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커피 2호점-1화 (1/103)

<1화>

열두 살은 그다지 어린 나이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열두 살에 이미 인생의 쓴맛을 다 봤던 것 같다.

나의 부모는 형편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빠는 툭하면 나를 때렸다. 엄마는 가끔 나를 때렸다. 아빠가 옆집 유부녀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을 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얼마 후 엄마가 낯선 남자를 데리고 왔다. 그 남자도 나를 때렸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은 으레 애들을 때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나를 이모네 집에 맡기고 그 남자와 태국으로 떠났다. 그때 엄마는 외할머니가 남긴 사망보험금을 그 남자의 사업자금에 털어 넣었는데, 몇 달 후 말아먹고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한다. 실업자가 된 남자는 엄마를 죽도록 패고는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훔쳐서 달아났단다. 아빠도 야반도주했는데 그 남자도 같은 짓을 저지른 셈이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다. 엄마는 어린 내가 아빠나 그 남자에게 두들겨 맞을 때 단 한 번도 그들을 말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덜 맞았다고 자기도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 엄마에게 버려졌다고 해서 슬플 리 없었다. 슬프기는커녕 조금이나마 희망을 더 품을 수 있게 됐던 것 같다. 이제 더는 맞을 일이 없을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이모와 이모부가 때렸다. 생각해보면 그게 사람들의 가장 더러운 본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 당하면 동정하거나 돕기보다는 함께 짓밟거나 경멸하는 심리 말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내 세계에는 없었다.

이모부는 태권도 사범이었다. 이모 내외는 읍내에서 태권도 학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나날이 원생이 줄어간다고 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둘 다 알코올에 찌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술로 해결되지 않는 울분을 힘없는 내게 풀었다.

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사촌 동생 준이가 태어났다. 나는 살기 위해 처맞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냈다. 준이의 보모 노릇을 하기 시작하자 매가 덜 날아왔다.

그래서 나는 또래 아이들이 엄마 손에 의지하며 걸어 다닐 때 준이를 업고 다녔다. 얼마 후에는 밥도 짓고 청소도 했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나는 더 바쁘게 살아야 했다. 집안일을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집안일을 제대로 해놓고 학교에 갔는데도 처맞을 때가 있었다. 내가 집안일을 도맡는 게 당연시되면서 더 이상 이 정도 쓸모로는 매를 줄일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도 성격이 좋은 놈은 아니라서, 그럴 때면 세상 다 끝났다 치고 아락바락 대들었다. 그렇게 대들면 당연히 더 심한 폭력이 돌아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날이 갈수록 나는 끔찍한 현실에 적응해 나갔다. 매 맞는 것에 적응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매를 맞아도 점점 울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내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에 대해 무감해질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이 지옥 같은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어깨 뒤쪽에 ‘그것’이 나타난 후부터였다.

그것.

내 인생은 ‘그것’이 나타난 이전과 이후로 나눠도 무방했다. ‘그것’이 내 몸에 나타난 후 나는 폭발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 갑작스럽게 성장했다.

물론 키나 체격이 폭발적으로 자랐다는 말은 아니다. 뭐랄까, 내적 성장? 대충 그런 뜻이다.

‘그것’이 생기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건 내 탓은 아니었다. 태어난 이후로 쭉 그런 집구석에서만 살아왔으니 다른 세상을 알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다른 세상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생겨났으나 명백히 외부에서 온 것이었다.

언젠가 나비 한 마리가 집안으로 날아든 적이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루를 닦고 있었다. 그 나비의 날개는 기억에 선명하게 남을 만큼 새파란 색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파란 날개를 가진 나비를 본 적이 없었다. 나비는 내 주위를 한번 맴돌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도 절실히 그 나비가 부러웠다. 저 나비는 갈 곳이 있는 모양이구나. 저렇게 파란 날개를 가졌으니 그게 어디든 날아갈 수 있겠지.

‘그것’이 내게 왔을 때 나는 그 나비를 떠올렸다. 내게도 그 나비처럼 파란 날개가 돋아난 기분이었다. 마침내 갈 곳이, 찾아야 할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기대라는 것이 나를 들뜨게 했다. 생전 처음이었다.

*

모처럼 목욕탕에 간 날이었다.

이모는 보름에 한 번씩 나와 준이를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나를 데려가는 이유는 당연히 준이를 씻길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이모는 제 새끼 씻기는 것도 귀찮아하는 사람이었다.

이모가 혼자 여탕에 들어가 속 편하게 씻는 동안 나는 숨도 못 쉴 만큼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모는 기다리는 것도 싫어해서, 자기가 다 씻고 나왔는데 나와 준이가 없으면 길길이 화를 냈다.

한 번은 늦었다고 종업원을 시켜 남탕에 들여보내서, 빨리 안 나오면 다시는 목욕탕에 안 데려온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나는 쌍X, 욕을 씹으며 열심히 씻었다. 집은 더운물이 잘 나오지 않아 겨울이면 거의 씻지를 못하는데, 그나마 목욕탕에도 못 오게 되면 온몸에 부스럼이 생길 것이다.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씨근덕거리며 목욕을 끝낸 후, 그동안 나를 기다리며 세숫대야 안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던 준이를 데리고 탈의실로 나왔다. 내 옷은 입지도 못하고 동생 먼저 입히느라 분주한 가운데 아저씨 한 분이 말을 걸었다.

“꼬마야. 혹시 누가 때렸니?”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몸에 그 상처들, 맞은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운동하다가 넘어져서 그래요.”

아저씨는 미심쩍게 나를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몸은 온통 시퍼런 멍과 상처투성이였다. 그런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건 그 아저씨뿐이 아니었다. 그날따라 목욕탕에는 손님이 많았다.

나는 불안해졌다. 사람들이 신고라도 하면 곤란했다. 이모네가 경찰에 잡혀가는 건 좋지만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모네 집이 지옥이라도 고아원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준이 옷을 다 입히고, 겨우 내 옷을 입으려고 캐비닛을 열었다. 그 캐비닛에는 조그만 거울이 달려 있었다. 셔츠를 머리 위로 뒤집어쓰는데 어깨 뒤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보석처럼 빛나는 느낌은 아니고 그 부분만 비닐코팅이 되어있는 것 같은, 대충 그런 반사광이었다. 등에는 늘 매질을 당한 상처가 있기에 처음에는 그것도 상처인 줄 알았다.

“점인가?”

점치고는 좀 길고, 뭔가 연속적인 객체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등 뒤로 손을 뻗어봤는데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흉터는 아니었다.

그때 좀 전에 말을 걸어온 아저씨가 거울 속에 비쳐 보였다. 이 이상 맨몸을 보여봐야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셔츠를 입었다. 그 아저씨는 내 꼴이 영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마침 들마루에 앉아있던 준이가 칭얼거렸다. 나는 얼른 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집에 돌아와 손거울 두 개로 등을 비춰보았다. 아무리 봐도 좀 기묘하게 생긴 점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점이 하루가 다르게 커진다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나는 거의 매일 그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뭘까 궁금하기도 했고 왠지 근사한 모양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생긴 날로부터 몇 달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그것이 정체를 드러냈다.

“글씨?”

분명 알파벳이었다.

“L…u, n, a….”

내 시력은 좋은 편이지만 글씨가 생긴 곳이 어깨 뒤쪽이고 크기가 작아서 거울에 비춰가며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읽어낸 글씨는 꼭 사람 이름 같았다.

“루나… 블랜치…?”

Luna Blanche.

집에는 물어볼 사람은 물론이고 검색해볼 컴퓨터도 없어서 나는 학교에 갈 수 있는 월요일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월요일, 등교 시간이 되자마자 제 엄마보다 나를 더 따르는 준이는 어김없이 울며불며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엇? 공룡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준이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동생이 돌아보는 사이 냅다 뛰었다. 이모의 악다구니가 들렸지만 나는 날듯이 달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학교에 가려면 적어도 40분을 걸어야 하는데, 그날은 내내 뛰었기 때문에 2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덕분에 수업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시설이 열악한 시골 학교라서 학생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는 따로 없었다. 휴대폰을 가진 아이들도 별로 없어서 친구에게 빌릴 수도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교무실에 가서 담임선생님에게 사정을 말하고 잠깐 컴퓨터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Luna Blanche.

‘Luna’는 달이라는 뜻이었다. 위키피디아에는 초승달이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나와 있었다.

‘Blanche’는 하얗다는 뜻의 ‘Blanc’이라는 단어의 형용사였다. 벨기에 사람 중에 이 성을 가진 연예인이 있었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어, 독일어와 함께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단다.

그 외에는 화장품 브랜드, 게임 캐릭터, 소설 주인공의 성씨로 몇 가지 나왔을 뿐이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백설 공주(Blanche-Neige)를 칭할 때도 사용하는 단어였다. 발음은 ‘블랑슈’였다.

선생님이 뭘 찾고 있냐며 고개를 들이미는 바람에 서둘러 윈도우 키를 눌러버렸다. 굉장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기에 나는 인사를 꾸벅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내 얼굴이 부어터졌어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선생님인데 자기 컴퓨터로 뭘 검색하는지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루나 블랑슈.”

나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뇌었다. 뭘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어째서 이런 정체불명의 이름이 내 어깨에 나타난 것일까?

남의 이름이 몸에 나타나는 건 무슨 의미일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으로 뭔가를 나타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잠깐. 뭐가 노골적이라는 거지? 그리고 뭘 나타낸다는 거지? 문득 든 느낌이지만 나조차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마치 이름표 같기도 했다. 내 책상 구석에 붙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책상에 붙은 ‘정은별’ 스티커는 이 책상이 정은별의 것임을 뜻했다. 이 책상을 두고 정은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정은별은 책상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이고, 이름표는 책상이 내 것이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내 몸에 이름표처럼 붙은 누군가의 이름은….

세상에! 정말 근사한 생각이었다.

이 세상에서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외톨이였는데, 나를 낳은 부모마저 나를 내팽개쳤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치 ‘정은별’과 ‘루나 블랑슈’가 전생에서부터 이어지는 어떤 인연인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 생각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생각의 고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검색하다가 본 바로는 루나가 달의 여신 이름이라던데. 그럼 여자 이름일까? 아니, 사실 그건 내게 큰 의미는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지금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프랑스에 있을까? 그건 조금 절망적이었다. 내가 프랑스에 갈 방법이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혹은 그녀가 여기로 올 수도 있을까?

그 사람이 온다고? 나를 찾아서?

그것은 내게 또 다른 희망이 되었다. 어쩌면 그도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정은별이 루나 블랑슈의 이름을 갖고 있으니 당연히 루나 블랑슈도 정은별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렇구나!”

지금까지 한 추측 중에 가장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서로의 이름이 몸에 새겨졌을 거라는 것 말이다.

마침 내가 아는 것 중에 그걸 정확히 표현하는 단어가 있었다. 그 단어가 저절로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이건 분명히 ‘그것’이었다.

“운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