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권토중래 (9/39)

신해범과 진치우의 오프가 겹치는 드문 날이었다.

이삿짐 정리를 더는 미룰 수 없었던 탓이었다. 포장 이사 업체에서는 정리 수납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래처와 연결해 주겠다고 나섰지만, 신해범이 거절했다. 보안상의 문제라는 말에 관계자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안은 개뿔.”

진치우는 짬뽕 국물을 들이켰다. 입술에 묻은 국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투덜댔다.

“그놈의 그릇들 때문이잖아.”

“당연하지. 이게 어떤 물건들인데.”

진치우의 짐 정리는 오전 중에 끝이 났다.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을 떤 덕분이었다. 신해범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 정리를 시작했으나, 여태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진치우는 티스푼을 일일이 발포지로 싸고 에어 캡을 두툼하게 둘러 상자에 차곡차곡 챙겨 담는 친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해범의 수집욕은 지나쳤다. 새 집에 짜 넣은 장식장이 기존 것보다 수납공간이 많음에도 불구, 그새 늘어난 수집품들이 다 들어가지 않아 일부는 창고에 보관해야 했다. 심지어 그는 이사 과정에서 지저분해진 상자를 재활용하기 싫다며 각종 포장용품을 새로 마련했다. 상자, 에어 캡, 발포지에 습기 제거제까지.

“그냥 좀 처넣으면 안 되냐? 왜 고생을 사서 해?”

“이런 걸 바로 관리라고 해. 귀중품을 다루는 사람이 응당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지.”

“지랄 똥을 싸고 자빠졌네.”

진치우가 투덜댔다.“쓰지도 않을 거, 차라리 팔든가.”

“안 돼. 다 가격 오르는 타이밍이 있어. 급하다고 헐값에 파느니 내가 먹고 죽는 게 나아.”

“스크루지 같은 새끼.”

상자에 습기 제거제를 집어넣던 신해범이 말했다.

“나 요즘 복잡하다.”

“언제는 편하게 살았냐?”

“장승희 기분이 계속 별로야. 담당 퍼스널 쇼퍼가 일을 관뒀어. 후임자가 오긴 왔는데, 아무래도 예전 그 사람만 못한가 봐.”

“퍼스널 쇼퍼?”

“명품관 기준 상위 0.1퍼센트에 드는 고객에게만 제공하는 쇼핑 서비스 담당자.”

“그런 게 다 있냐?”

“너는 알 줄 알았는데.”

“몰라!”

상자에 머리를 박고 있던 신해범이 고개를 들었다.

“왜 화를 내?”

“누가?”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치우. 앞으로 차근차근 배우면 되지.”

“배우긴 뭘 배워! 그딴 거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어.”

“상류층 문화 좋아하면서.”

“넌 애새끼 하나 폐인 만들고 놀러 다닐 기분이 나냐?”

진치우의 뒤통수에서 박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야!”

“내가 노냐? 놀아?”

“아, 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너야말로 태평한 소리 좀 하지 마! 애새끼 수발드느라 예나만 고생하잖아. 가뜩이나 수면 시간 불규칙해서 힘든데.”

“그렇게 아부해 봤자 예나는 너 안 좋아해.”

진치우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제는 부정도 안 하네. 근데 치우, 너 정말 걔 스타일 아니야.”

신해범이 웃었다. 그는 진치우가 반박하기 전에 화병 하나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높이 삼십 센티미터, 지름 이십 센티미터의 화병이었다. 코발트블루색 몸통에 하얀 월계수 장식이 고풍스러웠다.

“어때?”

“좆나 구려.”

“네 거 아니니까 안심해.”

신해범은 진치우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병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흠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건 왜?”

“병문안 선물.”

“누구? 애새끼?”

“응.”

“가지가지 한다.”

신해범이 쿡쿡 웃었다.

“성격 많이 죽었다, 진치우. 넌 정류진이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신경 쓰는 게 아니고, 양심이 있으면 당연히 찔리지 않겠냐? 그리고 발키리 얘기 꺼내지 마라. 가뜩이나 꿉꿉하고 더워 죽겠는데 혈압 오른다.”

“이제 장마 시작인데 벌써 그러면 어떡해?”

“너나 잘해, 인마! 비싼 그릇에 곰팡이 안 피게.”

“그래서 지금 이렇게 노력하잖아.”

신해범이 화병을 쓰다듬었다.

“진짜 안 예뻐?”

“아 이뻐, 이뻐. 너무 고급스러워서 눈이 멀 거 같아.”

“짬뽕 다 먹었으면 나 좀 도와주라.”

“씨발,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진치우는 투덜대면서도 신해범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발포지를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테이프를 뜯어 건넸다. 신해범은 화병 손잡이와 깨지기 쉬운 입구를 꼼꼼하게 감싸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웨지우드의 화이트 로열 크라운 컬렉션 제품이야. 출시일이 워낙 오래돼서 구하기 힘들었어. 매물이 나와도 흠 있는 게 대부분이고. AA급 찾느라 고생 좀 했다.”

“주전자랑 컵만 모으는 거 아니었냐?”

“수저랑 포크랑 나이프도 취급해.”

“진짜로 가지가지 한다.”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꼼꼼하게 포장된 화병을 상자에 집어넣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꼬꼬가 좋아할까?”

“좋아할 거야. 아주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릴 거야. 암.”

“비꼬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아주 좋아할 거야. 사람 뚝배기 깨기 딱 좋은 사이즈잖냐.”

“…….”

“왜?”

“말본새하고는. 뚝배기가 뭐냐?”

“뭐! 별걸 다 트집이야!”

“예나가 요즘 꽃꽂이 배워. 정류진이 옆에서 구경하면서 꽃대도 다듬고 한대. 그런 소일거리도 나쁘진 않지. 애가 밖에 못 나가니까 방구석에 들어앉아서 할 일이 없잖아.”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하지 그랬냐.”

“지가 자꾸 미련하게 굴잖아. 지금 하는 것도 봐. 힘들어도 밥 먹고 움직여야 하는데 방구석에 처박혀서 청승이나 떠니까 차도가 없지. 내가 그래서 호월루 안 보내려고 한 거야.”

신예나가 십 분 간격으로 전화를 걸어 대며 사람을 괴롭히지만 않았다면 신해범은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거기서 많이 좋아졌다며.”

“이제 가게 사람들하고도 얘기하나 봐.”

“최 대위가 뭐랬지? 실어증?”

“거창한 병명 붙일 필요도 없어. 그냥 잠깐 회까닥한 거야. 정신력이 약해서 그래.”

진치우는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신해범이 최유신의 조언을 듣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책을 몇 권이나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에 제복 차림으로 번화가 서점에서 책을 샀으니.

신해범이 구매한 책들이 해당 매장의 베스트셀러 1, 2, 3등을 나란히 차지했다는 사실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날 이후 신해범은 의학적 지식을 고루 갖춘 엘리트 군인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 많은 책을 읽고도 발전이 없었다. 신해범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정신적인 후유증은 나약함의 증거’라는 기적의 논리를 밀어붙였다.

진치우는 정류진이 왜 입을 다물어 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일 터였다. 말만 안 통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 벽이 주먹까지 휘둘러 대니 몸과 마음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진치우는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에 책 한 권이 보였다. 신해범이 어젯밤에 끼고 읽던 책이었다. 어찌나 뒤적거렸는지 손때가 까맣게 타고 귀퉁이가 너덜너덜했다.

“저건 도움이 되냐?”

“그냥 그래.”

“도움도 안 되는 걸 그렇게 붙들고 있어?”

“심심해서.”

빈말로도 심심풀이용은 아니었다. 심혈을 기울여서 꼼꼼하게 읽은 티가 났다. 몇몇 페이지는 귀퉁이를 접어 두었고, 포스트잇에 적은 메모도 눈에 띄었다.

진치우가 뺨을 긁적거렸다.

“성재경 요즘 바쁘더라. 기왕 예산 내려온 거 값지게 쓰겠다나 뭐라나. 우리 첫 군견인데 최고로 잘난 놈으로 골라야 한다고, 온갖 개 농장을 다 돌아다녀.”

“개 농장이 뭐냐, 개 농장이. 무슨 탕거리 찾아?”

“아 그냥 표현이.”

“애쓸 필요 없어. 호월루에 백구 새끼 받기로 했어.”

“백구는 그냥 경비견이잖아. 그래도 훈련소 출신이 낫지 않나? 부모가 군견인 놈으로.”

“우리한테 줄 개는 없다고 할걸. 아니면 바가지 씌우거나, 어디 하자 있는 놈으로 주거나.”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진치우가 말했다.

“정류진 말인데… 권주혁이 맘에 들어 하냐?”

포장된 화병을 상자에 넣고 리본까지 단단하게 둘러 묶던 신해범이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뭐가?”

“모르는 척하지 말고, 새꺄. 또 부를 것 같으냐고.”

“왜?”

“기우희한테 자꾸 전화하나 보더라. 하여튼 밝혀. 애새끼 아프다는데 그새를 못 참고 간을 보네.”

“내가 연락한다고 해.”

“알았어.”

신해범은 리본 끄트머리 올이 풀리지 않도록 라이터로 지지는 섬세함까지 선보였다. 과연 중고 장터 이용자 평점 만점에 빛나는 최우수 판매자. 그는 자신의 결과물에 만족한 듯, 진치우에게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보여 주었다.

“어때?”

“예뻐. 근데 나는 정류진 보내는 거 반대다.”

“너한테 결정권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냥 좀 고려해 달라고.”

“나한테도 결정권 없어.”

신해범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예나가 너한테 연락하는 거 알아.”

“엉?”

“정류진 잘 좀 얘기해 달라고 그런 거겠지. 양쪽에서 쪼면 내가 마음 돌릴 줄 알고. 근데 내가 마음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야. 권주혁 취향이 바뀐다면 모를까.”

“…….”

“괜찮아. 니들끼리 내통했다고 화 안 내.”

“내통은 무슨. 그냥 전화로 얘기 좀 한 거지.”

“예나한테 이쪽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전해 줘.”

진치우는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내가 알아서 한다는 뜻.”

신해범은 권주혁이 류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를 바랐다. 생각보다 못생겼다고, 뻣뻣한 말라깽이라 볼품없다고, 쥐뿔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시건방진 애새끼라고 불쾌해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MVP의 고기 방패로 던져 주고 관심 끊기를 바랐다. 믿을 수 없게도 그랬다.

신해범은 상자를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신성이 왜 그 모양이 되었는지 기억해. 옛날부터 돈독한 혈맹이 치정 싸움으로 박살 나는 경우 많았어.”

“권주혁은 하성록보다 더해. 훨씬 주도면밀하고 약았어. 그리고 그 새끼는, 정류진한테 애정 같은 거 없어. 그냥 가지고 노는 거야.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

“하지만 권세혁은 다르지.”

“걔 약하는 거 놀랍지도 않더라.”

상류층 젊은이들 사이에서 마약은 드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류진이 공급책 역할을 자청했다는 사실은 ‘별관으로 돌아가 운전면허 시험이나 공부하라’는 신해범의 명령에 반했다는 점에서 명령 불복종에 해당했다. 철두철미한 기우희는 추후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주장했다.

신해범은 그 주장에 동의했다. 류진을 곁에 두고 싶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최유신이 극구 요양을 권했고, 신예나는 특유의 집요함을 십분 발휘하여 신해범을 들볶았다. 둘의 협공에 신해범은 항복하고 말았다.

류진을 호월루로 보내던 날, 그날은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렸다. 광대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해쓱해진 류진은 성재경에게 안기다시피 해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신해범은 그를 레인지로버 뒷좌석에 태우고 출발했다. 류진은 신해범이 하는 말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뒷좌석에 류진과 함께 앉은 성재경은 선택적 함구증 증상이라고 설명했다. 최유신이 진단한 병명이었다.

선택적 함구증.

신해범은 그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피가 끓었다.

류진이 호월루로 가던 날, 신해범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그 후로도 몇 번 호월루를 찾아갔으나 마찬가지였다. 류진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신해범과 말도 하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신해범이 아무리 말해도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 들린다, 하는 멍한 얼굴로 신해범의 어깨 너머만 응시했다.

하신성의 혼수상태 소식을 전했을 때에는 조금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때도 말은 하지 않았다. 우는 얼굴을 기대했는데 그마저도 보여 주지 않았다. 신해범은 그런 류진이 답답했다. 하도 답답해서 따귀를 한 대 올려붙였다가 마침 동백실로 들어오던 신예나에게 들켰다. 그날 평생 먹을 욕의 절반을 한 번에 들어 먹었다. 신예나는 류진이 뉴스에 나오는 군인들조차 보기 싫어한다며, 신해범에게 당분간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당분간’도 오늘로 끝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었다. 더는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신해범은 기대하는 중이었다. 정류진을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직도 그 모양이라면, 그 약해 빠진 정신력이 조금도 나아진 데가 없다면 자신에게도 생각은 있었다.

***

풍기 교육대에서는 일찍이 권세혁의 신체 사이즈에 맞춘 제복을 보내왔다. 그러나 입소식을 하루 앞둔 오늘, 권세혁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꼭 맞았던 바짓단이 짧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디자이너 팀은 길길이 날뛰었다. 어떻게 왕자님 치수를 잘못 맞추느냐고 화를 냈다. 풍기 교육대 측은 권세혁의 키를 다시 한번 측정해 줄 것을 부탁했다.

결과는 누구의 실수도 아니었다. 막을 수 없는 신체의 성장 때문이었다. 189센티미터였던 권세혁의 키는 192센티미터가 되어 있었다. 무려 삼 센티미터가 자랐다. 하지만 몸무게는 전에 비해 줄었다.

권세혁은 정밀 검사를 받아 보자는 임찬영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운동을 그만둔 탓에 근육이 빠져서일 거라고 둘러댔다. 다행히 임찬영은 권세혁의 핑계를 이해했고, 권세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물 복용 사실이 드러나면 곤란했다.

임찬영은 금일 자정이 지나기 전까지 바지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지게 될 거라고 일갈했다. 권세혁은 그런 그를 말렸다.

“난 괜찮은데.”

“이건 명백히 그쪽 실수입니다. 사소한 일일수록 확실하게 해 둬야 나중에 잡음이 없어요.”

“바지 짧은 것 정도로 기분이 상하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야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임찬영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단호했다.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에게는 왕자님을 복무 기간 동안 불편 없이 모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마찰이 생겼다는 건, 그가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권세혁은 한숨을 쉬었다.

“옷 같은 거 그렇게 안 중요해. 그리고 해범이 형이 내 전담 비서야? 어떻게 나한테 일일이 신경을 써. 그런 건 내가 부담스러워서 싫어.”

“…….”

“그리고 임 비서, 대체 누구한테 책임을 묻겠다는 거지? 내 키가 자란 걸 어떡하란 말이야? 재단사가 그런 것까지 생각해서 옷 만드나? 아니면, 아직까지 쑥쑥 자라는 내 잘못인가?”

“…….”

“시작도 전에 기 싸움으로 힘 빼지 마. 해범이 형이 나한테 안 좋은 마음 품을 사람도 아니고. 융통성 있게 해, 융통성 있게.”

그렇게 말하는 권세혁의 얼굴이 마냥 밝았다. 임찬영은 그가 정말로 연애 비슷한 걸 하나, 싶어서 불안해졌다.

권세혁은 평범한 스무 살 남자애가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남들과 달랐다. 혓바닥이나 손가락으로 타인의 인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인간들의 기준은 남들과 같을 수가 없었다.

임찬영은 침대에 엎드려 휴대폰을 만지는 권세혁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전화도 숨어서 하는 것 같고. 저 나이 때 애들이야 밥 먹을 때에도 휴대폰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다지만….

“왕자님.”

“왜?”

“건강히 다녀오셔야 합니다.”

권세혁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응.”

임찬영은 며칠 전부터 ‘권세혁 왕자 의무 복무 결사반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뻗치기를 시작한 극성팬들을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 동네가 시끄러워지긴 했지만 항의할 만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도 없거니와, 입대를 앞두고 만에 하나 있을 권세혁의 일탈을 막기에도 좋은 수단이었다. 가끔 이렇게 손 안 대고도 코 푸는 경우가 있다.

거추장스러운 애들 좀 치우라는 장승희의 닦달도 내일로 끝이었다. 신해범이 저 극성 팬클럽을 떠안고 골치 아파 할 생각을 하면 임찬영은 벌써부터 어깨가 들썩들썩했다.

***

먹구름이 밤하늘을 뒤덮었다. 습한 공기에 나무 타는 냄새가 섞였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전조였다.

류진은 도톰한 카디건 앞섶을 꼭 여몄다. 산속이라 그런지, 장마철이라서 그런지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밤에는 추웠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류진은 무릎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어느새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장대비가 쏟아졌다. 류진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당 뒤쪽에서 요란하게 짖는 소리가 났다.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온 백구는 예전에 비해 짖음이 늘었다. 류진은 허둥지둥 우산을 찾았다.

맨발에 아무렇게나 꿰어 신은 슬리퍼가 커서, 그리고 아직 온전치 않은 걸음걸이 때문에 뒷마당까지 가는 데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몸이 무거운 백구가 가로등 밑에서 맹렬하게 짖고 있었다. 류진은 빗물에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백구의 목줄을 풀어 주려고 애썼다. 쉽지 않았다. 개가 워낙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데다 한 손에 우산까지 들고 있어서.

“아!”

류진은 우산을 놓쳤다. 온몸이 삽시간에 젖었다. 바람에 날아가는 우산을 본 백구가 더 크게 짖었다.

우산은 낯선 남자의 발치에서 멈췄다. 검은 바지에 감싸인 긴 다리가 우산을 걷어차고 류진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큰 손이 백구의 덜미를 붙잡았다. 개 목걸이와 줄이 간단하게 분리되었다. 백구는 몸을 부르르 떨며 대청마루로 뛰어 들어갔다.

“…….”

“개가 아주 상전이야.”

새하얀 가로등 불빛이 남자의 모습을 비췄다.

신해범은 크고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진녹색 셔츠의 한쪽 소매가 젖었다. 목줄을 풀어 줄 때 우산이 기울어져서 그렇다.

류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언제….”

“방금 왔다.”

빗소리가 요란해서 차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았다.

“개새끼 배 많이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마.”

“너 이제 나랑 말하네.”

류진의 입술이 조가비처럼 꼭 다물렸다.

“좋아져서 다행이다, 정류진.”

신해범이 우산을 내밀었다. 받지 않았다. 류진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뒤에서 신해범이 쫓아왔다. 류진이 걸음을 재촉했으나, 신해범도 속도를 높여서 따라왔다.

류진이 홱 돌아봤다.

“왜?”

신해범의 눈에 류진은 우는 것처럼 보였다.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서.

“…오랜만이다.”

류진은 신해범의 인사를 무시했다.

큰 슬리퍼가 벗겨지지 않도록 애쓰며 걸었다. 어기적거리는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를 신해범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목덜미에 땀이 솟았다. 충분히 앞질러 갈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속으로 비웃는 게 틀림없었다.

빗물에 슬리퍼가 죽 미끄러졌다. 류진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 손과 옷, 얼굴까지 온통 더러워졌다. 뒤에서 신해범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한다. 재밌네.”

“재밌어?”

류진은 상체를 일으키며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젖은 모래를 신해범에게 뿌렸다. 그의 매끈한 얼굴을 더럽히고 싶었으나, 던지는 힘이 모자라 진녹색 셔츠 앞섶을 더럽히는 데 그쳤다.

신해범이 픽 웃었다.

“뭐 하냐?”

그가 다가왔다. 류진은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신해범은 발로 걷어차는 대신 류진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류진의 머리 위로 검은 우산이 드리워졌다.

“됐어. 어차피 다 젖었어.”

“더 젖지 말라고.”

바람이 불었다. 강풍에 우산이 흔들렸다. 신해범은 류진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뭐야! 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시, 신발이 커서 그래.”

“후장이 너덜너덜해서겠지.”

대청마루에 짐짝처럼 팽개쳐졌다. 류진은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눈앞에 큼지막한 상자가 있었다. 비닐로 감싼 상자였다. 투명한 비닐 사이로 리본이 보여서 선물 상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신해범이 마루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투덜거렸다.

“옷 다 버렸네.”

“뭐 하러 왔어?”

“내가 오면 안 되냐?”

“…….”

“꼬꼬야, 대답해. 여기가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냐고.”

“누나는 지금 일하는 중이야. 2부 오픈 시간이라서 바빠.”

신해범이 다가왔다.

“너 보러 온 거야.”

류진은 신해범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 마.”

“내가 뭐 할 것 같은데?”

백구가 다가와 빗물에 흠뻑 젖은 류진의 얼굴을 핥았다. 개가 사람보다 나았다.

류진은 옷 속으로 들어오는 신해범의 손을 밀어내며 백구의 축축한 털을 쓰다듬었다.

“금방 따뜻하게 해 줄게.”

“나는?”

“당신은 알아서 해.”

“개보다 대접을 안 해 주네.”

신해범이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마루로 나온 그의 손에는 뽀송뽀송한 마른 수건이 들려 있었다.

“야.”

“…고마워.”

신해범이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가 머리를 털자 희미한 샴푸 냄새가 났다.

류진은 백구의 털부터 말려 줬다. 무거운 몸으로도 자꾸만 뛰어다니는 개를 붙잡고 등이며 발을 닦아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류진의 머리 위로 수건이 툭 떨어졌다.

“우리 꼬꼬는 내가 해 주지.”

“필요 없어.”

“가만있어.”

류진의 팔에서 벗어난 백구가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류진은 수건을 갖고 백구를 따라가려 했지만, 신해범에게 붙잡혀 도로 앉혀졌다.

“가만히 있으랬지.”

“…….”

“왜 또 꿀 먹은 벙어리야.”

류진은 못 들은 척했다. 신해범이 피식 웃었다.

“새끼들 애비는 누구냐?”

“몰라.”

자기 얘기를 한다는 걸 알았음인지, 방에서 백구가 컹! 하고 짖었다. 류진의 머리를 털어 주던 신해범이 혀를 찼다.

“저 개새끼를 확 그냥.”

“예민해져서 그래. 요즘은 누나도 함부로 못 만져.”

“그럼 넌?”

“나는… 내가 밥 주는 사람이니까….”

“자기 밥 주는 사람은 따른다?”

“아마도.”

“그럼 넌? 네 생활비가 내 계좌에서 나가는데, 왜 나는 너한테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까?”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겠는데.”

류진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그냥 모르는 채로 살아.”

“우리 꼬꼬가 못 보는 사이에 시니컬해졌네. 이제 귀여운 건 버렸어? 냉미남 콘셉트로 가는 거야?”

신해범은 능청을 떨었다. 속으로는 수건으로 류진의 입을 틀어막고 마른 몸을 대청마루에 눕혀 가차 없이 범하는 상상을 했다. 비에 젖은 모습이 섹시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일을 치렀다간 이번에야말로 동생에게 절연을 당할지도 몰랐다.

신해범이 담배를 꺼내는 모습을 본 류진이 말했다.

“밖에서 피워.”

“얼씨구.”

“백구 임신했잖아.”

“개보다 못한 대우 맞네.”

류진의 눈은 신해범이 주머니에 집어넣은 손에 못 박혀 있었다. 불안한 표정. 신해범은 한숨을 쉬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집어 던졌다.

“오늘만 봐준다.”

“…….”

“저거는 고맙단 말도 없어.”

류진이 어깨를 움츠렸다.

“가서 물 좀 떠 와.”

“내가 당신 시종이야?”

“안 떠 오면 군견이고 뭐고, 오늘 저 개 발라 먹는다. 비도 오니 운치도 좋고 딱이네.”

“뭐?”

“하나. 둘….”

류진이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슬리퍼를 꿰어 신고 부엌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신해범은 낄낄 웃었다. 이제 좀 봐줄 만하네.

방 안에서 백구가 낑낑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너 안 발라 먹어.”

신해범은 기둥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규칙적인 빗소리에 잠이 쏟아졌다.

“여기 물!”

“뭘 이렇게 빨리 갔다 와?”

“당신이 숫자 셌잖아.”

류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젖은 머리와 상기된 얼굴. 신해범은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덮었지만, 이미 늦었다. 신해범의 부푼 아랫도리를 본 류진이 한 걸음 물러섰다. 신해범이 버럭 소리쳤다.

“야!”

“무, 물 여기 둘게.”

“이리 와!”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신해범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그는 류진이 마루에 내려놓은 유리컵을 가리켰다.

“너 이거 마셔 봐.”

“왜, 왜?”

“네가 이걸 변기에서 퍼 왔는지, 침을 뱉었는지 어떻게 알아. 네가 먼저 마셔 보라고.”

류진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나한테 시켰잖아!”

분노로 무릎이 떨렸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자기가 불리한 상황에서 말을 돌리고, 그것도 모자라 사람을 의심하고.

변기에서 퍼 왔을까 봐 걱정돼? 침 뱉었을까 봐 무섭냐? 그러기에 평소에 나쁜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신해범이 컵을 내밀었다.

“마셔 봐. 야식으로 보신탕 먹기 싫으면.”

류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신해범은 컵을 받아 든 류진이 물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그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서슴없이 입을 맞췄다.

유리컵이 대청마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아…!”

신해범은 망설임 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류진의 입 안은 지난 며칠 동안 상상한 그대로였다. 따뜻하고 촉촉했다. 고른 치열도, 이리저리 도망치는 혀도 신해범의 기억대로였다.

류진의 입술 밖으로 물이 흘러넘쳤다. 신해범은 물방울이 맺힌 류진의 턱을 핥았다. 그러고는 씩 웃었다.

“독은 안 탔네.”

류진은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신해범의 혀가 닿았던 모든 부위를 소독하고 싶었다. 따뜻한 바닥에서 뒹굴던 백구가 다가와 류진의 뺨을 핥았다.

복도에 쭈그려 앉은 신해범이 투덜거렸다.

“야. 내가 무슨 역병 환자냐.”

“저리 가.”

“떨어져 있잖아. 꼬꼬야, 이제 문 좀 열어라. 나 춥다.”

“다른 방 가.”

“잊어버렸나 본데, 동백실 원래 내 방이거든?”

틀린 말이 아니라서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문을 열어 줄 마음은 없었다. 류진은 수건을 꼭 쥐고, 무릎 사이로 파고드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꼬야.”

신해범이 말했다.

“내가 선물도 가져왔잖아.”

“…….”

“진짜 좋은 건데. 너 보면 기절하는데.”

신해범의 손가락이 창살을 피아노 치듯 두드렸다. 류진은 그가 마음만 먹으면 문짝을 뜯어서라도 난입할 수 있음을 알았다. 지금 신해범은 봐주고 있는 거였다. 화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지만 류진은 잘 알았다. 신해범의 인내심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신해범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으악!”

“귀신이라도 봤냐? 뭘 그렇게 놀라?”

“무, 문에 그렇게 얼굴 대고 있으면 당연히 놀라지.”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서슴없이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양손에 각각 다른 크기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높이가 삼십 센티미터를 넘는 큰 상자와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가 류진의 눈앞에 나란히 놓였다.

“풀어 봐.”

“…….”

“왜 보고만 있어?”

“나중에. 누나 오면 같이 볼래.”

“왜?”

“…….”

“내가 폭탄이라도 넣었을까 봐 겁나냐?”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은 아까부터 신경 쓰였다.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이 계속 진동했다. 누군지 안 봐도 뻔했다. 권세혁은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거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에 답장이 끊기는 것도 참지 못했다. 휴대폰을 쥐고 살 수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류진은 신해범의 시선이 상자로 향한 틈을 타, 휴대폰을 꺼내 이불 밑으로 밀어 넣었다.

“왜 내 눈치를 보냐?”

“아니 그냥.”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아니야.”

류진은 황급히 상자를 끌어당겼다. 큰 상자의 비닐부터 뜯기 시작했다.

“뭘 이렇게 단단하게 쌌어.”

“비에 젖을까 봐.”

신해범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류진이 테이프를 뜯지 못해 낑낑거리자 도와주기까지 했다. 마침내 비닐을 전부 제거하고 리본까지 풀었을 때, 상자 뚜껑을 열고 에어캡을 치웠을 때, 신해범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어때? 근사하지?”

“이게 뭐야?”

“마저 풀어 봐.”

발포지와 에어캡을 한 겹, 한 겹 걷어 낼 때마다 류진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해 갔다. 신해범의 웃는 얼굴도 차츰 굳어졌다.

“왜 그래?”

“무슨 이런 걸….”

“마음에 안 들어? 표정이 별론데.”

“아니야. 좋아. 마음에 들어.”

류진이 고개를 돌리자 신해범이 손이 뻗어 와 턱을 붙잡았다. 류진은 그의 손을 쳐 냈다.

“하지 마!”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닌데?”

“안 기쁘니까.”

“왜?”

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도자기 필요 없어.”

“그래도 예쁘잖아. 비싸고.”

“예쁘고 비싸면 다 좋은 거야?”

“당연한 소릴.”

“이런 걸 얻다 써?”

신해범이 얼굴이 구겨졌다.

“화병이다. 이 닭대가리야.”

“아….”

“아, 는 무슨.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내가 이거 구하려고 몇 날 며칠을 앓으면서 잠도 못 자고… 됐다. 말해 봤자 네가 알겠냐.”

류진은 두 손으로 화병을 받쳐 들었다.

“되게 오래된 거 같은데. 이거 정말 비싼 거야?”

“그렇다니까.”

“내가 이런 거 모른다고 속이는 거 아냐?”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어디 창고에 처박혀 있던 거 같은데….”

“네가 무식해서 잘 모르나 본데, 내가 이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딜러야. 물건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고.”

그러나 류진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누나한테 물어볼 거야.”

“얼씨구, 그래라.”

류진은 화병을 상자에 도로 넣고 작은 상자를 손에 들었다.

“이건?”

“권주혁이 보낸 거다.”

“…….”

“열어 봐.”

류진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안 받을래.”

“내용물 확인하면 생각 바뀔걸.”

“그럴 일 없으니까 도로 가져가.”

신해범은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검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세상 좋아졌다. 옛날 같았으면 왕족이 주는 선물을 거절하는 거,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왕실 모독죄로 잡혀가고 싶냐?”

“그럼 당신 줄게. 내가 받아서 주는 거니까 괜찮지?”

“안 괜찮아. 왕족이 보낸 선물을 처분하거나 양도하는 것도 모독죄에 해당돼. 하여튼 닭대가리, 짱구 굴리는 수준 하고는.”

신해범이 얼른 풀어 보라고 재촉했다. 류진의 허벅지에 턱을 얹고 있던 백구도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류진은 한숨을 쉬며 상자를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백구가 튕기듯 일어났다. 백구는 류진의 손에 들린 상자를 덥석 물더니 그대로 동백실을 뛰쳐나갔다. 신해범이 경악했다.

“개새끼가 돌았나!”

신해범이 백구를 쫓아 복도를 달려 나갔다. 그런 신해범의 뒤를 따라 대청마루로 나간 류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진풍경이었다. 장대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와중에 신해범이 백구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류진은 이 기념할 만한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두면 두고두고 놀려 먹기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눈앞에서 번쩍하고 터지던 플래시가 떠올라 몸을 떨었다.

류진은 동백실로 돌아왔다. 조용해진 방 안에 휴대폰 진동이 요란했다. 이불을 들추고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메시지가 세 자릿수 넘게 쌓여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열 통. 발신자는 전부 권세혁이었다.

「형?」

「뭐 해?」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바빠?」

「무슨 일 있어?」

「지금 밖에 비 엄청 와」

「형 진짜 뭐 해?」

「이거 보면 답장해」

「답」

「장」

「줘」

「미안. 장난이야」

「답장 천천히 줘도 돼」

「혹시 뉴스 봤어?」

「나 인터뷰 떴는데」

「긴장돼서 잠이 안 와」

「형 만나러 가고 싶은데 나갈 수가 없어」

「팬클럽 애들이 많아서」

「얘들 슬로건도 만들었다」

「내가 풍기대 가는 게 싫대」

「나 연예인 다 됐어」

「형」

「형」

「형」

「전화하고 싶어」

「일 끝나면 연락 줘」

「내가 전화할게」

「응?」

「늦게라도 괜찮아」

「기다릴게」

「기다릴게」

「기다릴게」

「보고 싶어」

「진짜 보고 싶어」

메시지는 그 밑으로도 많았다. 신해범이 옆구리에 백구를 끼고 씩씩대며 돌아오지 않았다면 류진은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메시지를 끝까지 읽고 있었을 터였다.

신해범은 백구를 동백실 밖으로 내쫓았다. 되찾은 상자를 이불 위로 내던진 그가 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수건.”

황급히 건네줬다. 신해범이 얼굴을 문지르더니 버럭 화를 냈다.

“축축하잖아!”

어디서 뺨 맞고 화풀이인지 모르겠다. 류진은 욕실에서 마른 수건을 한 아름 가지고 나왔다.

“자.”

신해범은 받지 않았다. 보송보송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수건인데도.

“또 왜?”

“네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냐?”

“모르겠는데.”

“도대체가 너는…!”

신해범은 류진이 내민 수건을 낚아챘다. 그는 아이처럼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아 오만 신경질을 내며 머리를 벅벅 문질러 댔다. 류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원래도 속을 모르는 인간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그랬다.

문밖에서 백구가 낑낑거렸다.

“열어 주면 안 돼?”

“안 돼.”

“추울 텐데.”

“나한텐 다른 방 가라고 하더니.”

“당신이랑 백구랑 같나….”

“야!”

“아, 알았어.”

류진이 문고리를 잡은 순간, 신해범이 엄포를 놓았다.

“기어 나가면 죽는다.”

“…….”

“이리 와. 나 머리 말려 줘.”

류진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인간이 뭐라는 거야?

“못 들었어? 이리 와서 머리 좀 말려 달라고.”

신해범이 서랍에서 드라이어를 꺼냈다. 거부하면 저 바람 나오는 기계가 얼굴로 날아올 것 같아서, 류진은 주춤주춤 신해범 곁으로 다가갔다.

“미용실에서 하는 것처럼. 알지?”

“노력은 해 보겠는데….”

“잘해라.”

신해범의 머리카락은 전보다 길어져 있었다. 도려내진 귀를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비 냄새에 섞인 희미한 샴푸 냄새. 류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잘하네. 우리 꼬꼬.”

“…….”

“보고 싶었다.”

“…….”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안 보고 싶었어. 류진은 속으로만 대꾸했다.

이제 겨우 자리 털고 일어났을 뿐이었다. 누군가와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는 사실을 신해범은 알까? 이해할 수 있을까? 류진은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기계 소리를 빌려 침묵했다.

류진의 손가락이 신해범의 귀에 닿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형태 그대로 아물었다.

“이거….”

“왜?”

류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냐.”

“선물이나 풀어 봐라.”

“안 받는다니까.”

“보기만 해. 그런다고 후장 닳는 거 아니잖아.”

류진은 신해범의 등을 노려보았다. 젖은 옷 위로 근육이 도드라졌다. 단단한 근육이 신해범의 숨소리를 따라 부드럽게 오르내렸다.

크고 강한 몸이었다. 누구나 탐내고 동경할 만한 알파 개체였다. 그러나 저 진녹색 셔츠 아래, 단단한 근육을 감싼 피부는 온갖 흉터로 너덜너덜했다. 류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냥 가져가.”

“나라고 좋은 마음으로 가져온 줄 아냐?”

“그러니까 가져가라고.”

“도대체 몇 번을 설명해야 알아들어! 진짜 잡혀가서 뒤지게 처맞아야 정신 차릴래?”

얄팍한 인내심이 언제 바닥나나 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기에 놀라지 않았다. 류진은 드라이어를 치켜들었다. 여차하면 신해범의 머리를 후려치고 달아날 셈이었다.

그러나 신해범이 한발 빨랐다.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류진의 손목을 잡아채 비틀었다.

“아!”

드라이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해범이 플러그를 뽑자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가 웃었다.

“넌 나한테 안 돼. 아직은 그래.”

“…….”

“밥 많이 먹어라. 그래야 키도 크고 힘도 세지지.”

류진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신해범은 류진의 손목을 흔들며 비웃었다.

“닭발이다, 닭발.”

“이거 놔.”

“말 잘하네. 너 선택적 함구증인지 뭔지, 그거 꾀병이었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최유신이나 성재경은 속여도 나는 못 속여.”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당신은 몰라!”

“기세 좋은데.”

신해범이 류진의 뺨을 툭 쳤다.

“내일 권세혁 풍기대 입소한다. 뉴스 봤으면 알겠지만.”

“안 봤어….”

하지만 권세혁이 보낸 메시지 중에 인터뷰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인터뷰가 풍기 교육대 입소에 관련된 것이었나 보았다.

“이제 슬슬 하신성 정리해야지?”

신해범은 류진의 굳은 표정을 모르는 척했다.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걔 누워 있는 비용, 다 네 월급에서 깔 거니까.”

“…….”

“원수 때문에 빚지고 싶지 않으면 빨리 결정해.”

“…….”

“기다리는 환자가 한 트럭이야. 몸이 망가져서 못 고치는 사람들 말이야. 다른 사람 장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신해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사람들이 천년만년 기다려 줄 것 같냐? 네가 꾸물거리는 사이에 사람이 죽을지도 몰라. 이해 안 돼? 네 손에 몇 명의 목숨이 달렸는지 정말 모르겠어?”

“…….”

“하신성, 그 새낄 위해서도 이게 좋은 방법이야. 어차피 가망 없는데 마지막으로 선행하고 떠나야지. 안 그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쓸데없는 희망은 걸지 마라. 식물인간이 몇 년 만에 극적으로 깨어나서 말짱해지는 건 드라마, 영화, 해외 토픽에서나 있는 일이야. 너 어차피 그 새끼 좋아하지도 않잖아.”

잠자코 듣던 류진이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급하면 당신이 해. 나한테 책임 떠넘기지 말고.”

“섭섭한 소리 하지 마, 정류진. 우린 닮았어. 넌 네가 살기 위해서 남을 물어뜯는 방법을 배워야 해.”

“헛소리 작작 해.”

“죄책감 같은 건 똥통에 처박아 버려.”

신해범의 엄지가 류진의 관자놀이 흉터를 쓸었다.

“널 갖고 놀면 어떤 꼴이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란 말이야.”

신해범은 류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움찔하고 눈길을 피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머리부터 으적으적 씹어 삼키고 싶을 정도로.

신해범은 직접 상자 포장을 뜯었다. 검은색 상자에 금박으로 적힌 브랜드명이 생소하지 않았다. 바쉐론 콘스탄틴.

“어때?”

류진은 본품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묵직해서 한 손으로는 잘 열리지도 않는 상자를 바라봤다. 신해범이 투명한 포장재 아래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시계를 꺼내 보여 줬다.

“차 볼래?”

듀얼 타임 기본형에, 시곗줄은 검정 가죽이었다. 매끈한 표면에 은은한 악어 무늬가 섬세했다.

신해범이 류진의 손목에 시계를 댔다. 류진은 뿌리치려고 했지만 악력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안 해…! 안 한다고!”

“자자. 마음에 들면서 빼지 마.”

“진짜 필요 없어!”

실랑이하는 와중에 류진이 신해범의 손등을 할퀴었다.

“아.”

류진은 더럭 겁을 집어먹고 뒤로 물러났다. 뭉툭한 손톱에 긁혀 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만, 신해범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파라.”

“내가 싫다고 했잖아!”

“너무하네.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면 장단 맞춰 줄 줄도 알아야지. 하긴 뭐, 그럴 깜냥 있었으면 애초에 그 사달도 안 났지.”

류진은 입을 꾹 다물고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냐?”

“한 번만 더 그 소리 하면 가만 안 둬.”

“왜. 한 대 치시게? 이번에도 귀 잡아 뜯을 거냐? 어쩌나, 이젠 다 아물어서 좆나 괜찮은데.”

“사람이 진짜….”

“뭐.”

“진짜 유치하다.”

“뭐야?”

어느새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그래서 바지 주머니에 급하게 쑤셔 넣은 휴대폰 진동이 잘 들렸다. 류진은 손바닥으로 주머니를 꾹 누르며 신해범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받아.”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MVP 전화잖아.”

“나중에.”

“아까부터 계속 거슬렸어. 받아.”

“어떻게 알았어?”

“네 표정만 봐도 알지. 꼭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

“…….”

류진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한숨을 쉬고 도로 집어넣으려는데, 신해범의 손이 다가와 휴대폰을 낚아챘다.

“아!”

“봐 봐.”

“뭐야! 싫어!”

“요즘 애들 어떻게 노는지 좀 보자.”

“뭘 놀아! 별 얘기 안 했어!”

“왜 이렇게 예민해? 설마 내 욕 했냐?”

“당신 얘기 안 했어. 그냥 자꾸 뭐 하냐고 물어봐서… 줘!”

신해범이 순순히 돌려줄 리 없었다. 그는 류진의 휴대폰을 든 채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갔다. 맞은편 벽에 뒤통수를 콩, 부딪힌 그가 액정을 들여다보며 킥킥거렸다.

류진은 신해범의 웃는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눌러 버리고 싶었다. 남의 프라이버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놈. 날 약 올리고 괴롭히는 게 삶의 낙인 놈. 교통사고 나서 콱 죽어 버렸으면.

“이거 사생활 침해 아니다. 모니터링이야, 모니터링.”

같지도 않은 변명 하고는.

류진은 입술을 비죽이며, 신해범이 억지로 채워 준 시계를 풀어 상자에 도로 넣었다.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

“이거 당신이 사자고 한 거야?”

“아니.”

신해범은 휴대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권주혁이 좋아하는 브랜드야. 내 시계도 받은 거고, 기 소령도 하나 가지고 있어.”

“아무렇지 않아? 이런 거 받아도?”

“노동의 대가와 신뢰의 증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괜찮아.”

“…….”

“너한텐 화대 개념인가?”

류진이 집어 던진 상자가 신해범의 관자놀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간발의 차이로 뇌진탕을 면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버릇 조심해라.”

“당신이야말로 주둥이 조심해.”

정말이지 한마디도 안 진다. 그래도 저렇게 설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가만히 입 다물고 허공만 쳐다보던 바보 천지보다는 백 배, 아니 천 배 나았다. 신해범은 또다시 진동하기 시작한 휴대폰을 류진에게 던져 줬다.

“전화 받아. 보고 싶은 류진이 형.”

보스턴백 안주머니에 숨겨 놓은 액상 담배를 도로 꺼냈다. 되도록 참아 보려고 했는데 떨려서 안 되겠다.

권세혁은 천장을 향해 뿌연 연기를 뱉으며 재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신호음이 길게 가지 않았다.

- 여보세요.

권세혁이 냅다 소리쳤다.

“형 진짜 너무한다! 내가 몇 번을 전화했는데!”

- 미안. 잠깐 다른 거 하느라.

“뭐 하고 있었는데?”

- 조금 바빴어… 갑자기 비가 와서.

“거기도 비 와?”

- 응. 많이 와.

“그러고 보니까 빗소리 들리네.”

- 너는 뭐 하고 있었어?

“집에 있어. 아, 진짜 답답해 죽겠어. 요즘 팬클럽 애들 때문에 창문도 못 연다니까.”

권세혁은 류진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 내일 풍기대 입소한다며.

“아, 응.”

류진의 숨이 가빴다. 권세혁은 조금 미안해졌다. 조금 바쁜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정원 관리는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일이니까.

“귀찮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형 목소리 꼭 듣고 싶었어.”

- 왜. 긴장돼서?

“꼭 그런 건 아닌데….”

권세혁은 말을 흐렸다.

풍기 교육대 입소는 분명 기다려 왔던 일이었다. 믿음직한 숙부의 주선으로 성사되었고, 신해범은 여유롭고 안락한 생활을 약속했다. 사회 복무 요원 신분이라지만 그가 보통의 ‘공익’들과 같은 대접을 받을 리는 없었다.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코앞에 다가온 군 생활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게 옳은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핑 사건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권세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다 그 인터뷰 때문이야.”

- 무슨 인터뷰?

오락성 토크 프로그램이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던 게 실수였다. 풍기 교육대 입소 전 마지막 스케줄에서, 권세혁은 뜻밖의 기습을 당했다.

“아, 그 돼지 새끼 아직도 생각나. 지가 기자면 다야?”

그날은 컨디션이 좋았다. 헤로인은 긴장을 풀어 주고 아늑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스튜디오는 넓진 않지만 따뜻한 분위기였고, 몸을 꼭 조인 슈트와 밑창이 딱딱한 구두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인터뷰어들은 권세혁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배려하는 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엄선된 방청객들의 질문 또한 어렵지 않았다. 권세혁은 풍기 교육대 입소를 앞두고 심경이 어떤지, 소집 해제 후 방송 활동 계획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위트 있게 대답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엄승원은 권세혁이 애써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무뢰한이었다. 문화부 기자라는데 아무래도 사회부 같았다. 그는 처음부터 의무 복무를 거액의 기부금으로 대체한 귀족 집안 자제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권세혁에게 그들과 다른 행보를 택한 이유를 캐물었다.

생각하니 또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권세혁은 거칠게 내뱉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뭐라고 해? 숙부님이 가라고 해서 그랬다, 어차피 배구 선수도 물 건너갔고, 할 거 없이 노느니 군대 문제나 해결해야지 싶었다, 이렇게 말해? 아니면 뭐 도핑 얘기 듣고 싶은 건가? 애초에 그따위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야? 지가 기자면 기자지, 경찰이야? 군인이야? 돼지 같은 게 얻다 대고 까부는 거야, 짜증 나게.”

우다다 쏟아 내고 나니 속이 풀렸다. 권세혁이 뱉는 담배 연기에 한숨이 섞였다.

“방송이고 뭐고 그냥 확 쏴붙여 줄 걸 그랬어. 숙부님 얼굴에 똥칠할까 봐 웃어넘겼는데 너무 후회돼.”

- 그래?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 나는… 글쎄. 상상이 잘 안 가네.

“아, 나 진짜 바보 같았어. 그 돼지 속으로 날 엄청 무시했을 거야.”

- 설마. 누가 감히 너를 무시해?

권세혁이 씩 웃었다.

“형은 나 무시하잖아.”

- 내가 언제?

“벌써 잊어버렸어? 지난번에 병원에서 나 바람맞혔잖아. 그리고 오늘 내 전화, 메시지, 전부 다!”

- 그건… 미안. 사과할게. 내가 미안해.

“우리 만나자. 형 시간 언제가 괜찮아?”

- 음… 아, 잠깐만… 아직 나가기 힘들 것 같아.

아직도? 며칠째 얼굴을 못 봤는데. 권세혁은 휴대폰을 부여잡고 칭얼거렸다.

“왜?”

류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형? 뭐야? 옆에 누구 있어?”

- 아, 아니.

권세혁은 류진이 통화를 끊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자 서운함이 복받쳤다. 이 전화 한 통이 연결되기까지, 몇 번의 전화를 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류진은 이 한 통의 전화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형. 나랑 통화할 땐 나만 생각해 줘.”

- 미안.

“미안하다는 소리만 하지 말고.”

류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 응.

권세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황급히 얼버무렸다.

“화내는 거 아냐. 형한테 무슨 일 있나 걱정돼서.”

- 아니야. 아무 일 없어.

“…몸은 좀 나았어?”

류진은 아직 감기 기운이 있다고 했다.

- 몸살인가 봐.

“그러게 좀 쉬라니까. 다 낫지도 않았는데 계속 일해서 그렇잖아. 호월루에 다른 알바생 없어?”

- 그런 식으로 말하면 전화 끊는다.

“아, 형! 잠깐만!”

권세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류진과 대화하면 드는 생각이 있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내가 호월루로 병문안 가도 안 돼?”

- 네가 손님으로 오는 것보다 싫어.

“너무해.”

- 안 돼. 오지 마… 분명히 말했어. 지난번, 지난번에도, 난 그냥 정원 관리 알반데… 해란실까지 들어갔잖아. 너 때문에.

“응. 그때 우리 재밌었지.”

권세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블라인드 사이를 벌려 바깥을 보았다.

이미 늦은 한밤중이었다. 빗줄기도 가늘어질 기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앞을 장악한 팬클럽의 머릿수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그들의 전의를 더욱 부채질하는 듯했다.

권세혁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권세혁 왕자 의무 복무 결사반대’ 구호에 한숨을 푹 쉬었다. 저것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나, 형 많이 보고 싶은데.”

- 권세혁… 나중에.

“약 없이도 괜찮아. 장소도, 시간도 내가 맞출게.”

권세혁은 초조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류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형?”

뚝.

전화가 끊겼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권세혁은 물고 있던 전자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뽀얀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뭐야.”

기가 막혔다.

“뭐야! 진짜!”

지금껏 충분히 참아 줬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바람을 맞아도, 뒤늦게 몸이 아팠다며 변명 같은 소리를 늘어놓아도 이해했다. 그랬더니 사람을 아예 보자기 취급한다.

권세혁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여러 번 요란하게 바닥을 내려찍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반쯤 열린 방문 앞에 어린 동생이 서 있었다. 겁먹은 표정.

“형아….”

평소라면 웃어 줬을 터였다. 형은 화난 게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권세혁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의 관심과 손길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쳤다.

권세혁은 싸늘하게 일갈했다.

“나가.”

“형아.”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 아니야.”

“내가 남이야?”

“나가라면 나가!”

사자후가 쩌렁쩌렁했다. 권세혁은 겁에 질린 동생이 방문도 닫지 못한 채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지금껏 동생이 자기 방에 들어오는 걸 막은 적이 없었다. 허락 없이 물건을 가져가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어리광도 이젠 끝이라고, 권세혁은 생각했다. 내가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 해 줘야 해? 나도 내 인생 사느라 바쁜데!

목이 탔다. 권세혁은 테이블 위에 둔 텀블러를 낚아챘다. 물이 미적지근해서 더 화가 났다. 그는 텀블러를 벽으로 집어 던졌다. 비참하게 바닥을 구르는 물통이 류진에게 거절당한 자기 모습 같았다.

충격으로 켜진 오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류연비 노래였다. 류진의 목소리와 꼭 닮은 허스키 보이스가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권세혁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만 좀 해!”

류진이 팔꿈치를 세워 신해범의 옆구리를 쳤다.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아야, 했다. 그래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권세혁과의 통화는 강제로 끊어졌다. 통화하는 내내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몸을 주물러 대더니, 결국 사달이 났다. 류진은 한숨을 쉬며 다시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러나 신해범이 한발 앞섰다. 그는 류진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은 다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류진을 바닥에 눕히고 올라탔다.

“뭐야… 아! 하지 마!”

“형 노릇 하니까 재밌냐?”

신해범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나 형이라고 불러 봐.”

“싫어.”

“왜? 나 형 맞잖아.”

“당신 나한테 형 아니야. 삼촌이나 아저씨지.”

그러고는 황급히 팔로 얼굴을 가리는 류진을 보며 신해범은 푸하하 웃었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대화를 하겠냐.”

“…….”

“옷이나 벗어라. 냄새난다.”

“됐어. 입고 있으면 말라.”

“지랄 말고 벗어. 감기 들어.”

류진은 신해범을 노려보았다.

“당신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속셈? 무슨 속셈?”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제법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류진은 신해범의 표정 연기에 속지 않았다.

류진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는 신해범을 피해서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저리 가.”

“표정 봐라. 내가 잡아먹냐?”

신해범의 손이 다가와 카디건 자락을 붙잡았다. 류진은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애썼다.

“좀…!”

다리 사이에 신해범의 하반신이 느껴졌다. 소름이 쫙 끼쳤다.

“장난치지 마.”

“장난? 내가 그렇게 할 짓이 없어 보여?”

“진짜… 하지 마. 나 아직 아파.”

최후의 보루를 꺼내 들었지만, 그건 신해범의 핑계에 힘을 실어 줄 뿐이었다.

“그래. 너 환자야. 몸도 성치 않은데 감기까지 걸려서야 쓰겠어? 그러니까 옷 벗어.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

“됐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떨어져!”

“네가 뭘 알아서 해. 개새끼만 챙길 줄 알지.”

류진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으나, 신해범이 와락 달려들어 그 자리에 쓰러졌다. 큰 손바닥이 뒤통수를 짓눌렸다. 이마가 딱딱한 바닥에 닿았다. 머리 가죽이 뜯어져 나갈 것 같았다.

“놔!”

“감기 걸리기 전에 옷 벗자, 아기야.”

“꺼져!”

빗물을 먹어 묵직해진 카디건이 벗겨져 나갔다. 축축한 티셔츠도 가슴까지 밀려 올라왔다. 류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었다.

“비켜… 싫어!”

버둥거리는 류진을 내려다보던 신해범이 웃었다. 덫에 걸린 사슴이 사냥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아!”

딱딱한 이가 목덜미에 박혔다. 류진의 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꺼져! 진짜 싫다고!”

앙다문 턱이 바르르 떨렸다.

“제발 좀…! 하지 마! 나 좀 건들지 마!”

“건드리고 싶게 생겼어, 너.”

신해범의 손바닥이 가슴을 어루만졌다. 류진은 헐떡이며 앞으로 기었다. 위로 올라가는 족족 끌어 내려졌다. 단단하고 뜨거운 손바닥이 유륜 전체를 누르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자극으로 꼿꼿해진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잡아당겼다.

류진은 어금니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엉덩이 사이에 문질러지는 성기의 부피감에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무섭다. 무섭다.

“씨발… 씨발,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우리 꼬꼬는 귀엽고, 예쁘고, 섹시하기까지 하네. 아주 세상 혼자 살아요.”

“미친놈이 뭐라는… 아!”

귀를 물어뜯겼다. 류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아직 그날의 상처가 낫지 않은 몸이었다. 목덜미와 어깨, 가슴과 옆구리에 멍 자국과 잇자국이 선명했다, 골반과 다리 사이, 엉덩이도 엉망이었다. 꼴사나운 걸음걸이를 봤으니 알 거 아닌가.

류진은 신해범이 끔찍했다. 도대체가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신해범은 류진이 아프거나 말거나,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자기 욕구만 채우는 데 신경 썼다. 이런 인간이 출세하는 세상이라서 말세라고 하나 보았다.

식은땀이 바닥에 떨어졌다. 가슴을 한참 주무르던 손이 옆구리로 옮겨 갔다. 신해범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예나가 너 굶기냐?”

“누나 잘못 아니야. 그냥 내가… 계속 토해. 그러니까 좀… 떨어져. 나 진짜 힘들단 말이야.”

신해범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고통이었다.

살이 빠져 앙상해진 팔다리와 상흔으로 얼룩덜룩한 피부를 볼 때마다 류진은 자기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음식을 먹지 못하고, 가까스로 먹어도 이내 토해 버리는 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부피가 단 일 그램이라도 늘어나는 게 싫어서였다.

신해범이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떡할 거야.”

“뭘….”

“하신성. 질질 끌어 봤자 너만 손해야.”

헐렁한 운동복 바지 속으로 뜨거운 손이 들어왔다. 속옷째 엉덩이를 쥐고 주물렀다. 류진은 무릎을 세워 앞으로 기어가려고 했으나, 그건 신해범의 하반신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웃었다.

“옛날에는 닭도 날 수 있는 새였대.”

“뭐?”

“하지만 좁은 우리에 갇히고,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으면서 살이 올라 날지 못하게 된 거래.”

“갑자기 무슨 헛소리… 아, 만지지 마…!”

“사람이 말이야. 인간들이 진짜 못돼서. 일부러 그렇게 개량한 거지. 하늘을 못 나는 새는 잡아먹기 쉽잖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꼬꼬는 언제쯤 살이 찔까?”

신해범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사육법은 틀렸다. 볼품없이 말라 빠진 정류진 몸에서, 그나마 먹을 만한 부위는 이 쫄깃한 엉덩이뿐이었다.

“살 좀 쪄라. 제발 좀.”

“아…!”

속옷을 젖히고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그의 목덜미를 핥았다.

바지와 속옷이 벗겨져 나갔다. 볼깃살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졌다. 손가락 주인이 속삭였다.

“기대돼.”

신해범은 오랜 시간을 들여 구멍 입구를 쓰다듬고, 두드렸다. 손가락을 몇 개나 쑤셔 넣을 수 있을지 가늠하기라도 하듯.

눈을 질끈 감은 채 도리질하던 류진의 코앞으로 화장품 병이 내밀어졌다. 시중에서 흔하게 파는 튜브형 모이스처라이저였다.

“이거 괜찮지?”

류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드러난 맨등에 신해범의 젖은 셔츠가 밀착됐다. 귓바퀴를 핥는 혀가 축축하다.

“싫어.”

류진은 울음을 삼켰다.

“안 하고 싶어.”

“난 하고 싶어.”

신해범이 한 손으로 뚜껑을 열고 튜브를 움켜쥐었다. 백색 로션이 주르륵 흘러나와 바닥을 더럽혔다. 류진이 도리질했다.

“싫어, 싫어… 하지 마. 하지 마….”

“아깝잖아.”

튜브를 내던진 신해범이 바닥에 흥건한 로션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그는 검지부터 진입을 시도했다.

“아아악…!”

동백실 밖에 백구가 있었다. 문을 박박 긁으며 낑낑거렸다. 신해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고통에 헐떡대는 류진의 허리를 바짝 추켜세우며, 검지에 이어 중지까지 단숨에 밀어 넣었다.

“하아, 악!”

생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류진이 울기 시작했다.

“아아! 아파…! 아파!”

“착하지. 가만히 있어야지.”

속살을 헤집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또 피 나네.”

바닥에 얼굴을 묻고, 류진은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빌었다.

“다음에… 다음에 해. 나 정말 아파….”

“난 지금 하고 싶어.”

“한 번만 봐줘… 진짜 힘들어서 그래.”

“언제는 욕하더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류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앙다문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샜다. 신해범이 류진의 목덜미를 핥으면서 말했다.

“불쌍한 콘셉트 안 어울린다. 꼬꼬야.”

벨트 버클 풀리는 소리가 천둥 같았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류진은 손등에 이마를 댄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 많이 해 봤잖아.”

“싫어… 진짜 싫어…!”

“이해해 줘. 나도 오래 참았거든.”

로션으로 젖은 입구에 귀두가 문질러졌다. 찢어진 살을 벌리고 파고들었다. 두툼한 귀두가 입구에 걸쳐진 것만으로도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아… 아.”

“엄살은.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어.”

류진은 턱을 바르르 떨었다. 입 속으로 신해범이 손가락이 들어왔다. 힘껏 깨물었지만 그는 아파하기는커녕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단단하게 곧추선 성기가 이물감에 요동치는 내벽을 꾸역꾸역 밀어젖혔다. 류진은 신해범의 손가락을 문 채, 흐느끼며 바닥을 기었다.

포식자가 미소 지었다. 근육질 어깨가 크게 한 번 들썩였다. 극하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아아! 아!”

생살을 찢어발기며 끝까지 밀어 넣었다. 류진의 울부짖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신해범은 황홀함에 몸을 떨었다. 더웠다. 피부에서 연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제 셔츠 단추를 잡아 뜯었다. 옷을 벗어 던지고, 부들부들 떠는 류진의 등 위로 엎어졌다.

“류진아….”

신해범이 송곳니를 세웠다. 류진의 목덜미를 긁으면서 신음했다. 얇은 피부 너머로 펄떡이는 혈관이 느껴졌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을 문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엽고, 섹시하기까지 한 나의 먹이. 나의 정류진.

등허리와 허벅지 근육이 팽창했다. 척추까지 찌르르 떨려 왔다. 신해범은 류진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신해범은 허리를 뺐다가, 류진이 안도의 첫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도로 밀어붙였다. 퍽 소리와 함께 로션이 튀었다. 류진의 허벅지 안쪽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아… 아파. 아파. 싫어.”

“예뻐. 너 진짜 예뻐.”

신해범은 우는 류진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는 비와 흙, 나무 냄새가 났다.

아플 만큼 단단해진 성기가 보드라운 내벽에 마찰하는 감각이 좋았다. 말로는 아프다, 싫다며 흐느껴 울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걸. 신해범은 찢어져 피가 흐르는 구멍을 로션의 힘을 빌려 강제로 벌렸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류진이 귀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숨을 삼키던 신해범의 눈에 류진의 손이 들어왔다. 움켜쥔 주먹에 손등 뼈와 핏줄이 불거졌다. 신해범은 그 알량한 주먹을 자신의 큰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언젠가는 이 손에 살해당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었다.

신해범은 권주혁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믿었던 자의 손에 과거에 저지른 악행의 대가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죗값을 피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런 건 비겁하니까.

다만, 신해범은 자신의 최후를 스스로 고르고 싶었다. 자기가 선택한 사람의 손에. 쓸데없는 저항은 집어치우고.

그건 명예롭고 화려한 결말이었다. 불꽃놀이의 피날레처럼.

신해범은 류진의 손을 잡고 생각했다. 내 모든 걸 네게 주겠다. 나를 삼키고 살아남아라.

“기다릴게.”

지옥에서.

“기다릴게….”

신해범은 한 팔로 류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반대쪽 손은 밑으로 내렸다. 체모를 헤치고 힘없이 늘어진 성기를 붙잡자 류진이 강에서 끌려 나온 생선처럼 팔딱거렸다.

“흐아, 아, 싫엇, 싫… 아아!”

류진이 허리를 비틀면서 내벽이 확 조였다. 아찔한 쾌감이 신해범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신해범은 비로소 이 쓸모없는 물건의 쓰임새를 알았다. 잡고 당기라고 붙어 있는 거였군.

그는 아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떠올렸다. 꽁무니에 매달린 고리를 쭉 당겼다가 탁, 하고 놓으면 앞으로 굴러가는 장난감 차였다.

***

벨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알람인가 했다. 잠자는 시간은 왜 이렇게 쏜살같이 지나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찾아 쥐었다.

액정을 확인한 권세혁의 눈이 커졌다. 알람이 아니었다. 류진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권세혁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형?”

- …….

“류진이 형? 뭐야?”

- 세혁아.

발신자는 류진이 맞았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 깨워서 미안.

“아냐, 통화 괜찮아.”

권세혁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까이에 둔 텀블러를 잡았다. 미적지근한 물이라도 벌컥벌컥 들이켜니 정신이 들었다. 권세혁은 침대에서 벗어나 소파에 몸을 던졌다. 새벽 네 시였다. 배구부 시절에도 이 시간에 일어나지 않았다. 밤새도록 먹고 마시며 떠드는 날이라면 모를까.

“무슨 일 있어?”

- 미안해. 내일 다시 걸게.

“괜찮아, 말해.”

류진은 자꾸만 사과했다. 갑자기 끊어진 통화에 대해 따지려던 생각이 쑥 들어갈 정도였다. 권세혁은 한숨을 쉬었다.

“형. 나 진짜 괜찮아. 어차피 잠 안 와서 뒤척이던 참이었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괜찮았다. 류진이 안심한다면.

“내일 중요한 날이라 그런가 봐. 긴장해서.”

- 그럼 더 푹 자야 하잖아.

“됐어. 애매하게 잠 설치는 것보다 깨어 있는 게 나아.”

- 응….

“근데 형, 지금 어디야? 화장실? 목소리가 울리는데.”

- 병원이야.

“뭐?”

휴대폰 너머, 류진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 병원에 있어. 지금.

권세혁은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자기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분명히 새벽 네 시였고, 이 시간에 갈 수 있는 병원이라고는 응급실뿐이었다.

권세혁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류진이 아프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몸이 안 좋은 줄 몰랐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권세혁은 바닥에 이마를 찧고만 싶었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문화였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세게 찧는다. 상대방이 그만 되었으니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형 얼마나 아픈 거야? 내가 갈까?”

- 아니야. 나 때문에 온 게 아니라.

류진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 세혁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알 것 같아서. 넌 고등학교도 나왔고, 나보단 똑똑하니까.

“응.”

- 식물인간이 뭐야?

“어?”

- 무슨 뜻인지는 알아. 그런데 그게 정말로… 죽은 거야? 숨을 쉬어도? 숨을 쉬는데도 죽은 거야? 기다려도 못 일어나? 영원히?

권세혁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데?”

- 그냥.

“그냥?!”

권세혁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차 키와 지갑을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느 병원이야? 갈게.”

- 아니야. 그러지 마.

“무슨 일 있는 거 알아. 형 목소리만 들어도 그래. 누구야? 형 아는 사람이야?”

- …….

병원과 식물인간. 두 가지 단어만으로도 머릿속에 정황이 그려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류진과 가까운 누군가가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쩌면 이미 소생 불가 판정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류진이 말한 식물인간, 혹은 뇌사.

권세혁은 류진이 자신에게 전화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린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움켜잡기 마련이었다. 빤히 아는 사실에 질문을 던지고, 평소 의지하지 않던 사람에게까지 기댄다. 그게 상황을 개선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권세혁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그런 중요한 일은 나하고 상의를 했어야지!”

- 미안.

“사과는 나중에 해. 지금 어느 병원인지 말해.”

- 미안해, 세혁아.

다음에 이어진 류진의 말은 상처가 되었다.

-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미안해. 괜히 전화해서.

“형!”

- 그냥 좀 무서워서. 병원이라 그런가 봐. 어릴 때도 그랬는데 어른 돼서도 이 모양이네. 한심하지? 나도 그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건너왔다.

권세혁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데 왜 전화했어? 식물인간이 뭔지 궁금해서? 거기 병원이라며. 의사한테 물어봐. 나보다 훨씬 설명 잘해 줄걸. 형 눈높이에 맞춰서 쉽게.”

- 미안해.

“사과 듣고 싶지 않아. 난 형이… 형한테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는 게 황당해. 어이없어. 형 요즘 나 안 만나 준 게, 감기 때문에 아파서가 아니고 그 일 때문이야?”

- …….

“솔직하게 말해.”

류진이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권세혁은 기다렸다.

- 반쯤은.

“무슨 대답이 그래?”

- 미안해.

“자꾸 사과만 하지 말고!”

권세혁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 형한테 도움 되고 싶어. 주제넘는다고 생각하지 마. 난 형 주변에 널린 그저 그런 놈들이랑은 수준이 다르니까.”

숨 막히는 침묵이 흘러갔다. 류진은 한참 만에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 내가 유일한 보호자래. 이상하지.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보호자래. 그래서… 해야 한대. 그런데 모르겠어. 의사가 뭐라고 설명은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 진짜 이상해. 분명 우리나라 말인데 외국어 같아.

“관계자 바꿔 줘. 내가 얘기할게.”

- 안 돼.

“형. 진짜 내가 누구지 몰라서 그래?”

- 알아. 네가 누군지 너무 잘 알아. 전화해서 미안해. 그런데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권세혁의 입술이 벌어졌다.

“형, 지금 괜찮아?”

- …….

“형 대체 어디야. 말해 줘. 내가 지금 갈….”

또다. 또 전화가 끊어졌다.

권세혁은 휴대폰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새벽에 무슨 날벼락이냐고 한탄할 시간도 없었다. 지금 류진이 어디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그가 힘들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지금 류진이 코너에 몰렸다는 사실이었다.

권세혁은 벌떡 일어났다. 휴대폰을 주워 주머니에 넣은 다음, 방을 뛰쳐나갔다. 계단을 구르듯이 달려 내려가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류진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신해범의 손안에서 휴대폰 액정이 반짝였다.

통화 종료.

차가운 네 글자를 바라보며, 류진은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신해범이 저승사자 같다고 생각했다. 검은 재킷, 검은 바지, 검은 구두. 받쳐 입은 셔츠와 넥타이까지 모조리 검은색이었다.

지난주에 신예나가 새로 사 온 옷이었다. 사이즈로 미루어 보아 신해범의 옷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이런 용도일 줄은 몰랐다. 신해범의 검은 슈트는 상복이었다.

류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있던 탓에 꼬리뼈가 아팠다.

“자.”

류진은 신해범이 무심하게 돌려주는 휴대폰을 받아 쥐었다. 왜 권세혁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필요했고, 휴대폰에 저장된 얼마 안 되는 연락처 중, 하신성과 접점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 권세혁이었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가자.”

“잠깐만.”

“왜?”

“잠깐만… 시간을 줘.”

“무슨 시간? 생각할 시간?”

신해범이 웃었다.

“생각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동요해야 할 이유가 있나?”

어깨를 으쓱한 신해범이 비아냥거렸다.

“화장실에 숨어서 우는 줄 알았다. 하신성 불쌍하다고.”

“안 그래.”

“다행이군.”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야.”

“어련하시겠어.”

류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신해범이 억지로 뒤집어씌운 검은 티셔츠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행위가 끝난 뒤에도 류진을 놔주지 않았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핏물 섞인 정액조차 닦지 못하게 했다.

속옷은 생략한 채 바지만 꿰어 입었다. 그러고는 팔을 붙잡혀 끌려 나왔다.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자, 신해범은 까불면 권주혁에게 보내 버린다는 말로 류진을 닥치게 했다.

류진은 신해범이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몰랐다. 호월루에 온 건 권주혁의 선물을 전해 주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해범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신해범이 호월루를 찾아온 진짜 이유. 류진은 그것을 제5 중앙 병원의 간판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여섯 글자. 

신해범은 복도에 멍하게 선 류진의 어깨를 쳤다.

“가.”

“…….”

“너 때문에 몇 명이,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해?”

항변하려던 류진이 입을 다물었다. 긴 목덜미에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류진은 마른침을 삼키고 걷기 시작했다. 신해범이 바로 뒤에 있었다. 그는 류진이 걸음을 멈추거나, 느려질 때마다 어깨를 툭툭 치며 재촉했다.

긴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찌나 고요한지 재깍거리는 손목시계 초침 소리까지 다 들렸다.

중환자실 문 앞에 의료진과 사복 군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류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 발만 응시했다.

신해범이 문을 열었다. 그는 주저하는 류진의 등을 떠밀었다.

하신성은 혼자 있었다. 의식 없는 몸을 뒤덮은 각종 튜브와 호스가 보였다. 생명 유지 장치가 어둠 속에서 퍼렇게 빛났다.

류진은 좀처럼 다가가지 못했다. 의료진의 설명과 종교 단체 관계자의 엄숙한 설교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꼼짝하지 않았다.

저게 하신성이야?

식량난으로 굶주리는 국가의 바짝 마른 어린아이나 미라가 아니고?

침대에 누운 하신성은 이미 죽은 것 같았다. 류진이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2차 수술 도중에 심정지가 와 혼수상태에 빠진 하신성의 뇌 손상 정도는 심각했다. 신해범은 그가 기적적으로 깨어난다 해도 정상 회복이 어려울 것이며, 죽을 때까지 거액의 병원비를 잡아먹으면서 간병인에게 의지하게 될 거라고 거듭 말했다.

류진은 귀를 틀어막았다. 윙윙거리는 생명 유지 장치 소리는 귓가에서 벌떼가 날아다니는 소리 같았다.

신해범은 하신성의 몸을 뒤덮은 튜브와 지렁이 같은 철사들을 바라보았다. 의술의 발전이 새삼 놀라웠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나 중국 진시황에게 현대의 최첨단 과학에 대해 브리핑을 해 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영원히 살 수 있었답니다. 몇 세기 후에 태어났으면 말이죠!

“정류진.”

대답 없이 돌아보는 얼굴이 창백했다.

“지금 기분이 어때?”

“…….”

류진은 힘없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직도 믿을 수 없었다. 이게 하신성이라니.

온통 붕대로 싸맨 얼굴에서 드러난 부위라곤 한쪽 눈과 부르튼 입술뿐이었다. 호스로 연결된 산소마스크가 김으로 뿌예졌다가 투명해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가슴팍이 힘겹게 오르내렸다. 붕대 위로 배어난 피는 보랏빛이었다.

“힘들어하고 있어.”

신해범이 말했다.

“네가 편하게 해 줘.”

마른 몸이 휘청거렸다. 신해범은 류진이 쓰러지지 않도록 힘주어 잡았다. 억지로나마 똑바로 서게 했다.

“하신성 얼굴 제대로… 보고 싶어.”

“못 알아볼걸.”

“그래도.”

류진이 중얼거렸다.

“마지막이잖아.”

신해범은 속으로 한탄했다. 신파극은 그의 장르가 아니었다. 그는 류진의 몸을 돌려세워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정신 차려. 저 새끼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저놈 얼굴 보면, 너는 평생 저 새끼 못 잊어. 저 붕대 아래가 어떨 것 같아? 네가 기억하는 하신성 얼굴은 형체도 없어.”

“…….”

“사람 몸은 과녁이랑 달라. 총 맞았을 때 구멍 하나 뚫리는 게 아니라고.”

사람 손가락 마디만 한 총알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면서 피부를 뭉개고,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순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술 후가 더 처참하다. 조각난 뼈에 철심을 박아 이어 붙이고 피부를 누덕누덕 기웠기 때문에.

“어휴, 꿈에 나올까 봐 무섭다.”

신해범이 너스레를 떨었다.

“살았을 땐 미남이기라도 했지, 얼굴 절반 뭉개진 좀비가 네 후장 따먹겠다고 달려들면 어떡할래?”

“…….”

“꼬꼬야. 사람들 기다려.”

인간의 몸은 사망하는 순간부터 부패가 진행된다. 그사이에 이식 수술이 결정된 장기를 꺼내 간절한 누군가의 수술실로 보낸다. 종교 단체를 섭외한 건 보여 주기식 절차가 아니었다. 이건 장기 매매가 아니라 합법적인 장기 기증이었다.

신해범은 그 과정을 여러 번 보았다. 지금껏 숱하게 많은 무연고 사형수가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그래도 하신성은 사형수들보다 형편이 괜찮았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최후를 맞으니까.

그것이 신해범이 하신성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였다.

우린 옛날부터 별로 안 친했지.

어린 시절, 라이벌 관계였던 신해범과 하신성의 사이를 중재한 건 진치우였다. 그러나 하신성은 진치우마저 배신했다. 그날 이후 진치우는 하신성을 완전히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백사자>의 이름이 알려지고 하신성이 반정부 단체의 얼굴마담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도 그런 이름은 난생처음 듣는다는 듯 행동했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진치우의 기억에서, 이미 어린 시절 친구였던 하신성은 사라졌다. 그는 그저 <백사자>의 간부일 뿐이었다.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었다.

신해범은 어둠 속에서 미소 지었다. 전부 하신성이 자초한 결과였다. 아버지의 결정이었다는 변명은 안 먹힌다. 하신성은 어떻게든 비정한 아버지의 마음을 돌렸어야 했다.

괴물의 탄생보다는 삼자 합동 자살이 나았다.

신해범은 바들바들 떠는 류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쟤 좋은 일 하는 거야.”

“…….”

“맞잖아. 장기 기증이 얼마나 대단하고 숭고한 일인데.”

류진은 그 말에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사촌 동생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생각해 보면.

박진아와 정성현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 선천성 심장 기형으로 태어났다는 그 아기가 딸인지, 아들인지 물어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신해범은 류진의 등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하신성이 죽어 주는 덕분에 몇 명이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

류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신해범은 류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키득거렸다.

삶과 기록은 산 자의 것이었다. 신해범은 정류진의 머릿속에서 하신성에 대한 기억을 몰아내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 있었다. 이미 다음 먹잇감을 끌고 오는 중이었다. 자기가 제단에 올라가는지도 모르고 희희낙락 웃고 있을 권세혁이 눈에 선했다.

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갔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었다. 권세혁의 마음은 이미 광성의 종합 병원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류진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휴대폰을 머리맡에 두고 누운 채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기는 싫었다. 권세혁은 현관으로 돌진했다.

“어디 가니?”

“…….”

“너 지금 어디 가냐고. 이런 시간에. 비까지 오는데.”

슬립 원피스 위에 카디건을 입은 장승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권세혁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잠깐 요 앞에. 편의점.”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차량이 없으면 드나들기 힘든 동네 주민들은 식자재를 비롯한 각종 생필품을 대량 주문하는 생활 습관이 몸에 익었다.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에 창고가 있었고, 일하는 고용인들조차 필요한 게 생기면 ‘지하에 다녀온다’고 말하지 뭔가를 사러 나간다고 하지 않았다. 하물며 편의점이라니.

권세혁은 고등학교 친구들과 편의점에 가 본 적도 드물었다. 학교 매점에서 훨씬 좋은 걸, 더 싼 값에 파니까.

“장난해?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장승희의 시선이 거실의 커다란 괘종시계로 향했다.

“지금 몇 시인지 몰라? 세 시간 후에 임 비서 들이닥칠 텐데 어딜 간다고?”

“…….”

“담배 사러 가니?”

“아, 엄마!”

“소리 지르지 마.”

장승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이 시간에 집을 나가? 지갑에 차 키까지 챙겨서?”

“…….”

“요새 누구 만나니?”

권세혁이 발끈했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갑자기!”

넓은 집 안에 고성이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계단으로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권세혁은 속으로 한탄했다. 어린애가 잠귀는 또 왜 그렇게 밝은지 모르겠다. 예민해서 그런가.

“아, 진짜….”

권세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는 어머니가 어떻게 감을 잡았는지 몰랐다. 누구지? 임찬영? 디자인 팀의 누군가? 아니면 그냥 직감?

모르겠다.

류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권세혁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손가락 사이로 지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그런 거 아냐. 신경 꺼.”

“넌 정신머리가 있는 애니, 없는 애니? 지금이 어느 땐데.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긴데! 숙부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거 빤히 알면서 밖으로 돌아?”

“…….”

“누구야. 방송하면서 만났니? 연예인? 아나운서?”

“그런 거 아니라고!”

“얘가!”

거실 샹들리에 불빛이 켜졌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권세혁은 눈을 감아 버렸다. 장승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현관으로 달려간 장승희는 권세혁을 밀치고, 비상 보안 장치를 작동시켜 문을 잠가 버렸다. 집 안의 모든 창문에도 셔터가 내려졌다.

권세혁은 입을 떡 벌렸다. 외부에서의 총격이나 테러를 대비한 시스템을 이렇게 악용할 줄이야.

“엄마!”

“너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임 비서랑 사람들 오기 전까지.”

“좀…! 나한테 왜 그래, 진짜! 여기가 무슨 감옥도 아니고! 내가 뭔 죄를 지었어?”

“죄가 없지는 않지.”

권세혁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재깍재깍 흘렀다. 류진이 힘들어하고 있는데, 자기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내버려 두니까 엉뚱한 데 눈을 팔잖아!”

장승희가 손을 척, 내밀었다.

“너 휴대폰 줘.”

“뭐?”

“어차피 풍기대 가면 필요 없을 거야. 내놔.”

“무슨 그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 공익 시킨 거 엄마잖아!”

“네가 그냥 공익이니? 너 거기서 은둔하는 거야. 숙부님이 일 마무리하고 조용해질 때까지. 그 배구부 애들, 파 보니까 꺼림칙한 게 한두 개가 아니더라. 너 대체 걔들이랑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권세혁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눈을 내리깐 채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권세혁!”

절대로 뺏길 수 없었다. 어머니가 류진의 존재를 알게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한 시간, 아니 삼십 분이면 류진에 대한 모든 정보가 어머니 앞에 낱낱이 까발려질 터였다. 류연비의 동생이라는 사실부터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출신 성분은 어떤지. 권세혁은 어머니가 류진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면 모를까.

“너 걔들이랑 마약만 한 거 아니지.”

“…….”

“박변한테 다 들었으니까 발뺌할 생각 마. 니들 전적이 아주 화려하던데. 폭주에 절도, 학교 폭력까지.”

장승희는 머리끝까지 화나 있었다. 권세혁은 팔짱을 끼는 어머니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권세혁. 너 대체 학교 다니면서 무슨 짓을 한 거야? 학폭위도 열렸었다며? 어쩜 나한텐 감쪽같이 속였니? 너 설마 애들 때리고, 괴롭히고 다녔어? 어떻게!”

권세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냐. 억측하지 마.”

“권세혁. 너 내가 계좌 내역 다 까 봐야 정신 차릴래?”

“난 그런 일이랑 관련 없어. 진짜야. 아버지 이름 걸고 맹세하는데 나, 사람 다치게 한 적 없어. 학폭위 소환된 것도 나 아니야.”

“근데 왜 박변이 그런 소리를 해. 네 이름이 왜 그런 데서 튀어나와!”

“아, 원래 친구끼리는 그런 거 커버 치고 하는 거야!”

“뭐라고?”

“그럼 친구가 감옥 간다는데 가만있어? 합의금 그거, 까짓 몇 푼이나 한다고.”

장승희의 얼굴이 벌게졌다.

“너 미쳤니?!”

“뭐가?!”

“학교 폭력 저지른 애를 도와주려고 돈을 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너 제정신이야? 미치겠다. 진짜 내가 너 때문에 아주 돌아 버리겠다, 정말!”

“알았어. 안 나갈게! 안 나갈 테니까 그만해!”

장승희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차 키랑 휴대폰 내놔.”

“싫어.”

“내일 돌려줄 테니까, 지금은 엄마한테 주고 네 방으로 올라가서 자. 아니면 지금 당장 네 친구인지 버러진지 하는 애들 리스트 뽑을 거야.”

권세혁은 손에 힘을 줬다. 휴대폰을 순순히 내놓느니 변기에 처넣고 말겠다. 그는 결의에 차서 대꾸했다.

“휴대폰은 안 돼. 사생활이야.”

“참 나.”

“사생활이야! 내가 엄마 휴대폰 보는 거 싫잖아. 그거랑 똑같다고!”

실랑이는 끝내 차 키만 내놓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고작 하룻밤일 뿐이지만, 권세혁은 허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패잔병처럼 걸었다.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장승희의 한탄 섞인 목소리가 따라왔다.

“박변도 사람 참. 어떻게 애 말만 듣고 일을 해결해 줘. 나한텐 여태 입 벙긋 안 하고.”

“내가 엄마 허락받았다고 했으니까!”

“조용히 해, 권세혁!”

“엄마나 조용히 해!”

권세혁은 울고 싶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뿐인데. 왜 다 지나간 옛날 일까지 끄집어내서 사람을 물어뜯느냐고.

복도에 나와 있는 동생이 보였다. 권세혁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세게 걷어차자 벽이 흔들렸다. 일 층에서 장승희가 소리 질렀다. 집 무너지겠다!

알 바 아니었다. 이런 감옥 같은 집이라면, 차라리 무너져 버리는 게 나았다.

신해범은 24시간 영업하는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류진은 레인지로버 조수석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서둘러 호월루로 돌아가 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신해범은 부득불 뭔가를 먹어야 한다며 사람을 귀찮게 했다. 이 시간에 문을 여는 가게는 패스트푸드점이 고작인 걸 알면서.

운전석으로 돌아온 신해범이 봉투를 건넸다. 검은 슈트의 어깨 부분이 젖었다.

“자.”

“안 먹어.”

“배 안 고파?”

“당신은 음식이 넘어가?”

“응.”

신해범은 부리토 포장을 벗겨 한입 물었다. 차 안에 기름진 음식 냄새가 퍼졌다.

“밤새워서 피곤한데 이거라도 처먹어야지. 그래야 버티지.”

이미 신해범의 삶에서 하신성의 존재는 사라진 듯했다. 류진은 할 말이 없었다. 저게 도대체 사람인가, 싶었다. 지금 신해범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죄책감, 슬픔, 이런 것들.

“왜?”

“믿을 수가 없어….”

신해범이 비웃었다.

“청승 떨지 말고 처먹어. 먹어야 살지. 먹는 게 남는 거야.”

“안 먹어. 속이 안 좋아.”

“셋 셀 테니까 아무거나 하나 집어라. 말 안 들으면 뒷좌석으로 간다.”

신해범의 협박에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지하실로 간다. 권주혁에게 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차 뒷좌석이었다.

류진은 허겁지겁 봉투에 손을 넣었다. 감자튀김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저 같은 것만 골라요.”

“…….”

류진은 묵묵히 감자튀김을 먹었다. 먹자마자 토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배가 고팠다. 그렇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어떻게….

류진은 하신성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울기는커녕 허기를 느끼는 자신을 혐오했다.

“컥!”

목이 메었다. 신해범이 혀를 차며 음료를 꺼내 주었다. 컵 표면에 물방울이 송송 맺힌 콜라였다. 탄산의 강렬한 충격이 부어 있는 목구멍을 강타했다.

“푸헉!”

“야 이! 가지가지 한다, 진짜!”

“물, 물…!”

신해범은 당장 류진을 내쫓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차 문을 열고 류진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대신 500ml 생수 뚜껑을 열어서 내밀었다. 휴대용 물티슈도 건넸다.

“네가 흘린 거 닦아.”

“아, 알았어.”

“혀로 싹싹 핥게 만들고 싶은데 참는다.”

류진이 입을 삐죽이는 찰나였다. 신해범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류진은 물티슈를 뽑아 몸을 숙였다. 바닥에 쏟은 감자 파편을 줍기 위해서였다. 웅크린 류진의 등 위에서 신해범이 말했다.

“왕자님?”

류진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조수석 서랍에 머리를 찧었지만 아프지도 않았다. 놀란 마음이 앞서서.

“무슨 일이십니까. 이렇게 전화를 다 주시고.”

신해범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졌다. 류진은 신해범의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를 보았다. 오늘따라 뾰족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야 언제든지 준비된 사람 아닙니까. 아뇨, 아뇨.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같았다. 지킬 앤 하이드. 표정과 목소리, 말투까지 필요에 따라 백팔십도 바뀌는.

신해범은 연신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류진은 귀를 쫑긋 세웠으나 대화 내용을 엿듣지는 못했다. 창밖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서.

“예. 알겠습니다. 제가 찾아보지요. 아뇨,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신 사장에게 전화 넣겠습니다. 예, 믿어 주십시오.”

“…….”

“물론입니다. 외부에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 마시고, 모쪼록 푹 주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신해범은 이런 말까지 덧붙였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절대.”

통화가 끝났다. 신해범은 쯧, 혀를 차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뭐야? 권세혁이야? 걔가 왜 당신한테 전화해?”

신해범이 웃으며 휴대폰을 흔들었다.

“MVP가 너 찾는다.”

류진은 입을 벌린 채 신해범을 바라보았다. 들고 있던 물티슈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역시 해범이 형. 확실히 의지가 된다.

권세혁은 휴대폰을 든 채 침대로 몸을 던졌다. 신해범의 조각 같은 옆얼굴이 떠올랐다. 새벽 시간에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신해범은 조금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걱정 말라는 당부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다짐까지 완벽했다. 참, 알면 알수록 괜찮은 사람이다. 롤 모델로 삼은 보람이 있어.

류진이 호월루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단서였다. 그렇게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나 호월루의 주인인 신예나는 신해범과 사촌지간이었다. 신해범이라면 지금 류진이 어디 있는지 찾아 줄 수 있었다. 그가 자기 입으로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권세혁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직접 가지 못하는 건 미안했지만, 오히려 류진에게 자신의 지위를 보여 줄 기회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원래 높은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신데렐라를 애타게 찾았던 왕자도 시종을 먼저 보냈다. 왕자가 직접 유리 구두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건 모양새 빠지잖아.

권세혁은 전자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오히려 잘됐다. 신해범 풍기 교육대장 정도라면 류진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털어놓고, 해결할 거 해결하고, 그런 뒤에는….

“아!”

머리에서 전구가 반짝 켜지는 기분이었다. 권세혁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전자 담배를 문 입술이 빙그레 웃었다.

류진이 형, 풍기대에 자리 하나 만들어 주면 되겠다.

***

신예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담배를 빠끔빠끔 피우며, 신해범이 장롱 깊숙이 처박혀 있던 등산 가방을 꺼내 얼마 안 되는 류진의 짐을 차곡차곡 챙겨 담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옷가지와 컨버스 운동화 하나, 보라색 머그 컵. 운전면허 문제집과 연습장은 버리기로 했다. 신해범은 류진이 주섬주섬 꺼내 온 필기구와 세면도구도 어차피 새로 지급될 테니 필요 없다면서 뺐다. 그러더니 빈자리에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 상자를 챙겨 넣었다.

신예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 무식하게 큰 도자기는 안 가져가?”

“그렇게 말하지 좀 마. 머리에 든 거 없어 보이잖아.”

“그러는 댁은. 뭐 얼마나 유식해서 아픈 애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끌고 가신대?”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그럼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지금 이 상황에?”

신예나는 아까부터 말이 없는 류진에게 다가갔다. 마른 어깨에 손을 얹자 흔들리는 눈이 돌아봤다.

“누나한테 전화 해.”

“전 괜찮아요. 누나 바쁘신데….”

“내가 심심해서 그래. 이제 어떡하지, 밤에 외로워서? 그동안 우리 류진이 덕분에 누나 옆구리가 따뜻했는데.”

신해범이 입술을 쭉 내밀고 신예나를 흉내 냈다.

“눼가 심심해서 구래.”

“아, 저 인간!”

“너도 작작 해라. 누가 누구랑 남매인지 모르겠네.”

“바꿀 수 있었으면 벌써 바꿨어. 그치?”

류진의 어깨를 감싸 안은 신예나가 동의를 구했다. 류진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등산 가방을 든 신해범의 살벌한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신예나가 투덜거렸다.

“적당히 좀 해. 오빠 때문에 애가 기를 못 펴잖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예나의 말이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신해범은 신예나에게 안겨 있는 류진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마른 몸이 휘청했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신해범의 뒤에 대고 신예나가 소리쳤다.

“류진아! 누나가 용돈 보내 줄게!”

뒤돌아보는 류진을 끌어당기며 신해범이 말했다.

“속지 마. 너 여기서 일한 임금 정산해 주는 거야. 용돈은 무슨.”

“일 많이도 안 했는데….”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노동은 고귀한 거야.”

등산 가방을 레인지로버 뒷좌석에 던져 넣은 신해범이 물었다.

“근데 너 계좌는 있냐?”

“아니.”

“그럼 뭐, 내가 현금으로 받아다 줘?”

류진이 고개를 흔들더니 대답했다.

“우리 이모한테 전해 줄 수 있어?”

“박진아 씨?”

“응. 아니면 이모부도 괜찮아.”

신해범이 차 문을 쾅 닫았다. 류진이 움찔했다.

“왜?”

“네 머릿속에 있는 거 뇌 아니지? 순대 뭉쳐 놓은 거지?”

“왜 또 지랄인데? 안 되면 안 된다고 하면 되지….”

류진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신의 무엇이 또 신해범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알 수 없었다. 더는 그와 실랑이할 기운도 없었다.

류진은 레인지로버 조수석에 올라탔다. 신해범이 운전석 문을 쾅, 세게 닫으며 심술을 부렸다. 그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지랄병이 멍청한 것보단 나아.”

“…….”

“네가 그런다고 가족한테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대답하지 않았다. 류진은 고개를 숙인 채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신해범이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 저런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했다.

레인지로버는 고가 도로에 들어섰다. 류진은 창밖을 응시했다. 태양이 뜨고 있었다. 밤새 내린 비로 축축한 세상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의 포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잠깐 눈 붙이고 있어.”

“당신은 안 졸려?”

“하룻밤 새우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다가 일찍 죽어.”

신해범의 손가락이 핸들을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우리 꼬꼬가 무럭무럭 커서 싸움닭 되기 전까지는 안 죽어.”

“…….”

“왜 말이 없어? 감동받았냐?”

신해범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류진은 조수석 등받이에 옆얼굴을 묻고 있었다. 마른 가슴이 힘겹게 오르내렸다.

신해범은 입을 다물고 정면을 보았다. 하지만 신경은 오로지 조수석에 쏠려 있었다.

***

남아 있던 엑스터시를 모조리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 정도는 먹어야 긴장하지 않을 것 같았다. 류진에게 구입한 헤로인도 일 회분 남았지만 그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아껴 두기로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약 기운이 돌자 기분이 좋아졌다. 권세혁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얼굴이 조금 까칠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문밖에서 임찬영이 노크했다.

“왕자님. 다 되셨습니까?”

“어, 나가.”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짐은 다 나갔나?”

“예. 혹시 빠뜨리신 거라도?”

“아니,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권세혁은 웃었다. 약을 먹길 잘했다. 긴장해서 말을 더듬거나 질문의 취지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여서 숙부의 얼굴에 먹칠하지는 않을 테니까.

일 층으로 내려갔을 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권세혁은 슬쩍 웃었지만, 장승희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했다. 뒤통수에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권세혁은 뒤돌아봤다. 큐브를 든 동생이 어머니의 뒤로 숨었다.

“잠깐만.”

임찬영이 멈춰 섰다. 권세혁은 어머니의 실크 스커트 자락을 쥐고 있는 동생을 향해서 말했다.

“무혁아.”

아이가 조그만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안겨도 되느냐고 묻는 듯했다.

“응. 괜찮아.”

권무혁의 작은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권세혁은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후회가 밀려왔다. 동생이 보는 앞에서 방문을 걷어차며 화낸 일에 대해.

권세혁은 도도도 달려오는 동생을 품에 꼭 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녀올게.”

“형아, 몇 시에 와?”

권무혁은 아홉 살이었다. 의무 복무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오늘부터 집에는 형이 없다는 사실을.

장승희가 다가왔다. 그는 형에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아이를 떼어 냈다. 그러고는 권세혁에게 눈짓했다. 당부하는 눈빛이었다. 부탁이니 허튼짓하지 마라. 뭐 하라고 안 할 테니까 사고만 치지 마.

권세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기자 회견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권세혁은 불시의 공격적인 질문에도 대비하고 있었지만, 강당으로 들어가기 전 임찬영은 걱정 말라고 했다.

“지난번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까. 이번에도 회색분자 섞여 들어왔을 것 같은데.”

“안심하셔도 됩니다. 풍기 교육대 측에 사상 검증을 철저히 하라고 요청해 두었습니다.”

임찬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권세혁은 그게 사상 검증의 대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회견장의 깔끔하고 편안한 분위기는, 전적으로 신해범 덕분이었다.

그에게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신해범의 뚜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이따금 위트 있는 농담이 터졌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권세혁은 이곳에서 자기가 딱히 할 일이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그저 신해범의 옆에서 그가 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웃기만 하면 된다고.

신해범은 섬세하게 권세혁을 배려했다. 조금이라도 곤란할 것 같은 질문은 칼같이 나서서 자르고, 사진을 찍을 때는 눈이 아프지 않도록 플래시를 가려 주었다. 그러면서 이쪽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사람 찾았습니다.”

권세혁이 활짝 웃었고, 플래시가 요란하게 반짝였다.

“만날 수 있어요?”

“저녁때 왕자님 방으로 보내겠습니다.”

“더 일찍 안 돼요? 점심 같이 먹고 싶은데.”

신해범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이쪽을 봐 달라는 사진 기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권세혁은 몸을 돌렸다.

좀 더 가까이 붙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신해범이 바짝 다가왔다. 두 사람의 어깨가 부딪치고, 향수 냄새가 섞였다. 권세혁은 순간 비틀거렸다. 뭔가가 오금을 때렸다. 아무래도 신해범의 무릎 같았다.

“해범이 형?”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상냥한 목소리로 카메라 쪽으로 손을 흔들어 주라고 조언했다.

“알았어요.”

권세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해범이 형이 실수한 걸 모르는구나.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웃어 주십시오. 왕자님.”

권세혁은 신해범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신해범에게는 고마운 게 많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이유를 묻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것. 그게 권세혁이 생각하는 신해범의 최고 장점이었다.

신해범과 권세혁은 모든 게 달랐다. 나이도, 출신 성분도, 성장 과정도. 그로 인해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상극이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은 어느 부분 하나 겹치지 않았다.

오늘 기자 회견이 이토록 주목받은 이유는 권세혁이 다른 왕족, 귀족들과 다른 행보를 걸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고른 풍기 교육대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특수한 집단이어서도 아니었다. 유미현 수석 전략가의 움직임이 미미한 지금, 정계에서는 권주혁 총통 보좌관이 신임하는 신해범과 그가 지지하는 총통 후보 권세혁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 둘의 교차점이 발생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권주혁에게 발탁된 이후 거칠 것 없이 치솟은 신해범의 가파른 상승 곡선이 권세혁의 천상계 평행선을 꿰뚫었다.

그러나 이곳의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상승 곡선과 평행선을 아우르는 거대한 포물선이 지금 이 자리에, 기자들의 카메라 프레임 바깥에 있었다. 기우희는 상승 곡선의 화려한 궤적에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낼 때를 기다렸다.

엄승원은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다. 카운터에 놓여 있던 초콜릿 칩 쿠키도 두어 개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포장을 뜯어 우걱우걱 씹어 먹는데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는 입술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등으로 훔치며 씩 웃었다. 아르바이트생이 황급히 눈을 피했다. 엄승원은 맞은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아차, 했다.

신장 183센티미터에 몸무게는 세 자릿수가 넘어가는 거구였다. 며칠째 잠을 설쳐 푸석한 피부, 눈 밑의 그림자와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이 영락없는 산적이었다. 목이 늘어나 후줄근한 티셔츠는 또 어떻고. 엄승원은 한숨을 푹 쉬었다.

권세혁 왕자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로 얻은 별명이 멧돼지였다. 잔인한 추종자들은 훤칠하게 잘생긴 젊은 왕자와 풍파에 찌든 사십 대 아저씨를 나란히 붙여 놓은 사진으로 복수했다. 좀 더 적극적인 이들은 본사로 항의 메일을 보냈다. 전화도 걸려 왔다.

엄승원의 이름이 붙은 기사에는 영락없이 악플이 쏟아졌고, 메일함은 협박장과 결투장으로 꽉 찼다. 엄승원은 권세혁을 대본밖에 읽을 줄 모르는 애송이로 생각한 걸 뼈에 사무치게 후회했다. 영 앤 핸섬 프린스가 거느린 팬클럽의 힘을 간과하는 게 아니었다.

엄승원은 트레이를 들고 그늘진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맨살이 익어 버릴 듯 무더운 한여름이었다. 에어컨 근처의 명당자리는 이미 한 무리의 회사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테이블 세 개를 붙여 놓고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도마 위에서 난도질당하는 생선은 최근 급등한 주가로 조작 의혹이 불거진 바이오 기업체다.

엄승원은 볼펜을 굴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대표가 구속된 상황에서 주가 복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식약국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아,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엄승원은 노트북을 열었다. 작업하던 파일이 그대로 떠 있었다. 금일 풍기 교육대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 대한 글이었다. 기사라기보다는 칼럼에 가까웠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속보는 다 나갔다. 최전방에서 제외된 2군 기자의 역할은 자극적인 타이틀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게 아니었다.

엄승원은 얼음 하나를 깨물어 먹으며 손을 움직였다.

7월 5일. 금요일이다. 황룡을 심벌로 하는 권씨 왕가는 예로부터 금(金) 자가 들어가는 날을 길일로 친다. 권세혁 왕자는 신계동 자택에서 오전 열 시에 출발해 이십여 분이 지난 시각 풍기 교육대 본관에 도착했다. 입소식은 2층 강당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기자 회견은 점심때를 한참 지난 오후 두 시에 입소식이 있었던 강당에서 열렸다. 풍기 교육대장 신해범, 부대장 진치우, 제1 부장 기우희를 비롯한 풍기 교육대 주요 간부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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