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원세영 (32/39)

벤츠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후다닥 내린 진치우가 타이어에 스프레이 체인을 뿌려 댔다.

“그냥 지나가요. 멈추면 눈에 띄어.”

“진치우 머리 좋네. 눈치챈 건 아니겠지?”

“그냥 우연인 거 같은데요.”

“그런가?”

“그래요.”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였다. 핸들을 잡은 중년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수석에 앉은 여자는 무릎 위에 올려둔 프라다 서류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권씨 형제를 담당하는 정신과 전문의에게서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오늘의 진료 기록이었다. 상담 내용은 물론 처방전까지 자세하게 첨부됐다. 그래도 의사 자격을 박탈당하지는 않는다. 의대 재학 시절 유미현과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저 친구는 왜 감시하라는 거야? 공주님 눈 밖에 날 짓 했나?”

“둘 다 아니에요.”

“그래도 굳이 기름값 써 가면서 따라다니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굳이 아셔야 하나요?”

원세영이 웃었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으나, 얼마 안 가서 도로 열렸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서로 간에 신뢰가 있어야 해. 다른 놈도 아니고 진치우 아닌가. 공주님하고 헌병 시절부터 같이한 친구로 아는데. 이렇게 몰래 따라다니는 거 알면 얼마나 서운하겠어.”

원세영은 남자를 봤다. 솥뚜껑만 한 손으로 조물조물 눈사람을 만들어 벤츠 보닛에 올려놓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여튼 말 더럽게 안 듣는 아저씨였다. 블랙박스에 찍히니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행히 신예나와 진치우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귀엽게 봐줘서 다행이지만, 다음부터는 철없는 짓 하지 말라고 단단히 말할 참이었다. 물론 유미현에게 두 사람의 동선을 보고한 다음에.

“원 보좌, 혹시 화났어? 미안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감시하는 게 아니에요. 호위하는 겁니다.”

“응?”

“요직에 있던 군인이 은퇴하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죠. 직업 자체의 특수성입니다. 현역 시절에 원한을 살 수밖에 없는. 의무를 다한 죄로 누군가에게 칼 맞을까 봐, 총 맞을까 봐 떨어야 하는.”

남자는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과거 풍기 교육대의 악명을 모르지 않았다.

“신해범 준장은 죽고, 기우희 소령은 내부 고발자로 신분 세탁, 게다가 지금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인이죠. 그럼 남은 게 누굴까요?”

신예나와는 달리, 진치우는 신해범에게 이용당한 피해자 포지션을 확보하지 못했다. 기우희는 그런 진치우를 따로 보살펴 달라고 했다. 당사자는 모르게.

유미현은 순순히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는 신해범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다는 기우희의 생각을 높이 평가했다. 원세영은 신해범의 재산을 모조리 차지한 유미현이 최소한의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기우희는 변했다. 신해범으로 인해서. 황마 교도소 시절 기우희였다면 진치우가 옷을 벗겠다고 결정한 즉시 그로부터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우희는 진치우를 설득했다. 결과가 기우희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공주마마’께서는 과거의 가신을 옆에 두고 일을 주며 몰래 호위까지 해 주고 있었다.

진치우는 언제쯤 알까? 군복을 벗으면 당장의 비난은 피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기우희는 그걸 알기에 진치우를 데려가려 했던 거였다.

그나마 비공식 ‘오른팔’ 노릇은 해 줘서 다행인가.

원세영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눈송이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이퍼와 등을 부드럽게 감싸는 가죽 시트, 차 안의 따뜻한 공기 때문에 잠이 몰려왔다.

“여기서 기다릴까?”

남자가 말했다. 그는 차를 갓길에 정차한 뒤 원세영의 의사를 물었다.

“네. 그러죠.”

“잠 오면 눈 붙여. 내가 신경 바짝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원세영은 프라다에서 포도당 캔디를 꺼내 먹었다. 남자에게도 하나 건넸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백색 사탕을 입에 넣었다.

사람을 참 잘 믿는 타입이었다. 용병치고는.

진치우의 검은 벤츠가 스쳐 지나갔다. 남자는 바로 뒤에 따라붙지 않고, 택시 한 대를 사이에 둔 채 따라갔다. 확실히 그게 안전했다. 눈이 오는 도로에서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니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원세영은 옆 차선의 봉고 차를 보면서 말했다.

“좀 빨리 가요.”

“눈 와서 그래.”

남자는 혀를 끌끌 찼다.

“나야 교통사고로 죽기 아까운 나이는 아니지만, 원 보좌는 아니잖아? 운전할 때 서두르지 마. 젊은 나이에 황천길 가고 싶은 거 아니면.”

“재촉 한 번이 황천길 소리까지 나올 일이에요?”

“위험하니까 그러지. 잔소리로 듣지 말고….”

“잔소리로 들려요. 그런 말은 애들한테나 하시죠.”

“예. 예.”

대놓고 무시하는 원세영의 말투에도 남자는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 윤이, 그놈이 일곱 살 때부터 칼을 잡았거든. 어두운 데서도 전구 하나만 켜 주면 뼈고 힘줄이고 싹 발라냈다고. 고기만 잘 다루나? 생선 손질도 잘하지. 나무젓가락으로 잔가시 하나하나를 다 발라내는데 내가 다 감탄이 나오더라니까. 그놈, 확실히 재능이 있어. 타고난 장인이야.”

“하란재성 씨.”

“응?”

“수석님 앞에서 그런 소리는 마세요. 일곱 살짜리 아이를 학교도 안 보내고 키운 거, 자랑 아니니까.”

“그렇긴 해?”

하란재성은 머쓱하게 웃었지만, 딱히 부끄러운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잘 자랐어. 세 놈 다.”

“서희는 어떤가요? 수석님이 여아를 좋아하세요.”

“서희, 그놈도 잘하지. 근데 혼자 일하기엔 아직 어려서.”

하란재성에게는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하나는 여아였고 둘은 남아였다. 그리고 장남을 제외한 둘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였다.

유미현이 하란재성을 기우희에게 소개한 이유는 명확했다. 하란지호와 하란서희, 이 쌍둥이는 오래전에 죽은 기우희의 동생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란재성은 기우희에게 빌다시피 했다. 먹여 살려야 할 입이 셋이다. 셋 다 호적도 없이 이름과 생일뿐이다. 이 나라가 아니면 갈 곳이 없다.

오른쪽 무릎 아래가 의족인 나이 든 용병은 자식들을 앞세워 일자리를 구걸했다. 그는 기우희를 만나기 전, 유미현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한 바 있었다. 가족에게 속아 조카를 자기 호적에 올려 준 뒤, 흑해자가 되어 버린 자신의 진짜 아이들을 데리고 힘들게 국경선을 넘어왔다고.

하란 윤은 하란재성이 ‘강력 추천’하는 영재였다. 그는 하란 윤이 권무혁 왕자의 호위를 맡기를 바랐다. 열여섯 살. 각종 선전 활동으로 바쁜 친형 대신 어린 왕자를 보살펴 주는 데는 적합한 나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건 하란재성의 생각이었다. 유미현은 윤이 어리다고 생각했다. 환경이 환경인 만큼 철은 일찍 들었겠으나 애늙은이와 진짜 어른은 달랐다.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 조건 부분에서.

열여섯 살짜리 단독으로는 안 된다. 하지만 권무혁에게 사람 둘을 붙일 정도의 여력은 없다.

원세영은 자식을 사고파는 데 익숙해 보이는 하란재성의 옆얼굴을 봤다. 중국 성씨를 가진 남자는 특이하게도 황백 혼혈의 외모를 지녔다. 사진으로 본 하란 삼 남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이국적으로 생긴 아이들이었다. 특히 하란 윤은 턱선이 뚜렷하고 큼직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는 얼굴로, 그은 피부를 희게 만들고 머리카락 색을 옅게 바꾸면 권세혁과 권무혁 사이에 낀 형제라 해도 믿을 만했다.

하란재성은 그 사실을 아는 게 분명했다. 하란 윤이 권세혁과 닮았기 때문에 권무혁과 더 쉽게, 빠르게 친해질 수 있다는 걸.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상대에게 친근감을 느끼니까. 외모든 성격이든.

권씨 형제에게 동족 혐오적 성향이 없다는 건 전문가의 진단으로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원 보좌가 잘 좀 말해 줘. 우리 윤이, 이제 곧 열일곱이라니까.”

“그래도 아직은 열여섯이에요.”

원세영은 하란재성에게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결정은 기우희와 유미현이 아이를 만나 보고 할 것이다. 그전까지는 되도록 기대치를 낮춰야 했다. 한껏 기대하게 만들었다가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이 유쾌한 성격의 남자가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친근하고 가벼워 보여도 용병이었다. 쓰임새는 있되, 기본적으로 믿지 말아야 할 족속들이었다.

“권무혁 호위직, 순정 경호는 아닌 거 아시죠? 옆에서 지키는 게 다가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연기력이 받쳐 줘야 해요. 위기 상황 대처 능력도 중요하고요. 저나 수석님이 모든 걸 코칭할 수는 없으니까요.”

“알아. 윤이는 잘할 거야. 그놈이 동생들도 다 돌봤어.”

“아이 생각은 어때요?”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원세영은 그 부분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자 했다.

“어른들이 암만 좋아해도 본인이 일할 마음이 없으면 불가해요.”

“우리 윤이야 뭐 스탠바이 완료지. 당장 내일부터도 출근 가능해.”

“지금은 뭐 하고 있댔죠?”

함정 질문이었다. 하란 윤이 축산업 종사자라는 사실을 잊은 게 아니라.

권무혁의 경호직은 10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십대 청소년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만한 베이비시터 일이 아니었다. 만약 하란 윤이 수시로 직업을 바꾸고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면, 원세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란 윤의 취업을 막을 작정이었다.

“지난번에 얘기 안 했나? 마구동 도축장 다녀. 거기두 슬슬 이전 얘기 나와서 불안한가 봐.”

“그런가요? 어쩌죠. 딱히 들은 게 없는데.”

“괜찮아, 언질 달란 거 아니야.”

그러나 하란재성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일이 없긴 한가 봐. 예전엔 하루 천오백 마리도 잡았는데, 요샌 하루에 천 잡는 날이 드물대. 완전히 반 토막 났나 봐.”

“어유.”

“아쉬워. 거기가 지금 광성서 딱 하나 남은 시설인데.”

원세영은 어쩔 수 없이 상상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돼지를 도축하는 잘생긴 십 대 소년. 피 냄새에는 익숙하겠지.

“힘들단 얘긴 안 해요?”

“즐기면서 해.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고.”

“학교는 관심 없고요?”

“전혀.”

“음….”

정말로 배움의 의지가 없는지, 본인의 사정이 사정이라 학교에 못 간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는 불분명했다. 이건 당사자에게 물어봐야 아는 문제였다.

“원 보좌 같은 사람은 이해가 안 되겠지. 그래도 말이야, 어려서 일찍 적성을 찾은 놈한테는 정규 교육이 별 의미가 없어. 머리 아프게 그런 것 안 해도 충분히 먹고살거든.”

원세영은 하란재성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금지옥엽이 아니다. 정해진 운명이나 타고난 팔자 같은 건 없다. 나는 내 힘으로 인생을 개척했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서 있어.

전방을 살피던 하란재성이 말했다.

“샛길로 빠지는데.”

“좀 떨어져서 따라가요.”

원세영은 차창에 팔꿈치를 대고 손꿈치로 옆머리를 받쳤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사실 하나를 인정했다. 하란재성과 이야기할수록 하란 윤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만약 그가 권무혁의 경호를 맡는다면….

최초의 후보자는 강인혜였다. 그는 유미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당했다. 생각해 보겠다는 여지조차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입이 무겁고 진중한 성격의 충성스러운 사냥개. 머리는 기본으로 좋아야 했다. 경호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너무 많이 바라는 건 아니었다. 과거에 뽑았던 왕실 유모 기준을 떠올려 보면. 선출 기준에서 학력 삭제, 경력 삭제. 출신 성분은 당연히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갖다 앉힐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충성심이었다. 권무혁이 성인이 될 때까지 옆을 지키고 감시하면서, 허튼 짓거리 하지 못하게 몸과 마음을 통제하되, 본인은 결코 기우희의 명령을 거역해서는 안 됐다.

지배당하는 통제자.

신해범 같은 놈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의미 없어.”

“응?”

“아니에요. 그냥 잡생각이.”

“원 보좌도 잡생각을 다 해?”

“저를 너무 철 가면으로 보시네요. 이래 봬도 상냥한 여잔데.”

하란재성이 고개를 돌렸다. 원세영은 창밖을 보며 쿡쿡 웃었다.

“여기 세우죠.”

공영 주차장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정차했다.

“주차장 안 들어가고?”

“네.”

하란재성은 시동을 끄고 핸들에 엎드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세상에 검푸른 어스름이 깔렸다. 도로 가장자리의 가로등에는 하나둘 불이 켜지고.

“공원인 것 같은데. 누구 만나나?”

“데이트였네요.”

“에엥?”

“여기, 공원도 공원인데,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서경관이라고 있어요. 식물관인데 진치우나 신예나한테는 좀 특별한 데에요.”

“식물관? 별… 데이트면 분위기 좋은 데 가지. 여긴 애기들 현장 학습 오는 데잖아.”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규모가 꽤 크거든요.”

서경제약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지금 하란재성의 표정을 봐서는 그런 걸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고 그런 사인가 본데. 아까 납골당도 그렇고. 진치우 모친이 거기 있다며?”

“그러게요. 진짜 둘이 잘되어 가나.”

“딱 봐도 청혼 코슨데. 어머니한테 인사드리고, 특별한 데서 반지 주고.”

“그건 아직 모르죠. 너무 앞서 나가지 마세요.”

원세영의 핀잔에 하란재성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가?”

“그래요. 아직 쟤네들 잘 모르시잖아요.”

“앞으로 알아 갈 사이지.”

잘, 면밀히, 세세하게 말이야. 원세영은 핸들을 안고 엎드린 하란재성의 시선을 피했다.

“오늘은 이쯤 하죠.”

“야호. 퇴근.”

“내일부턴 혼자 하셔야 되는데 괜찮겠어요?”

“충분히 할 만해. 자신 있으니까 마음 푹 놓고 맡겨.”

원세영은 마음을 놓는 대신 한숨만 푹, 쉬었다.

“지금까지는 용케 아무 일 없었던 거예요. 앞으로도 지금 같으리란 보장은 없어요.”

“무슨 일 있었어? 진치우한테?”

“일이라면 일이죠. 협박장.”

그 말에 하란재성의 눈빛이 변했다. 원세영은 ‘충성심은 눈빛에서 나온다’고 말하던 유미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외모는 솜씨 좋은 성형외과의를 만나면 뜯어고칠 수 있지만, 죽은 동태 눈깔은 그 어떤 명의가 와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눈빛까지 연기했던 사람이 하나, 존재하긴 했지만.

“협박장이라.”

하란재성이 턱을 긁었다.

“그래서 나한테 일이 생겼구만.”

“처음엔 대수롭게 생각 안 했어요. 저희도 늦게 알았죠. 아, 수석님을 한심하게 여기진 마세요. 당사자가 말을 안 하는데 알 도리가 있나요.”

“조잡한 수준이었나 보지? 본인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위협에 둔한 사람은 아니에요. 본인 선에서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면 자존심.”

“자존심?”

“암만 낙하산이니, 친구 빽이니 해도 밑바닥에서 올라와 중령까지 해 먹은 사람이에요. 자기가 선택한 부분도 있고요. 별 달아 준다는 것도 뿌리치고 옷 벗었는데, 인제 와서 누구 손 빌리고 싶지 않았겠죠.”

하지만 기우희는 진치우의 안전에 신경 쓰고 있었다. 원세영은 진치우와 업무 내용을 주고받는다는 핑계로 그의 연락처, 주소 등 개인 정보를 확보했다.

진치우의 개인 휴대폰이나 메일을 해킹하지는 않았다. 그건 이미 범죄의 영역이었다. 새삼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원세영은 앞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칠 사람과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해결소장’의 사무소에서 팩스 하나만 따 왔다. 이따금 방문할 때 사무실 전화기의 자동 응답 기능 정도만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진치우 자택의 우편물 체크 정도.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딱 그 정도였다. 아이, 그 정돈 눈감아 줄 수 있잖아.

진치우도 어렴풋이 눈치는 챘을 터였다. 올가을 그의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기우희는 진치우에게 택배 상자를 열지 않고도 내용물을 확인하는 기계를 선물했다. 풍기 교육대에서 쓰던 것과 같은 모델을 구하느라 골치 아팠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았다.

“이제 원 보좌는 진치우한테 손 떼는 건가?”

“아예 신경 끄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래도 한 사람 몫은 톡톡히 해 주셔야겠죠? 저한텐 다른 일이 또 생겼으니까.”

지금까지도 1인 2역을 해 온 참이었다. 유미현의 비서 일, 진치우의 지킴이 일.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나활의 존재와 그의 주장이었다. 권일혁 총통이 ‘불법’ 심장 이식을 받았다는.

이나활이 진치우를 찾아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기우희와 유미현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의도했다. 너무 가까이 두면 위험하고, 아예 멀리 떨어뜨리기에도 불안한 놈. 그런 놈을 맡을 만한 사람은 진치우뿐이었다.

진치우는 기우희를 배신하지 않는다. 신해범의 목숨이 유미현의 손에 달렸고, 유미현은 기우희의 집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낼 사람이니까.

“무슨 일인데? 많이 힘든 거야?”

“힘들다기보다는 번거로운 일이죠.”

이나활의 신상 명세부터 캐야 했다. 정말 필리핀 혼혈인지. 어머니가 외화벌이로 출국한 간호사가 맞는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말은 사실인지.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없던 신뢰가 뚝딱 생기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거짓이 발각될 경우, 원세영은 없던 신뢰도 박살 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 줄 참이었다. 감히 암사자들을 가지고 놀아?

그쳤던 눈발이 또다시 휘날리기 시작했다. 원세영은 차창을 내리고 한 손을 밖으로 뻗었다. 찬바람이 뺨을 할퀴었다. 운전석의 하란재성이 춥다고 징징댔다.

“뼈에 바람 들어, 늙은이 배려 좀 해 줘.”

“엄살이 심하시네.”

“원 보좌도 내 나이 돼 봐.”

손바닥 위에서 녹아 사라지는 눈송이를 보며 원세영이 말했다.

“하란재성 씨. 그쪽 하기 나름이에요. 아버지 역량에 따라서 아들 인생이 바뀔 수도, 그대로일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본인 다리도.”

원세영은 하란재성의 하반신을 곁눈질했다. 오른쪽 무릎 밑으로는 의족. 그것도 오래된 재래식 의족이었다. 가죽 코르셋으로 고정하는 형태라 탈착용이 불편하고 피부에도 좋지 않으며, 무엇보다 무거웠다.

유미현은 그에게 가볍고 튼튼한 새 다리를 약속했다. 올마이티 그룹의 윤태금이 신체 보조기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최대한 인간과 흡사한 로봇을 만드는 게 목적인 공학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기우희에게 불의의 사고나 각종 재해, 혹은 자해로 신체 일부를 잃은 사람들의 ‘샘플’을 요청한 바 있었다. 그에 따르는 비용은 전부 올마이티 그룹에서 부담한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놓았다.

기우희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하나, 지금껏 해동문국에서 지역별, 유형별 장애인 비율이 정확하게 집계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둘, 이번 기회에 국가 차원의 ‘인체 보조기 지원 사업’을 진행하여 민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세계 각국에 무기를 팔아 치우는 외국의 대기업에서, 최신식 기술로, 땡전 한 푼 받지 않고 보조기를 만들어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아직 기우희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유미현은 이 국가적인 프로젝트 또한 선전 방송으로 제작할 계획이었다. 가능한 불행한 스토리를 가진 사람을 모으고 시청자들 눈에서 눈물 좀 뽑아낸 다음, 올마이티 그룹의 빛나는 기술력으로 제작한 보조기를 보여 준다. 의뢰인은 이전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편해진 삶을 살아간다. 장애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거뜬히 해내면서. 그렇게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완성.

자세한 건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의뢰인 비율은 대략 생각해 두었다. 민간인 5, 군인 3, 용병 2. 민간인은 20대 미만의 아이와 청소년 위주로 선정한다. 같은 스토리라도 아이가 주인공이면 감동이 배가 되니까. 왜 그런 거 있잖아. 불구로 태어나서 버려졌다거나, 아픈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위험한 일을 하다가 다쳤다거나.

원세영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본인이 무자비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죽기 전에 마음껏 뛰어 보셔야죠. 애들도 업어 주시고.”

하란재성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원세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엔 아쉽게 못 만났지만, 다음번엔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올마이티의 윤태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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