이 내 팔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졌다. 저런 집에 사는 남자라면 뭐든 할 수 있겠지. 비록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기는 했으나 역시나 루나는 보통 인간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보다 내가 놀란 것은 그의 얼굴 때문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그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평생, 그림책에서도 본 적 없었다.
눈부시도록 하얀 얼굴에 은빛 구슬과도 같은 눈동자, 고깔 같은 콧날에 자그마하고 도톰한 입술. 달맞이꽃이 사람으로 환생하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서 악의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은 많든 적든 나를 보는 얼굴에 악의를 드러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이렇게 선하고,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순수하고,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을까. 그를 본 순간 내 마음속에서 두려움이라는 것이 간곳없이 사라졌다. 느닷없이 헤어진 가족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남은 힘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루나커피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인지, 그 이름이 내 어깨에 새겨진 이름이 맞는지, 나를 찾으러 저 먼 달나라에서 온 것인지, 마음속에는 수십 가지 질문이 떠올라 찰랑거렸지만 기절하기 직전 겨우 한 가지 질문만 던질 수 있었다.
“천사님… 루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