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혁은 수영장에 있었다. 장승희의 사후 쓰지 않던 수영장을 보수하고 물을 채우느라 월 생활비의 절반을 써 버렸다고 들었다. 한심한 짓이었다. 생활비가 빠듯해 고용인 한 명도 쓰지 못하는 처지에, 최소한의 생활 공간만 남기고 폐쇄해야 할 마당에.
신계동 저택에는 수영장이 두 개 존재했다. 실외에 하나, 실내에 하나. 전자의 큰 수영장은 여전히 비었다. 권세혁이 보수한 수영장은 실내에 있는 ‘비교적’ 작은 수영장이었다.
장승희는 죽기 전에, 권무혁의 키가 150센티미터를 넘으면 집 수영장에 물을 넣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전에 장승희는 죽었다. 저택의 새 주인이 된 권세혁은 거기에 한이 맺힌 모양이었다. 권무혁의 치료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무슨 치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수영을 가르치고 싶었다고 하지. 그러면 이모의 마음으로 오리 튜브라도 하나 사 줬을 텐데.
“금방 좋아질 겁니다.”
“예?”
“내 다리요. 금방 나을 거니까 걱정 말라고.”
유미현은 아, 했다. 도넛 튜브에 몸을 끼고 물장구를 치는 권무혁을 보느라 권세혁의 말을 듣지 못했다.
“쓸데없이 돈 낭비 안 할 테니, 너무 감시하지 마요.”
“감시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 사람 섭섭합니다.”
“수영장 얘기 듣고 뛰어온 거면서.”
“아쉽게도 아닙니다. 오늘 뵙기를 청한 건 서거하신 각하의 유품을 전해 드리기 위해섭니다.”
“유품?”
권세혁이 웃었다.
“내가 그걸 왜 받아.”
“왕자님.”
“도로 가져가요. 쓰레기 버리는 데도 돈 내야 해.”
권세혁이 비치 체어에 앉으면서 물방울이 튀었다. 수영복에 가운 하나만 걸친 그가 다리를 꼬자 회색 가운 자락이 올라가며 탄탄한 허벅지가 드러났다. 다치지 않은 쪽 다리였다. 구릿빛으로 그을지는 않았으나, 군살이 전혀 없고 다리뼈 윤곽이 드러날 만큼 마르지도 않았다. 운동을 그만둬서 몸이 부실해졌을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유미현은 속으로 한탄했다. 왕자를 ‘개인적으로’ 원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알겠다.
권주혁이 살아 있을 때에도 그런 치들은 존재했을 것이다. 욕망을 드러낼 수 없었을 뿐. 그때 권세혁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감히 넘보지 못할 구름 위의 존재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권세혁은 자기를 지켜 줄 뒷배를 모두 잃었다. 약자에게 한없이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은 거라도 지키려면 기우희에게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권세혁은 기우희의 극단적인 처형 방식에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태어난 생가이자 자라난 외가를 멸문시킨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더 컸다.
유미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를 내밀었다.
“물건 확인하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가능한 귀중품으로 골라 왔다. 팔면 돈이 될 것들. 값비싼 명품 브랜드, 그중에서도 시계나 브로치나 반지 같은 사치품들. 기우희가 이 형제를 각별히 아끼거나 가엾게 여겨서는 아니었다. 이것들이 어떻게 쓰일지 알기 때문이었다.
권세혁은 각성제가 없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고교 졸업 전부터 약을 접했고 그에 의존한 지 오래되었다. 약을 하지 않으면 두통과 간지러움에 시달렸으며 체온 조절 기능도 떨어졌다.
기우희는 대놓고 약을 줄 순 없다고 말했다. 권세혁은 약을 하지만 그게 자신을 망친다는 인식은 있었다. 그래서 쿠션 하나가 필요했다. 약을 주진 않지만 약을 살 수 있는 돈을 주었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유미현은 손수 상자를 열었다.
“어떻습니까?”
“…두고 가요.”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이 물건들의 소유주는 왕자님이시니 어떻게 처분하시든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신경 끄겠다는 말을 참 길게 합니다. 유 수석.”
권세혁이 담배를 피웠다. 어린 동생이 풀에 들어가 있는데도 서슴없이 연기를 내뿜었다.
“용건은 그게 답니까?”
일 초라도 빨리 꺼져 달라는 생각이 엿보였다. 그래도 유미현은 미소를 유지했다.
“작은 왕자님 전담자가 정해졌습니다. 이제 왕자님께서도 한시름 놓고 스케줄을 소화하실 수 있겠지요.”
“뭐?”
“지난번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작은 왕자님을 수행할 사람을 하나 붙일 거라고. 사실 진즉에 이뤄졌어야 할 일인데 늦어져서 송구합니다. 그간 왕자님께 너무 큰 짐을 지웠습니다.”
“무혁인 내 짐이 아니에요.”
“왕자님께선 불쌍한 소년 가장이 아닙니다.”
“뭐라고?!”
“비록 아픔은 있었지만, 왕자님께선 충분히 창창한 나이십니다. 자기 삶을 사셔야지요. 누군가를 부양하는 데 평생을 바칠 게 아니라.”
“무슨 인생? 선전 방송 전용 배우?”
권세혁이 빈정댔다. 화난 목소리였다.
“내가 쓸모없어지면 버려진다는 거 알아요. 그동안 누린 게 있었으니 억울하진 않아요. 그래도 무혁이는 다릅니다. 쟤는 나만큼 누리지도 못했고, 잘못한 것도 없어요. 쟤를 봐요, 유미현 수석.”
권세혁의 전자 담배 끝이 권무혁을 가리켰다. 유미현은 튜브에 의지한 채 동동 뜬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열한 살이 되는 열 살짜리 소년. 장가의 피를 이었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고 말랐다. 크면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던데.
“저런 애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감시할 생각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권무혁은 기우희에게 손톱만큼의 해도 끼치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사람이 필요하지요.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무혁인 나 말고 아무도 안 믿습니다. 원래도 낯가림이 심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더.”
“믿을 만한 사람으로 준비했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작은 왕자님을 든든하게 지킬 인물로.”
“이해가 잘 안 되나 본데, 지금 난 호위 무사 따위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권세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나만으로 충분하니까.”
“작은 왕자님, 내년부터는 정규 교육을 받게 할 생각입니다.”
“누구 맘대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작은 왕자님께서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왕자님께서 고교를 졸업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내 말은!”
권무혁은 오래전부터 학교를 가지 않았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권세혁은 유미현의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렇게 무혁이 교육에 관심이 많으면 적당한 가정 교사나 구해 줘요.”
“아시다시피 홈스쿨링에는 비용이 많이 듭니다.”
“아, 돈 없어요? 그럼 됐습니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무혁이 학교에 데려다줄 운전기사는 필요 없다고.”
“작은 왕자님은 학교에 가셔야 합니다. 이건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감히!”
분노한 권세혁이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풀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유미현은 끄떡하지 않았지만 원세영은 움찔했다.
권무혁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가운을 벗어 던진 권세혁이 입수했다. 희고 큰 물보라가 일었다. 유미현은 무심한 표정으로 보석같이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응시했다.
권무혁은 상처 입은 아기 새처럼 권세혁에게 매달렸다. 형의 목을 감싸 안은 두 팔이 부러질 듯 가늘었다.
꼭 감은 두 눈, 파르르 떨리는 입술. 여지없이 겁에 질린 상태였다. 하지만 본인이 위험해서 소리를 지른 건 아니었다. 유미현도, 원세영도 알고 있었다. 저건 발작이었다. 장승희의 처형 장면을 먼발치에서나마 목격한 이후 생겨난 병이었다. 권세혁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매번 달라서. 방심한 순간에 튀어나와서. 저 소리를 멈추게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괜찮아. 무혁아. 괜찮아. 형 여깄어.”
권세혁은 권무혁을 안고 걸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몸을 흔들며, 정작 본인은 수영복 하나만 달랑 걸친 몸이라는 사실도 잊고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형제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옛날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타월로 몸을 감싸 주는 사람이 많았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 형제는 자기들의 일을 스스로 해야만 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게 맞았다. 그동안 필요 이상으로 떠받들려 살았을 뿐.
유미현은 권세혁의 어깨에 가운을 걸쳐 주려는 원세영을 막았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학교는 단순히 지식만 주입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회성을 길러 주죠. 작은 왕자님께서 학교에 다닌다면….”
“좀 닥쳐 줄래요?!”
권세혁이 소리쳤다. 권무혁의 째지는 비명이 유리창을 때리고, 잔잔해진 수면을 갈랐다. 유미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원하신다면 두 사람도 가능합니다. 후보가 둘 있거든요. 다만 이 경우에는 저희가 책정한 예산을 초과해서, 한 사람분의 인건비는 왕자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좀!”
마른침을 삼킨 권세혁이 말했다.
“스파이는 한 놈이면 충분해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대체 누굽니까?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안다면 아는 사람입니다. 이나활.”
“장난쳐요? 그놈은!”
권세혁은 말을 삼켰다. 권무혁 때문이었다. 권무혁을 안은 상태에서 ‘그놈은 우리 엄마를 쏜 새끼잖아’ 할 수 없었다.
유미현을 노려보는 권세혁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다른 사람은? 아까 후보가 둘이라고 했잖아요.”
“하란 윤이라고, 열여섯 살 남자애고 중국인입니다. 아주 어릴 때 들어와서 언어 문제는 전혀 없고요.”
“열여섯?”
권세혁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누구를 돌볼 나인가? 게다가 중국인? 외국 사람 손에 무혁이를 맡기라고?”
“헤이하이즈입니다. 사실상 조국은 없다고 봐야지요.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여기 오래 살았고, 직업도 있습니다.”
권세혁의 시선이 원세영에게 향했다.
“그런 핑계로 남의 나라에 기생하지. 태어난 나라로 가서 구제 신청 하라고 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쪽으로 넘어와서 터전을 잡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외국인은 이제 지긋지긋해.”
총알 같은 말이었다. 원세영은 총격에 나가떨어졌다. 사람을 만나 보기라도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이미 선을 넘은 상황이었다. 권세혁이 아니라 유미현의 선을.
유미현이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이나활로 결정하신 거지요?”
“난 좋다고 한 적 없어요.”
“출근은 다음 주부터입니다.”
권세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유미현이 생각하기에, 권세혁이 ‘예스’라고 대답해야 할 시점에서 침묵하는 건 자존심 때문이었다. 모든 걸 잃어버린 지금까지도 남은 자존심. 기우희의 선전 도구가 되었어도 여전한 자긍심.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가루가 될 것이다. 약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면 알았다.
본인이 맨발로 땅을 걸으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진흙탕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가겠어.
권세혁의 다리도 마음에 걸렸다. 과거에 총상을 입은 다리는, 비록 수술과 재활을 거쳐 완치되었으나 예전만 못했다. 수영을 할 때나 천천히 걸을 땐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미현은 알아보았다. 권세혁은 달리기나 뜀뛰기를 하지 못했다. 빨리 걷기 정도는 해내겠지만, 무리하면 통증이 있을 터이고.
시간이 갈수록 더 안 좋아질 것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렇다. 게다가 권세혁은 동생에게 정신이 팔려 자기 몸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돌도 씹어 먹을 시기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해도 본인이 체감하기 전까지는 모른다. 유미현은 그래서 권세혁에게 충고하지 않았다. 말한다 한들 권세혁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았다. 자길 저주한다고 생각하면 모를까.
“수석님.”
“왜?”
대기하던 차량에 올라탄 순간, 원세영이 말했다.
“수영장에 이어폰을 떨어뜨린 것 같습니다. 먼저 출발하시면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칠칠찮기는.”
“죄송합니다.”
시간을 확인한 유미현이 말했다.
“십 분이면 되겠니?”
“감사합니다.”
원세영은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권세혁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문을 열어 주었다. 다행히 형제는 수영장에 있었다.
“이어폰을 떨어뜨렸다고?”
“무례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세영은 고개를 숙이고 투명한 문 너머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권세혁은 문을 가로막은 팔을 치우지 않았다.
“이어폰 같은 거 없었는데.”
“작아서 눈에 잘 안 띄니까요. 흰색이기도 하고. 허락해 주시면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권세혁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져 코앞에 서 있는 원세영의 셔츠 깃을 적셨다. 원세영은 말없이 권세혁을 올려다봤다. 옛날 같았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겠지만….
구름 위 옥좌에서 끌어내려진 왕자는 과거의 미숙함과 귀여움은 온데간데없는 날카로운 안광을 빛냈다. 툭 건드리면 바로 찔릴 것 같다. 이건 단순히 약과 술, 담배 때문만이 아니었다.
환경이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맞다. 원세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권세혁의 뒤를 따라 수영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가운 자락을 날리며 비치 체어에 앉았다. 권무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왕자님은요?”
“욕실에.”
“혼자 목욕하실 수 있나 보네요.”
“그럼. 걔가 무슨 저능아야?”
공격적인 목소리였다. 원세영은 재빨리 사과했다. 진심은 없는 사과였지만 어차피 받는 당사자도 흘려들었다. 어차피 용건은 따로 있었다.
원세영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 블레이저 앞 주머니를 눌렀다. 정확히는 남들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히 들어 있는 물건을. 올마이티 그룹의 이 도청 방지 장치는 품질이 우수했다.
“작은 왕자님 호위직 말인데요. 사람 한 명만 더 재고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뭐?”
권세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유 수석이 마음대로 하는 일이잖아.”
“작은 왕자님의 보호자는 권세혁 왕자님이잖습니까.”
“내가 결정하는 건 유미현이 주는 선택지 안에서야. 진짜 몰라서 물어?”
“왕자님.”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마음에 안 들면 네 보스한테 가서 말해. 힘없는 사람 붙들고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지 말고.”
권세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의자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원세영은 머리보다 몸이 솔직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권세혁은 자기가 왜 이어폰 핑계를 대고 돌아왔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했다.
“물론 이나활은 훌륭한 호위 무사입니다. 기본적인 수행 능력은 물론 뛰어난 사격 실력과 위기 대처 능력을 고루 갖췄죠. 하지만 작은 왕자님과 친구가 되지는 못할 겁니다. 나이 차이가 커서요.”
“그놈이 몇 살이지. 스물여섯?”
“내년이면 스물일곱입니다. 왕자님보다도 나이가 많아요.”
“…….”
“하란 윤은 다릅니다. 이나활보다 열 살이나 어리죠. 작은 왕자님께 친구이자 좋은 형제가 돼 줄 겁니다. 학교생활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겠죠. 아시잖습니까? 그 나이 땐 어른들보다 또래들 말이 절대적이에요. 특히 싸움 잘하는, 서너 살 많은 형이 있다는 건….”
원세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랄까. 굉장한 메리트가 되죠.”
원래 나이보다 성숙해 보여도, 권세혁이 고교를 졸업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됐다. 아직 권세혁의 몸과 마음에 남아 있을 터였다. 스무 살을 ‘노땅’ 취급하는 세계에서 또래가 발휘하는 절대적인 힘을.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나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그렇게 빙빙 돌려서 할 필요 있나?”
“그건 정말 오해십니다.”
“무혁이 학교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원세영의 예상과 달리 권세혁의 반응은 싸늘했다.
“난 혼자서 충분했어. 그건 내가 왕자 신분이기 때문만이 아니야.”
아. 원세영은 비로소 깨달았다. 학창 시절 권세혁에게는 비빌 언덕이 필요 없었다. 외모와 체격, 성적과 성격으로 계급이 매겨지는 십대들의 사회에서, 권세혁은 가만히 서기만 해도 눈에 띄었다. 그는 왕자가 아니었어도 틴에이저 피라미드의 최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당신들 눈엔 무혁이가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아냐. 그 애한테도 나름의 생존 전략이 있어. 그건 어른들이 생각 못 하는 방법이야.”
“그 어른에 왕자님도 포함되나요?”
“그래, 나도 포함돼.”
권세혁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난 알아. 쟤 형이니까. 무혁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려 하는지… 난 알 수 있어.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것도.”
“그 부분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다른 형이나 친구는 필요 없어. 무혁이 세상은 좁아.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데 오래 걸려.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치고 들어오면, 걔는 정신을 못 차릴 거야.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 버리겠지.”
권세혁은 자조했다.
“차라리 그게 나아. 첫눈에 반해서 앞뒤 못 재고 돌진하는 것보단.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신중하게.”
“하란 윤이 안 되는 게 중국인이어서입니까?”
류샤오밍. 류연비와 정류진의 아버지가 중국 사람이었다.
“…….”
“맞군요.”
“그럼 안 되나?”
“섣부른 일반화는 좋지 않습니다.”
“그딴 소린 짱깨한테 엿 먹은 적 없는 사람한테 해!”
원세영은 입을 다물고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통유리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은 넓었지만 관리가 안 되어 지저분했다. 곳곳에 덜 녹은 눈은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그렇다 쳐도, 곳곳에 무성한 잡초는 저택의 무심한 관리 상태를 부정 못 하게 했다. 아무렇게나 자라 삐죽삐죽한 정원수는 차라리 뽑아 치우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담.
“미관상 좋진 않군요. 저 철조망.”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아.”
일전에 사고가 있었다. 주인 모를 드론이 신계동 저택을 넘어 들어온 일이었다. 드론에는 카메라가 달린 채였다. 누군가가 저택 내부를 찍고 있음이 분명했다. 비록 그때 형제는 집 안에 있었고, 저택의 모든 유리창은 밖에서 들여다볼 수 없도록 코팅되었지만 밤늦은 시각이었다. 필름 처리를 한 유리도 밤에는 안이 들여다보인다. 범인은 그걸 알고 드론을 날린 게 틀림없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잡지 않았다. 권세혁은 곧장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권세혁의 극성팬 중 하나일 거라고 결론짓고 수사를 마쳤다. 그게 다였다. 당시 신고를 접수하고 출동한 경찰은 순찰을 좀 더 강화하겠다고 했으나, 권세혁이 느끼기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철조망을 설치한 이후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권세혁은 안심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감시한다는 느낌이 떨쳐지지 않았다. 철조망에 전기를 흘려 보내고 싶었지만 예산 부족이었다.
예산 부족.
옛날에는 이해할 수도 없었던 단어였다. 돈이 부족하면 벌면 되잖아.
“이 아이입니다. 얼굴이라도 한번 보세요.”
원세영은 습관적으로 태블릿을 꺼내려다 마음을 바꿔 파일을 꺼냈다. 하란 윤의 사진은 하란재성에게 받았다. 단독 사진도 아니고 삼 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인 데다 그마저도 사본이었지만, 아이의 훤칠한 얼굴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원세영은 한사코 보지 않으려는 권세혁에게 사진을 쥐여 주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시라는 말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시고, 저한테 개인적으로 연락 주세요.”
“두 사람분의 인건비는 없다며. 예산 초과라고 들었는데, 아냐?”
“그러니까 제게. 개인적으로.”
유미현에게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원세영은 하란 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열심히 사는 어린아이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한때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이 정돈 해 줄 수 있잖아.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고.
하란 윤을 유미현과 기우희에게 소개할 계획이었지만, 권일혁 총통 일로 정신이 없었다. 그때는 이미 이나활로 결정된 상황이기도 했다. 하란재성에게는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해 뒀지만….
하란재성이 실망하든 말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원세영이 마음에 걸리는 존재는 하란 삼 남매였다. 윤이 여기서 일하게 된다면 본인은 물론 작은아이 둘의 사정도 좋아질 터였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 부탁드립니다. 왕자님.”
권세혁은 원세영이 내민 명함을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권세혁의 비치 체어 팔걸이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힘차게 몸을 돌린 순간 권세혁이 말했다.
“내가 미쳤다고 스파이를 둘씩이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나활이든 하란 윤이든, 내가 원해서 이 집에 들여놓는 게 아니니까.”
“숙식 제공은 아닙니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할 거예요. 예전에 고용인들 많이 써 보셨으니 아실 텐데요. 스테이인, 아웃.”
“그거 알아? 원세영 보좌?”
권세혁이 일어났다. 물과 레몬 냄새를 풍기며 원세영에게 다가왔다. 긴 손가락에는 방금 건넨 명함이 걸려 있었다.
“무혁이는 아직 유괴당한 경험이 없어.”
“아직?”
“나도, 죽은 엄마도 어릴 때 유괴당했거든. 면식범이었지.”
“…….”
“그래도 난 노력했어. 나쁜 경험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아까 원 보좌가 말한 섣부른 일반화. 그거 안 하려고 애썼어. 지금은 내가 왜 그랬는지 화가 나.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의심하는 게 당연한데.”
“그들이 작은 왕자님께 해를 끼칠까 봐 두려우십니까?”
“걔들은 장기 말이지. 본체는 따로 있고.”
“왕자님.”
원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권세혁의 손가락에서 빠져나온 명함이 팔랑팔랑 날아갔다.
“저희가 작은 왕자님을 해하려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아뇨.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자님께선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장군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또 왕자님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있습니다. 지금 왕자님의 입지가 어떻든지 그들은 왕자님을 사랑하고, 왕자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의문을 품을 겁니다. 그건 장군님의 지지율에 문제가 되겠죠.”
원세영은 조금 세게 말해 둘 필요를 느꼈다.
“왕자님은 장군님께 필요한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이해가 안 가.”
권세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나를 사랑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나를?”
“글쎄요. 얼굴? 목소리? 분위기?”
숨 막히는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한 소리였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그래도 권세혁의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날 정도는 되었다.
원세영은 열린 유리문에 기대섰다. 고개 숙인 권세혁이 양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런 얘기, 아무 위로도 안 되겠지만. 왕자님 팬들 중에는 옛날보다 수척해져서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
“불행을 파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과거에 신해범이 쓴 전략이자,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먹히는 셀링 포인트였다. 보는 이의 마음을 자극하여 동정심에 호소하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자존심만 버리면 쉬운 일이에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요.”
“그딴 건!”
“신해범도 태어날 땐 도련님이었답니다.”
원세영은 눈을 감았다. 우당탕 쿵쾅 소리가 요란했다. 권세혁이 걷어찬 비치 체어가 수영장에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켰다. 천천히 가라앉는 의자를 노려보며 권세혁이 일갈했다.
“썩 꺼져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왕자 전하.”
원세영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묵직한 유리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권세혁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 분노를 자기보다 약한 대상에게 풀거나 안으로 썩히는 것보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선 원세영의 허리께에 뭔가가 닿았다. 작고 따뜻한 어린아이 손이었다.
“작은 왕자님.”
원세영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하얗고 작은 아이. 마른 어깨를 감싼 욕실 가운은 성인용이었다. 키가 작은 권무혁에게는 길어서 가운 자락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했다.
“우리 형 괴롭히지 말아요.”
“들으셨습니까?”
“형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왕자님.”
원세영은 쭈그려 앉았다. 올려다본 아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가까이서 보니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는 있지만 영양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권세혁이 동생에게 소홀하지는 않을 듯싶지만… 모른다. 권세혁은 성장기에 누군가가 챙겨 주는 삶을 살았으니까. 지금 권무혁은 성장기 아이에게 필요한 균형 잡힌 식사가 아닌, 예산 내에서 허기만을 면하기 위한 식사를 계속하는지도 몰랐다.
“앞으로 안 왔으면 좋겠어요.”
“저흰 두 분께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건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가 정해요. 우리가 위협적이라고 느끼면 그런 거예요.”
위협적. 원세영은 권무혁의 어휘 구사력에 놀랐다. 홈스쿨링을 했다더니, 집 안에서 놀기만 한 건 아닌가 보지?
“옳은 말씀입니다, 전하.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발전이 없어요. 평생 이 저택에서 단둘이 지낼 생각이십니까?”
“난 그러고 싶어요.”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권무혁의 목소리는 높고 가늘었다. 눈을 감고 들으면 여자아이 목소리처럼 들렸다. 원세영은 손을 뻗어 포근한 가운에 감싸인 권무혁의 팔을 잡았다.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권무혁은 저항하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서 형을 부르지도 않았다. 소리도 못 낼 만큼 겁에 질려서는 아니었다. 지금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형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이는 자기를 지켜 줄 사람이 있을 때 운다. 권무혁은 울음을 삼키는 소년으로 자랄 터였다.
무너진 유리성을 재건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게 낫겠지.
원세영은 권무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젠가는 지원금이 끊길 겁니다. 국민들이 왕족과 귀족을 인정하지 않는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 전에 방법을 찾으셔야 합니다.”
“방법…?”
“살아갈 방법 말입니다. 왕자님.”
권무혁이 눈을 깜박였다. 원세영은 언뜻 무해한 듯 보이나, 어쩌면 권세혁보다도 경계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의 눈을 응시했다. 창백한 얼굴에 버짐이 피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맑았다.
“이 저택도 왕자님의 집이 아닙니다. 지금 왕자님 두 분이 이곳에 살 수 있는 건 기우희 장군의 배려일 뿐. 언젠가 이 집도 국고로 환수되어 나라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겁니다.”
“여긴 우리 집이에요.”
“아뇨. 나라 재산입니다.”
원세영은 그 말을 마치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권무혁의 앳된 목소리가 무릎을 잡았다.
“우희 누나는 공산주의자예요?”
원세영은 당황하지 않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족이랑 귀족을 망하게 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출신 성분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아닙니다. 장군님께서는….”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은 없어요.”
앳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떤 시대에도 풍족하게 잘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소외 계층도 있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예술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요.”
이게 열 살짜리 입에서 나올 말인가. 원세영은 무심코 생각하다가, 권무혁이 놓인 특수한 상황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아이가 또래에 비해 뒤떨어지리라 생각한 자신의 머리를 치고 싶었다. 권무혁은 또래보다 성숙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장승희가 아무리 둘째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한들 실력 없는 가정 교사를 집 안에 들일 리 없었다. 권무혁도 일국의 왕자였다.
홈스쿨링 중단 뒤에도 권무혁이 공부할 만한 수단은 집 안에 많았다. 컴퓨터와 태블릿, 텔레비전.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도서.
그래… 망했어도 다르다 이거지….
“맞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없지요.”
원세영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린애와 기 싸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이 한마디는 분명히 해 둬야겠다.
“그래서 가끔씩, 세상이 뒤집히는 거겠죠. 달이 차면 기우는 것처럼.”
권무혁의 아기 새 부리 같은 입술이 다물렸다. 똑똑한 아이니 ‘뒤집힌다’는 말이 사전 그대로의 정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 터였다. 달이 차면 기운다는 말의 속뜻도.
“그럼, 또 뵙겠습니다.”
원세영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벗어났다. 유미현이 이미 가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차는 원세영이 기억하는 자리에 있었고, 유미현도 시간을 넘겼다는 이유로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차량이 출발했을 때, 유미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이타심이 많았니?”
원세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도청 방지 장치는 여전히 켜진 채였다. 유미현도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이니 성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지 즉석에서 발휘한 핑계가 설득력이 없었을 뿐.
유미현이 피식 웃었다.
“이어폰이라니. 네가 그런 거 흘리고 다닐 성격이야?”
“죄송합니다.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요.”
형편없는 연기력에 유미현이 속아 준 이유는 하나였다. 원세영이 무슨 용건으로 되돌아갔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하란재성이 협박해? 좋은 자리에 아들 꽂아 달라고?”
“아뇨.”
원세영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제 오지랖입니다.”
“도축장보다야 어린애 시중이 편하긴 하겠지.”
“왕자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안다. 네가 나한테 뭐 숨길 애 아니라는 것도.”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그, 윤이라는 놈.”
“내가 만나 봤으면 좋겠어?”
“아닙니다. 이미 결정된 일에 시간 할애하실 필요 없습니다. 또 수석님께서 아이를 보자고 하시면, 그게 여지를 두는 것처럼 보여서….”
“안 하느니만 못하다?”
원세영은 고개를 숙였고, 유미현은 차창 너머 하늘을 보았다.
“단순 경호직이라면 열여섯 살이라도 괜찮지. 그런데 이건 마음이. 마음이 굳세야 하는 일이라.”
굳센 마음이란 변함없는 충성심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미모의 형제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도 이쪽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한. 권무혁의 호위는 ‘그럴 만한’ 명분을 지닌 사람이 맡는 게 안전했다.
원세영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수석님 결정에 따를 겁니다.”
유미현은 말없이 웃었다.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꽂혀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맑은 겨울 하늘이었다.
우리 해준이는 들었을까? 원수의 숨통이 과거의 부관 손에 끊어졌다는 소식?
유미현의 어깨가 들썩였다. 원세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석님?”
“무슨 복이 그렇게 많아서, 사람 하나는 기똥차게….”
아직도.
아직도 유미현은 신해범을 질투했다.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기는 이미 그의 모든 걸 가졌는데도.
신해범의 재산, 신해범이 키운 사람들, 하물며 그의 목숨과 직결되는 신분까지 손에 넣었는데도, 유미현은 신해범의 매끈한 얼굴을 떠올리면 질투심으로 목구멍이 후끈해졌다.
죽이기 전에 물어볼 걸 그랬다. 자갈밭에서 원석을 골라내는 방법.
‘비천한 놈에게 무슨 노하우가 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누구나 할 법한 대처를 했을 뿐입니다. 제게 어떤 비결이 있다기보다는, 그 친구들이 제 진심을 알아준 거지요. 뭐 그래도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할 것 같지만. 그 잘생긴 얼굴로 화사하게 웃으며.
유미현은 고개를 저어 신해범에 대한 생각을 털어 냈다. 고인을 상대로 질투심에 젖는 건 좋지 않았다. 의미 없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짓을 하지 말라고 강인혜에게 조언한 게 우스울 지경이다.
신해범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이나활을 떠올렸다. 유미현은 원세영을 떠보았다.
“네가 보기엔 어떠니? 이나활. 잘할 것 같아?”
“기본적인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겠지요.”
원세영이 차폐막을 닫았다.
“전 총통이 단독으로 옆에 뒀을 정도니. 경호원으로서는 우수한 인재입니다.”
“그 밖에는?”
“왕자들과의 친분, 교류… 이런 건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은 개인적으로, 아,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괜찮아.”
“친구로서의 역할은 하란 윤이 낫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연배니까요. 워낙에 나이 차이가 큰 형제니 하란 윤이 중간에 들어가면 딱 비율이 맞죠.”
하란 윤의 나이는 마이너스 요인임과 동시에 플러스 요인이었다. 그건 정말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다만 이미 이나활을 ‘꽂아 주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권세혁이 동생에게 ‘친구’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는다면 하란 윤이 끼어들어 갈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원세영은 강수를 뒀다. 본인도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사비를 써서라도 사람을 붙여 주겠다는 소리를 하게 될 줄은. 그것도 권무혁을 위해서.
나는 할 만큼 했어. 할 만큼 한 거야. 여기까지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대치니까….
신중하게 결정해 줬으면 좋겠어. 권세혁 왕자.
원세영은 여전히 차창 밖, 하늘을 응시하는 유미현을 바라보았다.
“중간이라.”
유미현이 중얼거렸다. 권일혁 총통의 승계 전쟁 그래프에서, 기우희의 모든 조건은 최악이었고 권세혁은 최상이었다. 이나활은 그 둘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가 성장한 미국은 장두현의 마수에서 안전한 지대였긴 하나,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홀어머니 손에 혼자 자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괴로웠을 수도 있다. 그리움이 원망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나활은 건실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적어도 미국 사회에서 떳떳하게,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되지 못했다. 그러니 해동문국으로 왔지.
미국 시민권자로 산다는 행운의 수저를 손에 쥐었음에도, 승계 전쟁 따위와는 관련되지 않을 기회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이나활은 그들 사회에서 도태되었다. 그런 주제에 태어나지도 않은 나라의 왕이 되고 싶어?
국적 문제는 귀화로 해결 가능하겠지만….
“아.”
유미현은 입을 벌렸다. 이나활이 ‘기우희의 다음’을 고집하는 이유가 또 하나 존재했다. 정통성이었다. 아무리 왕가의 핏줄이라 한들 해동문국에 출생 신고조차 되지 않은 사람이 총통 자리에 오른다는 건 본인이 생각해도 우스웠음이라. 하지만 기우희가 있다면 다르다.
기우희는 본인의 피가 이어진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그런 기우희가 이나활을 양자로 맞아들인다면, 물론 이복동생을 양자로 맞아들인다는 게 상식적으로는 문제가 되겠지만, 기우희의 ‘불가피한 사정’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상황도 아니었다. 근친혼으로 갖가지 유전병을 야기한 권씨 왕조라면 더더욱.
“네가 한번 만나 봐라. 하란 윤.”
“제가요?”
“아니,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사람이 좋겠어. 하란재성이 네 얼굴을 알고 있으니. 뭐라고 귀띔해 줬을지 모르잖아.”
유미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인혜 보내자. 살짝만 보고 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