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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38화 (138/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38화

“그래서 그냥 모른다고 했는데, 영 찜찜해서요. 정말 연락 온 거 없어요? 모르는 번호로.”

“아뇨…… 딱히 그런 건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사실, 이런 상황에 두현 선배랑 엮이면 좀 그렇잖아요, 솔직히.”

태오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하는 말에 단솔은 어색하게 입꼬리만 당겼다.

태오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만, 과거의 저 역시 누군가에게는 기피 대상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태오에게 인사를 한 뒤 단솔은 지수의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

“누구 찾아요?”

“아! 깜짝이야.”

지수의 얼굴을 보니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땡땡이쳤어? 어디 갔다 와?”

“여기 태오 씨가 있더라구요. 우연히 마주쳐서 안부 인사 좀 했어요.”

“이거 안 되겠네, 잠깐 자리 비우면 그새를 못 참고 한눈을 팔고.”

“치, 한눈을 팔긴 누가 팔아요.”

짐짓 삐진 체하는 단솔에 지수가 귀여운 듯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단솔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누가 보면 어떡해요……!”

“머리 쓰다듬는 것도 안 돼?”

“안 되죠!”

단솔은 마치 비를 막는 사람처럼 제 정수리 위에 양손을 척 올렸다. 그런 단솔을 놀리는 게 재미있는 듯 지수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

“그럼 볼 찌르기는?”

“안 돼요!”

“어깨 깨물기는?”

“절대 안 돼요!”

“후…… 밖에선 안 되는 게 많아도 너무 많네. 안 되겠다. 도망가자.”

멤버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단솔은 못내 지수의 말이 기쁘게 느껴졌다. 사실 PT실은 모르고는 들어가도 알고 나니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컴백이 머지않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대표가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하냐, 단솔이 또 엄마처럼 잔소리를 귀엽게 늘어놓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수는 뜻밖의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운동이 힘들어도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단솔의 하늘색 티셔츠가 땀으로 푹 젖은 게 눈에 들어왔다.

“진짜 가도 돼?”

“네……! 좋아요. 아니 얼른 가요 형.”

* * *

갈아입을 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단솔은 지수의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한 뒤 지수의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자주 오다 보니 단솔의 전용 옷이 되어 버린, 빨간색과 초록색이 섞인 체크무늬 바지와 괴물 그림이 그려진 회색 티셔츠였다.

처음 이 집에서 밤을 보낸 날, 드레스 룸에서 아무거나 골라 입으라는 말에 단솔이 직접 고른 옷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이 옷은 몇 년 전 지수가 지인들과 ‘못생긴 옷 입고 오기 파티’에 입고 간 옷이었다.

단솔이 이 옷을 입고 나오자마자 지수는 탄식하며 ‘진짜 아무거나 입고 나왔네.’라고 말했다.

물론 바로 아래층에 가면 제 옷이 있었다. 하지만 단솔은 땀에 젖은 옷으로 갈아입고 한 층을 내려가는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지수의 옷을 입어 제게서 지수와 같은 향이 나는 것이 좋았다.

정작 지수는 이 옷을 싫어하면서도 단솔이 오면 으레 단솔의 전용 옷이라며 꺼내 놓는 것도, 온통 까맣고 하얀 욕실에 제 몫의 알록달록한 칫솔이 놓인 것도 좋았다.

그 사소한 흔적들이 까칠하고 싸가지 없는 배우 한지수의 사적인 영역에도 침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형, 어디 있어요?”

단솔이 욕실에서 나오면 늘 소파에 앉아 있다가 단솔을 데려가 머리를 말려 주던 지수가 보이지 않았다.

단솔은 서재로 향했다. 요즘 무슨 바쁜 일이 있는 듯 지수는 툭 하면 서재에 박히곤 했으니 서재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지수는 서재에 딸린 테라스에 나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지 지수는 단솔이 서재에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

이제 와 사법 시험이라도 준비하는 걸까. 실없는 상상에 단솔은 지수가 변호사 역을 맡아 출연했던 드라마를 떠올렸다.

괜히 푹신한 서재 의자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그때,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공룡 엔터…….”

전 소속사의 이름이었다. 단솔의 눈이 흔들리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계약 해지 이후에는 떠올리기도 싫었던 이름이었다. 혹시 그동안 지수가 그렇게 바빴던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나.

“솔아.”

단솔이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그사이 어느새 테라스에서 들어온 지수가 단솔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이거 뭐예요, 형?”

“아무것도 아니야.”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왜 말 안 했어요?”

지수는 늘 단솔을 너무 과보호했다. 아프리카에서도 당사자인 단솔이 모르는 일을 혼자 꾸몄다. 그게 한편으로는 고마우면서도 뒤늦게 알고 나면 찝찝한 죄책감 같은 것이 남았다.

“……네가 알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이게 어떻게…… 내가 몰라도 되는 일이에요, 형. 우리 팀 이름을 뺏길지도 모르는 건데.”

“미안해. 다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형이 다 알아서 해결하면…… 나는요? 매번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만 있는 게…… 형이 바라는 일이에요?”

“정말 별일 아니야. 신경 쓰이고 귀찮은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단솔의 말에 지수는 속이 타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단솔의 눈에서는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같은 삶을 두 번이나 살았는데, 왜 이렇게 무능한 거지. 단솔은 너무도 자존심이 상했다.

“씨발, 네가 이럴까 봐 내가 말 안 한 거라고. 너…… 귀. 스트레스가 쥐약이라며.”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는 단솔의 어깨를 지수가 그러쥐었다.

“울지 마, 솔아. 저딴 새끼 때문에 너 속상해하는 거 보면…….”

그때, 지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뒤집었다.

“전화 받아요…….”

“필요 없는 전화야.”

“……변호사던데.”

“나한테 너보다 중요한 거 없어.”

나도 알아요. 근데 그게 문제란 말이에요.

잔뜩 울음을 머금은 단솔이 힘겨운 숨을 내뱉는 사람처럼 말했다.

단솔의 마음에 켜켜이 쌓인 부채 의식이 터져 나왔다. 지수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나 전 소속사 사장이 벌인 일 정도는 단솔과 다른 멤버들이 알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소속된 회사가 있다고 해도 결국 당사자니 말이다.

자꾸 지수의 도움을 받다 보니, 지수가 저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보는 걸까.

“내가 너무 바보 같아요. 형은 어떻게 나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아요? 나는…… 형한테 뭘 해 줄 수 있어요?”

지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수에겐 단솔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었으나, 그게 단솔이 원하는 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갈게요.”

단솔은 서재에 지수를 남겨 두고 집을 나왔다.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눈물을 닦아 내던 단솔이 아래층으로 가려다가 지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수에게 화를 낸 주제에 또다시 지수 명의의 숙소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숙소에 들어가 겉옷이라도 챙겨 나올까 했지만, 그 겉옷조차 지수가 사 준 물건임을 떠올렸다.

“바보 같아…… 이건 애인도 아니고 그냥 빈대잖아…….”

겉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제 땀내 나는 운동복만 끌어안고 아파트 단지에서 나왔다. 언제 불쑥 이렇게 겨울이 온 건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아파트 공동 현관으로 돌아가야 하나, 제자리를 맴돌던 단솔이 결심한 듯 단지 바깥으로 마구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아까 헬스클럽에서 혹사당한 다리가 아파 왔지만, 추위는 잊을 수 있었다.

어찌나 빨리 뛰었는지, 단솔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달렸을까. 어느새 단솔은 모르는 골목에 와 있었다.

“헉…… 허억…… 여기가 어디지……?”

늘 지수나 길성이 태워 주는 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 걸어서 다니는 길은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어쩐지 단솔에게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저 멀리 지수의 펜트 하우스가 보였지만, 지금 단솔이 발을 딛고 선 동네는 원룸이 많이 있었고 동네가 서민적인 분위기가 났다.

“내가 전에 여길 와 본 적이 있던가…….”

한참을 걷던 단솔이 길모퉁이를 돌았을 때,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지수가 여기까지 쫓아온 걸까.

단솔이 휙, 하고 뒤돌아섰을 때, 단솔의 뒤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검은 모자에 검은 후드티를 눌러쓴 채 단솔을 불렀다.

“주단솔.”

누구였더라, 이 목소리.

“오랜만이네?”

“유……두현……?”

단솔은 그제야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채곤 경악했다.

“한지수 그 새끼가 어찌나 싸고도는지. 드디어 만났네, 우리.”

“날 찾았어요? 왜요?”

“하, 몰라서 물어?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무…… 무슨 소리예요. 그건 선배가 이연 선배한테 나쁜 짓을……!”

“순진한 척 잘하네. 역시…… 인생 2회차라 그런가. 혹시 나도 좀 가르쳐 줄래? 나는 두 번을 겪어도 모자란 것 같아. 이렇게 또 인생이 좆된 걸 보면.”

유두현이 또 다른 회귀자였다니.

단솔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두현의 뒤로 단솔에게도 너무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지난 삶에서 죽기 전 들렀던 김밥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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