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냄새가 남아 있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을 비비자 깃털로 속을 채운 베개가 부드럽게 꺼졌다. 류진은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철근으로 느껴질 만큼 피곤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형.”
권세혁이 얼음물과 숙취 제거제를 내밀었다. 류진은 노란색의 납작한 알약을 몇 차례에 나누어 겨우겨우 삼켰다.
“괜찮아?”
권세혁의 커다란 손바닥이 류진의 이마와 뺨을 만졌다. 류진은 배시시 웃었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괘아나.”
류진은 자기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소리로 알았다. 권세혁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이지러져 보였다.
“술 안 마셔도 된다니까.”
“그애도.”
“뭐가 그래도야.”
“괘아나, 난.”
권세혁이 피식 웃었다.
“발음도 제대로 못 하면서….”
“왜 나한테는 사투리로 얘기 안 해?”
“형 진짜 취했다.”
권세혁은 웃으면서 류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달아올라 붉어진 뺨이 아니라도, 어설픈 발음이 아니라도, 지금 류진은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을 했다.
“응? 왜에….”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애교부리는 것도 여느 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엄마가 쓰지 말랬어. 광성에서는 다른 지역 출신을 무시하니까.”
권세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쿠나.”
“함풍은 사투리 안 써서 몰랐지?”
눈을 감은 류진의 입술 사이에서 흐으응,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권세혁은 외조부가 원망스러웠다. 손자뻘인 사람 상대로 신경전이라니. 어른답지 못하게….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권세혁은 류진은 침대에 똑바로 눕혔다. 취한 사람은 자기가 취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
“형. 자?”
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목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가 답답해 보였다. 외출복을 입고 자는 건 확실히 불편할 것이다. 권세혁은 누운 류진의 위로 몸을 숙였다.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대는 순간, 뒤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바로 뒤를 돌아보지 못한 건 불안해서였다. 혹시 누가 서 있을까 봐. 사람이면 다행인데, 정수헌의 누가 감히 자신을 몰래 엿본단 말인가. 광성에서 겪은 사생팬들도 감히 집 안으로는 침입하지 못했었다.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세, 세상에 귀신은 무슨. 난 어렸을 때도 그런 거 안 무서워했어.
“어후.”
아무도 없었다. 방 안은 그저 고요했다. 시계 초침이 재깍거리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도둑이 제 발 저린 건가. 권세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마치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기분이었다. 지금 나는 취한 사람을 어떻게 해 보려는 게 아니라고. 정말 답답해 보여서, 그래서….
난 류진이 형을 편하게 해 주고 싶을 뿐이야. 권세혁은 그렇게 되뇌면서 손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모퉁이 벽에 나란히 등을 기댔다. 권세혁이 복도로 나와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을 무렵, 기우희는 윤태금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왜 때리세요?”
“너 때문에 들킬 뻔했잖아.”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됩니까?”
“네가 문 닫았잖아. 소리가 그때 났다고.”
“애초에 소령님이 궁금하다고 하시지 않았으면….”
기우희가 주먹을 흔들자, 윤태금이 고개를 돌리고 꿍얼거렸다.
“저 방이 3층 손님방 중에서 제일 좋은 덴데. 세면대 바꿔야겠네요.”
“할 일 없냐? 그만 가라.”
“아직 제 제안에 대답 안 해 주셨잖습니까.”
기우희는 한숨을 쉬었다. 권세혁이 류진을 3층 손님방까지 업고 올라왔을 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손님방에서 윤태금과 함께 있었다. 인기척에 복도를 내다보니 누군가 토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적어도 권세혁은 자기 몸을 가눌 수 있을 만큼 멀쩡했다. 소리의 주인은 분명 류진이었다.
기우희는 곧장 류진에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윤태금이 그를 막았다. 왕자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알아서 하기는….
기우희는 취해서 누운 류진의 위로 몸을 숙이던 권세혁을 떠올리고 한탄했다.
권세혁과 정류진이 뭘 하는지 궁금해하는 게 아니었다. 윤태금이 문을 열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살짝 열린 문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었다.
“소령님도 보셨죠?”
“…….”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왕자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
“청춘이네요. 흐흐.”
기우희는 윤태금을 세게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다. 지금도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이듯 말하는데, 큰 소리가 나면 안 되니까. 이번에야말로 권세혁이 박차고 나와 ‘여기서 뭐 해? 나랑 류진이 형 훔쳐봤어?!’ 할 것 같아서.
“분위기 죽이던데. 그렇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입단속을 좀 하면 좋겠군. 누굴 모시는 일을 하려면 평소에도 혓바닥이 짧아야 해.”
기우희는 윤태금을 지나쳐 걸어갔다. 뒤에서 그가 불렀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윤태금의 제안에는 지금 당장 대답해 주지 못한다. 진압 차량을 원정 사냥에 동원하려면 세 사람의 허가가 더 필요했다. 권세혁과 장두현, 그리고 신해범까지. 어쨌든 무조는 풍기대의 재산이었다.
모퉁이를 돌자 뒤통수에 따라붙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기우희는 목을 좌우로 꺾으면서 한 손으로 어깨를 주물렀다. 맥주 몇 캔에 나가떨어질 자신이 아니었다.
정수헌 본관의 3층 전체가 손님방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지금 정수헌에 머무는 다른 손님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이곳의 수많은 방 중 아무 데나 하나 골라 들어가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아.”
“…어.”
비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있었다. 네 쪽짜리 미세기 창이 열렸음에도 담배 냄새가 지독했다. 어지간히 피워 댄 모양이다.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재떨이를 살피니 꽁초가 수북했다. 완전히 헤비 스모커로군. 기우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상대방이었다.
“풍기대?”
기우희는 여자의 모습을 살폈다. 민소매 셔츠를 입어서 드러난 어깨에 용 문신이 화려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는 신해범이 피우는 것과 같은 고급품이었다. 의외였다. 단물만 빼 먹히고 버려지는 용병들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접이 괜찮은 모양이다.
“실례했습니다.”
기우희는 고개를 까딱이고 퇴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튀어나왔다.
“기우희 소령이지?”
대뜸 날아온 반말이 거슬렸다. 보아하니 또래 같은데, 언제 봤다고….
기우희는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왠지 낯익었다.
아, 알겠다.
장두현이 원정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선두의 퍼런 차에서 내리던 모습을 봤다. 넓은 어깨에 문신이 인상적이라 기억했다.
기우희는 턱을 쳐들었다.
“그런데.”
헤비 스모커가 다가왔다. 담배를 비뚜름하게 물고 있었는데 필터에 잇자국이 무수했다.
안 좋은 버릇이 있구먼….
“한번 얘기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네.”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어서. 이야기는 다음번에 하지. 날이 밝은 다음에.”
마지막 말에 힘이 들어갔다. 늦은 밤에 정수헌 관계자와 단둘이 있는 상황은 거북했다. 그가 겁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장진은 장두현의 앞마당이었고, 정수헌은 늙은 용의 아가리 속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정류진이 일하는 중이었다.
기우희는 그가 덜떨어진 맹추라서 장두현의 잔을 다 받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류진은 일부러 취한 것이다. 비록 속이 아파 토하긴 했어도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이 권세혁에게 어떻게 비칠지 계산했을 것이다.
‘분위기 죽이던데. 그렇지 않았습니까?’
비단 윤태금만 그렇게 느끼진 않았을 거라고, 기우희는 생각했다.
류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권세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멋쩍은 목소리.
“안 잤구나.”
“응….”
“미안.”
“뭐가.”
류진은 살짝 웃으면서 다리를 벌렸다. 권세혁의 단단한 몸이 아랫배를 지그시 눌러 왔다. 권세혁의 목을 끌어안았더니 그가 흠칫했다.
“어?”
“이리 와.”
“잠깐만… 왜.”
“너 시원해.”
권세혁의 부드러운 귓불이 파르르 떨렸다. 귓바퀴부터 귓불까지 영산홍 꽃잎처럼 붉었다. 류진은 그의 귀에 숨을 훅, 불어넣었다.
“간지러워.”
“재밌잖아.”
류진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권세혁이 푸르르, 푸르르 몸을 떨었다. 류진은 웃음을 흘리면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오늘 밤 그가 차려입은 근사한 정장을 흩뜨렸다. 지금 권세혁에게서는 약 냄새를 감추려고 뿌리는 지독한 향수 냄새도, 액상 담배 특유의 쪄낸 대마 냄새도 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서는 태양 냄새가 났다. 한낮의 따사로운 볕 냄새. 색깔로 표현하자면 노란색.
류진의 감은 시야에 밀짚모자를 쓴 채 태양 꽃을 한 아름 안은 권세혁이 나타났다. 키 큰 해바라기들 틈에서도 그의 뒷모습은 뚜렷하게 잘 보였다.
권세혁이 뒤를 돌아본다. 웃는다. 희고 말간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과 찬란한 미소. 빛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세혁아.”
“응.”
“나 갖고 싶어.”
“뭐든지 말만 해.”
“네 증표를 받고 싶어.”
“줄게.”
권세혁이 말했다.
“형한테 줄게. 약속했잖아.”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장진에서는 가능했다. 강력한 연적인 신해범이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권세혁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온 앞마당이었다.
“나 이길 자신 있어.”
상대는 외조부였다. 자기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하나 이기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영영 승리할 일 없을 테니 혓바닥 깨물고 뒈지는 게 낫다고, 권세혁은 류진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이겨 줄게. 내가 형의 가치를 증명할게.”
전투 잠수함 한 대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권세혁에게 류진은 그랬다. 그렇다는 사실을 외조부에게 알리고 싶었다.
출신 성분이 낮아도 상관없다. 류연비의 동생인 게 뭐 어떻다고.
권세혁은 류진의 눈을 들여다봤다. 깃털 베개 위에 흐트러진 까만 머리칼을 그러쥐었다. 머릿밑이 아프지 않게 조심해서 움켜쥐느라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말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형을 끌어올릴게.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윤태금이 함께였던 자리에서 외조부는 말했다. 류연비의 친동생이 과연 너와 의도치 않게,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생각하느냐.
권세혁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아니라도 개안타. 내는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그럼 네 엄마한테 가 말해라. 내는 불륜녀 동생허고 사랑에 빠졌어요, 해라. 가 말해 바라.’
‘할배한테 먼저 말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때 외조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음을 권세혁은 눈치챘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엄마보다 할배가 위 아이가. 우리 집에서.’
어머니가 겁나서 내려온 거 맞았다. 외조부의 허락과 증표를 얻으면 어머니의 반대로부터 류진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외조부는 당장에 어머니에게 류진의 존재를 알릴 터였다.
외조부의 입을 억지로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게’ 할 수는 있었다.
‘내 인생에서 허덜시리 중요한 일인데, 할배가 먼저 알아야지. 엄마는 그다음이고. 아니가?’
권세혁은 외조부를 인정함과 동시에 자극하는 방법을 썼다. 그가 류진에 대한 일을 어머니에게 일러바치기 전에, 내가 류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험해 볼 마음이 들게 했다.
마지막 카운터까지 깔끔하게.
‘솔직히 할배도, 내 문제로 엄마 걱정시키기 싫잖아.’
외조부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자기 선에서 손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결국 외조부는 입을 다물게 되어 있었다. 딸을 걱정해서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류진이 형은 내를 용서해 준 사람이다. 내는 류진이 형 보고 있으믄, 내한테 있는 힘을 다허고 싶어진다. 할배는 살믄서 이런 기분 느껴 본 적 있나? 내는 처음이다.’
자존심 센 사람은 독불장군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한번 마음먹으면 태세 전환이 빠르다. 그렇게 바뀐 마음은 좀처럼 흔들리지도 않는다. 자존심 센 사람에게 번복은 자해나 다름없기 때문에.
권세혁은 외조부가 그 스스로가 먼저 제안한 사냥 내기에서 비겁한 수를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는 짓이니까. 스스로의 실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니까.
그러니까… 이기면 되었다. 내기에서 외조부를 이기면 모든 일이 단번에 해결됐다. 류진은 전투 잠수함을 받을 거고, 어머니는 어리연함의 소유주가 된 류진을 며느리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형….”
류진과 만난 뒤로 가끔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류연비는 풍기 문란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는 숙부와 곽재헌 사이의 정쟁에 휘말린 희생자일지도 모른다고. 옛날부터 연예인은 전쟁의 선동 도구로, 또 정치가들의 비리를 덮는 가림막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유명세는 대중의 시선을 끄니까.
분홍색으로 물든 뺨을 만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 조그만 얼굴이 자길 쳐다보면 심장이 뛰었다. 전신의 혈류가 빨라지고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해졌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며 들고일어나는 것 같았다.
류진은 그랬다. 내게 있었으나 자각하지 못하던 것들을 깨닫게 했다. 권세혁은 류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형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드러난 맨가슴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만져도 처음처럼 생소했다. 권세혁은 자신의 머리칼 속으로 들어와 두피를 건드리는 손가락을 느꼈다.
“내 머리 마음에 들어?”
“부드러워서 좋아.”
“실컷 만져. 다 형 거니까.”
권세혁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두 팔 아래 흐트러진 류진이 누워 있었다. 달아오른 얼굴에 새빨간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망설이지 않고 키스했다.
권세혁은 류진의 벨트를 풀면서 쿡쿡 웃었다. 연인에게 자기 어렸을 적 옷을 입히는 게 괴상하다고 수군대는 고용인들을 안다. 응, 알고 이러는 거야. 이 사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나로 처발라 버릴 거야.
코끝에 맴도는 신해범의 향수 냄새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추워….”
“아깐 덥다며.”
알몸이 된 류진이 어깨를 떨었다. 마른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추워. 세혁아. 나 옷….”
“이거? 이제 이런 거 필요 없어.”
권세혁은 들고 있던 옷가지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까부터 답답하게 목을 조이던 셔츠 단추를 잡아 뜯으며, 군침 도는 속살을 내보이는 류진의 위로 쓰러졌다.
분홍색 뺨을 한 류진이 배시시 웃었다. 권세혁은 그가 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취한 사람을 상대로 스킨십을 한다는 데 거리낌은 없었다. 류진이 자신을 원했다. 내일 아침, 아니 새벽녘에라도 잠에서 깬 류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한다면 상처받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권세혁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자기가 어릴 때 입었던 정장 차림으로 정원에 나타난 류진을 봤을 때부터 그랬다.
“우린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젖꼭지에 입술을 대고 빨았다. 류진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권세혁은 제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오는 손가락 감촉을 느꼈다. 두피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듯이 문지르는 손길의 주인은 한 사람뿐이었다.
“좋아해. 좋아해… 너무 좋아해.”
“응….”
작은 목소리지만 류진이 답해 주는 게 기뻤다. 젖꼭지를 빨며 한 손으로는 다른 쪽 가슴을 어루만졌다. 마르고 실팍한 몸뚱이였다. 힘껏 그러쥐어 주무를 지방층이 없었다. 그런데도 잠시라도 손을 떼면 애가 타고 목이 말랐다. 함께 있는데도 그랬다.
마른 허벅지를 움켜쥐고 벌렸다. 류진은 순순히 몸에 힘을 빼고 다리를 늘어뜨렸다. 권세혁은 서슴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 류진이 대꾸했다.
“응.”
여전히 작은 목소리였다.
“아직도?”
“아직도….”
“더 많이 섹스해야겠다.”
가뜩이나 분홍색인 얼굴이 더 빨개졌다. 붉은 기가 목까지 물들였다. 권세혁은 두드러진 목 빗근에 이를 세웠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이 목에, 이 예쁜 모가지에 자국을 남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건 결혼 기념으로 아껴 둘 생각이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떡하니 보이는 위치에. 주인이 있다는 증거로.
곧고 팽팽하게 뻗은 쇄골에 키스했다. 술을 따라 마셔도 될 것처럼 우물이 깊었다. 권세혁은 그 쇄골 우물에 한참이나 입술을 묻었다.
류진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힘차게 움직이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권세혁은 이 소리가 나보다 늦게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가 됐든, 어떤 상황이든, 내가 이 사람보다 먼저 죽었으면 좋겠다….
정류진이 없는 세상에서 단 일 초도 살고 싶지 않으니까.
바지를 벗기자 맨다리가 드러났다. 한 손으로 속옷을 잡아 끌어 내렸다. 마른 다리가 움찔움찔 오므리려 하기에 허벅지를 잡아 넓게 벌려 놓았다.
류진이 흐으응, 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워.”
“기분 좋을 거야.”
이제 류진이 몸에 걸친 거라고는 검은 양말뿐이었다. 나신이나 다름없는 몸뚱어리가 권세혁의 두 팔 사이에 놓였다. 그는 천천히 벨트를 풀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꼿꼿하게 대가리를 쳐든 성기를 꺼내 류진에게 보여 주었다.
핏줄이 불거진 채 번들거리는 좆을 본 류진이 고개를 돌렸다. 권세혁은 웃었다.
“왜? 보기 싫어?”
“흔들지 마… 멍청아!”
“징그러워? 뭘 새삼스럽게. 그러지 말고 인사해 줘. 안녕, 권세혁 주니어. 나는 네 주인님이야.”
“꺼져!”
“싫어요.”
권세혁은 류진의 코앞에 성기를 갖다 댔다. 류진은 피하지 않았다.
“빨아 줘.”
“너….”
“얼른.”
권세혁은 허리를 흔들며 재촉했다. 쿠퍼액으로 젖은 귀두를 류진의 입술에 대고 꾹, 누른 채 둥글리듯 굴리면서 비벼 댔다.
“들어갈래… 허락해 줘.”
류진은 눈을 감았다. 입술을 열자마자 묵직한 살덩이가 치고 들어왔다. 숨 한번 고를 틈도 없었다. 혓바닥을 누르고, 입천장을 밀면서 깊숙이 들어왔다.
“우…!”
본능적으로 고개를 흔드는데 권세혁의 손바닥이 이마를 꾹 눌렀다. 류진은 간신히 눈을 떴다. 눈물로 흐릿한 시야에 잔뜩 흥분한 얼굴의 권세혁이 있었다.
“내가 움직일게.”
반쯤 떴던 눈을 도로 감았다. 류진은 권세혁의 허벅지를 긁으면서 버텼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얼굴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가슴우리가 부서질 것같이 아프고,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었다. 권세혁의 무자비한 움직임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우우… 으… 우으으….”
“기분 좋아. 형, 나 형이 좋아. 정말 좋아.”
몸이 땅속으로 꺼지는 듯했다. 권세혁은 평소보다 거칠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걸까? 턱이 얼얼하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그는 사정의 순간에도 성기를 빼지 않았다. 류진의 입 안에 완전히 털어 넣었다. 헐떡거리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어서, 밖으로 흘러나온 정액을 도로 넣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웃었다.
“너무 예쁘다.”
뜨거운 입술이 다가왔다. 그는 정액으로 젖은 류진의 입술을 거리낌 없이 빨았다. 류진은 눈을 감고 받아들였다. 권세혁의 머리와 목,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밑에도 들어갈래.”
방금 사정한 게 무색할 만큼 단단한 성기가 아랫배에 비벼졌다.
“아….”
권세혁이 보챘다.
“응? 넣을래. 넣을래. 넣게 해 줘.”
“나 자고 싶은데….”
“자도 돼. 형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권세혁이 아래로 내려갔다. 은근슬쩍 오므리려는 다리를 잡아채 홱 벌렸다. 류진의 골반에서 뚝 소리가 났다.
“아!”
“보기 좋아. 이렇게….”
권세혁은 류진의 국부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평생 나한테 다리 벌려.”
오직 내게만.
류진이 울먹거렸다.
“너 커서… 아파.”
“천천히 할게. 안 아프게 할게. 형, 내가 진짜… 노력할게.”
권세혁은 류진의 엉덩이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보드라운 살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이 위치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류진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 위해서, 자신에게 안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이걸로 괜찮지?”
권세혁은 우그러진 노란색 플라스틱 통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하얀 로션으로 젖은 손을 류진에게 보여 주었다.
“좀 차가워.”
“으.”
류진은 허리를 움찔거렸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어디 가.”
“이상해. 이상….”
“도망가지 마.”
권세혁은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는 류진의 골반을 잡아 내렸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류진의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휑하니 벌어진 그의 치부를 감상하며 엉덩이 사이를 범하는 순간이 가장 기분 좋았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움찔움찔 반응하는 류진은 정말 예뻤다.
“으응, 으… 아.”
“손가락이야. 괜찮아. 아픈 거 아냐.”
“으아… 앗. 앗.”
“겨우 하나야. 괜찮다니까.”
사실 세 개였다. 하지만 류진이 그걸 알면 무서워할 것 같아서, 권세혁은 당사자가 모를 수 없는 거짓말을 했다.
류진의 두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연신 아파, 아파, 울먹거리는 얼굴로 매달려 왔다. 권세혁은 속으로 한숨 쉬었다. 형, 좆이 안 달린 놈도 여기서 멈추지는 못할 거야.
“진짜 많이 해야겠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손가락을 한꺼번에 빼냈다. 류진이 안심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권세혁은 끄덕거리는 좆을 움켜잡아 입구에 댔다. 로션으로 젖은 입구에 푸욱, 힘주어 밀어 넣었다.
“아… 악…!”
“겨우 여기서, 아프면 어떡해.”
귀두가 간신히 진입했을 뿐이었다. 가장 굵은 머리 부분이긴 했다. 권세혁은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늘어난 입구를 내려다봤다.
숨을 참으며 조금씩, 조금씩 쑤셔 넣었다. 두 손으로는 류진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아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으응, 으. 하아. 앗, 앗…!”
조금이나마 덜 아픔을 덜어 보려는 듯 허리를 흔드는 류진이 보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귀여워서 내버려 두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통, 통 흔들리는 성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권세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에 보이는 살덩이가 먹음직스러웠다. 먹고 싶었다. 입에 넣고 빨아 대고 싶었다. 갈 것 같다며 울부짖는 류진을 무시하고, 머리카락이 죄다 쥐어뜯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쏟아 내는 정액을 핥아 먹을 수 있다면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눈을 반쯤 뜬 류진이 물었다.
“다 됐어…?”
“응?”
“다 넣었, 느냐고…!”
“아… 응.”
아니었다. 이제 절반 들어갔다. 다 넣었다고 거짓말한 건 조금 놀려 주고 싶어서였다. 끝까지 품을 수 있으면서 아프다고 우는 모습이 예쁘고 귀여운 한편 괘씸하기도 해서.
권세혁은 탱글탱글한 볼깃살을 주무르며 버석하게 웃었다. 그럼 류진이 형, 총통 부인을 공으로 해 먹을 줄 알았어?
“다 넣었어.”
그는 뻔뻔하게 웃으면서 거짓말했다.
“별로 안 아프지?”
“진짜 다… 한 거지?”
“그렇다니까.”
권세혁은 류진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체모가 닿지 않는다는 걸 눈치챌 법도 한데, 류진은 눈물 고인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럼… 움, 직여도. 돼.”
“진짜? 나 막 흔들어도 돼?”
“대신에 천천히. 천천히!”
하반신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류진이 눈을 꼭 감았다. 긴 속눈썹이 젖어 들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권세혁은 반만 넣은 채 흔들었다. 오물오물하는 입구와 선단을 보드랍게 감싸 주는 내벽이 기분 좋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욕구의 절반도 풀리지 않았다.
“형, 좋아? 응? 이러면 기분 좋아?”
“몰라. 몰라….”
“사진 찍어 줄까? 동영상 좋아하지? 지금 형, 예뻐. 엄청….”
권세혁이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화면에 류진이 담겼다.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부터 숨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 꼿꼿해진 유두, 긴 목덜미, 새빨개져서 울먹거리는 얼굴을 꼼꼼하게 촬영했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을 때 땀으로 젖은 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우리 형 화면발도 죽이네.”
“아… 찍지 마….”
“왜?”
권세혁의 휴대폰에서 찰칵, 사진 찍는 소리가 여러 번 났다. 플래시는 터지지 않았다.
“형 이런 거 좋아하잖아.”
그가 휴대폰을 흔들었다. 류진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온몸이 발갛게 익은 꼴로 울먹이는 자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안 좋아해. 하지 마. 이리 와.”
“그럼 예전에는 왜 찍었어?”
“그건….”
권세혁이 상체를 숙이자 삽입이 깊어졌다. 류진은 헉, 숨을 들이켰다.
“너 끝까지 다…!”
“안 넣었지.”
“야!”
“형은 다 좋은데, 안이 너무 좁아.”
살덩이가 밀려들어 왔다. 내벽을 때리면서 파고들었다.
“아아아…!”
명치가 후끈해졌다. 결장이 몸 위로 도망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본래 위치에서 밀려난 내장들이 짓눌려 짜부라지고 있었다. 배가 아프고, 가슴도 아프고, 숨도 쉬기 힘들었다. 좆이 아니라 팔뚝이 들어와 몸속을 휘젓는 착각이 들었다.
류진은 입을 벌리고 헐떡거렸다.
“아아, 하아, 하, 하으, 읏. 우으읏.”
엉덩이를 주무르던 권세혁의 손이 떨어졌다. 혹사당해 붉어진 살갗에 까슬한 체모가 비벼졌다. 권세혁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끝?”
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고 들어왔다.
“우으으….”
눈을 치뜬 류진이 턱을 바르르 떨었다. 권세혁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여기가 끝이지.”
“아파. 아파아… 조금만 빼… 응?”
“숨 쉬어. 숨 쉬어.”
끝까지 삽입한 채 허리를 잘게 흔들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 주려는 시도였지만, 류진은 그마저도 힘들어 보였다. 권세혁은 덜덜 떨리는 허리와 골반을 번갈아 쓰다듬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하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있었다. 넣은 걸 빼라는 부탁은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그건 정말이지… 부처가 와도 못 한다.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은.
“날 속였어.”
“서방님 물건 크기도 모르는 형한테도 잘못이 있어.”
“개소리하지 마!”
“멍멍!”
“야!”
암팡지게 움켜쥔 주먹이 허공을 휘저었다. 권세혁은 잠자코 맞아 주었다.
“다 했다며! 끝까지 넣었다며!”
“형이 너무 예뻐서. 귀여워서. 나는 그냥….”
“아파, 아프다고. 너 때문에 힘들어. 힘들어, 나.”
“그래도 술 다 깼잖아.”
권세혁은 류진의 턱에 키스했다.
“정신이 확 들지?”
“꺼져…!”
“형 몸속으로 꺼질래.”
웃을 때 처지는 눈매가 별안간 사나워졌다. 류진은 숨을 삼켰다.
“아! 아아! 아아아, 앗! 아, 아으! 읏!”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튼튼한 마호가니 침대 이음매에서 나사못 흔들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류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이 아프고, 저릿저릿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 숨 쉴 틈도 없었다.
권세혁은 약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숨 한번 들이마시려 해도 입술이 덮쳐 왔다. 타액이 끊임없이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받아 마시는 수밖에.
꼴깍, 꼴깍, 류진의 목울대가 바쁘게 오르내렸다. 한참 동안 각도를 바꿔 가며 키스하던 권세혁이 비로소 입술을 뗐다. 뜨거운 숨이 폭탄처럼 터졌다.
“형….”
그가 신음했다.
“신해범 향수 쓰지 마.”
권세혁은 거칠게 움직였다.
“나랑 약속해. 두 번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굵고 긴 손가락이 깍지를 끼어 왔다. 류진은 헐떡이며 고개를 돌렸다. 권세혁의 손등에 푸르스름하게 돋은 핏줄이 보였다.
“아!”
삽입이 깊어졌다. 하반신이 완전히 열리고, 뭔가가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지점까지 범해졌다.
맞잡은 손에 엄청난 아귀힘이 가해졌다.
“아악…!”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류진은 더럭 겁이 나 소리쳤다.
“아파! 세혁아, 아파! 싫어!”
“두 번 다시는!”
“안 써. 안 써! 아파! 손 놔아!”
“약속해?!”
“약속… 해…!”
권세혁은 깍지 낀 손을 풀어 주었으나, 난폭한 허리 짓은 그대로였다. 입구를 찢어발길 기세로 사납게 처박던 그가 어느 순간 어깨를 확 움츠리더니 류진의 유두를 덥석 물었다.
“아아아…!”
가슴을 강하게 빨렸다. 류진은 날카로운 통증이 관자놀이를 꿰뚫는 순간에 사정했다. 마른 배 위에 뽀얀 정액이 뿌려졌다. 권세혁의 셔츠까지 더럽혔다.
“형….”
권세혁은 사정 후 힘이 빠져 늘어진 류진을 내려다봤다.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쌕쌕 숨 쉬고 있었다. 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어쩌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겼지? 유전자의 조합이 어떻게 되면 저런 얼굴이 만들어지냔 말이야.
권세혁은 방금 류진이 사출한 정액을 손가락으로 훔쳐 내 맛을 보았다.
“달다.”
전혀 단맛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체액에서 단맛이 났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니면 내가 미쳤거나.
권세혁은 키득키득 웃으면서,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류진의 가슴에 정액을 펴 발랐다. 류진이 목을 움츠렸다.
“싫어… 하지 마, 그거….”
“형아 젖 나온다.”
“아냐.”
“뭐가 아니야.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
“으으응, 아냐. 아니야아.”
권세혁은 저항하는 류진의 손목을 붙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정액으로 촉촉해진 가슴에 입술을 대고 빨기 시작했다.
“맛있다.”
양쪽 젖꼭지를 번갈아 가며 희롱했다.
“하지 마아….”
류진이 버둥거렸다. 고개를 젓고 등허리를 움찔거리면서 보챘다. 권세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놀렸다. 마침내 그의 가슴에 정액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전부 핥았을 무렵, 권세혁은 성기를 아슬아슬하게 뺐다.
귀두가 입구에 살짝 걸쳐져 있을 정도로만 빼냈다가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잔인한 삽입에 류진은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눈을 치뜨면서 고개를 젖혔다. 권세혁은 류진의 입에 자기 손가락을 물렸다.
“우으으. 흐그윽.”
“형, 죽지 마.”
“으윽. 흐윽.”
“죽어도 내가 먼저야.”
정류진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
권세혁은 한쪽 팔로 류진의 상체를 끌어안으면서 사정했다. 육감을 곤두세워 그의 냄새와 체온을,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좋아….”
류진의 땀 냄새가 좋았다. 그가 쏟은 정액 냄새가 좋았다. 권세혁은 류진의 안을 적시면서 생각했다. 그가 내 냄새를 풍겨 주지 않는다면,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체취를 풍기면 좋겠다고.
다른 남자 말고.
권세혁은 힘없이 늘어지는 류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이마가 뜨거웠다.
“으….”
“쉬어. 이제 쉬어도 돼.”
“아…….”
“쉬면서 기다려. 내가 씻겨 줄게.”
권세혁은 류진의 가슴팍에 뺨을 댄 채 가쁜 숨을 골랐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권세혁은 기절하듯 눈감아 버린 류진의 얼굴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침대를 벗어난 그의 뒤에서 다 꺼져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
“목욕물 받으러.”
“응….”
권세혁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블라인드 버튼을 눌러서 벽을 불투명한 유리로 바꾸었다. 이제 류진은 욕실 안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수온은 반신욕에 맞춰져 있었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만졌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랐다. 욕조에 물이 다 찰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마지막까지 남은 두 장을 전부 보내기로 했다. 분홍빛 뺨을 하고 우는 류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한 장, 다리를 한껏 벌린 채 자신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전부 보이는 전신사진 한 장.
신해범에게 전송했다. 메시지는 딱 한 마디 적었다.
「예쁘죠?」
자살하고 싶어질 것이다.
***
어린 시절 생계를 위해서 한 밀렵 행위 덕분에 정수헌의 사병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고 밝힌 마강희는 원정 사냥을 늙은이의 심심풀이 체력 단련 수준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구십오만 평짜리 매머드급 사유지였다. 장두현은 이 땅의 지형별 특성을 살려 구획을 나누었다. 초입에 마련된 캠핑장을 제외하면 오로지 평야, 숲, 강과 호수로 이루어진 천연의 자연환경이었다.
장진의 여름철 온도는 사십 도까지 올라간다. 장마로 폭염이 한풀 꺾여 가을 날씨라는 광성은 딴 나라 이야기였다. 습한 바닷바람이 일교차를 몰고 오는 장진은 여전히 낮에는 찜통 같았고, 밤에는 겉옷이 생각날 정도로 쌀쌀했다.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드넓은 광야는 잡초투성이였다. 하지만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전체 부지를 통틀어 삼 분의 일 부근에서 구불구불한 S자형으로 흐르는 취명강(翠明 江)과 만나게 된다.
수온이 높고 대류가 활발해 엄동설한에도 얼어붙지 않는다는 강이었다. 일 년 내내 청록색 물이 흘러서 낮에는 햇빛에 에메랄드처럼 반짝이고, 밤에는 달을 거울처럼 비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마강희는 이 취명강이 정수헌 사병들의 생사를 나누는 갈림길이라고 말했다. 한번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삼도천이나 다름없었다.
강에서 불과 일 킬로미터 떨어진 코앞에 메인 스테이지가 보였다. 장두현이 세계 각국에서 밀수해 번식시킨 야생 동물들이 서식하는 숲 <힐 스톤 그로우> 초입은 전나무와 삼나무를 비롯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침엽수로 꾸며 놓았으나, 들어갈수록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의 모습이었다. 숲이라기보다는 밀림에 더 가까웠고 바위와 늪, 저습지가 있었으며 키와 잎이 큰 활엽수가 우거져 대낮에도 어둑어둑했다.
자고로 평범한 사람은 자연의 거대한 힘에 저항할 수 없다고 하지만, 힐 스톤 그로우는 훈련받은 사병들에게도 자비가 없었다. 광야를 자유롭게 질주하던 차들이 좁고 가파른 비탈길에서 발이 묶이거나 늪에 빠져 바퀴가 헛도는 사이에 태양이 진다. 플래시를 켜지 않으면 코앞에 있는 사람도 찾지 못하는 새카만 밤이 찾아온다.
본토에서는 살지 않는 식육목 짐승들을 풀어놓아 생태계가 망가진 탓에 숲의 주인들은 언제나 배고팠다. 굶주린 짐승들이 고기 냄새를 맡고 기어 나오는 밤은 위험했다.
장두현은 그 위험을 즐겼다.
마강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매번 원정 사냥에 나설 때마다 몇 사람은 반드시 죽어 나간다. 그러나 장두현은 위험한 사냥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어차피 자기는 죽지 않으니까. 사병들이야 얼마든지 대체제가 있으니까. 그리고….
“죽어야 재미있으니까.”
마강희가 조소했다. 그는 장두현이 사냥에 있어서만큼은 ‘반쯤 미친 상태’라고 말했다.
“베어 그릴스가 와도 애먹을걸.”
생존 전문가도 위험해서 혀를 내두를, 그야말로 미친 광기의 사냥이었다.
“강을 건너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해.”
마강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사냥감이 될까.”
기우희는 마강희의 어깨 위 선명한 문신에 입술을 댔다.
“원하는 게 뭐야?”
“여길 떠나는 거.”
마강희는 정수헌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광성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는 풍기대에 입대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꿈….
기우희는 속으로 웃었다. 아름답고 허망한 단어를 오랜만에 들었다.
마강희는 원정 사냥 경험자였다. 그가 고향을 오랫동안 떠나 있어 손님이나 다름없는 권세혁 왕자의 진영에 들어온다면 힐 스톤 그로우에서의 목숨 건 사냥도 무모한 도전은 아니었다.
기우희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성재경이 박차고 나간 마당에, 소령의 권한으로 한 사람쯤 인사 명단에 쑤셔 넣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봐도 마강희는 쓸모가 있었다. 장두현 일행의 선두 차에서 내렸던 그는 관리자급이었다. 사병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장두현 밑에서 비교적 오래 버텼다는 뜻이다. 그건 곧 주인의 비밀을 많이 안다는 의미도 된다.
어쩌면 장두현이 원정 사냥에 사병들을 동원하는 건 자신의 ‘비밀’을 많이 하는 수족들을 주기적으로 솎아 내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친딸과 손자도 권력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병쯤이야, 촌스러운 군용 트럭 스페어타이어와 동급일 테지.
마강희는 사냥 팀이 꾸려질 거라고 말했다. 그때 자기를 꼭 왕자 팀에 넣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자기 목숨을 거는 일이 아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큼은 살아남는다고 믿기에 장두현은 팀을 나누는 일에 무책임했다. 사병 개개인의 특성과 장기를 분석해서 레벨을 균등하게 맞추기보다 동전 뒤집기, 사다리 타기, 심지어는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도 했다.
마강희는 자기가 가장 괴롭다고 느끼는 방식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장두현은 사병 중에서 마음에 드는 리더를 뽑는다. 이번 원정 사냥의 팀장이 되는 것이다. 그 역할은 대개 자기와 같은 중간급 관리자에게 돌아오는데, 이 팀장들이 돌아가면서 자기 팀에 들어갈 사병을 한 사람씩 뽑는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사병은 역량이 뛰어나지 못하거나,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사냥에 동원된 경우였다.
“그런 놈들이 죽는 거군.”
“그렇지.”
기우희는 약속했다. 공격적으로 매달려 오는 마강희의 팔을 잡아 어깨에 걸치며 그의 귀에 대고 말해 주었다. 광성에서는 나를 깍듯하게 소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사병으로서의 경력은 풍기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니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여기 온 정류진 이병에게도 후임 대접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지금쯤 권세혁의 밑에 깔려 낑낑대고 있을 애송이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기우희는 자기가 그와 똑같은 짓을 하게 될 줄 몰랐다.
하기야, 신해범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창한 명분도, 화려한 언변도, 그리하여 훗날 역사의 새로운 한 획을 긋게 되더라도, 결국에 승패를 좌우하는 건 뒷방에서의 친구 놀이였다. 당사자들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전설’ 따위를 만들어 권력자들을 신성시하는 게 아닐까.
기우희는 정류진을 생각했다. 신해범을 생각했다. 진치우와 신예나를 떠올리며 아자 교란 너머 새카만 하늘을 응시했다. 우리의 완벽한 사냥을 위해.
***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왔다. 권세혁은 생체 알람이라도 맞춰진 것처럼 정확히 다섯 시에 눈을 떴다. 류진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어제 고생했으니, 깨어나려면 한참 더 자야 할 것이다.
권세혁은 류진의 벗은 어깨를 어루만졌다. 잠든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저만치 밀려났던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는데 노크가 들렸다. 윤태금이었다.
“별관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뇨, 이젠….”
권세혁은 잠자는 류진을 내려다봤다. 윤태금이 내미는 물컵을 받아 한 번에 비웠다. 턱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치고 말했다.
“어리연함 운용 준비는 다 됐잖아요. 할배 허락만 남았지.”
“그러잖아도 대관께서 보자십니다.”
“새벽바람부터… 나 원. 할배는 날 너무 좋아해.”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윤태금이 따라 웃었다. 그는 말끔하게 다려진 셔츠와 바지를 가지고 왔다. 양말까지 스팀 처리가 되어 뽀송뽀송했다.
권세혁은 의자에 발을 턱, 올려놓았다. 윤태금이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권세혁은 그가 자기 구두끈을 묶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딴 데 보면서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눈깔 돌리란 뜻이야.”
“아. 죄송합니다.”
“예쁘다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희소성이 있으니까 더 귀하게 느껴지지. 안 그래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윤태금은 진심으로 권세혁의 말에 동의했다. 아름다움의 희소성으로 해 먹는 게 보석 장사였다.
그는 가진 자들이 더 사치하고 욕망하길 바랐다. 세상을 망치고 망치다가 파멸하는 자들의 인생은 화려하고 불꽃 같았다. 태양의 폭발을 가까운 곳에서, 그러나 불똥이 튀기지는 않을 만한 위치에서 지켜보는 일은 재미있었다. 타인의 성공도, 파멸도 모조리 자양분 삼아 성장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뭐가?”
“도련님이 왕자님의 운명적인 상대가 아니라도 괜찮으시냐는 말입니다.”
“운명적인 상대?”
권세혁이 픽 웃었다.
“그런 데 목 안 매요. 동화책 졸업은 훨씬 옛날에 했어.”
권세혁은 거울 앞으로 갔다. 브라운 오픈 카라 셔츠에 파텍 필립 문 페이즈. 외조부에게는 없는 모델이라 생각하니 조금 유치하게도 안심이 됐다. 그는 거울을 통해 윤태금을 바라보았다.
“이따가 잠깐, 시간 돼요?”
그는 질문에 숨은 의미를 알아들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물량이 똑 떨어졌는데, 당분간 배달이 어렵습니다.”
“왜요?”
윤태금은 미리 생각해 둔 핑계를 내놓았다.
“원장이 지 팔뚝에 주사 꽂다가 걸려서요. 다행히 간호사랑 얘기가 잘 돼서, 뭐 그쪽도 십 년 경력이고 원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 둘이서 머리 맞대고 급하게 이 병원 저 병원서 물량 끌어와서 개수 맞춰 놓긴 했는데 아무래도 좁은 바닥이라 한번 얘기 나오기 시작하면 큰 소문 되는 게 순식간이지 않습니까. 당분간 서로 조심하자고 독려를….”
“알았어요.”
권세혁은 수긍했지만,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모습이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금단 증상이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쯤 알았을 테니까.
중독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종류의 마약을 투여하는 건 흔한 치료 방법이었다. 예쁜이는 그걸 몰랐다. 뭐, 공급책들 무식한 거야 한두 사람 얘기가 아니긴 했다.
윤태금은 젠틀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가실까요?”
전쟁 같았던 밤이 지나갔다. 정말 이래도 되나, 내가 이러는 게 맞는 걸까 생각하게 만드는 복잡한 새벽도 지평선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태양에 밀려 사라졌다. 아침이 왔다.
기우희는 한쪽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 침대에 걸터앉아 군화 끈을 조여 묶었다.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신해범의 목소리가 푹 잠겨 있었다. 본인도 그걸 아는 듯했다. 몇 번이나 헛기침하는 걸 보면.
“그래서 말인데, 원정 사냥에 진압 차량 운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저쪽에서 내기를 걸었으니 결과를 내고 싶습니다.”
신해범이 쿡쿡 웃었다.
-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어, 지금 자네 승부욕에 불붙은 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 소령이 그러고 싶다면야, 여기 있는 내가 말릴 수는 없지. 그래, 하지만 장두현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진 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네가 적진에서 고생 많아.
신해범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기우희는 목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아닙니다.”
- 증표에 대해서는 아직인가?
“예. 생각보다 고용인들 입단속이 철저합니다. 정 이병도 아직 모르는 눈칩니다.”
- 걔가 알고서도 숨길 깜냥은 안 되지.
“그랬다면 제가 눈치챘을 겁니다.”
- 그럼, 그럼. 우리 기 소령이 누군데.
“…어차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젭니다.”
기우희는 힘주어 말했다. 증표를 걸고 내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오늘 당장 권세혁이나 정류진의 입에서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 난 아직도 궁금해. 왜 꼬꼬가 나한테 그 얘기를 안 하고 갔을까?
신해범은 대놓고 서운한 티를 냈다.
- 최유신한테도 흘렸으면서.
“정확하게 증표라고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 그래도 비슷한 얘기였잖아. MVP가 자기한테 주고 싶은 게 있다, 그런 얘기를 내가 아니라 최유신한테 했다고. 왜?
“…….”
- 나한텐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도 안 했어. 있잖아, 기 소령, 내가 자네한테 이런 얘기까지 하긴 좀 그런데, 자네 일행이 출발하기 전날에 나랑 우리 꼬꼬가 얼마나 오랫동안 붙어 있었는지 알아? 말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고.
“알겠습니다. 정 이병에게 왜 대장님이 아니라 최 대위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어보겠습니다.”
- 아니, 아니!
“아닙니까?”
- 그래, 아니야. 지금 소령이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꼬꼬가 나한테 증표 얘기를 안 해서가 아니라, MVP와 정 이병 사이에 오간… 그래, 약속. 그 중요한 약속을 제삼자인 기 소령을 통해서, 그것도 일행이 장진에 도착한 다음에 내가 알게 됐느냐,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기우희는 속으로 웃었다. 신해범이 오래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오래 생각한 다음에 꺼낸 말일 것이다. 서운하다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하지만 신해범이 착각하는 게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도마 위에 올린다는 건 그 자체로 ‘난 이게 계속 신경 쓰였어’라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빨리 보고했어야 했습니다.”
- 실없는 소리는. 소령은 알자마자 보고한 거잖아.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양쪽 매듭을 다 묶었을 때, 기우희는 문밖의 인기척을 느꼈다.
“실례합니다. 밖에 누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 그래? 누구?
기우희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미닫이문을 열어젖히니 막 노크하려던 포즈로 눈을 동그랗게 뜬 류진이 보였다.
“정 이병입니다.”
- 타이밍 기가 막히네.
신해범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기우희는 류진에게 들어오라고 턱짓했다.
- 전화 좀 바꿔 줘, 소령.
“알겠습니다.”
기우희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 류진에게 건넸다. 조그만 얼굴이 갸우뚱했다.
“대장님 전화다.”
“아….”
별로 통화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류진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소령님, 이거 어떻게 쓰는….”
“긴 쪽이 앞으로 가게.”
이어폰 너머에서 신해범이 웃는 소리가 났다.
- 너무한다, 꼬꼬야. 내 목소리 듣기가 그렇게 싫어?
“그런 거 아니야. 이런 거 처음 써 봐서….”
기우희는 발코니로 나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공기가 뜨겁진 않았다. 난간에 손을 얹고 바깥을 내려다보는데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갈색 머리에 큰 키. 건장한 체격이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권세혁이었다. 그 옆은 윤태금이었고.
두 사람은 분수를 낀 정원 가장자리의 대리석 돌길을 따라서 함께 걷고 있었다. 높은 곳은 땅에서 걷는 사람들의 이동 방향을 파악하기에 좋은 위치다. 그들은 장두현의 개인 집무실이 있는 본관 서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 장두현 만나 보니까 어때? 우리 꼬꼬, 무서운 할아버지한테 닭 털 다 뜯긴 거 아냐?
신해범의 핀잔을 듣는 순간, 류진은 자신이 그의 목소리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대장의 목소리에 안심하는 건 당연했다.
“웃기고 있네. 하나도 안 무서웠거든.”
- 기개가 느껴지네. 좋아. 그런 모습 기대했어.
“보지도 못했으면서 아는 척은.”
- 떨어져 있어도 알아.
“무슨 헛소리야! 당신이 어떻게 알아.”
같이 오지도 않았으면서.
류진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꿀꺽 삼켰다. 일인용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데 무릎이 달달 떨렸다.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고 말했다.
“장두현 별거 없어. 그냥 키 크고 덩치 큰 할아버지야.”
- MVP랑 닮았어?
“응.”
- 정정해? 어디 골골거리지는 않고?
골골거리기는. 집채만 한 트럭 끌고 원정도 다녀오는데….
“응.”
- 슬프지 않냐? 남의 고혈 짜 먹는 노친네는 치매도 안 걸려.
“응….”
- 우리 꼬꼬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당신 물건 없어진 거 봤어?”
신해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류진은 그가 손가락으로 눈꼬리를 훔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 그거 미안해서 나한테 연락 안 했어?
“안 미안해. 어차피 당신은 새것 사면 그만이잖아.”
- 아닌데? 너 복귀하면 절도로 고소할 건데?
“겨우 그런 거 갖고 치사하게!”
- 꼬꼬야 엉덩이 벌려라, 영장 들어간다.
“그냥 새로 사! 미친놈아!”
- 내 카드도 너한테 있잖아.
“그…!”
- 할 말 없지?
“…….”
- 보고 싶다. 우리 꼬꼬.
신해범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감겼다.
- 보고 싶어.
“…….”
- 너는 내 생각 안 해?
한다.
장진으로 내려온 뒤 매일같이.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마다, 당신이었으면 이랬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 응? MVP랑 섹스할 때, 내 생각 안 해?
류진은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리쳤다.
“안 해. 안 해. 죽어도 안 해!”
- 좀 해 주지.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여튼 신해범, 이 인간은 내가 없어서 아쉬운 게 그 짓거리 못 하는 것뿐이지. 이 늙은이 색골. 성격도 더럽고 몸도 별로야. 스태미나도 딸리고 기술도 없어. 그러니까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지….
- 솔직하게 말해 봐. 나랑 MVP랑, 둘 중에서 누가 더 잘해? 누구랑 하는 게 더 좋아?
“시끄러워! 닥쳐!”
신해범의 웃음소리에 관자놀이가 간지러웠다. 류진은 손바닥으로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 꼬꼬야?
“…왜.”
- 건강하지?
“그럼 당연하지. 당신 얼굴 안 보니까 속이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 밤에 잠도 잘 자.”
- 잘됐다. 축하해.
“당신한테 그런 소리 들어 봤자 안 기뻐.”
류진은 신해범이 대꾸하기 전에 질문했다.
“당신은? 당신은 요즘 어떤데?”
- 우와, 지금 내 안부 묻는 거야?
나 출세했네. 신해범이 키득댔다.
“당신 좋아서 물어보는 거 아냐.”
류진은 신해범이 웃는 게 싫었다. 그가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내가 지금 권세혁과 있는데. 당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며칠째 지내고 있는데. 당신은 왜 아무렇지 않아 해? 이제는 날 좋아하지 않아?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아?
연신 ‘나 출세했다, 출세했어’ 해 대는 신해범에게 쏴붙였다.
“아니거든? 당신은 한물갔거든!”
신해범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발했다.
- 오, 그래? 지금부턴 우리 정류진 대장군 각하의 시대라 이거야? 내가 벌써 한물간 늙은이 신센가? 아쉽군, 아쉬워.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그래도 뭐, 우리 정류진 대장군 각하께서 꺼지라면 입 닥치고 꺼져야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그득했다. 일부러 저렇게 말한다는 사실을 안다. 알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페이스에 말렸다. 류진은 발가락을 오므렸다.
“그렇게 말하면 좋아?”
- 재밌어. 우리 섹스할 때 생각나. 너 나한테 엄청나게 욕하잖아. 사실 그래서 좀 흥분된다? 기억해? 너 장진 가기 전에 말이야. 뜨거웠던 우리 둘만의 밤.
“개소리 집어치워라.”
- 난 기억해. 얼마나 심장이 뛰었는지 몰라. 그때 우리 병아리 각하께서 뭐라고 했더라. 나를 바꾸겠다고 하셨나? 누가 누구 인생을 뜯어고친 것처럼?
“지금 호, 혼자 있나 보네? 그렇게 헛소리해 대는 걸 보면.”
- 그날 우리 병아리 각하의 멋진 모습. 나 완전 뿅 갔잖아. 이제 어떡해? 어딜 봐도 우리 꼬꼬밖에 생각이 안 나. 텔레비전을 봐도, 일하면서 대원들을 봐도 그렇고, 하다못해 치우 놈 그 뺀질뺀질한 얼굴을 보고도 우리 꼬꼬가 생각났다니까? 어떡하지? 중증이야.
“입 다물어 또라이 새끼야! 아침부터 별 거지 같은…!”
인내심이 바닥났다. 더는 참고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어디까지 지껄이나 그래 한번 들어 보자, 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 와중에도 이어폰을 빼 바닥에 내동댕이치지 않는 건 순전히 기우희의 물건이어서였다.
“한마디만 더 해. 한마디만 더 하면 주둥이에 총을 처넣어 버릴 거야.”
- 처넣으면 핥아 줄게. 우리 꼬꼬 이쁜 좆이라고 생각하고.
“허…!”
- 어제 네 사진 보면서 자위했어. 근데 아무래도 약발이 부족하더라고. 뭐랄까, 임팩트가 부족하달까? 그래서 다른 작품을 찾아봤어. 기억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있잖아. 취조실에서 찍은 거. 샤워실 편도 있고. 나 그거 아직도 갖고 있어. 네가 하도 울어서 스너프 느낌 나긴 하는데, 그래도 찍어 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도 알지? 나 한 번으로 만족 안 되는 거. 참,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을 줄 알았으면 할 때마다 기록해 두는 건데.
류진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신해범을 향한 살심이 솟구쳤다. 아직 아침 식사 전이라서 다행이다. 저따위 음담패설을 듣고 있다간 먹은 게 역류하고 말 테니까.
- 그래서 말인데, 꼬꼬야, 너 MVP랑 섹스하는 영상이랑 사진, 좀 더 보내 줄래? 걔가 찍은 거라도 되는데. 그러면 이 외로운 짐승이 오늘 밤도 뜨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끊어! 개새끼야.”
- 꼬꼬야, 제발. 나 말라 죽어.
“이딴 개소리 하려고 전화 바꾸라고 한 거면, 두 번 다시 안 받아!”
- 너무해.
“너무하긴, 당신이 너무해!”
- 꼬꼬야아….
“개새끼! 나쁜 놈!”
- 아, 방금 그거. 목소리 좋다. 쌀 거 같아.
“부하들 앞에서 오줌이나 싸라! 변태 새꺄!”
- 지린 건 너잖아.
“뭐?”
신해범이 쿡쿡댔다.
- 자장자장 우리 아기.
“이, 이이… 이 나쁜…!”
류진은 바르르 떨었다.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이렇게나 기가 살다니.
그야말로 잡초 같은 생명력이었다. 무인도에 던져 놔도, 사막의 모래 폭풍 속에 떨어뜨려도 악귀같이 살아남을 인간이 바로 신해범이었다.
류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인간은 당당한 거야. 왜 잘못했다고 빌지 않는 거야. 왜 자꾸 장난을 치고 웃는 거야.
뭘 잘했다고. 뭐 그렇게 잘났다고. 웃기지도 않는 저급 변태 유머, 그런 건 좀 집어치우고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받고 싶다고
그렇게 좀… 빌어 보라고.
- 이제 좀 웃음이 나와?
“안 웃겨.”
- 흥분한 거 같은데?
“그게 웃긴 거냐? 이 멍청아.”
- 그래도 아까보다 나아졌어. 목소리에 기가 살았어.
튀어나오려던 욕설이 도로 들어갔다.
“뭐야?”
-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풀 죽지 말고 화를 내. 난 우리 꼬꼬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 게 어울리기도 하고.
말문이 막혔다. 류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 열 받게 만들어 놓고 뭘 잘했다고….
- 지금 나 어디 있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관심 없어.”
- 그러지 말고 맞춰 봐.
“관심 없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 쓰였다. 류진은 이어폰을 착용한 귀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눈을 감고 주의를 집중했다. 신해범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있는 장소의 소리가 느껴졌다. 바람 소리를 비롯해 거리의 잡음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실내였다. 지금 신해범은 실내에 있었다.
풍기대 지하의 취조실이 생각났다. 류진에게는 생각하기 싫은 장소였다.
발코니에서 담배를 태우던 기우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테이블 위 재떨이에 꽁초를 비비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류진은 고개를 숙였다. 아랫입술이 약하게 떨렸다.
“사무실이야? 아니면 집?”
- 집.
“당신 집이야?”
- 아니.
신해범은 류진이 되묻기 전에 말했다.
- 강아지 살해범 찾았어.
“정말?!”
- 그런데 좀.
“뭐야, 왜? 누군데?”
- 마크하고 있었는데 놓쳤어. 미안하다.
“놓쳤다는 게… 뭐야? 도망갔다는 거야? 당신한테서?”
- 뭐 그런 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당신한테서 누가, 어떻게 도망을 가!”
- 그러게나 말이다. 이것 참 부끄럽네.
류진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 걱정하지 마. 곧 잡아 올 거니까. 잡을 수 있어.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소리치는 류진의 앞으로 아직 담배 냄새가 남은 손이 다가왔다.
“이병.”
기우희였다. 그가 이어폰을 돌려 달라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류진은 그를 쳐다봤다. 아직 이야기 중이라고, 신해범에게 궁금한 게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류진은 순순히 이어폰을 빼서 기우희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는 능숙하게 이어폰을 착용하고, 휴대폰을 챙겨 다시 발코니로 나갔다.
등 뒤로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대장님. 접니다.”
- 강인우 도망갔다.
“…예.”
- 마크하던 애들 당했어. 난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경동맥을 따서 그런가, 온 집 안이 피바다야.
신해범이 말을 이었다. 아주 엉망진창이야.
- 전쟁 통에 폭격 맞은 거 같다.
기우희는 차분하게 생각했다. 집 안에서 일이 벌어졌다면.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 강재상, 오은정 둘 다 숨졌어.
“우리 쪽에서 한 짓입니까?”
- 설마.
“그럼….”
충분히 가능했다. 강인우는 유미현에게 버려지고, 여동생을 인질로 잡히고, 본인은 자택에 구금된 채 감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정신적 압박이 상당했을 것이다.
기우희는 평소에는 사람 가죽을 뒤집어쓰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숨어 지내던 짐승이 위기의 순간에 가죽을 벗어던지고 본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상상했다.
사람은 수세에 몰렸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기우희는 이게 강인우의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풍기대에서 보여 줬던 사교성은 사회화된 결과물일 뿐. 애초에 강인우는 평범한 군인도 아니었다. 그가 <백사자>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떠올려 보라. 그는 조직 내부에서 그림자로 존재하며 동료들을 감시하고 변절자를 숙청했다.
기우희는 모텔에서 죽은 이로한과 콘크리트에 묻힌 모습으로 발견된 우승환을 생각했다.
과연 하성록이 변절자들만 제거하게 했을까?
본거지는 해외에 있는 데다, 활동 자금은 클럽 운영과 약물 유통으로 해결하고, 조직원들을 닭장 같은 숙소에 집어넣고 노동력을 착취하던 주먹구구식 반정부 단체가 어떻게 입때껏 망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을까. <백사자>는 어중이떠중이 양아치 집단이 아니었다. 하신성이 죽기 전까지 군부의 골치깨나 썩이던 무장 단체였다.
기우희는 그 답을 짐작했다. 하성록은 공포로 조직을 지배했다. 정류진 같은 어린 말단이면 몰라도 연차깨나 쌓인 간부급이라면 은연중에 짐작했을 것이다. 조직 내에 검은 손이 있다. 혹시라도 딴마음을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다.
증거도 없고,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지만.
기우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거칠게 내뱉었다. 등 뒤가 신경 쓰였다. 이쪽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하는 정류진이 거슬렸다.
“…….”
곽재헌의 아들이 생각났다.
곽현우. 그가 단순히 정의감 때문에 침묵했을까? 자기가 불면 <백사자> 내에 남은 친구가 다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기우희가 아는바, 조직에서 곽현우의 발목을 잡을 만한 존재는 둘이었다. 테러조장 차모은. 그리고 정류진.
<백사자> 시절 정류진은 강인우의 존재를 몰랐다. 곽현우는 정류진과 나이 차이가 크지 않고 연차도 더 짧았으나, 그에게는 테러조장 차모은과의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만약 차모은이 의도치 않게 조직의 변절자는 숙청된다는 뉘앙스의 말이라도 흘렸다면. 농담으로라도.
곽현우는 머리가 좋았다. 머리가 좋은 놈들은 대개 눈치도 빠르다.
기우희는 눈을 내리깔았다. 눈앞의 난간이 흔들려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정류진에게 곽현우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나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류진은 여전히 소파에, 그 자리에 덩그러니 앉았다. 기우희는 맞은편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너 <백사자>에서 별명이 있었나?”
가명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저는 없었습니다. 말단이어서….”
“강인우는 달랐겠지?”
류진은 얼굴을 번쩍 들었지만,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역할이니까.”
“아는 게 없어서 죄송합니다.”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죄송하다고 하지 마.”
류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우희는 침울해진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고 했다.
“나한테 짐작 가는 게 하나 있는데.”
“소령님께서요? 어, 어떻게요?”
“뒷골목에서 도는 별명이 거기서 거기지.”
일종의 문화였다. 교도소를 밥 먹듯이 드나드는 깡패들이 스트리트 갱 문화를 형성하고, 새로운 조직원을 영입하고, 그들이 또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감되고. 범죄자 문화는 새로 생기거나 새롭게 바뀌는 부분도 있지만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기우희가 있었던 황마 교도소에도 존재했다. 사실 그런 포지션은 어느 집단에나 꼭 한 명씩 있었다. 보스의 비공식 오른팔. 조직의 분열을 야기하고, 질서를 흩뜨리는 놈들을 자비 없이 먹어 치우는 스캐빈저.
“스캐빈저….”
류진이 중얼거렸다. 기우희는 자신에게 그 단어를 알려 준 소녀를 기억했다. 옥채윤은 ‘겉보기에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을 청소부로 영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진한 얼굴에 소극적인 태도. 집단에서 눈에 띄기는커녕, 존재감이 느껴지면 다행인 그런 애로.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자기가 그 역할에 적격이라고 말해도 비웃지 않았을 텐데.
기우희는 시선을 내렸다. 류진이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사냥 대결을 하게 됐다면서.”
“예.”
“우리 팀은 진압 차량을 쓰게 됐다.”
“예?”
류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기우희는 그가 아직 <힐 스톤 그로우>나 경기의 규칙에 대해서 듣지 못했음을 알았다.
권세혁이라면 그럴 만했다. 분명 중요한 알맹이는 쏙 빼고 듣기 좋은 달콤한 말만 늘어놨겠지. 조금도 어렵지 않다고. 하나도 위험한 거 아니니까 겁먹지 말라고.
어쩌면….
당사자인 권세혁 또한 사냥 대결의 실체를, 자세한 내용을 모를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충분했다. 권세혁은 고등학교에 재학하는 삼 년간 고향을 떠나 있었다. 삼 년은 긴 시간이다. 깡마른 팔다리에 키만 껑충 컸던 소년이 192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남자가 될 만큼.
장두현이 권세혁을 속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기우희가 추측하는바, 장두현은 믿을 수 없는 자였다. 그는 사랑하는 장손이라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속여 먹었다.
기우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마강희에게 들은 이야기를 고대로 읊었다간 왜 류진이 형을 무섭게 하느냐며 권세혁이 날뛸 터였다. ‘가뜩이나 풀 죽어 있는 사람 겁주지 마요!’
하고.
“자세한 얘기는 MVP나 윤태금에게 들어. 그보다, 왕실의 증표가 뭔지 알아냈나?”
이건 단순한 사냥 내기가 아니었다. 진압 차량까지 동원해 대결하는 마당에, 왕실의 증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기우희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류진을 보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
아까와는 달리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신해범이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집어넣자 진치우가 기다렸다는 듯 빈정거렸다.
“이 새낀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져.”
“왜 또.”
“왜, 또? 왜 또? 왜에 또오?”
“나 귀 안 먹었다.”
“넌 지금 내가 유난 떤다고 생각하지?”
자일리톨 껌을 씹는 진치우가 말할 때마다 타액이 튀었다. 신해범은 미간을 찌푸리고 ‘현장 훼손하지 마’ 했다.
감식 팀의 증거 확보가 한창인 거실로 나왔다. 어째 드레스 룸보다 거실이 더 더웠다. 볕이 들어오는 방향인 데다 창이 커서 그렇다.
“숨 막힌다. 숨 막혀.”
실내지만 에어컨도, 선풍기도 틀 수 없어서 땀이 줄줄 흘렀다. 땀방울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찝찝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군화를 감싼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진치우가 라텍스 장갑을 튕기며 연신 덥다, 쪄 죽겠다, 투덜거렸다.
“좀 대충해도 괜찮잖아. 어차피 범인 빤한데 뭘.”
“그래도 꼼꼼히 해야 해. 만일의 경우가 있잖아.”
만일의 경우는 무슨. 진치우가 꿍얼거렸다.
유력한 용의자가 있는 사건이었다. 어젯밤 이 집에는 강인우와 그의 부모, 셋이 있었다. 그리고 강인우를 마크하던 풍기 교육대 대원 둘. 총 다섯 명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이는 강인우, 단 한 명뿐이었다. 그가 강재상의 은색 도요타를 타고 달아나는 모습이 집 앞 CCTV에 찍혔다.
도요타는 사건 현장인 호성동 주택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로변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트렁크 쪽에 불로 태운 흔적이 보였다. 신분을 특정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신해범은 강인우가 CCTV가 없는 골목길로 도주했음을 알았다. 하신성도 그랬고, <백사자> 조원들 대부분이 CCTV가 없는 골목길을 도주로로 잘 써먹었다.
애초에 사각지대가 많은 실골목이었다. 그렇다고 CCTV를 한 대도 설치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설치하는 족족 ‘정부는 국민을 감시하지 말라’며 훼손하거나 떼다 파는 도둑놈들이 많아 그렇지.
전자 제품은 고물상에서 좋은 값을 받는다. 부품이 목적이기 때문에 새것이어도 모르쇠 하고 받는다. 도둑놈들은 오히려 설치한 지 오래되어 낡은 것들은 손대지 않았다. 상점이나 주택가에서 주인이 자비로 설치한 최신형 감시 카메라를 주로 노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설치된 CCTV는 대개 모형이었다. 이곳에 감시 카메라가 있으니 허튼짓하지 말라, 는 경고가 최선인 가짜.
그나마 호성동은 부촌이었기에 집 앞의 감시 카메라를 확보했다. 그리고 대로변의 CCTV 녹화본 몇 개. 물론 그것만으로는 강인우의 도주로를 파악할 수 없었으나, 신해범은 짐작했다. 강인우의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하성록에게 몸을 의탁하고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신해범은 즉각 수배령을 내렸다. 일대에 교통 통제가 시작되었다. 강인우의 범죄 소식을 들은 헌병대는 순순히 인력 지원을 해 주었다.
지금껏 헌병대에 협조를 구했던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받은 건 처음이라 웃음이 나왔다.
내막이야 어쨌든 강인우는 헌병대 특별 수사본부 출신이었다. 현직 풍기 교육대 대원 둘이 죽어 나간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을지라도, 헌병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해범은 지금쯤 헌병대장 황주열이 어떤 심정일지 알았다. 애새끼가 사고 친 거 봐줬으면 새집에서 잘 먹고 잘 살 것이지, 왜 헛짓거리해서 나한테까지 똥물을 튀겨!
황주열이 다급한 건 권주혁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상 황주열은 이 사태에서 덤터기를 쓴 자였다. 애초에 하극상을 저지른 ‘문제아’ 강인우를 풍기대로 치워 버린 자는 권주혁이었다. 그러나 권주혁은 자기가 이 사태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전직 헌병대원 하나를 감싼 끝에 현직 풍기대원 둘을 황천길로 보냈다는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 황주열을 전면에 내세우고 뒤로 숨어 버렸다.
신해범은 현명하게 처신하기로 했다.
황주열도, 권주혁도 원망하지 않는다. 순직한 대원 둘의 목숨값은 강인우의 심장으로 받겠다.
신해범은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갔다. 오은정의 시신은 들것에 실려 나갔다. 하지만 그의 목을 조른 넥타이는 천장에 그대로 매달려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졌다. 바닥은 혈액을 비롯한 각종 체액으로 지저분했다.
신해범은 젖은 부분을 피해 조심조심 움직였다.
고급 주택의 안방다운 인테리어였다. 넓고, 쾌적하고, 아늑한 부부 침실이었다. 헤링본 바닥과 셰이커 스타일의 원목 가구, 가장자리에 토숀 레이스가 주르륵 박힌 아이보리색 리넨 커튼. 신해범은 커튼을 장갑 낀 손으로 커튼을 끝까지 젖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인테리어는 이런 스타일이 유행인가 봐.
하지만 사건으로 인해 집 안 전체가 난장판이었다. 안방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커튼과 같은 색의 이불은 훌떡 젖혀졌고, 베개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신해범은 오은정의 키와 침대 위치, 높이를 가늠하며 천장 조명에 매달린 그가 살기 위해 침대로 발을 뻗었을지, 어쨌을지 상상했다.
“뭐 찾냐?”
진치우가 들어왔다. 껌은 다 씹었는지 짝짝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냥.”
신해범은 장갑을 고쳐 꼈다.
“가족 사진 멋지네.”
한쪽 벽에 걸려 있었다. 이 집의 특이점이 그것이었다. 보통 가족사진은 거실, 안방에는 결혼사진을 걸어 놓기 마련인데, 부부 침실에 가족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고 거실에 대문짝만한 결혼사진이 보란 듯이 자리한 게 조금 의아했다.
신해범은 팔짱을 낀 채 사진 앞으로 갔다.
비교적 최근에 찍었다. 남매의 외모가 지금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옷이나 머리 모양도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강인혜가 올해 대학생이 되었으니, 어쩌면 그걸 기념해서 찍은 사진일지도 모르겠다.
곁에 다가온 진치우가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멋지긴 개뿔이. 촌스러워.”
“그래?”
“표정 다 굳었잖아. 손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눈은 카메라를 보는 건지, 어디를 보는 건지….”
진치우는 사진 속 강인우의 얼굴에 손가락질했다.
“이 새낀 지가 그렇게 될 줄 알았을까?”
“글쎄.”
신해범은 가족사진을 응시했다. 강재상과 오은정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였다.
“…….”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고개를 휘휘 저어 머릿속에서 털어 냈다.
신해범은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도피 자금에 보탬이 될 만한 현금, 패물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앨범이 있었다. 한 페이지에 사진 한 장이 딱 들어가는 조그만 앨범이었다.
거실 장식장에 있던 필름 카메라가 생각났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신해범은 앨범을 펼쳤다. 여행지에서 찍었음 직한 풍경, 동물, 길 아무 데나 핀 들꽃 사진들이 나타났다.
신해범은 무심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누구 취미일까? 화장대에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오은정?
“강인우 방 이 층인데. 너 거기 볼 거냐?”
“뭐 나온 거 있어?”
“있겠냐.”
진치우는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냥 난장판이지 뭐. 책장이 죄다 쓰러져서 발 디딜 틈도 없더라.”
“그럼 됐어. 복귀하자고. 감식 팀은 마무리하고 오라고 해.”
“엉.”
신해범은 몸을 돌렸다. 애초에 그는 이곳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강인혜의 약점이 될 만한 거라면 강인우가 도망치기 전에 없앴을 테니까.
태우거나, 찢었거나, 변기에 넣고 레버를 당겼거나. 동생의 약점이 되는 거라면 먹어 치워서라도 없앴을 터였다.
함께 도망칠 수 없다면….
그래도 나였으면 혼자 도망가진 않았을 거야.
을씨년스러운 정원을 지나 대문을 나섰다. 신해범은 그제야 거치적거리던 비닐을 벗어 던졌다.
신해범은 자기가 동생을 설득할 수 있다고 말하던 강인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필사적인 표정이 아직도 기억났다.
과연 부자 동네라 그런지 주민들의 시민 의식이 남달랐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야! 같이 가!”
집안에서 진치우가 뛰어나왔다. 양손에 벗은 비닐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신해범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있잖아, 치우.”
“왜?”
“강재상이랑 오은정. 평소에도 부부 싸움이 잦았을 거 같지 않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웃 탐문 아직 안 했잖아?”
“인근 경찰서에 접수 신고가 하나도 없었잖아. 현장이 저만큼 난리가 났는데. 늦은 밤에, 분명 상당히 시끄러웠을 텐데.”
아무리 방음이 잘되는 집이라 해도 주택가였다. 호성동도 광성에서 알아주는 부촌이지만, 집 평수부터 어마어마한 신계동에 비하면 협소했다. 신계동 주택가에 비하면 집도 다닥다닥 붙은 수준이었다.
진치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이상하긴 하다.”
“평소에도 자주 싸웠던 거야, 저 집.”
꼭 부부 싸움이 아니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의 싸움이라도.
평소보다 소음이 크긴 해도, 인근 주민들은 여느 때와 같은 집안싸움이라고 생각했을 확률이 컸다. 남의 집 일에 끼어들지 않고 싶다는 심리도 무시할 수 없고.
부촌의 특징은 각자의 사생활이 보장된다는 점에 있었다. 각자의 일로 너무나 바빠 남의 집 일에 신경 쓰기는커녕 알기도 싫은 사람들이 모인 환경이었다.
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못 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끼어들면 귀찮아지거든.
신해범은 씁쓸한 기분으로 걸었다. 안방에서 본 가족사진을 떠올렸다.
겉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겉만 보면 모른다.
국내 최고 대학에 다니는 딸은 운동권. 헌병대 녹을 먹으면서 착실하게 일한다고 생각했던 아들도, 사실은 반정부 단체 프락치.
터덜터덜 뒤따라오던 진치우가 말했다. 너도 이제 인기 떨어졌나 보다. 사인 받으러 나오는 사람이 하나 없어.
신해범은 지프 뒷문을 열면서 대꾸했다.
“이 상황에 못 하는 소리가 없다.”
“뭘 정색해? 인기 떨어졌다고 하니까 화나?”
“꼭 그렇게 제 발 저리는 소리 하지, 응?”
운전대를 잡고 있던 대원이 꾸벅 인사하고 출발했다. 신해범은 안방에서 가지고 나온 앨범을 무릎에 올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창밖을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호성동 바로 옆이 태화동인데.”
시끄러워, 닥쳐, 할 줄 알았던 진치우가 뜻밖에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누나 집?”
대일전자의 진혜림 부사장이 둥지를 틀었던 곳이었다. 기존의 부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호성동에 비하면 집값도 낮았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진혜림이 명품과 파티에 돈을 탕진하여 ‘어쩔 수 없이’ 싼 지역에 집을 샀다고 수군댔다. 태화동이 풍수지리학상 매우 좋은 명당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그러면 뭐 하냐.”
진혜림은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진화영의 딸이 아니었어도 회사에서 한가락 했을 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숨겨진 명당이라고 칭송받는 땅에 자리를 잡았고, 그 땅의 축복대로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끝이 좋지 않았다. 지금 진치우가 태화동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이유였다.
“…이래서 끝이 중요하다고 하나 봐.”
“뭐?”
신해범은 싱긋 웃었다.
“아냐.”
숙련된 운전병 덕분에 지프 안은 편안했다. 신해범은 창밖 풍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 꼬꼬도 함풍 2도 시골구석 깡패들의 소굴 말고 이런 데서 자랐으면….
그래도 나 만나서 인생 조졌을 거야.
신해범은 피식 웃었다. 아까 통화했는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 전화 통화를 녹음해 뒀어야 했는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는 휴대폰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통화 내역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데, 딱딱한 기계가 몸을 떨었다.
기우희로부터 들어온 메시지였다.
「사냥 내기에 걸린 왕실의 증표는 장가의 전투 잠수함 3호 어리연. 신룡관의 수련, 창포와 자매함이라고 합니다」
신해범은 휴대폰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바로 옆에 있는 진치우조차 그의 살벌한 표정에 흠칫할 정도로.
강인혜는 체포 직전, 소지하고 있던 휴대폰을 버렸다. 하수구에 빠뜨린 손바닥만 한 전자 기기를 찾아내는 데 반나절 이상이 걸렸다. 복구는 그보다 빨랐다. 요즘 휴대폰은 방수 기능이 탑재되어서 편하다.
강인혜의 주 연락 수단은 텔레그램이었다. 주고받은 메시지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되어 비밀 보장이 된다고 착각하기 쉬웠으나 포렌식 절차를 거치면 복구할 수 있었다. 복구된 명세를 살펴보던 중 남매가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는 메시지 내역을 확인했다. 강인혜는 풍기 교육대 강아지가 군견 한 마리 몫을 해내는 걸 경계했다.
자백을 받아 내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시간을 끌었다. 신해범은 모든 패가 뒤집힌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스무 살짜리에게 감탄했다. 유미현이 아끼는 이유를 알겠다.
또래 집단에서 리더십을 인정받는 사람은 쌔고 쌨지만, 나이와 경험과 견해 차이가 압도적으로 차이 나는 사람을 상대로 꺾이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점에서 소녀의 기개는 높이 살 만했다.
그러나 강인혜의 한계는 명확했다. 집단에서 인정받는 영특한 아이라면 당연히 품기 마련인 자만심이었다. 유미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자기가 유미현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조차 스무 살의 패기다웠지만, 유미현은 강인혜가 가지고 놀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강인혜가 똑똑해서 참 다행이었다. 명백한 증거물 앞에서 잔머리 굴려 봤자 불리해지기만 한다는 걸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대상자의 입을 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유미현의 당부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
신해범은 호성동에서 가져온 앨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거 봐.”
강인혜는 고개를 돌렸지만 물건을 의식하는 중이었다.
“뭐에요?”
지하 취조실에 갇힌 터라 그는 아직 사태를 몰랐다.
“작품 좋더라.”
“봤어요?!”
“네 거야?”
“…엄마 물건이에요. 우리 엄마 만났어요?”
시신을 확인한 것도 만남으로 친다면, 뭐 그런 거겠지. 신해범은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됐다.”
“이걸 왜 가져왔는데요? 아, 내 마음 약해지게 하려고? 수법 너무 빤해서 놀랍지도 않네요. 근데 이런 거 소용 있어요? 나한테 더 물어볼 게 남았어요?”
“따발총이냐? 좀 천천히 말해.”
“왜 갑자기 날 배려해 줘요?”
쥐방울만한 게 눈치가 빠르다.
“순순히 협조하는 사람한텐 나도 착한 사람이야.”
“날 유미현한테 보낼 거예요?”
“돌아가고 싶어?”
강인혜는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시선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앨범에 꽂혀 있었다.
“유 수석은 너한테 미련 있어.”
“한번 배신당했는데 다시 돌아가라고요? 사람 저능아 취급도 정도가 있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너도 뒤통수치려고 했잖아. 둘 다 똑같은 거 아냐?”
“똑같…!”
“우리 엄만 차 사고로 죽었어.”
신해범은 깍지 낀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군화 코를 가볍게 흔들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강인혜는 자기 눈을 뽑아 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농담으로 할 말이 있고, 아닌 게 있어요!”
“내가 장난치는 것 같나?”
강인혜는 숨을 들이켰다.
“진짜야. 아무렴 내가 자식새낀데 그걸 모를까.”
“…….”
“어른들이 그러지? 풍기대 신해범 이 씨발 새끼, 아버지 뒤통수친 천하제일 패륜아 새끼. 유 수석도 내 욕 엄청나게 하지 않았어?”
“욕먹을 만하니까 했죠.”
“우리 엄마는 있잖아, 똑똑한 사람이었어. 돈 많은 늙은이 물어서 팔자 고친, 대가리 텅텅 빈 썅년 소리 들으면서 살았지만 사실은 되게 현명하고 용감했어. 꼭 너처럼 말이야.”
“하….”
“내가 자식새끼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우리 엄마는 영웅이었어. 납치되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했거든. 그때 알고 있었던 거야. 지금 끌려가면 백 퍼센트 죽는다. 변호사고 나발이고, 재판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모가지 날아간다. 지금이야 총살이 관행이지만, 나 어렸을 땐 본보기가 중요하다고 참수형이라는 걸 했거든. 알지? 참수형.”
신해범은 자기 목에 대고 손을 찍, 그었다.
“이거.”
“알아요.”
“차를 타고 추격했어. 사람들 눈치 보인다고, 밟을 때 세게 나가는 차 무섭다고 80년대 구형 레인지로버, 그거 타고 다니던 사람이 벤츠 쫓는다고 용쓰다가 커브에서 뒤집혔어. 외진 도로라 지나가는 다른 차도 없었고… 스파크 때문에 차가 폭발했는데 몸이 끼어서, 혼자 힘으로는 나올 수가 없어서… 응. 그렇게 됐어.”
기사 한 줄 뜨지 않았다. 그때는 언론 통제가 뭔지도 몰랐다. 뒤늦게 진상을 파악한 고모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신해범은 아직도 모친의 죽음을 자살로 알았을 터였다.
“나한테 왜 그런 이야기를 해요?”
강인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빛이 흔들린다. 시종일관 의연하던 그가 침착함을 잃고 흔들렸다.
신해범은 앨범을 가리켰다.
“왜 가져왔냐고 물었지?”
“…….”
“네 어머니 유품이다.”
“…….”
“범인은 네 오빠. 강인우 대위고.”
무뚝뚝한 목소리에는 일 그램의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강인혜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을 때, 이미 의자는 비어 있었다.
진치우가 헤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중간에 끊어야 하나 생각했다.”
“왜?”
“네가 어머니 얘기 한 거 처음 아냐?”
“나도 잊어버리고 살았거든.”
신해범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검지로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피곤하면 12층 올라가서 쉬어. 여긴 내가 있을게.”
“…후회하는 중이야.”
“뭐?”
신해범이 킥킥댔다.
“강인우 구금하고 나서 네가 그랬지. 몰래 GPS 하나 달자고.”
“엉. 왜?”
“네 말 들을 걸 그랬다.”
진치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뭔 소리야, 미친놈아. 걸리면 우리 좆 되는데.”
현장에서 그런 말을 안 해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 얘긴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대원들의 죽음 앞에서 신해범은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실수했다고. 아니 잘못했다고.
최초의 의견이 뒤바뀐 상황이었다. 진치우는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꼈다.
“난 그냥 장난으로 말한 거야.”
“요새 기계 잘 나오잖아. 초소형으로. 강인우 정신없게 만들면 어떻게 몰래 부착할 방법이 있었을지도 몰라. 아니, 있었을 거야.”
“야.”
진치우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그만해라.”
“왜? 애초에 네 생각이잖아.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기계 붙이는 게 훨씬 안전하고 간단했어. 아니, 아니다. 애초에 혐의 아무거나 갖다 붙여서 강인혜랑 공범으로 만든 다음에 취조실에….”
“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진치우는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애들 죽어서 힘든 거 알겠는데 자학은 하지 마. 그거 너한테 진짜 안 어울려.”
“알았어.”
신해범이 웃었다. 그러나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진치우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파오훼이 시절 신해범을 괴롭힌 우울증이 도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우울증이 불치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경이 바뀌면 나을 수 있었다. 신해범의 도벽도 사라지지 않았나. 중요한 건 환경이었다.
환경….
다른 일에 집중할 만한 환경.
지금 당장 환경은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신해범의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건 가능했다. 그가 더는 자학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진치우는 매직미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고개를 숙인 채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떠는 강인혜가 있었다.
“쟤 입에 뭐 물려야 하는 거 아니냐.”
“왜. 자살 시도할 것 같아?”
“부잣집 아가씨잖아. 저런 애들 정신력 약해. 자기 할 말 다 하는 것 같아도, 겉보기랑은 다르다니까.”
“맞아. 저 또래에 우리 꼬꼬만 한 배짱은 드물지.”
“…….”
“얼굴 펴자, 치우. 내가 그렇게 못 할 소리 한 건 아니잖아?”
“진지하게 말하는데 뇌 사진 찍어 보자. 내년 건강 검진 당겨서 한다고 치고, 내일이라도 병원 갔다 와. 이거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져. 나중엔 아주 씨발, 존만이 이름 부르면서 투신이라도 하겠어.”
“원래 짝사랑은 힘든 거야.”
“개소리 좀 작작 해 미친놈아! 존만이가 왜 너만 보면 치를 떠는지 아직도 모르겠냐!”
신해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치를 떨어? 걔가? 나한테? 아닌데?”
“퍽이나.”
“진짜야. 아까 통화할 때도, 내가 자기 사진이랑 영상 보면서 자위했다니까 좋아 죽던데? 시무룩하던 놈이 기가 살아서 펄펄 날뛰는데, 아, 얼마나 깜찍하던지….”
진치우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진지하게 충고 하나 한다.”
“하지 마.”
“들어! 새꺄.”
“네 아빠.”
진치우가 인상을 구긴 채 입을 열었다.
“존만이랑 잘해 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생각 바꿔. 진심으로 사과하고 무릎 꿇고 빌어. 그래도 솔직히 쳐다볼까 말까인 거 알지? 근데 니가 자꾸 음담패설하고 장난치면 애가 무슨 생각이 들겠냐? 상식적으로? 미친놈이 왜 나한테 달라붙고 지랄이야, 이런 생각부터 들지 않겠냐?”
“잘해 볼 생각 없는데 주변에서 난리들이네. 남의 연애 사업에 무슨 관심들이 이렇게 많은지….”
“뭐야?”
신해범은 대꾸하지 않았다. 앉은자리에서 상체를 비틀며 기지개를 켜더니 휴대폰을 꺼내면서 취조실을 나섰다. 뒤에서 진치우가 ‘그게 무슨 말이냐’ 소리쳤지만 무시하고 나갔다.
신해범은 유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세영 비서관을 거치지 않고 직통으로 연결되는 번호를 받아 두었다.
유미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신해범은 걸으면서 안면 가득 미소를 띠었다.
“강녕하십니까, 수석 각하. 저 풍기대 신해범입니다.”
유미현도 알았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 복수심이라는 사실을. 지금은 패배와 배신의 충격으로 머릿속이 얼얼해졌을 강인혜를 자기 입맛대로 세뇌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신해범은 가벼운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차 보내세요. 후송하겠습니다.”
유미현이 웃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알았다. 원하는 걸 손에 넣었을 때, 사람은 얼굴보다 마음이 먼저 웃는다. 신해범은 유미현의 마음속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강인우가 부모를 죽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면담할 때 참고하시라고.”
- 강재상은 확실하지?
오은정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예, 뭐.”
신해범은 자살이 확실하다는 최유신의 말을 떠올렸다. 오은정은 발목에 총상을 입었지만,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였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이다. 오은정의 두 손에는 목이 졸려 죽는 사람이 고통에 겨워 줄을 잡아 뜯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죽은 그의 위에서는 종잇조각이 나왔다. 조각조각 찢긴 데다 산에 녹아서 내용을 식별하기는 어려웠으나, 시간만 충분하면 알아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종이를 찢어 삼킨 의도가 빤했다. 보안이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두툼한 비닐 팩도 삼킬 수 있는 게 사람이었다.
- 그래서 신 준장, 통행 제한 조치는 효과가 있었나?
“아직 체포 전입니다. 그래도 직할시를 빠져나가지는 못할 겁니다. 가능한 모든 통행로를 막았습니다. 땅굴이라도 파지 않는 한, 빠져나갈 구멍은 없습니다.”
- 땅굴이라.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목적지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어.
“…다르다는 게?”
1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고 탑승자를 내보냈다. 신해범은 사무실로 걸어가며 유미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하성록은 욕심이 많아. 그런 보스 밑에 빈손으로, 아니 패배해서 돌아가는데 금의환향을 기대할 수 있겠어? 준장 같으면?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시점이 아닐 텐데요.”
- 궁지에 몰려서 주저앉는 사람이 있고, 더 필사적으로 활로를 모색하는 사람도 있고. 신 준장 생각은 어떤가? 그놈이 어느 쪽 같아?
“글쎄요.”
- 실망스러운 답변 내놓기야?
본인도 겪어 봤잖아. 신해범은 유미현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았다.
- 나는 신 준장이 너무 자신만만하지 않았으면 해.
맥이 탁 풀렸다. 먹이를 물어다 줬는데, 칭찬은커녕 대가를 바라지 말라 한다. 당근도 준 적 없으면서 채찍 손잡이부터 든다. 아직 사냥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강인혜가 확실히 자기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신해범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자만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 내 말 섭섭하게 듣지 마. 신 준장 철두철미한 사람인 거 내가 모르나.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이상해. 운이 좀 따르나, 싶으면 다른 데서 엉뚱한 게 터지더라고.
“…….”
- 그게 주의가 느슨해져서 그러는 거거든. 긴장이 풀려서.
마른침이 넘어갔다. 반대편 손이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졌지만, 신해범은 담뱃갑을 꺼내지 못하고 힘껏 움켜쥐기만 했다.
유미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내가 겪어 봤잖아. 인혜 그 깜찍한 게 딴생각하고 있는지 미처 모르고. 바로잡는 데 오래 걸렸지. 신 준장 손까지 빌리고 말이야.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 강인우가 빈손으로 갈 것 같으냐고.
“…예?”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신해범은 문고리를 선뜻 돌리지 못했다. 이상하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유미현의 목소리에 의자 바퀴 구르는 소리가 섞였다. 연이어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 준장도 알겠지만 통행 제한 조치는 오래 걸려. 도시 하나를, 그것도 유동 인구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도를 걸어 잠그는 게 어디 쉽나.
“그래서 일부 지역만 우선적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통행 제한은 순차적으로 내려졌다. 사건 현장인 호성동을 중심으로 공항, 선착장으로 빠질 수 있는 중앙로와 순환 도로가 최우선순위였다. 헌병대의 원활한 협조로 봉쇄선은 단단하게 구축되었다. 많은 광성 시민이 불편을 겪었지만, 항의 접수는 한 건도 없었다. 1년 365일 중 300일 가까이 국가 비상사태 ‘코드 3’인 지역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래도 시차는 무시할 수 없었다. 최초의 봉쇄선 구축에 대부분 병력이 투입된 것도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통행 제한 순위가 낮은 길은 조치가 늦어졌고, 상대적으로 감시도 느슨했다.
- 걔가 그걸 몰랐을까? 준장,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아.
신해범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공항도 아니다. 선착장도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소린가. 제아무리 헌병대 특수사 출신이라 한들, 등에 날개가 날린 것도 아닐진대.
- 내 말은, 그놈 목적이 출국하는 게 아니라니까.
신해범은 대꾸하지 못했다. 지금 유미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백사자의 근거지는 중국이었다. 헌병대로도, 유미현에게도 돌아갈 수 없는 강인우가 몸을 의탁할 곳이라고는 하성록의 곁이 전부였다. 그럴 깜냥으로 가족들을 제거한 게 아닌가.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가려고.
- 하성록 밑에서 내부자 색출하던 애야. 빈손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아.
“왜….”
- 이중 스파이로 의심받을지도 모르니까.
신해범은 유미현이 자신의 집무실 푹신한 업무용 의자에서 일어나 신룡관의 푸릇푸릇한 잔디와 새털구름이 떠가는 파란 하늘이 내다보이는 창가로 다가선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했다.
- 빈손으로는 안 돼. 하성록이 납득할 만한 뭔가가 있어야 해.
유미현이 내는 규칙적인 하이힐 소리가 귓바퀴에 달라붙었다. 신해범은 지금 이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히 유미현에게 있음을 알았다.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는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일밖에 못 했다.
“대체 뭘….”
오랜만에 느끼는 무력감이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유미현이 푸후, 한숨 쉬었다.
- 나도 그걸 모르겠어서 말이야.
강인우의 빈손을 채워 줄 것. 하성록이 납득할.
신해범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를 악물고 문을 열었다. 사무실로 성큼성큼 들어간 그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분명 익숙한 광경이었다. 풍기 교육대 본관의 12층 사무실은 자신과 진치우의 공간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 준장. 왜 그래?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시간이 돌아갔다.
- 신해범 준장!
풍경도 바뀌었다.
신해범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축축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젖어 있었다.
신고 있던 신발이 바뀌었다. 옷도 이상했다. 지금은 어느 학교에서도 입지 않는 촌스러운 옛날 교복 차림이었다.
이게 뭔가, 생각하는 찰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불을 후려쳤다.
‘아버지 내려 드려!’
고모?
신해범은 고개를 돌렸다. 오래전에 죽은 고모였다. 집안이 결딴나고 죽도록 고생하다가 과로로 죽어 버린 고모가 눈앞에 섰다. 신해범은 허탈하게 웃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바보 같긴. 좀 덜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오래 살았으면 내가 호강시켜 줬을 텐데.
신해범은 웃었으나, 고모의 얼굴은 험악했다. 연신 등허리를 후려치며 귀 따갑게 소리를 질러 댔다. 뭐 하는 거야! 아버지 내려 드리지 않고!
아, 알았어. 가. 간다고. 가면 될 거 아냐….
신해범은 발을 움직였다. 한없이 무거웠다. 저 앞에 시계탑이 보였다. 피 묻은 기요틴도 있었다. 매달린 머리는 세 개였다. 그중 하나를 내려서 고모에게 가져갔다.
여기.
품에 안은 머리를 내밀었다. 신해범은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고모, 이 짓을 꼭 나한테 시켰어야 했어?
‘이게 뭐니?’
응?
‘아버지 내려 드리라고 했잖아!’
맞아. 맞게 가져왔어. 설마 내가 이걸 헷갈리겠어?
지난 19년간, 하루도 잊어버린 적이 없어. 아버지 머리가 어디에, 어떻게 매달려 있었는지. 절단면은 어땠는지….
신해범은 가져온 머리를 살펴봤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보다 작고 가벼웠다. 꼭 감은 두 눈, 하얀 이마에 흐트러진 빨간 머리. 퍼렇게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만져 보고 싶을 만큼 예쁜 입술.
“아.”
추락한 휴대폰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혔다.
신해범은 멍한 기분으로 뒤돌아보았다. 문가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선 채로 한참을 노려보자 비로소 상대방의 이목구비가 식별됐다.
“아저씨.”
하성록이었다.
이름만 떠올려도 이가 갈리는 지긋지긋한 늙은이가, 기어코 아들의 복수를 하러 찾아왔다. 신해범은 환영을 노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넓은 방을 양분하는 중문 안쪽에는 침실이 있고, 바깥은 손님 접대와 휴식을 위한 화려한 응접실이었다. 정수헌 본관에서 가장 호화로운 장두현의 개인 방이었다. 한쪽 벽에 커다란 호랑이 가죽이 걸렸다. 권세혁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으나, 딱히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비교적 최근에 얻은 전리품인 모양이었다.
“그라믄 요번 사냥 규칙은 그렇게 허고.”
장두현이 팔걸이의 아랫부분을 더듬자 미니바가 올라왔다. 이 자리에는 윤태금도, 바로 옆을 지키는 사병도 있었지만 장두현은 손수 유리컵을 꺼내 얼음을 넣고 술을 따랐다.
“아침부터 빈속에 술이가.”
“몸 따땃해져가 좋은데, 와. 니도 한잔해라.”
“됐다. 야그 끝났으면 내는 간다. 이따 출발할라믄 준비할 거 많다.”
권세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장두현이 그를 붙잡았다.
“이야그 안 끝났다.”
“또 먼데?”
“네가 고놈을 어디까지 품을 수 있는지 말해 봐.”
의자에 도로 앉은 권세혁의 목덜미에 핏줄이 돋았다.
“할배는 아직도 우리 시험하나. 어제 류진이 형 야그 몬 들었나?”
“그 아가 니를 진짜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나.”
“당연하지!”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장두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앉아라. 버릇없게 굴지 말고.”
“할배가 자꾸 내를 못 믿으니까 이러는 기다.”
“니가 언제부터 이래 이기적이 됐는지 모르겠다.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나? 광성서 지내는 게 마이 어렵드나?”
“엉뚱하게 논점 흐리지 마라. 이거 다 내 선택이다.”
장두현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권세혁은 그가 내뱉을 말을 짐작했다. 인생을 건 선택을 하기에 너는 아직 어리다.
방 안에 내려앉은 침묵을 틈타, 이제나저제나 기회를 살피던 윤태금이 입을 열었다.
“조식 들일까요?”
“그래라.”
“괜찮아요.”
조부와 손자의 의견이 엇갈렸다. 이번에도.
“밥 묵고 가라.”
“됐다. 내는 류진이 형이랑 먹을란다.”
“밖에 뭐 하노! 후딱 안 움직이고!”
고용인들이 후다닥 들어와 아침상을 봤다. 조식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 감감무소식인 주인을 위해 두 사람분의 식사를 가져온 그들은 방 안의 살벌한 분위기에 잔뜩 긴장했다.
권세혁은 애꿎은 고용인들을 꾸짖는 외조부를 노려보았다. 장진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으나 외조부는 계속해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권세혁은 빼곡하게 들어찬 접시와 그릇들을 봤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장두현이 젓가락을 들었다. 좋아하는 해산물 요리가 천지였지만, 권세혁은 입맛이 없었다.
그는 자기 앞의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빈자리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았다. 허리는 쭉 펴고 목에는 꼿꼿하게 힘을 줬다. 그리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자신은 떼쟁이가 아니었다. 장래의 총통으로서, 장가의 장손으로서 합당한 요구를 하는 거였다.
“어리연함 류진이 형 줘라.”
“자격이 한참 미달이다.”
“총통의 본부인이 자격 미달이면, 그걸 대체 누가 갖는데?”
캐비어가 토핑된 스터프트에그를 먹던 장두현이 웃었다.
“니 증말로….”
“후사 문제는 내 생각이 있다고 했제.”
달걀 요리를 우물거리는 장두현의 표정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였다.
“무혁이 아를 입양할 계획이다.”
“푸하!”
권세혁은 눈을 감았다. 사색이 된 윤태금이 그의 콧등에 달라붙은 음식물을 닦아 주었다.
“…할배.”
“와.”
권세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할배는 내가 우습나?”
“그라믄. 겁이라도 내야 쓰것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권세혁은 버럭 소리쳤다.
“나,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내삐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 몬 한다! 절대로!”
마른침을 삼키고 이어 말했다.
“그건 상대방한테도 죄짓는 일이다. 그라니까 첩이니, 뭐니 허튼소리 하지 마라. 입이 닳아지라 일부일처 강조하던 사람이 할배 아이가. 인제 와서 딴소리한다는 게 말이 안….”
“니 동생 결혼 몬 한다.”
장두현의 단호한 목소리는 권세혁의 뺨을 찢듯이 스쳤다.
“…뭐?”
“무혁이. 그 아 성장 부진이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할배, 지금 뭔 소리 하는….”
“지금이야 어리니까 쬐금 늦되겠거니 하제. 두고 삐라, 2차 성징 할 때 되믄 바로 티 난다. 그 아 사내구실 몬 할 끼다.”
“할배!”
“와? 서운하나. 거짓부렁처럼 들리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무혁이 내 동생이다!”
“그라니까 제대로 알고 있어야제! 니 동생은 결혼 몬 한다. 후사를 몬 보는 몸땡이란 말이다!”
권세혁은 눈을 부릅떴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방금 내가 들은 소리는 뭔지.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나라의 그 언어가 맞는지.
술잔을 비운 장두현이 유리컵을 테이블에 탕! 내려놓았다.
“그 아만 아픈 거 아이다. 니도 정상은 아이니까.”
“지금 뭔 소리고!”
권세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기울이는 장두현의 모습이 좌우로 흔들렸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니한테 와 검을 가르쳤는지 아나. 마음 다스리는 법을 가르칠라 켔다. 아가 어려서부터 수행하믄 언젠가 미쳐도 곱게 미치겠지, 싶드라.”
장두현은 턱에 맺힌 술 방울을 손등으로 닦았다.
윤태금을 만나기 전부터 알았다. 창검의 시대는 갔다. 이미 오래전에 끝나 있었다. 그럼에도 무술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승계되어 내려오는 건 과거 생존 수단이었던 것을 정신 수련과 체력 단련 목적으로 개발, 변형하여 활로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이강연은 장두현이 어린 시절 동경했던 한무종가 출신이었다. 뜨내기가 아니라 어엿한 사범이었고, 비무 대회 수상 경력도 있었다. 무엇보다 장두현의 교육관과 일치하는 사상을 가졌다.
본토에서 도장을 열어도 충분했을 것을, 왜 연고 하나 없는 타국에 흘러들어선… 장두현은 이강연이 손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고 예상했다. 자신이 그를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권세혁은 장두현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어린 시절, 한없이 위풍당당했던 칠검 좌대는 이제 낡았다. 변색을 피하고자 볕이 안 드는 자리로 옮겨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글프면서도 부아가 치밀었다.
“그 야그는 안 허고 싶다.”
“결국에는 다~ 아 소용없었다. 내는 기냥 집안에 분란이나 일으키고, 헛짓거리만 해 뿌렀다.”
“사범님 쫓아낸 게 나가?!”
이 자리에 외조부와 단둘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또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은 집이었기에 권세혁은 가능한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분노가 한계치를 돌파해 버렸다.
“내는 뭐 납치되고 싶어서 그래 됐는 줄 아나!”
“…누구 탓할 것 읎다. 이 사범 잘못 아이다.”
“그카면 와 내보냈는데!”
권세혁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식기들이 흔들렸다. 사나운 분위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윤태금이 다가왔다.
“왕자님, 흥분하지 마시고….”
“시끄럽다! 어데 껴드노!”
윤태금이 합죽이가 되어 물러났다. 권세혁은 외조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제 협상 따위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 자리는 협상 테이블이 아니었다. 원정 사냥은 승부에 자신 있는 외조부가 ‘너는 절대로 나를 이기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내민 패에 불과했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이거이 할배 본심이었구만.”
그는 류진을 정부인으로 인정해 줄 생각이 없었다. 사실은 측실 자리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장가의 귀한 둘째에게 그런 망언을….
결혼을 못 해?
사내 구실을 못 해?
대체 누가!
권세혁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우당탕 소리가 났다. 권세혁의 목소리는 그 소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컸다.
“할배는 만날 이런 식이다! 나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내뿌린다! 뭔 이유도 설명 안 해 주고, 기냥 자기 맘대로! 그럴 거믄 만나게 하지나 말든지, 희망 고문은 와 하는데?! 그기 을매나 잔인한 짓인지 모르나!”
“세상에 이쁜 아가 금마 하나뿐인 줄 아나.”
“뭐라카노, 진짜?!”
“정신 차리고 넓게 바라! 인생 길다!”
“아이다, 짧다.”
권세혁은 실소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바꿨다.
“어떻게 하믄 좋나, 망설이는 동안에 중헌 거 다 지나가 뿌리더라. 내는 인제 그런 실수 안 할란다.”
“세혁아.”
“나, 할배 이길 기다. 이겨서 잠수함 따낼 기다. 류진이 형한테 지은 죄도 큰데, 이거라도 안 주면 미안해가 얼굴 들고 몬 산다. 할배는 내 마음 모를 기다.”
“섭섭한 소리 해 싼다. 또.”
“할배는 섭섭하나? 내는 인자 피눈물이 날 거 같다.”
마른침을 삼키는데 목구멍이 쓰라렸다. 권세혁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 밑이 묵직했다. 울면 안 되는데, 생각하는 찰나 문밖이 소란해졌다.
“밖에 머고?!”
장두현이 외쳤다. 문이 반쯤 열리고 당황한 표정의 사병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풍기대에서 오신 도련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지금 세혁이랑 야그하는 거 모르나!”
류진이 형?
몸을 돌린 권세혁이 문가로 뛰듯이 걸어갔다. 뒤에서 외조부가 화를 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사병의 어깨를 떠밀어 옆으로 밀쳤다.
“…형.”
양 주먹을 꼭 쥐고 자기 덩치의 두 배는 되는 사병 앞에 오도카니 서 있는 류진을 보자 설움이 복받쳤다.
그가 말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소령님이 너 여기로 갔다고 해서.”
권세혁은 오른팔의 상처가 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보여 주고 싶었던 풍경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가자, 형. 사냥 규칙 설명해 줄게.”
억지로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를 내는 일은 고통스럽다. 이런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권세혁은 어린애로 머무르고 싶지 않기에, 멀뚱히 선 류진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시간 없어. 할배가 좋은 거 선점해 버리기 전에 차랑 무기랑 골라야 해. 형 강아지 좋아하잖아. 사냥개들 보여 줄 테니까 골라 봐.”
“잠깐만, 세혁아.”
“이따 오후에 출발이야. 우리 얼른 옷 갈아입어야 해. 여기서 꾸물거릴 시간 없어.”
“알았어. 알겠는데, 너 먼저 가.”
“응?”
“너희 할아버지랑 얘기 좀 하게.”
“…왜?”
류진이 미처 대답하기 전이었다. 방 안에서 장두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권세혁이 문을 막고 비키지 않았다. 열려 있는 한쪽 미닫이문을 손으로 턱, 짚었다.
“가지 마.”
“나 부르셨잖아.”
“형한테 상처 줄 거야.”
다갈색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신경 쓰지 마.”
“괜찮아.”
류진은 권세혁의 팔을 잡아 내렸다. 그가 문에서 손을 떼게 했다.
“원래 사람 일은 마음먹은 대로 안 돼.”
“형….”
“소령님한테 가 봐. 지금 나보다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형이 있어야 해. 나한텐 형이 있어야 한다고.”
“금방 갈게. 따라갈게. 좋은 거 많이 골라 놔.”
류진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권세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짙은 상실감이 밴 뺨을 어루만졌다.
“…….”
조금 망설이다 권세혁의 입술에 키스했다. 아까부터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장두현이 보란 듯이.
“상처 주셨네요.”
류진은 권세혁이 걸어간 복도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탁탁탁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이 차례로 닫혔다. 순식간에 머리를 곧추세운 흑룡 그림이 완성됐다. 넓은 공간에 장두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 앉아라.”
방금까지 권세혁이 앉았던 의자였다. 아직 그의 체온으로 따뜻했다.
“술 좀 하나.”
“아뇨.”
장두현이 고용인에게 턱짓했다. 류진의 앞에 새 잔이 놓였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류진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쥐새끼처럼 엿듣고 있었드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죠. 지금 경우는 반대네요.”
류진이 웃었다. 장두현은 술잔을 기울이며 싸늘한 눈빛으로 류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우리 아 어디가 그래 좋드나.”
“마음이요.”
장두현이 웃었다.
“마음.”
“네. 마음이 강해서 좋아해요.”
“그래 봐 줘가 고맙데이.”
“세혁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좋은 분이시라고. 그런데 제 생각이랑은 많이 다르십니다. 저는 뭔가, 좀 더….”
“무서울 줄 알았드나?”
“아뇨. 더 착한 분이실 줄 알았어요.”
“착해?”
장두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살다 살다, 그런 희한한 말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그가 든 컵에서 술이 흘러넘쳤다. 재빨리 다가간 고용인이 장두현의 젖은 손을 닦아 주고, 사병은 시가 케이스를 열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장두현은 십오 센티미터가 넘는 시가를 능숙하게 꺼내면서 말했다.
“니도 내 생각이랑은 마이 다른 아다.”
“더 잘생겼죠?”
“능청은.”
“왜 그런 말씀 하셨어요?”
류진은 곧장 이어 말했다.
“정상이 아니라니, 그게 친손자한테 할 소린지.”
“니 어데까지 엿들었나?”
“쥐새끼가 들을 만큼 들었습니다.”
장두현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시가 연기가 흩어졌다. 류진은 권세혁의 높은 콧대와 꼭 닮은 장두현의 얼굴 중심을 응시했다.
“사냥에서 곧장 돌아오시지 않았죠. 세혁이는 도중에 회군 못 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때 짐작했습니다. 대관께선 우릴 반겨 주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지, 이게 현실인데.”
“그래. 맞다.”
“그래도 세혁인 기대를 놓지 않았어요. 저도, 대관께서 그 애한테만큼은 거짓말로라도 좋다고 말해 주셨으면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세혁이는 거절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왕 노릇 할라믄 익숙해져야제.”
“총통은 뭐든지 다 가능한 사람 아닌가요?”
“그래 생각하믄 안 된다, 인마야.”
장두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소를 머금은 그가 말을 이었다.
“몸은 좀 괘안나.”
“덕분에요. 원정 사냥은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풍기대 군인이라 켔제.”
“네.”
“니들 둘이 뎀비면, 내를 이길 거 같나?”
“소령님도 저희를 도와주실 겁니다.”
“그 아도 신기하다. 어째 세혁이랑 좋게 지내는가 모르겄다. 아무리 측실 딸년이라 케도, 소령쯤 달믄 욕심낼 법하거든. 정계 입문 말이다.”
서늘한 바람이 뺨에 달라붙었다.
“소령님께서는… 그런….”
“허튼 생각 안 한다, 이 말이제?”
기우희는 권주혁에게 충성하는 신해범 밑에 있었다. 장가의 승계 작업에 반기를 들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시였다.
그래도 장두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돋보기를 들이댄 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었다. 권력과 부귀는 손에 움켜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빠져나가는 성질을 가졌다.
“소령님은 좋은 분이세요. 세혁이도 소령님을 잘 따르고요.”
“…….”
“누나라고 부르더라고요. 여기 같이 내려온 것만 봐도 세혁이가 소령님께 얼마나 의지하는지 보이죠.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저도 누나가 있어서 그 마음 알거든요.”
류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엔 서먹해도, 어려울 때 생각나는 건 결국 가족이더라고요. 형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장두현은 대답 대신, 턱을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전 제 누나의 결백을 믿습니다.”
“그기 문제다. 사람이 앞뒤가 안 맞아.”
“사람 마음이 단편적으로 설명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고민할 일도 없지요. 왼쪽이면 왼쪽, 오른쪽이면 오른쪽, 그렇게 딱딱 구분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저도 편했을 겁니다.”
류진은 장두현이 문 시가 끄트머리를 노려보았다.
“아까 세혁이한테 말씀하셨죠. 인생 길다고. 네. 인생 길어요. 한평생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살기에 전 너무 아까운 사람입니다.”
말하는데 신해범이 떠올랐다. 진지한 질문에도 장난만 쳐서 사람 머리꼭지 돌게 하는, 쓸데없이 잘생기기만 한 그 얼굴이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나쁜 짓도 머리가 좋아야 한다.
신해범은 머리가 좋았다. 그래서 잘하는 게 많았다. 공부도, 요리도, 언변도 화려하고 부하들을 통솔하는 리더십도 있었다.
하지만 류진은 신해범의 나약함을 보았다. 이후로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여전히 미웠지만,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잘난 얼굴로, 근사한 목소리로, 똑똑한 머리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는 신해범이….
아까웠다.
왜 당신은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법밖에 모르나.
죽으면 편해질 것 같나. 아니다. 당신은 죽어서도 행복해지지 못한다. 염원하는 지옥은커녕 저승도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악귀가 될 것이다. 불붙은 채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산 자들의 팔다리를 뜯고 내장을 헤쳐 먹는 해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내버려 두기에, 신해범은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다.
류진은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십자가 앞에 서 있었던 신해범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다. 인간인지 괴물인지, 악마인지 구원자인지 알 수 없는 자가 어디까지 갈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원망 안 헌다고….”
장두현이 시가 연기를 뿜었다.
“내는 그런 말 안 믿는다.”
“왜 믿지 못하시는지 압니다. 사실은 바라고 계셨던 거죠.”
류진은 인상을 찌푸린 장두현을 향해 웃었다.
“누군가가 복수하러 와 주기를. 와서, 언젠가 정상에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를 해소해 주기를. 잠들지 못하는 밤을 끝내 주기를. 사실은 누구보다 바라고 계셨지 않습니까?”
장두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옆에 있던 사병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가 홀스터에서 글록을 꺼낸 것과 류진이 헐렁한 셔츠 자락으로 가렸던 리볼버를 꺼내 테이블에 탕 소리 나게 내려놓은 건 거의 동시였다.
류진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난 채였다. 이마로부터 불과 십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리볼버의 은빛 총구가 있었다.
장두현의 고성이 솟구쳤다.
“치아라!”
“하지만 어르신.”
“퍼뜩 치아라! 니 눔 똥구멍에 쑤셔 박아 뿐다!”
신해범이 들으면 유머러스하다고 좋아할 말이었다. 류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놀라셨지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아, 명색이 군인인데 빈손으로 덜렁덜렁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이게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무기를 꺼내려고 하면 바로 움직여요. 손이.”
장두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시가를 피웠다. 독한 연기를 바로 앞에서 내뿜는데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는 류진이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장두현에게는 데이터가 있었다. 일선에서 수십 년간 싸워 오며 몸소 체득한 백전노장의 데이터였다. 그의 상식선에서, 정류진은 진즉 죽었어야 할 놈이었다.
돈도 없고 백도 없는 놈. 출신 성분은 최하.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어느 지저분한 매음굴의 볕도 들지 않은 축축한 골방에 갇혀 약물에 전 채 썩어 갔을 놈이, 아끼는 증손자의 불타는 첫사랑 상대가 되어 있었다.
정류진의 눈은 깨끗했다. 복수심도, 원망도, 하다못해 체념도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눈이었다. 장두현은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은인도, 저주의 대상도, 그 중간의 수두룩한 무언가도 되어 보았으나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딱 한 명 있었다.
“…허.”
장두현은 시가를 사병에게 넘겨주었다.
얼굴이 빼어나게 류연비를 닮지 않았다면, 아니 작정하고 신분을 속이고 나타났더라면, 장두현은 자기가 그의 출신 성분을 특정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관상은 귀족인데 하는 짓은 거지였다.
몸뚱어리는 바짝 말라 굶어 죽기 직전의 유기견. 몸동작은 전장에서 살아남은 투견. 군대 말투와 양아치 말투를 섞어 쓰는 기묘한 남자애.
지금껏 장두현의 데이터를 벗어난 케이스는 한 명이었다. 이강연. 물론 그에게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외국인이었고, 비밀을 감췄으며, 모든 이에게 상냥한 것 같아도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상대방이 아무리 밝은 빛을 내뿜어도 선뜻 다가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초연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권세혁은 이강연을 남달리 잘 따랐다. 이강연이 단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이강연이 아니라도 많았다.
장두현은 이강연을 향했던 손자의 맹목적인 신뢰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소개해 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사람 보는 눈이 같은 것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른침을 삼키는 장두현의 곁으로 류진이 다가왔다. 류진은 총을 든 사병을 무시하고, 장두현이 앉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원수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고.”
속삭임은 나직하고 은근했다.
“상처받은 사람은 강하죠. 극복하는 법을 아니까.”
장두현은 눈을 감았다. 지척에서 풋풋한 냄새가 났다.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는 봄날, 보랏빛 제비꽃이 만개한 들판이 펼쳐졌다.
“세혁이한테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처를 극복하는 법, 그리고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
“그래가 배웠나?”
“네.”
장두현은 눈을 떴다. 코앞에서 제비꽃이 웃고 있었다. 곱상한 얼굴에는 뜻밖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확실히 배웠습니다.”
신해범은 원수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권세혁은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은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었다. 진치우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뼈에 사무친 외로움이 잠시나마 잊힌다면, 원수에게서도 단 하나의 장점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그렇게 죽을죄는 아니라고, 곽현우를 배신하는 건 아니라고… 류진은 생각했다.
신해범은 군인이었다. 군인 중에서도 ‘넘을 수 없는 벽’ 안쪽이라 불리는 장성급이었다. 이립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인 승진이 가능했던 배경은 첫째, 철혈일성 집권하에 이루어진 엄청난 숫자의 내부 숙청이었다.
권일혁에게는 한시바삐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권숙빈 체제의 나쁜 점만 모방한 그는 공화당 시절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정치가의 목을 쳤다. 그 시절 부내(部內)가 아니었음에도 불구, 공식 석상에서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도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여서 끌려갔다.
특히나 군부 관계자들이 권일혁의 집중적인 타깃이 되었는데, 권일혁이 어린 시절 힘없는 총통인 아버지가 무장한 군인들에게 압제당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장성급에는 공화당과 인연이 없는 자가 없었다. 군대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권수혁은 집권 초기부터 무리한 뉴딜 사업을 강행했고, 국가 재정의 절반을 차지하던 해저 천연가스도 그 대에 바닥을 드러냈다. 경제가 파탄 직전이었다. 그 시점에 군대를 먹여 살릴 만한 자본을 소유한 세력은 공화당뿐이었다.
공화당은 부자 모임이었다. 서경, 유성, 대일 삼대 재벌을 필두로 각자 자기 분야에서 네임 밸류 있는 사업가들이 똘똘 뭉쳤다. 그 시기 삼대 재벌의 정치력은 정점에 달해서, 1개 사단을 거느리는 투 스타도 석상에서 공화당 수뇌부와 마주치면 먼저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
이후 삼룡이 처형되고 공화당이 무너지자, 군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다들 꼬리 자르기에 급급했다. 문제는 꼬리와 몸통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지경이었다는 데 있었다. 물론 권일혁은 수뇌부라고 호락호락 봐주지 않았다. 권숙빈 시절의 원로라 한들 숙청의 칼날을 온전히 피해 가지 못했다. 꼬투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죽였다. 모함과 증거 조작이 난무했으나 진위는 파악되지 않았고, 진상 규명에는 아무도 관심 없었다.
개인의 감정까지 섞인 무분별한 정치질이 성행했다. 결과적으로 신룡관의 주요 보직이 텅텅 비었고, 권일혁은 태풍의 눈 한가운데서 묵묵히 자신을 지탱해 준 아우 권주혁의 말대로 인사 개편을 강행했다. 신룡관의 빅 브라더라는 호칭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둘째, 신해범은 철혈일성이 국내 반정부 세력의 기를 꺾어 놓기에 최적인 선전 도구였다. 신영산의 아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공화당 지지자들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신해범은 그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권주혁의 줄을 잡아 성공했고, 그의 사병 집단이나 다름없는 <풍기 교육대>의 수장이 되었다.
권에 대한 충성심이 어찌나 남다른지 추문이 끊이질 않았다. 권주혁의 애인이라는 소문은 성기능 장애 불구인 권주혁의 의료 기록이 공개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사태는 더 나쁜 방향으로 점화되었다. 신해범이 권주혁의 비이상적인 성욕 충족을 위해 자처했다고 알려진 일들은 세간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물론 관계자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땅한 증거도 나오지 않아 진실은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증거가 없는 건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의견이 끊이지 않았다.
의혹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권주혁이 풍기 교육대를 화려한 특수 부대로 이미지 메이킹하고, 신해범이 타고난 외모와 빼어난 언변을 십분 활용해서 지지 기반을 다지는 와중에도 불씨는 꺼지지 않은 채 잿더미에 파묻혔다.
그리고 지금.
조카에게 한 방 먹고, 측근들과의 사이가 소원해진 데다, 자랑하던 풍기 교육대마저 유미현에게 넘겨주기 직전인 권주혁은 부지깽이로 잿더미를 쑤시며 신해범에게 화풀이했다.
“내가 못 찾을 줄 알았겠지. 누군지 못 알아낼 줄 알았겠지! 유미현 그 두더지 같은 년이 또 누구 발목을 잡으려고!”
신해범은 대꾸하지 않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만 띠면서 최근 눈여겨본 크리스찬 디올의 디저트 플레이트 세트를 생각했다. 지름이 이십 센티미터 되는 흰 접시 가장자리에 회색 띠를 두르고 중심에는 브랜드 로고가 그려진. 딸기로 장식한 프루트푸딩이나 슈거 파우더를 듬뿍 뿌린 치즈케이크와 잘 어울릴 것이다. 코코넛 롱으로 장식한 로쿰을 잔뜩 쌓아 내놓아도 근사하리라.
권주혁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울분을 토했다. 이제 환상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세혁이 그놈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신해범은 묵묵히 찻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는 척하면서 표정을 감췄다. 난데없이 들이닥쳐 유미현에 대한 저열한 인신공격을 한참 쏟아 내던 권주혁은 이내 자신에게 일언반구 없이 장진으로 훌쩍 떠나 버린 권세혁을 원망했다. 기우희와 정류진이 함께 갔다는 사실이 권주혁의 화를 더욱 돋웠다. 그럴 만도 했다. 자기 측근으로만 알차게 채워 넣었다고 생각한 풍기 교육대에서 자기가 모르는 일이 벌어졌는데.
신해범은 눈을 내리깐 채 빙긋 웃었다. 믿는 구석인 기우희와 성욕 해소 수단인 정류진이 동시에 사라졌으니 애가 타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유미현.
이 의심 많고 성질 급한 늙은이는 유미현이 ‘어닝 쇼크 바리케이드’ 칭호를 획득하며 풍기 교육대에서의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신해범은 유미현에게 불알이라도 떼였나, 싶을 정도로 저주를 쏟아 내는 권주혁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누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권주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하니 또 울분이 치미는 모양이었다.
“장승희 총통 부인께서 손을 썼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는 팔짱을 끼고서 대꾸하지 않았다. 신해범은 권주혁의 잔에 담긴 다 식은 찻물을 버리고,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다시 채워 주었다. 생산성 없는 행동이었으나 권주혁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꼬투리 잡히면 곤란했다. 한시바삐 기우희에게 연락해야 했다. 강인우가, 수세에 몰린 쥐새끼가 그쪽으로 간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요?”
“그걸 몰라서 물어?”
“…모르겠습니다.”
“너 말이야, 너!”
삿대질. 권주혁의 손가락에 눈을 찔릴까 봐 무서웠다. 신해범은 이마와 콧등에 튄 것이 권주혁의 타액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다.
“저요? 제가 뭘 말입니까?”
“빼기는! 내가 너랑 총통 부인 사이를 모를 줄 알고.”
신해범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뭐 자랑이라고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니겠습니까.”
“그래도 나한테는 언질을 줬어야지!”
“다 한때 바람입니다. 왕자님이 둥지에서 떠나시고 이래저래 적적하시던 참에 제가 눈에 띈 것뿐입니다.”
“말은!”
권주혁의 지팡이가 바닥을 쿵, 찍었다. 무릎에 힘이 안 들어가는 노인네가 제 성질을 못 이길 때마다 하는 짓이었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나마 딱딱한 바닥이라서 다행이었다. 저 밑에 사람이 깔렸던 적도 많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습니까. 제가 신중하게 처신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애초에 장군께서 신경 쓰실 일도 아닙니다.”
“내가 유난 떤다는 소리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그분께 불장난 수준도 못 된다는 얘깁니다.”
신해범은 어깨를 으쓱했다. 권주혁이 시선이 따가웠다.
“차가 마음에 안 드시면,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취하기엔 이른 시간이긴 합니다만.”
“뭘 믿고 그리 태평해?”
“장군님을 믿으니까 이리 태평하지요. 설마하니 장군께서 유미현 따위에게 말고삐를 넘겨주시지는 않을 테니까요.”
“말도 말 나름이지….”
권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신해범을 위아래로 훑었다. 확인하는 눈이었다. 목줄에 매여 있는 것이 사냥개가 맞는지.
신해범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권주혁의 하관을 응시했다. 깊은 팔자주름 아래 입술이 푸르스름했다. 시선을 더 내렸다. 권주혁의 주름진 손가락에 유난히 알이 큰 반지가 있었다. 백금 링에 녹색 에메랄드가 박힌 패물은 그동안 신해범이 못 보던 것이었다.
불현듯 윤태금이 생각났다. 장승희가 골드 앤 아이언에서 구입한 루비 반지도. 그것 역시 유난히 알이 크고 반짝거렸다. 단순히 그런 디자인이 유행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송이 윤태금이라면 몰라도, 윤금강은 까다로운 장승희의 비위를 잘 맞춰 주었다. 그건 어지간한 눈치와 내공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해범은 윤금강을 눈여겨보기로 했다. 적어도 장승희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범아.”
“예, 장군.”
“너 유미현이 잔치에 낄 거니.”
“수석이 풍기대를 손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손쓰겠지. 지분을 그만큼 쥐고 있는데.”
권주혁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챘다. 인사이동과 조직 개편. 유미현이 조직에 자기 사람들을 끼워 넣기 시작하면 풍기대는 지금 같은 체제를 유지하지 못할 테고, 그건 권주혁의 군벌 약화로 이어진다.
신해범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나의 지붕 아래 두 세력이 공존하게 된다. 구(舊)친권파와 신(新)친유파.
처음에는 친권파가 득세할 것이다. 군령이 전두엽에 박히도록 교육받은 군인에게, 줄을 갈아타는 건 상당한 결심을 요하는 일이니까.
자존심 이전에 생존 문제였다. 폐쇄적인 군에서 한번 주인을 문 개는 보신탕감이 되었으면 되었지 새로운 주인, 그것도 좋은 새 주인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복무 기간을 채워서 명예롭게 옷이나 벗으면 다행이다. 대부분은 새로 전입한 부대에서 따돌림당하다 위험한 임무에 고기 방패로 돌려지곤 했다. 그 끝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풍기대에 적응한 강인우가 특별한 케이스였다. 그는 풍기 교육대의 모체인 헌병대, 그중에서도 엘리트 집단인 특별 수사본부에 근무했으며, 약자를 지켜 주려다 좌천당한 처지였기 때문에 영웅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여 기존 집단에 받아들여졌다. 본인의 붙임성 있는 성격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였다.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배신자에게 가해지는 내부의 형벌은 가혹했다. 개인의 역량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고, 매일 밤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으니 사지 멀쩡히 옷이나 벗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게 될 것이다. 아무 신이나 깨어 있다면 들어주기 바라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신해범은 시선을 들었다. 권주혁의 인중이 아니라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저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목줄을 받아 인생을 저당 잡힌 세월이 길다. 이제는 권주혁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장군.”
신해범은 무릎을 짚고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진치우가 뚜껑 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넣어 놓은 예거밤을 꺼내 흔들었다.
“한잔하시지요.”
“해가 중천인데 무슨.”
조그맣게 읊조렸다.
“취할 수 있을 때 취해 두십시오.”
신해범은 술병과 얼음을 넣은 잔을 챙겨 자리로 갔다. 테이블에 술병을 쿵, 소리 나게 내려놓고 병목을 잡아 상표가 잘 보이도록 권주혁 쪽으로 돌렸다.
“이것이 제가 장군께 대접하는 마지막 술일지도 모릅니다.”
“뭐야?”
“수석 각하 잔치에 낄 거냐고 물으셨지요? 예.”
신해범은 잔을 손바닥으로 덮고 가볍게 한 번 흔들어 주었다. 얼음 사이사이로 술이 들어가서 훨씬 시원하게 즐길 수 있다.
탕! 테이블이 흔들렸다. 신해범이 잔을 권주혁 앞으로 밀었다.
“제게 언제는 선택권이 있었답니까. 그저 흘러가는 대로, 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몸을 맡겨 왔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참… 쉬우셨지 않습니까?”
권주혁은 술잔을 만지지 않았다. 독기 서린 뱀눈이 번뜩였다.
“너 생각 잘해야 돼. 유미현이, 그게 지금 당장은 이것저것 퍼다 주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죄송한데 좀 귀찮습니다.”
“뭐?”
신해범은 깍지 낀 두 손을 당당하게 꼰 무릎에 올려놓았다.
“생각하는 게 귀찮습니다. 제가 보기보다 멍청해서요. 옳고 그름이나 이익, 조건 이걸 일일이 따지면 아이고, 밑도 끝도 없지요.”
“너….”
“장군, 비천한 제가 감히 조언 한마디 올려도 되겠습니까? 이 바닥에서는 말입니다. 생각을, 이 머릿속에서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그걸 최대한 줄이는 게 장수의 비결입니다.”
“너 지금 나하고 장난치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웃으십시오, 장군.”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은 권주혁이 혀를 찼다.
“저놈은 언제 사람 될까….”
“아이, 왜 그러십니까. 웃으면 복이 온답니다. 상황이 나쁠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말입니다. 밖에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보란 듯이 웃어 주십시오. 카메라 앞에서 손도 좀 흔들어 주시고. 나는 아직 건재하다, 결백하다, 거리낄 것 없으니 당당하게 국민 앞에 서겠다.”
신해범은 바로 이어 말했다.
“장군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자기가 믿는 게 중요하다고.”
“…….”
“결국에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아닙니까.”
권주혁은 드디어 화를 냈다.
“이놈이 술 처먹고 맛탱이가 돌았나.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주둥아릴 놀려!”
지팡이가 대리석 바닥을 쿵쿵 찍었다. 신해범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장군 고정하십시오. 바닥 내려앉습니다.”
“이놈이 그래도!”
“아까부터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농지거리 좀 던져 보았습니다. 너무 언짢아하지 마십시오.”
신해범은 히히 웃었다. 바보 천치 모질이 노릇이 평소에는 약발이 괜찮았는데, 오늘은 영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만큼 권주혁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신해범은 안심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줄곧, 있었다. 권주혁이 앉은 소파 등받이에. 몸의 윤곽이 흐릿한 하성록이 걸터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고 주름진 손이 권주혁의 어깨를 짚었다. 신해범은 그 손을 노려보았다.
“장군. 혹시 어깨 아프지 않으십니까?”
“흰소리 그만해라!”
쿵. 애꿎은 바닥이 얻어맞았다.
신해범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한계였다. 권주혁의 유미현 뒷담화와 떠보기에 더는 어울려줄 에너지가 없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권주혁을 바라보았다.
“아직 공식 발표 전입니다. 유 수석과는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습니다. 합의점은 제가 찾겠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수석이 맘먹으면 가장 먼저 잘려 나갈 사람이 저랑 치우, 그 밑에 기 소령, 이렇게 셋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제 코가 석 자입니다.”
“…….”
“유미현, 돈깨나 쥐고 있는 것 같아도 사업하는 집안 아웃사이더입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지금 화천 지구 건도 그렇고, 풍기대 지분 확보 건도 그렇고, 돈 들어가는 일투성인데 위세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지금도 집안에 머리 숙여 가며 자금 융통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제로 그런 소문이 도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소문의 발화지가 여기라도 상관없다. 유미현이 그런 걸로 쩨쩨하게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신해범은 한시바삐 권주혁을 몰아내고 싶었다. 아무리 자기라도 권주혁과 하성록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머리가 버텨 주질 않는다.
“지금 유미현은 풍기대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는 걸 원하지 않을 겁니다. 돈 많이 써서 기껏 괜찮은 이미지 구축해 놨는데, 사람 좋은 척하다가 분란 일으킨다는 말 나오기 시작하면 도로 아미타불 아닙니까.”
권주혁의 못마땅한 표정이 풀어졌다. 신해범은 살살 웃으면서 그의 비위를 맞췄다.
“유미현이 얼마나 사람들 눈치 보는지 장군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 겁 많아요.”
“그걸 범이 네가 어떻게 알아.”
“제가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똑같이 천한 장사치 핏줄인데.”
권일혁은 정치인들의 집안 배경으로 ‘본가’와 ‘분가’를 나누어 차별했다. 권주혁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노골적으로 재계를 무시했다. 똑같이 잘 먹고 잘 살아도 ‘근본’이 다르다는 거였다. 우리는 뼈대 있고 유서 깊은 왕족이고 귀족, 너희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타서 돈 좀 긁어모은 졸부. 그러니까 출신 성분 낮은 것들 눈치 살살 봐 가면서 기지.
“제가 잘 구슬려 보겠습니다. 지금이야 유미현이 숙청 여제니 뭐니 살벌해도, 기껏해야 분가 출신입니다. 본가 어르신들 앞에서는 찍소리 못 해요. 그 사람.”
이제 권주혁의 표정은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측근이 적에게 고개 숙이러 간다는데 빈말로도 만류하지 않는 모습이 그의 한계를 증명했다. 신해범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하여튼 자존심 상하는 일은 나한테만 시키지, 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노인네….
어쩌면 처음부터 이걸 목적으로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얘 해범아, 지금 집에 쌀이 떨어졌으니 옆집 원수 유미현네 가서 한 됫박 얻어 올래? 내가 시켰다고는 하지 말고.
권주혁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났다. 짚고 선 지팡이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예전보다 더 나빠진 모양이다.
그를 도로 한가운데 세워 놓고 차로 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신해범은 권주혁의 중절모를 건넸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신해범은 권주혁이 곧장 자기 측근들을 만나러 갈 것임을 알았다. 권주혁 군벌의 대들보들. 손진우와 오두경, 김해국. 권주혁은 그들을 꼬드길 것이다. 유미현의 풍기대 지분 확보를 역으로 이용해서 그의 자금 운용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자는 설계를 시작하겠지.
하지만 이미 그들에게는 유미현이 손을 썼다. 지금쯤 호월루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터였다. 의제는 간단했다. 썩은 동아줄 부여잡고 있다가 최석준 꼴을 당할 것이냐, 난세를 헤쳐 온 노장들답게 ‘융통성 있는’ 선택을 할 것이냐.
유미현의 혈관에는 사업가의 피가 흘렀다. 그것이 그의 정치 인생 내내 발목을 잡았으나, 장사할 줄 안다는 것은 전략가로서 대단한 무기였다. 정치가의 역량을 판단하는 두 가지 기준인 ‘배짱’과 ‘언변’은 장사의 필수 요소인 ‘흥정’의 기본이었다. 어딜, 시장에서 콩나물값 한 푼 깎아 본 적 없는 할배가 까불어.
“그럼, 편안히 귀환하십시오.”
신해범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권주혁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무릎에 힘이 탁 풀렸다.
신해범은 문을 짚고 섰다. 식은땀 때문에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그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
신해범은 머리를 흔들었다. 헛웃음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을 만지는 손가락이 떨렸다.
기우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권 이탈 지역이라는 안내 음성에 속이 타들어 갔다. 메시지는 전송되었으나, 수신 확인은 되지 않았다.
“통화권 이탈이네. 왜 이러지?”
권세혁이 휴대폰을 흔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우희는 그걸 이제 알았느냐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류진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신해범에게 전송할 목적으로 쓰던 장문의 메시지를 지웠다. 장두현과의 대담에서 기죽지 않았다는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글쓰기가 쉽지 않았다. 머릿속에 생각은 있는데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장두현에 대한 욕밖에는….
류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장두현의 욕으로 시작한 메시지는 결국 신해범에 대한 원망으로 끝났다. 왜 같이 안 왔어? 솔직히 좀 보고 싶어. 당신이 좋아서는 절대 아니고, 당신이 있으면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멀리서 윤태금이 뛰어왔다. 그가 안고 온 상자에는 검은 방탄 장갑이 가득했다.
“축사 안에서는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 사나운 놈들이 많거든요.”
장갑을 나눠 준 그는 이곳이 통화권 이탈 지역인 이유를 설명했다.
“주변에 민가가 아예 없어요. 대관께서 땅을 다 사들이셔서 밭으로 개간하셨거든요. 사람이 살긴 힘들어요. 개들 짖음이 시끄러워서.”
장갑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은 기우희가 물었다.
“대체 어느 정도기에.”
“사실 머릿수가 그렇게 많진 않은데. 얘들이 다 사냥개다 보니 짖음이 크고 하울링도 심해서요. 규모는 거의 농장이에요. 아, 그렇다고 요새 뉴스에 나오는 식용견 농장, 투견 사육장, 이런 건 아닙니다. 그런 데랑은 비교가 안 되죠.”
윤태금은 장두현의 개들을 두고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싱싱한 고기 먹고, 운동하고. 천국이 따로 없죠.”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윤태금이 손질된 생닭고기가 가득 든 수레를 권세혁에게 내밀었다. 개들에게 줄 간식이었다.
“그러죠, 뭐.”
권세혁은 순순히 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류진은 권세혁의 셔츠 밑에 있는, 오른팔을 감싼 보호대를 떠올리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할 수 있어.”
그는 수레를 밀면서 윤태금에게 질문했다.
“총 몇 마리예요? 지금?”
“새끼들 빼고 마흔일곱 마리입니다.”
“그거밖에 안 돼요?”
“번식은 잘 되는데, 한번 사냥 나갈 때마다 열몇 마리씩 죽어 나가서 그렇습니다. 훈련 중에 다치기도 하고요.”
“그렇게 위험해요?”
“상대가 상대니까요.”
윤태금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권세혁이 류진을 돌아보았다.
“형, 보다가 마음에 드는 개 있으면 말해. 우리가 할배보다 먼저 왔으니까 선점해도 돼.”
“응.”
“개 목줄에 이름표가 달려 있습니다. 거기다 이 바코드 찍으면 돼요.”
류진은 윤태금이 건네주는 기계를 받아 기우희와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검은색의 길쭉한 기계는 한 손에 딱 들어왔다.
수레를 든 권세혁과 윤태금이 열 걸음가량 앞에서 걸었다. 류진은 두 사람의 등을 응시하며 걷는 기우희 옆에 따라붙었다.
“저, 소령님.”
“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려 사각사각 잎사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류진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했다.
“그 잠수함 말인데요. 만약 제가 받게 되면….”
“되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류진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상상해 본 적도 없어서요.”
전투 잠수함이 뭔지는 알았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 봤을 뿐 자세한 기능이나 건조 목적, 운용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권세혁이 상세한 설명을 해 줘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뜻밖이라서. 또 너무 어려운 이야기라서.
기우희가 피식 웃었다.
“하긴. 여객선이면 크루즈 여행이라도 하지. 전쟁 통도 아닌데 그걸 당장 얻다 쓴다고.”
“하하….”
“솔직히 나도 좀 놀랐다.”
장가에서 신룡관에 보낸 예물인 ‘수련’과 ‘창포’가 워낙에 쌍둥이 전투 잠수함으로 유명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셋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실물을 본 건 아니었으나 권세혁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확실히 애송이지만 허풍쟁이는 아니었다. 함풍에서도 상황만 따라 줬다면 그가 함영재를 죽일 수 있었다. 신해범보다 훨씬 간단하게.
기우희는 그동안 권세혁이 새벽마다 별관에 드나들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확실히 전투 잠수함은 간단히 운용 가능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어리연함은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녀석이었다. 윤태금을 비롯한 정수헌 관계자들이 입을 다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장두현이 세 번째 전투 잠수함 건조를 마치고도 신룡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면….
총통을 속일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리연함에 대한 모든 일을 극비리에 진행했을 테니까. 하지만 권세혁은 어리연함의 존재를 알았고, 그건 장승희도 마찬가지이리라. 어리연함은 정말로 왕실의 며느리임을 증명하는 ‘증표’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장두현은 어리연함을 만들면서 누구를 떠올렸을까. 그의 성에 찰 만한 ‘왕실의 며느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장승희?
내 친모 같은 사람은 아니었겠지. 확실히.
“부담스럽습니다. …많이요.”
기우희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류진을 보았다. 장두현이 바란 며느릿감으로는 한참 미달이었다. 얼굴 빼고.
“저보다는 소령님이 더 어울려요.”
“뭐?”
“소령님은 왠지, 그런 거랑 잘 어울리세요.”
“그런 거가 도대체 뭔데.”
류진이 손가락을 꼽으면서 말했다.
“진압 차량, 지프, 트럭, 비행기, 헬기, 배, 또….”
“됐다. 그만해라.”
기우희는 류진의 말을 끊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동 수단의 이름이 다 나오기 전에.
“덥다.”
“여기 있습니다.”
“이건 또 어디서 났어?”
“차에서 하나 챙겼습니다. 좀 걸어야 한다고 해서.”
류진이 배시시 웃었다. 기우희는 물을 절반만 마시고 류진에게 넘겨주었다. 류진은 남은 물을 마시고 빈 플라스틱병으로 어깨를 탁탁 쳤다.
“다 왔습니다!”
앞서가던 윤태금이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쳤다. 류진은 파란색에 하얀 글씨로 ‘전방 100M 앞’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봤다.
권세혁의 어깨는 위아래로 거칠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길이 좁고 험해서 축사 바로 앞까지 덩치 큰 차량이 들어갈 수 없었다. 윤태금은 그걸 알고 권세혁에게 수레를 넘긴 게 틀림없었다.
“얍삽한 놈.”
기우희가 말했다. 류진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길은 갈수록 좁아졌다. 마침내 나무와 잡초가 빽빽하게 우거져 거치적거리던 길을 벗어나고 나면 깜짝 놀랄 정도로 탁 트인 공터가 나타났다. 거대한 축사의 지붕은 태양광 패널로 덮였다.
“과연.”
과연 개들 짖는 소리가 컸다. 바깥의 인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장갑 껴라.”
“예.”
비밀번호를 아는 윤태금이 축사 문을 열었다. 커다란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벌어졌다. 수레를 밀고 가던 권세혁이 방탄 장갑 낀 손을 흔들었다.
“형! 빨리 와!”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긴 했지만, 권세혁은 설레고 들뜬 표정이었다. 류진은 기우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권세혁에게 뛰어갔다.
“무거웠겠다.”
수레 손잡이 한쪽을 잡으려는데 권세혁이 바퀴를 틀었다.
“왜?”
“괜찮아. 나 하나도 안 힘들어.”
그래도 저 형한테는 한마디 해야겠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권세혁을 보며 류진은 윤태금을 애도했다.
“진짜 많이 바뀌었다….”
권세혁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넓어졌어. 못 보던 시설도 많네.”
“기술의 발전이죠.”
싱글거리면서 다가온 윤태금이 말했다. 류진은 권세혁이 그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패대기치기 전에, 그가 건네준 기계를 들어 보였다.
“이거 그냥 찍으면 돼요?”
“네. 저기 벽에 전광판 보이시죠? 바코드 찍으시면 저기에 개 이름이랑 기계 번호가 바로 뜹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결정하세요. 도련님.”
류진은 한 손으로 권세혁의 팔을, 다른 쪽 손으로는 수레를 잡아끌면서 말했다.
“가자. 개들 고기 주자.”
축사는 넓고 쾌적했다. 천장에 설치된 대형 에어컨 덕분에 춥기까지 했다. 곳곳의 필터들이 내부의 공기를 거르고 축사 특유의 냄새를 없앴다. 개들이 머무는 공간은 소도 키울 만큼 넓었는데, 종별로 섹션이 나누어졌고 개들은 그 안에서 아늑한 환경을 누리고 있었다. 류진은 공기 중에 떠도는 은은한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 풍기 교육대의 의무실 냄새.
“여기.”
류진은 분홍빛 뽀얀 살을 드러낸 닭고기를 권세혁에게 건네주었다.
“형이 해 볼래?”
“너 하는 거 보고 따라 할게.”
“그래, 그럼.”
권세혁이 활짝 웃었다. 그는 처음에는 조금 머뭇거렸으나, 곧 능숙하게 고기를 던져 줬다.
권세혁은 간식을 받으러 이쪽으로 달려오는 개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서열 높은 개들에게 밀려서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녀석들도 꼼꼼하게 챙겼다. 확실히 개를 키워 본 티가 났다.
간사 학생들이 견학 온 날 들은 ‘톰슨가젤 서바이벌’ 이야기가 생각났다. 장두현이 사냥개들을 훈련시킨 방법. 지금 여기 있는 개들은 그렇게 길러진 녀석들일까.
생각이 더 멀리 뻗어 나가기 전에, 류진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도 붙여 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강아지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조그만 솜뭉치들과 장두현의 사냥개들은 다르다.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우리 백구랑 닮은 개는 없을 거야.
“안 짖는 놈으로 해.”
“예?”
화들짝 놀라 돌아본 곳에 기우희가 서 있었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안 짖는 놈으로 하라고.”
기우희는 권세혁이 다리가 길고 근육질인 갈색 그레이트데인에게 눈길을 주는 틈을 타서 류진에게 속삭였다.
“무조건 안 짖는 놈. 그게 잘 싸우는 개다.”
“예.”
기우희는 피식 웃었다.
“넌 강아지밖에 관심 없지?”
“예? 아, 그, 아니….”
“표정 보면 알아.”
“그… 네.”
강아지들의 생활 공간은 입구에서 가장 안쪽, 부모견들과는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되었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않고 개월 수가 비슷한 강아지들과 섞여 있는 건 어려서부터 서열 사회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함이겠지.
류진은 수레에서 닭고기를 한 움큼 꺼내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았다. 그걸 들고 강아지들에게 걸어갔다. 권세혁은 그레이트데인의 이름표에 바코드를 찍으려고 노력하느라 미처 류진을 보지 못했다.
“음?”
전광판을 바라보고 섰던 윤태금이 류진에게 다가왔다.
“어디로 가?”
“저기 강아지들 주려고. 왜? 아직 고기 못 먹어?”
“아니, 먹을 순 있는데 순서가.”
윤태금은 사료도, 간식도 강아지들 먼저 먹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아지들의 몫은 살코기가 아니라 성견들에게 주고 남은 날개나 목, 내장 같은 것들이었다.
“장유유서잖아.”
“염병하네.”
“야.”
“난 애기들 먼저 챙길 거야.”
“같은 애기라서?”
류진은 바구니에서 닭 다리를 꺼냈다. 정수헌에서 살을 통통하게 찌운 닭이라 그런지 닭 다리 하나가 사람 얼굴만 했다.
“이거로 맞으면 좆나 아프겠다. 그치?”
윤태금이 입을 다물었다. 류진은 입술을 삐죽이며 그를 밀치고 강아지들에게 걸어갔다. 저 뺀질이 같은 놈, 내가 권세혁한테서 자기 구해 준 줄도 모르고….
강아지들이 왕왕 짖어 댔다. 생후 5개월부터 1년 미만의 강아지들이었다. 그래도 견종이 견종인지라, 아직 어려도 다들 한 덩치 했다.
바가지를 고쳐 잡는 류진의 옆에서 윤태금이 꿍얼댔다.
“아, 진짜 안 되는데.”
이곳은 철저한 서열 사회였다. 아직 사냥에 나서지 못하는 개들은 응당 성견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를 먹어야 한다는 게 장두현의 생각이었다.
“그게 이상하다니까.”
“왜?”
“강아지들은 아직 덜 자랐잖아. 그러니까 더 먹어야 할 때잖아.”
“그런가?”
“그래.”
“그럼, 뭐.”
윤태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해한 건지, 대충 이해하는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류진은 그가 입을 다문 것만으로 고마웠다.
부지런히 고기를 던져 줬다. 권세혁이 어떻게 했는지 떠올리면서.
꼬리를 흔들며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녀석들보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눈으로만 간식을 좇는 녀석에게 더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류진은 가능한 한 공평하게 나눠 주려고 애를 썼다.
“거참….”
옆에서 윤태금이 혀를 찼다. 또 시작이다.
“어차피 강아지들은 사냥에 도움도 안 되는데.”
“야생에서, 부모는 사냥에 성공하면 새끼를 먼저 먹여.”
류진은 자길 바라보는 윤태금의 시선을 느꼈다.
“사냥에 도움 되고, 안 되고는 상관없어. 부모견들은 자기 새끼들이 먼저 먹기를 바랄 거야.”
강아지 무리의 리더를 알아보기는 쉬웠다. 흑색과 갈색이 섞인 저먼 셰퍼드였다. 덩치도 크고, 다리도 곧게 뻗었다. 쫑긋 솟은 삼각 귀도 멋있었다. 모든 강아지가 그놈 주위를 맴돌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류진은 그놈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사람이 아무리 골고루 나누어 준다고 해도 힘없는 새끼는 자기보다 큰 놈들에게 먹이를 빼앗기기 마련이었다. 그런 놈들을 챙기는 건 셰퍼드였다. 녀석은 약한 강아지가 자기 몫의 고기를 다 먹을 때까지 그 앞을 지키면서 여유롭게 자기 몫의 고기를 뜯어 먹었다. 다른 강아지들은 입맛을 다시면서도 셰퍼드에게 덤비지 못했다.
“착하네.”
어느새 곁에 다가온 권세혁이 말했다.
“저놈 멋지다. 생긴 것도, 하는 짓도.”
“응. 좋은 사냥개가 될 것 같아.”
권세혁이 셰퍼드 강아지를 가리켰다.
“쟤는 이름이 뭡니까?”
“새끼들은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왜요?”
“지어 줘 봤자 소용없거든요. 데뷔전에서 많이 죽어서.”
데뷔전이란 성견이 되어 나가는 첫 번째 사냥이었다. 대부분의 강아지가 그때 목숨을 잃었다. 데뷔전에서 살아남아 성과를 올린 개들만이 정식으로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바코드가 달린 목줄도 그때 찬다.
류진은 그런 말을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는 윤태금이 껄끄러웠다.
“저놈이 마음에 드시면, 저 개 모견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세 살인데 지금 한창 팔팔할 때죠. 사냥 성적도 좋습니다.”
윤태금은 정수헌 사병들과의 친분을 들먹이며 사냥개들 성적과 컨디션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꿰고 있다고 자부했다. 권세혁이 류진을 돌아봤다.
“어때?”
“볼래.”
셰퍼드도 종류가 많았다. 크기도 생김새도, 털 색깔도 다양한 개들 틈에서 윤태금은 한 마리를 가리켰다. 귀와 등이 검은 셰퍼드였다.
“베로니카입니다. 편하게 로카라고 부르죠.”
이름을 불린 개가 대답하듯 컹컹! 짖었다. 권세혁이 움찔했다.
“이름 누가 지었어요?”
“성질이 좀… 사납긴 하죠.”
류진은 철창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개를 관찰했다. 혀를 길게 빼물고 헉헉대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동공이 확장됐고, 드러낸 송곳니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앞발은 바닥을 연신 세차게 긁어 대고.
류진은 윤태금을 돌아봤다.
“약 쓰죠?”
“물론이죠. 각종 영양제와 철분 보충제….”
“그런 거 말고요. 흥분제나 스테로이드 주사 같은 거.”
윤태금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효율성을 위해서요.”
“효율…!”
기가 차 신음한 건 권세혁이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윤태금을 바라보았다. 윤태금은 ‘대관께서 하신 결정’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나한테는 책임 없으니, 따지려면 위에 따지든가.
무책임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권세혁은 윤태금을 다그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그는 정수헌의 보안 담당자였다. 사냥개 관리자를 찾기 번거로워 함께 와 달라고 부탁한 쪽은 자신이었다.
입구 쪽이 소란해졌다. 개들이 짖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권세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돌렸다. 커다란 철문이 열리고 있었다.
더운 공기와 함께 장두현이, 그가 데려온 사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배.”
“와 그런 눈으로 보나? 내가 못 올 데를 온 거도 아이고. 여 있는 개들이 다 누구 낀데.”
장두현은 굳은 얼굴의 권세혁을 보며 웃었다.
“천천히 바라. 안 뺏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장두현의 사병들은 익숙하게 바코드를 찍는 중이었다. 전광판에 번호가 차곡차곡 쌓였다.
권세혁은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괴었다. 마음은 급한데 아는 게 없어서 답답했다. 겉모습만 대충 보고 고르기엔 윤태금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외조부는 사냥의 ‘효율성’을 위해서 개들에게 주사를 놓았다. 흥분제나 성장 촉진제, 스테로이드 따위를. 그런 약에 절어 든 개들의 심장은 상당히 비대해졌을 터였다.
그냥 내버려 둬도 단명할 놈들이다. 그런 개들을 흥분 상태로 몰아넣고 상당한 체력이 소모되는 원정 사냥에 동원하는 건 생체 시계의 리듬을 가속하는 행위였다. 사지로 떠미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윤태금이 멍하니 선 권세혁에게 제안했다.
“제가 골라 드릴까요?”
“닥쳐요.”
“욕은 하지 마시고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왕자님.”
윤태금이 전광판을 턱짓했다.
“이러다 에이스들 다 뺏기겠네.”
류진은 재빨리 바코드를 로카의 이름표에 찍었다. 윤태금은 로카의 사냥 성적이 좋다고 했다. 부디 거짓말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형.”
“…어쩔 수 없어.”
류진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안 고르면 다른 사람 선택을 받을 거야.”
이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눈에 든 개였다. 류진은 로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닮은 곳은 하나도 없지만,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호월루의 백구가 생각났다.
“정 이병 말이 맞습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기우희가 거들었다.
“여기 있는 개 중에 제명에 죽는 놈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는 외조부님이 그런 짓까지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요.”
“예?”
기우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상황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냥을 위해서 좋은 개를 고르는 게 중요하지.”
그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저놈들 하는 짓을 보십시오. 이번 사냥에 동원하는 마릿수와 상관없이 바코드를 찍어 대고 있습니다. 괜찮은 개들을 미리 다 선점해 버리려는 수작입니다.”
“그런.”
“멍청하게 서서 개들 불쌍하다 하지 말고 움직이세요. 어쨌든 이겨야 할 것 아닙니까?”
권세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우희는 그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자기 눈에 든 개를 차지하러 달려갔다.
류진은 권세혁을 쳐다봤다. 저렇게 말하는 기우희를 처음 봤다. 자신도 그가 낯설게 느껴질진대, 여태 비위 맞춰 주는 소리만 들은 권세혁은 오죽할까.
“…괜찮아?”
권세혁의 표정이 처참했다. 류진은 방탄 장갑을 벗고, 고개 숙인 권세혁의 뺨에 손바닥을 댔다. 눈을 감은 그가 중얼거렸다.
“나 기분 안 좋아.”
“응. 알아.”
“나 어렸을 때는 이렇지 않았어. 적어도 내가 아는 할배는… 개들한테… 약 같은 거 안 먹였다….”
그런 사실이 없었던 게 아니다. 권세혁이 어려서 몰랐던 거였다. 장두현은 주사를 맞지 않아 건강한 상태의 개들만 손자에게 보여 줬을 것이다.
그 사실을 굳이 확인 사살해서 권세혁의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네가 고른 개, 이름이 뭐야?”
“더크.”
갈색 그레이트데인의 이름은 더크였다. 키가 크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녀석은 권세혁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에 힘이 풀렸다. 더크는 진정 성분이 있는 약을 맞았다.
이만한 덩치의 개가 흥분하면 다루기 어려우니 재우거나 힘을 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권세혁은 개가 주인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서 자신에게 으르렁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류진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네 잘못 아니야.”
권세혁은 한참을 침묵하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장두현과 함께 온 마강희는 이리 교배종이 따로 있다고 조언했다. 기우희는 그의 조언에 따라 ‘가르토’라는 이름의 회색 개를 선택했다. 전신이 잿빛 털로 뒤덮인 이 사냥개는 늑대와 허스키의 혼혈이었다.
개보다는 늑대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고 으르렁거리기만 했다. 다른 개들에 비해 유난히 넓은 목줄을 찼고, 기둥과 연결된 사슬도 굵었다. 기우희는 그늘 속에 웅크린 채 먹이를 덮칠 때를 엿보는 녀석을 응시했다.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지만, 눈빛이 참….
“주인은 알아보나?”
“그럭저럭.”
“동족 잡아먹은 적 있지?”
“솔직히 말하면, 있어.”
“이런 걸 왜 만들었어?”
“투견장용.”
윤태금이 소개해 주지 않은 이유였다. 마강희는 원래 사냥에 동원되지 않는 개라고 언질을 줬다.
“돈을 벌어다 주는 개니까. 취미용이 아니라.”
“그런 놈을 골라도 돼?”
“우리 소령님은 몰랐으니까.”
마강희는 기우희를 스쳐 지나가면서 덧붙였다.
“나도 네가 이기길 바라.”
다루기 어려운 놈이다. 첫눈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손이 움직였다.
달빛 하나 없는 새카만 밤, 이번에야말로 재수 없는 ‘대가리’의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 주리라, 이를 갈며 총을 갖고 남자 화장실로 숨어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날쌘 놈이라도 별수 없다. 덜렁거리는 물건 꺼내 놓고 일을 보는 동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턱도 없었다.
신해범은 허리춤에서 빼낸 가죽 벨트로 권총 든 암살자를 제압했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았다. 자신이 총을 훔쳐서 갖고 있었다는 걸. 그걸로 누굴 해치우려고 했는지도.
기우희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어려우니까 재미있지.”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송곳니를 드러낸 늑대개가 달려들었다. 철망이 넘어갈 듯 크게 흔들렸으나 기우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름표 하단의 빨간불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전광판에 가르토의 이름과 기우희의 바코드 기계 번호가 나란히 떴다.
강인우는 문에서 가까운 이 인용 식탁을 골라 앉았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횟집이었다. 일부러 붐비는 점심시간을 피해 느지막이 들어왔다.
오후 두 시 반이었다. 혼자 들어가기 낯 뜨겁지 않으면서, 텅텅 빈 가게에서 홀로 점원의 관심을 받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시간.
자리에 앉자마자 물통과 컵, 일회용 수저와 젓가락이 나란히 놓였다. 강인우는 벽에 붙은 메뉴판에 ‘여름 특선’ 스티커가 붙은 콩국수를 주문했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을 달려갔다. 테이블 귀퉁이에 놓인 주문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강인우는 고개를 들었다. 대각선 맞은편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하는 젊은 남자였다. 입고 있는 회색 티셔츠는 목이 늘어났고, 앞섶에 까만 기름때가 묻어서 지저분했다. 남자가 맞은편 의자에 걸쳐 놓은 외투는 기름때에 거의 절어 버린 작업복이었다. 어찌나 더러운지, 원래 색이 청색인지 검은색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남자가 쓴 모자가 보였다. 옷처럼 지저분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분명 뽀얀 먼지가 잔뜩 내려앉았으리라.
강인우는 시선을 돌렸다. 제 딴에는 후줄근하게 차린다고 했는데, 이곳 선박 노동자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깔끔했다. 저 남자도 분명 의아해서 쳐다보았음이 분명했다. 볕에 그은 얼굴이나 체격을 보면 노동자일 텐데, 일하다 온 사람치고 너무 깨끗해서.
강인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거나 몸을 웅크리는 행동으로 의심을 사지는 않았다. 그는 음식을 기다리며 지루한 척, 바깥을 내다보는 척, 손으로 턱을 괴고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신해범을 속이는 데 실패하고 유미현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강인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하성록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만들어 둔 위조 여권과 신분증을 지퍼 백에 담아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벽 한쪽을 죄 차지하던 침대를 밀자 먼지가 뽀얗게 앉은 바닥이 드러났다.
벽과 맞닿은 모서리의 바닥재가 다른 부분에 비해 들떠 있었다. 강인우는 거침없이 바닥을 뜯어냈다. 달러와 위안이 각각 다른 지퍼 백에 담겼다. 그는 현금을 네 뭉치로 나누어 고무줄로 묶었다. 하나를 분실하더라도 낭패 보지 않도록.
이건 여행이 아니라 도피였다. 볕을 막아 주는 플로피 해트에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샌들을 신고 우아하게 캐리어를 끌었던 재작년 여름과는 완전히 다른 여행이 될 거라고 단단히 일러야 했다.
처음에야 당황하겠지만, 금방 알아듣고 이해할 것이다. 오은정은 똑똑하고 눈치도 빨랐다.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배포가 담대한 여자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십 년간 딸의 친부가 누구인지 속이지는 못한다. 강인우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크하는 풍기대원은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해야 했다. 오은정을 출국시켜 <백사자>와의 소식통으로 쓸 생각이었다. 인혜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 줄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그뿐이었다.
하성록과 직접 만나지는 않아도 괜찮았다. 백사율, 차모은, 아무나 좋다. 아무라도 좋으니 인혜만 빼내면 되었다. 신해범을 설득하든, 족치든, 협박하든.
하신성이 살아생전 풍기 교육대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안다. 곽재헌의 아들 때에도 교섭 시도는 있었다. 비록 결과는 안타까웠으나 곽재헌의 아들과 인혜는 경우가 달랐다.
하성록에게 곽재헌의 아들은 무가치했다. 그러나 유미현은 인혜에게 미련이 있었다. <백사자>와 손을 잡으면서까지 그 애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사람이다. 기대가 없었다면 <백사자>를 버리고 풍기 교육대에 협력했을 때, 그러기로 마음먹은 그때 바로 손을 썼겠지.
유미현은 손해를 감수하지 않는 자였다. 어떻게든 투자한 금액의 곱절을 쳐서 돌려받는 승부사였다. 그럴 수 있는 처세술의 소유자였다.
유미현이 총통의 친동생인 권주혁의 측근들을 뭉텅뭉텅 잘라 내면서도 여태 건재한 이유가 뭐겠는가. 유미현은 자기가 권일혁 총통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총통은 최측근인 권주혁의 세력이 왕좌를 넘볼 정도로 비대해지지 않도록 적당히 눌러 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 철혈일성에서 권주혁에 비할 만한 정치가는 유미현이 유일했다.
유미현은 자기가 싸워도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권주혁과 대립하는 거였다. 철혈일성의 지존이 자기를 보호할 테니. 분가 정치인으로서의 ‘선’을 넘지 않는 한.
강인우는 유미현이 신해범과 손을 잡은 이상, 풍기대에 억류된 인혜를 포기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강인혜 체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을지도 모른다. 유미현 본인이.
강인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패인을 분석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유미현이 더 손쓰기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기 전에 인혜를 빼내는 일이 급했다.
그는 백팩을 둘러메고 2층 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갔다. 집 안에 도청 장치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미리 확인했다.
맨발에 닿는 마룻바닥 감촉이 차갑다. 온 세상이 차갑고 싸늘했다. 창문이 커튼으로 죄 가려져 달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거실은 어두컴컴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의지해 걸었다. 강인우는 안방 문 앞에 섰다.
오동나무 문에 걸린 묵주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실리를 중시하는 고지식한 금융 맨이 느닷없이 종교에 귀의한 게 뜻밖이긴 했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약해진다. 여자는 반대고.
집 안 곳곳에 자리한 십자가상과 성경책, 종교 관련 서적들을 제외하면 아버지의 종교 활동은 미미했다. 주말마다 외출하긴 했지만 성당에 가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는 하나 과거의 백조교 사태도 그렇고, 아직은 종교인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기성세대 중에는 길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교회 청년부를 경찰이나 군에 신고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헌병대에 있어 봐서 안다.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것과 사회적 인식이 좋은 데는 차이가 있다. 그것이 강인우의 결론이었다.
너도 주님 믿으라고 하지만 않으면, 뭐.
막 노크하려는 순간이었다. 닫힌 문 너머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 자식 아니라고!’
곧이어 둔탁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강인우는 문고리를 붙잡고 돌렸다. 잠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문은 간단히 열렸다.
시야가 밝아지고,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가장자리가 월넛으로 된 묵직한 주석 공로패를 든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강인우는 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땅딸막한 키에 투실투실한 얼굴. 허리띠를 있는 힘껏 졸라매도 술로 찐 뱃살이 흘러넘치고 마는, 내세울 거라곤 조직 사회에 평생을 헌신한 대가로 움켜쥔 은행장 직함 하나뿐인 늙은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강인우는 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걸로 뭐 하려고?’
‘…나가라.’
부정할 수 없는 가정 폭력의 현장이었다. 강인우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잊어버린 채 소리 질렀다.
‘정신 차려! 이게 무슨 짓거리야!’
‘나가라고 했다!’
‘당신은 가장 자격이 없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은정이 놀란 눈으로 강인우를 쳐다봤다.
그는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잘못 말한 건 아니었다. 그것의 이름은 진심이었다. 강인우가 오래전부터 간직해 온 진짜 속마음이었다.
‘당신은 정말로…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옛날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는 자기가 모시는 상사들을 집에 자주 초대했다. 통보는 일방적이고 갑작스러웠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손님 먹을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린 강인우는 그런 자리에 나가서 인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아버지의 초조한 표정, 비굴한 목소리,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 지겨웠다. 이십 대 중반부터 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술안주 삼아 들먹이며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 아들의 어깨를 퍽퍽 때리던 아버지를 진심으로 혐오했다.
당신처럼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매일같이.
강인우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공로패를 빼앗았다. 자세히 보니 귀퉁이에 피가 묻어 있었다.
‘뭐야?’
그는 오은정을 내려다봤다.
‘다쳤어?’
강인우는 공로패를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한사코 고개를 숙이려는 오은정의 어깨를 잡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한쪽 눈두덩이 반대쪽의 두 배 정도로 부어올랐고, 뺨과 목덜미에 시뻘건 자국이 선명했다. 군인으로 일하며 오만 가지 상흔을 봐 온 강인우는 알았다. 오은정은 목을 졸렸다.
아버지에게. 현행범에게. 현장을 들키고도 당당한 가정 폭력 범죄자에게.
‘일어나.’
강인우는 오은정을 부축해 일으켰다.
‘…난 괜찮아.’
그렇게 얼버무릴 수 없는 상처였다. 강인우는 비틀거리는 오은정을 부축해 거실로 나갔다.
이마가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수건으로 상처를 꾹 눌렀으나 좀처럼 피가 멎지 않았다. 강인우는 화장실 수납장에서 가정용 구급함을 찾아 가져왔다. 급한 대로 응급 처치만 한 뒤 오은정에게 말했다.
‘여기 있어.’
‘가지 마.’
‘내가 얘기할게.’
안방으로 향하는 강인우의 팔을 오은정이 붙잡았다.
‘다 아셔.’
‘…그래.’
죄책감도, 허망함도 없었다. 그저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인우는 오은정을 내려다봤다.
‘감추고 사느라 마음고생 심했지. 이젠 안 그래도 돼.’
다 끝났어. 강인우가 말했다.
오은정이 소파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는 재빨리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거실은 또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혼자 남은 오은정은 커튼을 젖히거나 불을 켤 생각도 하지 못하고 피로 물든 수건을 힘껏 그러쥐었다.
강인우는 등 뒤로 문을 닫았다. 강재상은 아까와 똑같은 자리에 섰다. 그의 양손에는 아까 강인우가 집어 던진 공로패가 들려 있었다. 시선은 오은정이 쓰러졌던 바닥에 꽂혔고.
‘아버지.’
공로패를 쥐고 부르르, 떨던 그가 소리쳤다.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
‘언제부터 알았어?’
‘이, 천하의 패륜아 새끼!’
강인우는 피식 웃었다. 이봐요, 강재상 씨. 화나고 억울한 마음은 알겠는데 내 말 좀 들어 봐.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알았어. 알겠는데 우선 앉아 봐. 찬물이라도 한잔 떠 올 테니 마시고 속 좀 가라앉혀. 지금부터 내가 아주 중요한 얘길 할 건데….’
‘중요한 얘기? 중요한 얘기?!’
파열음이 요란했다. 강재상이 집어 던진 공로패 모서리가 문짝을 찍고 바닥에 떨어졌다. 강인우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사력을 다해 던졌으나 빗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빗나가게 던진 게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저자의 앞에 선 자신은 아들이 아니었다. 연적도 못되었다. 자기 소유물을 빼앗아 간 도둑놈, 강도, 무뢰한이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얼마나 헌신했는지!’
조명 불빛에 주석으로 만들어진 공로패가 반짝, 빛났다. 언뜻 보면 황금 같았다.
강재상은 이걸 안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장식장 한가운데 올려 두었다. 오은정은 매일같이 그걸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주석이 황금이 되지는 않았다.
황금이 되고 싶은 고철 덩어리. 이딴 거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강인우는 공로패를 짓밟았다. 가능한 한 힘껏.
강재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알아야 했다. 이제 이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강인우는 멨던 백팩을 벗어서 내밀었다.
‘길게 얘기 못 해. 당장 저거 갖고 공항으로 가. 부부 사이 끝장난 거 알겠는데, 지금으로선 별수 없어. 이게 당신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
‘여권에 신분증이랑 표 끼워 놨고, 여비도 부족하진 않을 거야. 중국행 가장 빠른 비행기야. 뻗치기 하는 놈들은 내가 막아 볼 테니까 차 타는 즉시 밟아. 뒤에서 뭔 소리가 나든, 누가 따라오든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너희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따지려면 나중에 따져! 이럴 수 있는 것도 오늘 밤뿐이야! 당장 내일 아침, 아니 새벽, 아니 한 시간 안에 풍기대가 영장 들고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팔자 좋게 신파극 찍을 시간 없어!’
‘이렇게 빠져나갈 셈이냐?’
‘빠져나가? 내가 빠져나가?!’
강인우는 백팩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아?!’
‘인혜 그년, 어릴 때부터 알아봤었다!’
‘뭐?’
강인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강재상이 분노를 토해 냈다.
‘그게 어릴 때부터 기질이 이상했지. 멀쩡하게 낳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아무리 넉넉하게 해 줘도 두 눈에 항상 불만이 많았어. 매사에 부정적이고, 과격하고! 계집애가 적당히 공부나 하다가 시집갈 것이지, 대가리 클수록 간덩이만 커져서는 친구들 선동하고 선생한테 미움받고, 반동분자로 의심받아서 출신 성분 증명서를 몇 번이나 뗐냐. 내가 그동안 몇 번이나 입이 닳아지게 말했냐! 계집애가 머리 좋아 봤자 쓸모없다고. 결국에 이렇게 집안 결딴낼 줄 알았으면 내, 그년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 어디 정신 병원에다…!’
강인우는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공로패를 집어 들었다. 차갑고 딱딱했다.
‘닥쳐!’
강재상의 안면을 겨냥해 집어 던졌다. 일말의 주저도 없는 확신의 공격이었다.
강인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진 남자의 멱살을 쥐고 끌어 올렸다. 그를 벽으로 밀어붙이자 방 전체가 흔들렸다. 벽이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강재상은 인혜에게 해 준 게 없었다. 그 애가 아주 어렸을 때 외에는.
‘넉넉하게 해 줬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강재상은 인혜가 중학생 무렵부터 그 애를 멀리했다. 좋은 투자처가 있다며 오은정의 통장을 가져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은행장의 권한을 집안에서도 휘두르며 생활비로 모녀의 숨통을 조르고 싶었겠지만, 그때는 이미 강인우가 돈을 벌고 있었다. 헌병대 월급으로 두 사람을 먹여 살렸다. 실질적으로 이 집안의 가장은 자신이었다.
강인우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차피 당신은 필요 없었어.’
비록 쇼윈도로나마 그들이 부부 관계를 유지하길 바란 건, 쟁쟁한 명문대생들 사이에서 인혜가 콤플렉스를 느낄까 두려워서였다. 이혼이나 별거 가정의 아이를 향한 세상의 눈초리가 얼마나 싸늘한지 아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 필요 없다. 더는 남들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이제 우리는 선을 넘은 수준이 아니라 울타리를 부숴 버렸다.
강인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어차피 그 둘, 내가 책임질 생각이었어.’
‘너… 너 이… 새끼!’
‘날 욕하는 건 상관없어. 정말이야. 이제 와 뭐가 무섭겠어. 근데, 그래도 어른 돼서 애만도 못한 짓은 하지 말아야지.’
강인우는 코피 흐르는 강재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래도 힘 조절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코뼈가 완전히 내려앉았다.
아니다, 차라리 잘되었다. 이들 부부가 사이좋게 중국행 비행기를 탈 리도 없고, 오은정 혼자만 보내는 게 나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아버지를 설득하고자 했던 자기가 바보 같았다.
‘그래.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 했다. 오은정을 따로 조용히 불러내서 뒷문으로든 부엌문으로든 몰래 내보냈어야 했다. 뒤처리할 사람이 하나 늘어나는 건 강인우로서도 난감했으나, 상대는 뱃살 투실투실한 늙은이였다. 2층으로 끌고 올라가서 떠밀어 버려도 상관없을 터였다. 지금 이렇게 일분일초가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야.
‘잘도… 이 연놈들이 내 집에서 잘도…!’
그런 말 할 줄 알았다.
강인우는 강재상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까는 벽이 울더니, 지금은 바닥이 울부짖었다.
편백나무 옷장을 열었다. 무수하게 걸린 넥타이 중 하나를 골라 들었다.
강재상이 바닥을 꾸물꾸물 기고 있었다. 강인우는 그의 등에 걸터앉았다. 아버지의 목을 졸라 죽이는 행위에 상상하던 것만큼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놀랐다.
어느새 강인우는 살생에 익숙해졌다.
그는 강재상의 목을 조르면서 숨을 참았다. 어쩌면 <백사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신에게는 살인마의 본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이든, 조그만 강아지 새끼든 눈 하나 깜짝 않고 죽일 수는 없었다.
있는 힘껏 조이면서 당겨 올렸다. 강인우는 몸부림치는 고깃덩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인혜는 대단한 애야. 어렸을 때부터 그랬지. 그 앤 나랑은 달랐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단에서 겉돌던 볼품없는 말라깽이와는 격이 달랐다, 이 말이야!
숨통이 막혀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딸이 나와 닮지 않아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아? 응? 당신이 그런 걸 알아?
‘그 앤 옳은 일을 하려고 했어.’
넥타이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마디마디 부서져 나가도 상관없었다.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이 모든 통증과 걱정을 잊게 했다.
강인우는 죽어 가는 고깃덩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를 세워 물어뜯었다. 시신에 흔적이 남아도 괜찮았다. 자기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이제는 정체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지난 이십 년간, 나는 충분히 숨어서 살았다.
‘내 딸은 옳은 일을 해. 더 힘든 일을 해. 알량한 출신 성분 갖고 태어나서 현실에 안주하고, 남들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는 독재 정권 부역자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안방 문이 열렸다. 소음에 놀라 뛰어 들어온 이는 오은정이었다. 강인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를 죽이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가냘픈 여자라 한들, 작정하고 달려들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마.’
강인우는 땀을 흘리며 말했다.
‘오지 마… 방해하지 마. 엄마.’
오은정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인우의 손가락에서 뚜두두둑 소리가 났다.
마침내 고깃덩이가 힘을 잃고 늘어졌다.
강재상은 절명했다. 코 밑, 목덜미의 맥, 엎드린 몸을 똑바로 돌려 눕혀 심장 박동까지 확인했다.
오은정이 기어 왔다. 그가 무너지는 강인우의 상체를 받쳐 안았다. 강인우는 오은정의 따스한 품에서 중얼거렸다.
‘인혜를 팔았을 거야. 그렇게 해서라도 이 집안, 뭣도 아닌 족보를 지킬 수 있다면… 이놈은 충분히 그랬을 거야. 그래서 자기 딸이 아니라고 한 거야.’
‘그래.’
‘이건 정당방위야.’
강인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이렇게 했을 거야.’
‘알아.’
‘우리 딸을 위해서.’
‘…응.’
오은정은 시체를 치우자고 말하지 않았다. 집 안을 청소해서 증거를 없애고, 알리바이를 조작하자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방구석에 처박힌 강인우의 백팩을 가져와서 말했다.
‘같이 가.’
강인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오은정의 두 뺨을 감쌌다.
‘먼저 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설명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래도 오은정은 이해할 거라고 믿었다. 지금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강인우는 시선을 내렸다. 무릎을 부서져라 움켜쥔 두 손이 벌벌 떨렸다. 핏줄이 두드러진 손등, 하얗게 변한 손가락 마디. 그는 자기 목에도 넥타이가 감겼다고 생각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
오은정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피부에 궤양이 생겨 썩어 들어가더라도 견뎌야 하는 시간이었다. 팔다리가 썩어 문드러져도 해내야 하는 일들이었다. 우리 딸을 위해서.
‘택시 승강장에 공중전화 있어. 이게 연락처랑 주소. 스위퍼에서 담당자 대신 왔다고 말하면 데리러 올 거야. 직접 찾아오라고 하면 주소 어떻게 부르는지 듣고, 여기 적힌 데가 아니면 아무 이유나 대서 밖에서 보자고 해. 광장이든 식당이든 어디든. 혼자서는 누구도 만나지 마.’
강인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걔들이 뭐라고 하든 아무 상관 없어. 무조건 보스 만나게 해 달라고 해. 뭔 질문을 해도 아무것도 대꾸하지 말고 무조건! 무조건 하성록 만나게 해 달라고.’
말이 점점 빨라졌다. 할 수 있다면 내장까지 토해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혜를 구할 수 있다면.
강인우는 울먹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요구를 안 들어줄지도 몰라. 그러면 이 말 그대로 전해. 스위퍼가 장진에 있다고. 강인혜와 정류진 맞교환을 희망한다고.’
‘정류진이 누군데?’
‘누군지는 몰라도 돼.’
모든 게 낯설었다. 오은정은 지금 자신을 향해 두서없는 말을 쏟아 내는 남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생각하고 있을 시간 역시 없었다.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더라도, 설령 그것이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어 가는 자살행위라도, 해야 했다.
강인우의 목소리가, 표정이,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 마. 걔들이 뭘 제안하든 그냥 다 개소리야. 무조건 인혜만 꺼내 달라고 해. 인혜만 살려 주면, 정류진이고 뭐고 본토에 남아서 평생 시키는 거 다 할 테니까 인혜만… 그 애만… 이해하지?’
오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안다고 해야 했다. 거짓말이라면 그에게도 일가견이 있었다. 감추고 산 세월이 이십 년이었다.
뒷문으로 나가기로 했다. 뒤뜰에는 창고로 쓰는 컨테이너 박스가 자리해서, 이쪽을 감시 중일 풍기 교육대원들의 눈을 피해 차고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면 된다.
강인우가 앞장섰다. 그는 오은정이 차고까지 안전하게, 누구의 방해 없이 도착한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다. 물론 그놈 먹을 것이 남아 있어야겠지만.
철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사복을 입었지만, 신장과 체격이 ‘누가 봐도’ 군인임을 알 수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강인우의 눈앞에 얼음이 동동 뜬 콩국수가 놓였다.
“식사 나왔습니다.”
홀 서버 소년은 필요하면 불러 달라고 말한 뒤 카운터로 돌아가 앉았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 항구 도시 억양이 짙게 배어났다.
강인우는 대접을 내려다보았다. 엎어져서 머리도 감겠다, 싶을 만큼 큰 그릇에 국물이 흘러넘치기 직전이었다.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식욕은 없었다. 강인우는 식사와 함께 나온 단무지 하나를 집어 들고 씹었다. 기가 막히게도 아무 맛이 없었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살기 위해서.
가방 속 라디오와 연결된 이어폰을 착용했다. 영양가 있는 소식은 없었다. 그만큼 언론 통제가 잘된다는 뜻이었다. 지금쯤 애먼 공항이나 선착장만 뒤지고 있겠지.
강인우는 얼음을 아작아작 소리 내 씹어 먹었다.
정류진만 손에 넣으면 된다.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나고 원래대로 돌아간다. 인혜의 바람대로.
장두현의 저택 이름은 지역 신문을 통해서 알았다.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출입이 극단적으로 제한된 곳이라 오히려 소문이 많았다. 과거 정수헌에서 일했던 사람들, 지금은 나이깨나 먹은 사람들이 옛날이야기를 팔아먹는 일로 말년의 소소한 재미를 챙기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강인우가 확보한 최근 일주일 분의 지역 신문에서는 정수헌과 ‘정수헌 어르신’을 찬양하는 주민 기고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문맹률이 높은 세대인데 의외였다.
정수헌의 위치는 파악했지만,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경비가 삼엄했다. 무작정 다가갔다가 감시 카메라에 찍히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정수헌은 저택이 아니라 성에 가까웠다. 요새.
강인우는 강재상의 도요타를 버린 뒤 중고 혼다를 구입했다. 중국인인 척하자 옳다구나 하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주인의 상술을 알아챘으나, 강인우는 순순히 위안으로 값을 치렀다.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을 감수했으나 이편이 나았다. 자국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인 척하면, 판매자가 면허증이나 신분증 확인을 임의로 누락할 확률이 컸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 이야기가 길어지면 귀찮으니까.
중고 오토바이 시장 돌아가는 상황이 그랬다. 겉모습만 브랜드 그대로 두고, 속은 싸구려 부품을 채워 눈속임하는 일이 범죄로 여겨지지 않는 판이었다. 거래는 대부분 현금으로만 이루어졌고 절차도 간단했다. 대금만 치르면 판매자는 기존 소유자 명의의 등록증과 매매 계약서를 건네줬다.
그걸로 끝이었다. 강인우는 이런 현장을 단속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또 겉만 그럴싸하게 꾸민 것과 내구성이 튼튼한 것을 구분할 자신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오토바이를 구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정수헌에서 오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폐차장의 일용직 일자리를 알아봐 두었다. 아직 정식으로 채용된 건 아니고 사장이 나오는 오후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지만, 강인우는 자기가 채용될 것임을 짐작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컨테이너 박스 안의 사무실로 안내받았을 때, 직원이 이것저것 물어본 것만 봐도 알았다. 외국인이 아니라서 좋다. 직할시 말투인데 혹시 거기서 살다 왔느냐.
강인우는 자기가 살해한 풍기 교육대원 중 한 사람의 이름를 댔다. 임기현, 스물아홉 살.
명백한 실수였다. 의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은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죽은 풍기 교육대원들의 본명과 나이가 언론에 공개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건, 강인우 스스로가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수헌에 들어간 뒤 시간을 끌지 않을 작정이었다.
미적지근한 콩국수는 싱거웠다. 면도 다 풀어져 흐물흐물했다. 밑반찬도 부실해서 가뜩이나 없는 입맛이 싹 달아났다. 강인우는 면만 빠르게 건져 먹은 뒤 입술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값을 치르는데 아르바이트 소년이 말을 걸었다.
“여행 오셨어요?”
옷차림을 바꾸고 말을 하지 않아도 현지인의 눈에는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강인우는 태연하게 웃었다.
“방학이라서 잠깐.”
“아, 대학생이세요?”
“여기 한번 와 보고 싶었거든. 어때? 남자 혼자서 다녀도 그렇게 이상하진 않지?”
“상관없지 않아요? 그런데 보통 놀러 온 대학생 형, 누나들은 끼리끼리 다니드라고요. 멀리서 봐도 알겠든데. 말투며 옷이며. 차도 있고….”
소년은 강인우가 갓길에 세워 둔 혼다를 바라보았다. 왜 말을 걸었는지 알겠다.
“빌린 거야.”
“저런 거 을매나 해요?”
“가격은 내가 잘 모르겠네.”
강인우는 잔돈을 거절했다. 소년이 주방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날쌔게 주머니에 동전을 쑤셔 넣었다.
“정수헌 가 봤어?”
“아뇨.”
“그래. 안녕. 잘 먹었다.”
실망스러운 식사였지만,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지폐와 동전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소년이 말했다.
“캠핑장은 가 봤는데!”
“캠핑장?”
“정수헌 어르신 사냥터 있는 데요. 올해는 아니고 작년 여름에. 아버지가 당첨되셔 가지고. 거기 통나무집 엄청 넓고 좋드라고요.”
“당첨?”
“예에. 아무나 갈 수 있는 데가 아니거든요, 거기.”
소년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강인우는 카운터로 돌아갔다.
“아무나 갈 수 없는 데라니, 되게 궁금해지는데?”
장두현 대관이 개최하는 지역 행사라고 했다. 인근 거주자 중에서 신청자를 받고 무작위 추첨을 해서 본인 사유지의 캠핑 시설을 즐길 수 있게 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소년은 올해는 당첨이 되지 않아 놀러 가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렇게 재밌었어?”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죠. 폰도 안 터지는 데서 뭐 하나 해 가지고. 근데 진짜 신기한 게, 이틀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드라고요.”
“그건 여기 사는 사람들만 되는 거지?”
그렇죠. 소년이 대답했다.
“그게 몇 년 이상 살아야 돼 가지고. 제 친구 중에도 신청 못 한 애들 많아요.”
“그렇구나.”
강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모자를 벗어 가방에 쑤셔 넣은 뒤, 재빨리 헬멧을 집어 썼다.
소년이 가게 문을 열고 따라 나왔다.
오토바이를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강인우는 태연하게 시동을 걸었다. 한번 태워 주겠다는 호의를 베풀 법도 했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출발했다. 자신은 이곳에서도 숨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