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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47화 (147/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47화

“어? 단솔 씨, 벌써 식사 다 하셨…….”

“네, 천천히 식사들 하고 오세요.”

오후 촬영이라 일정도 없는 단솔이 쌩하니 식당을 나가 버리는 바람에 관찰 카메라는 갈 곳을 잃은 채 문 앞에서 왔다 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 씨…… 어쩌죠. 그냥 주단솔 밥 먹는 거나 찍어서 가려고 했는데. 다이어트 중인가…….”

“……일단 밥 먹고 한지수라도 따라붙지 뭐…….”

“한지수는 좀 무서운데요, 선배님…….”

“얌마! 우리 프로야 프로! 어? 무서운 게 어디 있어!?”

그사이, 단솔은 한적한 동네를 돌고 또 돌고 있었다. 입이 싼 스태프의 말이 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머릿속에는 지수와 민영의 모습이 그려졌다.

단솔은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습관처럼 주변을 휙휙 둘러보곤 포털 사이트에 김민영을 검색했다.

“나이는 내가 훨씬 어리고, 헉…… 뭐야 결혼했네. 애기도 있잖아? 애기 엄청 귀엽다…….”

단솔은 어느새 SNS를 타고 타고 흘러가 민영의 어젯밤 야식 메뉴가 뭐였는지까지 줄줄 꿰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식을 저렇게 먹고도 저 몸매를 유지하다니. 신은 참 불공평해.”

지수가 저를 두고 옛 연인에게 눈길을 줄 사람도, 더군다나 유부녀와 염문에 빠질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알면서도 이렇게 기분 상해 하다니. 지수가 알면 저를 보고 귀엽다며 웃거나 그 스태프가 누구냐며 길길이 날뛸지도 몰랐다.

“유치해.”

사랑이란 감정은 항상 단솔을 유치하게 만들었다. 치열한 생존과 당장의 생계에 지쳐 있던 단솔에게 어디서 이런 유치하고 어린 마음이 있었을까.

지수와 연애를 하면서 단솔은 스스로가 오히려 점점 어려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건가.”

화가 나는 한편, 이 정도의 여유도 없이 숨 막히게 살았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삶은 퍽 사람 사는 꼴, 아니 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다.

모두가 지수 덕분이었다. 그러니 옛 연인과 조금 반갑게 앉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번은 봐주자. 주단솔.

그렇게 단솔은 어른스럽게 마음의 정리를 마친 뒤 촬영장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문제는 촬영이 모두 끝난 뒤 민영이 연 회식 자리에서 생겨났다.

단솔은 그날 오후에 혼자서만 촬영을 하느라 뒤늦게야 회식 자리에 합류했는데 이미 지수나 민영이 불판에 달궈진 건지, 소주에 얼큰하게 취한 건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또 누가 보면 오해를 할 정도로 딱 붙어 앉아 있었다.

단솔이 큰마음을 먹고 한 번 봐준 게 무색했다.

평소라면 지수가 먼저 단솔을 챙겼겠지만, 늦게 들어온 단솔은 멀찍이 문 근처에 앉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이리저리 치이고 있는데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먼저 단솔이 온 것을 알아차린 것은 민영이었다.

“어? 단솔 씨 왔네? 아이구 반가워요, 내가 맨날 티브이에서만 보다가 이런 데서 다 보네요.”

“네, 선배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주단솔입니다.”

“잠깐 자리 좀 비켜 줘. 단솔 씨랑 술 한잔해야지.”

그녀의 말에 민영의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던 자리가 하나둘 비워지고 단솔이 앉을 자리가 생겨났다.

“어…… 솔아 언제 왔어?”

지금 내가 언제 온지도 모르는 건가 설마.

단솔은 불쑥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둘이 무슨 얘기를 저렇게 나눴길래 저러지. 입술이 삐쭉삐쭉 튀어 나가려는 걸 참고 애써 웃어 보였다.

불과 10분 전,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길 나눴는지 알면 단솔은 아마 지수와 민영을 크게 비웃었을 것이다.

* * *

“아, 우리 솔이는 그런 거 안 한다니까. 유치한 질투 작전? 우리는 이미 그런 우여곡절을 다 넘어온 지 오래예요.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데. 우리는 서바이벌을 넘어서 만났어, 누나. 알긴 아나? 서바이벌?”

“허, 질투는 인간이 가진 아주 원초적인 감각이야 그게 없으면 죽은 거라고. 나랑 내기할까? 꼬맹이가 반응을 하나 안 하나?”

“뭔…… 사람 갖고 내기를…….”

“너 결혼하고 싶다며. 확인 한번 해 보고 싶지 않아? 네가 꼬맹이한테 절절 끓는 사랑인지 그냥 적당히 좋은 연애 상대인지?”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쉽게 정의 내려지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지수는 간혹 의구심이 들 때가 있었다.

“단솔 씨는 꼭 인생 2회차 같애. 어린 친구답지 않게 성숙해, 진중하고.”

워낙 고생을 많이 했고, 타고난 성격이 지수 쪽이 다혈질에 급하기 때문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을 다 감안하더라도 언제나 단솔은 덤덤했고, 안달 내는 쪽은 지수였다.

* * *

“저를…… 자주 보셨나 봐요?”

민영이 술을 따르며 하는 이야기에 단솔이 이번엔 민영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역시나 만만하지 않은 상대네. 민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뭐, 늘 티브이에서 단솔 씨 자주 보니까. 팬이에요, 우리 신랑이. 그리고 우리 지수한테도 이야기 많이 듣고. 얘가 나한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워낙 자주 하니까.”

민영의 은근히 기분 나쁜 화법에 단솔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갔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지수를 사이에 두고 경쟁심을 자극하는 사람이었다.

“전 지수 형한테 선배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요. 이렇게 재밌으신 분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좀 모실 걸 그랬어요.”

그때, 자연스레 소주잔에 입을 대려는 민영의 의자 등받이에 어깨동무를 하듯 손을 올린 지수가 민영을 제지했다.

“누나, 술.”

“응?”

“술 마시지 마. 나 줘.”

“아, 맞다. 그래, 너 마셔.”

지금 저것들이 뭐 하는 짓이람. 이제 단솔의 표정은 누가 봐도 기분 나쁜 티가 날 만큼 굳어 있었다.

민영이 받아 마셔야 할 술을 대신 마시느라 평소보다 두 배 빠르게 술을 마신 지수라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누나, 우리 솔이 진짜 화난 것 같은데……?”

“어…… 그래 너희 솔이 진짜 화난 것 같다.”

문제는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화가 났는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민영은 실시간으로 바뀌는 단솔의 표정과 눈치 없이 축축 처지는 지수의 몸뚱어리가 재밌기만 했다.

‘허, 이제 귓속말까지……?’

“어쩌죠, 더 앉아 있고 싶은데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죄송하지만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래요? 너무 아쉽다. 내가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아이돌이랑 술 한잔해 보겠어.”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형. 나 가요?”

단솔이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마치 따라 나오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지만, 민영이 그런 지수의 허벅지를 꽉 잡아 눌렀다.

단솔의 시선이 잠깐 그 손에 머무르더니 이내 허공을 향했다.

“어? 솔아, 어디 아파? 몸이 안 좋아? 어디가 안 좋은데?”

포인트를 한참이나 잘못 잡은 지수가 민영의 손을 뿌리치는 사이, 단솔은 쌩하니 가게를 나가 버렸다.

“아니, 누나 잠깐만 놔 봐. 솔이 아프다잖아.”

“너를 보니까 내 마음이 아프다.”

“아, 뭐래 이것 좀 놔요.”

“잠깐, 가기 전에 정산은 하고 가야지.”

“어?”

“아까 했잖아, 내기. 오늘 술값은 네가 계산해. 네 애인 지금 질투 나서 개빡쳤으니까.”

단솔이 질투를 한다고? 원래도 회식 자리나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단솔이었다. 단순히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나간 게 아니라고?

취기가 오른 지수의 얼굴에 스멀스멀 미소가 올라왔다. 생각만 해도 귀여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런 맛에 유치한 사랑놀음을 하나.

지수는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에서 아무 카드나 꺼내 민영에게 건넸다.

“쓰고 반납이나 잘해요.”

“와! 여러분 오늘 밤은 한지수가 쏜답니다!”

한지수! 한지수! 아, 예예 맛있게 드세요. 민영의 외침에 붙잡는 스태프들을 뿌리치고 겨우 나온 지수에게 낡은 술집의 주인이 장우산 하나를 건넸다.

“들고 가세요.”

“네?”

“오늘 비 온대요.”

“아…… 감사합니다. 쓰고 갖다드릴게요.”

* * *

가게를 나온 단솔은 숙소를 향해 걷다가 발길을 돌렸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장난기 가득한 민영의 도발이 분명했다. 둘이서 키득거리며 자신을 놀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역시나 어리긴 어리다며. 어린 애들이랑 사귀면 이런 재미가 있다며 단솔을 술안주 삼고 있을지도 모르지.

분명 스물여섯 살까지 살고 돌아와 놓고, 왜 이리 영락없는 애처럼 구는 걸까. 인생을 다시 살아도 매일, 매 순간 어려운 것투성이였다.

단솔은 문이 닫힌 동네 구멍가게의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았다. 맑았던 저녁 하늘에 어느새 먹구름이 끼더니 후드득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멍하니 앉아 있느라 소나기가 내리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비가 오네.”

숙소로 돌아갈 때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솔은 그저 이 순간 빗소리를 듣는 데에 집중했다.

단솔이 눈을 감고 손을 뻗어 손바닥에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참이나 느끼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손바닥에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해, 솔아.”

단솔은 그제야, 왜 자신이 비 맞을 걱정 따윈 하지 않았는지를 떠올렸다.

언제나 전화 한 통이면 데리러 나올 사람이 있었다.

이 비를 뚫고, 제가 어디에 있든지.

“술…… 더 마시지 않구요.”

“먹을 만큼 먹었어.”

“형, 유부녀한테 관심 있어요?”

“미쳤어?”

“……스태프들이 그러던데?”

“누구야, 그 새끼. 입을 찢어 버리게.”

“크큭…… 근데 김민영 선배랑 사귀었어요?”

“…….”

“어? 이건 진짜인가 보네.”

지수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자 단솔이 빗속으로 나가려고 했다. 다급하게 지수가 단솔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진짜 잠깐. 한 달? 아니 일주일인가?”

“갭이 너무 큰데요? 기각.”

“정확히 말하면 한 달인데 진짜 만난 건 일주일도 안 돼. 아무 일도 없었고, 손도 안 잡았어. 밥만 몇 번 먹었어.”

“음…… 인정. 형 있잖아요.”

“응.”

“우리 결혼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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