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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46화 (146/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46화

    ‘아니, 난 우리 집이 좋아.’

    다음 날 아침, 홀로 이른 촬영이 잡힌 지수는 촬영장에서 대기를 하며, 어젯밤 단솔의 말을 곱씹었다.

    “일단, 호텔은 제외. 외국에 어디 섬 같은 데를 빌려야 하나…….”

    “뭘 그렇게 중얼거려 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니? 대본 좀 미리미리 보고 오라니까.”

    “누나, 내가 그 버릇 고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소리야? 요즘 내 생활 보면 깜짝 놀랄걸? 바른 생활 사나이라 다시 반할지도 몰라.”

    지수는 장난스레 민영에게 윙크를 했다.

    민영은 극 중 형사로 나오는 지수의 옛 연인인 검사 역할이었다. 짧게 등장하고 마는 역할이라 출연료도 거의 받지 않고 친분으로 나와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은 지난날 잠시 잠깐 스친 인연이 있었다. 물론 그게 다였다. 남아 있는 미련 따위는 없었다.

    “아서라, 나 애가 둘이다.”

    “왜 애가 둘이야? 하나 아니야?”

    의자에 앉은 민영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활동을 쉬고 있느라 살짝 배가 나온 줄만 알았는데, 그사이 또 둘째를 임신했다니.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네, 진짜.”

    “근데, 너희 꼬맹이랑 귀찮은 똥파리들은 다 어쩌고 너만 딸랑 왔어, 오늘은?”

    “꼬맹이는 자고, 귀찮은 똥파리는 나 따라오기는 무섭대.”

    명색이 관찰 카메라인데, 예능 제작진들은 일찍이 숙소를 나서는 지수를 마주쳤음에도 지수를 따라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늘은 안 따라옵니까?’ 하고 대놓고 묻는 지수에 담당 PD가 바들바들 떨면서 말했다.

    “다…… 단솔 씨 팔로잉하려구요, 단솔 씨는 밥 먹는 것만…… 봐도 재밌대요 사람들이…….”

    그건 나도 그런데.

    왠지 설득이 된 지수는 오후 촬영이니까 괜히 애 일찍 깨우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촬영장에 오고 나서야 촬영 팀이 자신을 왜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깨달았다.

    어제 촬영을 이어서 하느라 피 칠갑을 한 야차 같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자신도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거울을 보곤 깜짝 놀랐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애들이 널 왜 무서워할까. 내가 너 처음 봤을 때 좆만이였어서 그런지 지금 봐도 왠지…… 돈 많이 번 좆만이 같달까.”

    “아, 누나. 좆만이가 뭐야.”

    “그럼 뭐라 그래.”

    “거…… 태교에 안 좋아…….”

    “크큭…… 네가 그런 것도 신경 쓰니?”

    “그나저나…… 그…… 결혼은 어떻게 한 거야……? 어? 비법 좀 알려 줘 봐요.”

    “너 결혼하게? 꼬맹이 너무 어리던데?”

    “아니……! 누가 지금 한대요? 좀 사귀다가…… 어? 나중에라도 하는 거지…… 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거지.”

    “와…… 수상하고 음흉한 새끼. 이거 알려 줘도 되나 모르겠네.”

    위기는 기회지.

    민영은 마치 대단한 비법이라도 말해 주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 싸운 적 있어?”

    “이, 있기야 있죠.”

    지수는 박필구의 내용 증명 때문에 두 사람이 다툰 날을 기억해 냈다. 그걸 보고 뛰쳐나간 단솔이 유두현에게 쫓기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물론 박필구가 그런 결과까지 생각하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겠지만, 지수는 단솔이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박필구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그를 몰락시켜 버렸다.

    다이노소울의 이름을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뉴스에 나오는 싸움 말고, 진짜 연인들끼리 싸우는 거 말이야.”

    “그런 건 잘 모르지…….”

    생각해 보니 평범한 연인들 간의 싸움은 잘 모르긴 했다. 워낙 주변에서 괴롭히는 인사들이 많다 보니, 지수는 제 편인 단솔의 말이라면 껌뻑 죽기 바빴고, 단솔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고 할 기세였다.

    “우리는 대판 싸웠어. 완전 크게. 근데 막 싸우는데 비가 막 내리는 거야 씨발!”

    민영이 갑자기 화가 나는 듯 의자 손잡이를 내려쳤다. 갑자기 화를 내는 바람에 지수가 움찔하면서 튀어 올랐다.

    “아 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아니, 진짜 그랬다니까. 아직도 생각하면 열 받아. 무슨 파티를 갔는데, 신발도 엄청 높은 거 신었어. 내 남편이 다른 여편네랑 시시덕거리다가 걸려 가지고 나는 막 뛰어나가고, 길에서 백으로 때리고, 소리 지르고, 뿌리치고 이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쏴아.”

    “그게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야?”

    민영의 말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지수는 어느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한참을 민영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였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앉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때 우리 남편이 막 지랄, 지랄하면서 날 업는 거 있지. 크큭, 비 온다고. 신발은 높지, 드레스는 걸리적거리지, 얼른 비를 피해야 하는데 뛰질 못하니까. 그때 결심했어. 이 남자랑 결혼해야겠다. 그래서 내가 어디 처마 밑에 들어가자마자 말했는데, 결혼하자고. 그랬더니 우리 남편이 대답을 어떻게 했게?”

    “어…… 어떻게 했는데?”

    “존나 키스했지. 무슨 대답을 해. 그게 우리 부부 프러포즈.”

    “아, 뭐야 시발. 별거 없네.”

    지수가 질린다는 표정을 짓자, 민영이 아직 티도 안 나는 배를 문질렀다.

    “와, 뭐래 욕하지 말라더니. 얘 까꿍아, 너 들었지? 이 삼촌이 엄마 아빠 러브 스토리 듣고 욕한 거? 부모의 원수는 두고두고 갚는 거야, 나중에 나오고 나면, 이 삼촌 찾아가서 꼭 원수 갚아 줘야 한다? 응?”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김민영 선배님 촬영 나오신다더니 그날인가 보네요.”

    단솔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전지적 주변인 시점의 카메라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각도로 찍어도 민영과 지수가 너무 다정하게 붙어 있는 바람에 지금 자신이 찍고 있는 게 예능 카메라인지, 잠복 취재 중인 연예부 기자 카메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황급히 단솔에게로 카메라를 돌려 보았지만, 영혼이 가출한 단솔의 표정은 오히려 사태의 심각성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두 분이서 긴밀히 대화 중이시니 인사는 이따가 드리도록 하고, 저는 점심을 먹으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단솔도 꽤 당황했는지,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같은 발에 같은 손이 올라가는 고장 난 양철 로봇 같은 걸음이었다.

    “저…… 단솔 씨, 카메라 배터리가 다 돼서요. 잠깐 껐다가 가겠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식당에서 뵐게요…….”

    “네, 뒤따라가겠습니다.”

    설마 주단솔처럼 귀여운 애인을 두고 유부녀인 김민영과 한지수가 바람이 난 거냐 아니냐로 전지적 주변인 시점 스태프들이 갑론을박을 벌이는 사이, 단솔은 착실히 식당에 도착해 복날 메뉴인 삼계탕을 받아 들었다.

    자신이 먹는 게 닭다리인지 닭날개인지도 모르고 씹고 있을 때, 뒤에서 경력이 오래된 스태프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김민영이 나이 먹어도 여전하더라, 한지수랑 오랜만에 붙여 놓으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말이야. 걔네 진짜 잘 어울렸는데. 나는 옛날에 걔네 결혼할 줄 알았어.”

    까득, 단솔의 입에서 물렁뼈가 씹히는 소리가 났다. 그때, 눈치 없는 막내 스태프가 부추기는 말을 뱉었다.

    “헐, 한지수랑 김민영 둘이 사귀었어요 옛날에?”

    “그래에, 걔네 붙어먹었던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애들 없는데. 너 몰랐구나?”

    단솔은 일부러 깊게 눌러썼던 모자를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써 줄 서서 받아 온 삼계탕은 딱 한 입밖에 못 먹은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단솔이 빙그르르 돌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이제 연예계 연차가 꽤 쌓인 단솔은 이런 류의 소문이 어떤 방식으로 도는지 잘 알았다.

    밥 한 끼를 먹으면 연애를 했다는 소문이 돌고, 썸을 타면 잠자리까지 할 거 다 했다는 소문이 도는 곳이었다.

    개인적인 연락처는커녕, 사석에서 만나도 제대로 말 한번 못 붙여 본 인간들이 뭐라도 되는 양 잘 아는 사람처럼 내가 다 아는데 하면서 떠든다는 걸.

    “어…… 어…… 단솔 씨도 식사하러 왔나 봐. 아, 역시 단솔 씨가 소탈해……. 스태프들이랑 원래 같은 식당…… 잘 안 쓰는데…… 배우들은…….”

    “그러게요. 아시잖아요. 제가 좀…… 없이 자라서.”

    저런 사람들 습성을 아는데, 잘 알면서 또 그런 말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지수에게 화를 내고 싶은 자신이 원망스러워 단솔은 날이 선 말이 자꾸 튀어 나가려고 했다.

    “그럼 식사 맛있게들……하세요.”

    * * *

    한편, 이런 상황을 모르는 지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아, 누나. 다른 거 없어요? 우리는 안 싸운다니까. 누나도 알잖아 우리는 거친 어떤 파도를 헤쳐 나온 전우애! 어? 전우애가 있어요. 그런 자잘, 자잘한 싸움은 애들이나 하는 거지. 누나도 봐서 알겠지만, 우리 단솔이가 생긴 것만 애기같이 귀엽고 예쁘지 속은 또 얼마나 성숙하고 현명한데. 그런 걸로 질투? 크큭, 그런 거 안 해. 애초에 싸움거리가 안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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