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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37화 (137/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37화

    숙소며, 회사 근처며 가리지 않고 잠복을 하는 기자들 덕분에 단솔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요 며칠 숙소와 지수의 집만 오갔다.

    멤버들에겐 몸이 찌뿌둥해서 아파트 안에 있는 헬스클럽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수의 집에 다녀올 때마다 근육통에 시달리는 바람에 정말 몸이 찌뿌둥하기는 했던지라 단솔은 본의 아니게 꽤 치밀한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형, 집에만 있으니까 지겹지 않아요? 우리―.”

    “어, 잠깐만 솔아. 형 전화 한 통만 받고 올게.”

    문제는 바라만 봐도 즐거운 제 애인이 바빠도 너무 바쁘다는 것이었다. 무슨 비밀 작전이라도 펼치는 건지, 도통 단솔 앞에선 전화를 받지도 않고 서재에 들어가 한 시간씩 통화를 하다가 나오니 단솔도 이 생활이 슬슬 지겨워지려던 찰나였다.

    “형! 어디 가?”

    그날 아침도, 단솔은 눈뜨자마자 지수의 집으로 향하기 위해 현관 앞에 섰다.

    멤버들 눈치가 보여서라도 잠은 무조건 집에서 자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단솔이었다. 여덟 시간이나 못 봤으니까 얼른 지수를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가려던 단솔을 붙잡은 것은 우현이었다.

    “헬스클럽…….”

    “형, 그러지 말고 오늘은 우리랑 같이 가. 어제 정 대표님한테 안부 전화 왔는데, 요즘 형 운동에 빠져 있다고 했더니 엄청 좋은 헬스장 PT 끊어 주셨어.”

    “……어? 대수 선배가……?”

    그럴 필요 없는데. 단솔은 간식이라도 빼앗긴 강아지처럼 눈썹이 축 처졌다.

    “왜? 싫어?”

    “아…… 아니!? 싫을 리가?”

    “거기 다른 연예인들도 많이 온대. 이제야 진짜 연예인이 된 기분이야.”

    민재까지 불쑥 끼어들었다. 민재는 신이 난 듯 운동복을 위아래로 차려입고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애들이랑 운동하고 오지, 뭐. 어차피 형은 바쁘고 요즘 체력도 떨어졌으니까…….’

    “가…… 가자!”

    단솔은 애써 자기 합리화를 펼치면서 지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형...... 저 애들이랑 헬스클럽 다녀올게요...... 대수 형이 PT 잡아 줬대요...... 살려 줘...... ㅠㅅㅠ

    늘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단솔을 위해 간식거리를 준비해 둔 지수가 메시지를 보곤 눈썹 부근을 긁었다. 뺄 데가 어디 있다고. 정대수가 또 괜한 짓을 한 모양이었다.

    “귀엽기는.”

    지수가 괜히 단솔의 메시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흔히들 쓰는 이모티콘도 단솔이 쓰니 유달리 귀여운 느낌이었다. 요즘 제 신경 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귀찮은 일이 아니라면, 헬스클럽까지 쫓아가 개인 PT를 해 줄 수도 있는데.

    지수는 다시 안경을 추어올리곤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하여간 지저분한 새끼들은 하는 짓이 다 비슷비슷해.”

    지수가 집어 든 서류는 다이노소울의 전 소속사 사장이 보낸 내용 증명과 고소장이었다. 다이노소울이라는 팀명이 자신의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이걸 어떻게 조져 줄까…….”

    박필구는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데뷔 초 잘못된 불공정 계약으로 고생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지수는 이런 식으로 어린애들을 괴롭히는 놈들을 제일 혐오했다.

    ‘다이노소울’이라는 이름 자체는 지수의 취향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지만, 단솔이 좋아하기 때문에 지수는 가능한 그 이름을 지켜 주고 싶었다.

    지이잉.

    “네, 한 변호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허…… 벌써 아침이에요? 밤새운 줄도 몰랐네. 제가 알아봤는데요, 박필구 그 사람, 요즘 돈이 많이 쪼들리나 봐요.

    “투자를 꽤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있던 직원들도 다 자르고 폐업까지 할 정도면……. 그렇게 무모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그게, 뭐 새로 만드는 걸그룹 멤버 중 하나가 꽤 돈 좀 있는 집 딸이었나 봐요. 헤비메탈에 꽂혀서 가수 하고 싶다는 걸, 그 아버지가 박필구 사장한테 투자를 해서 꽂아 넣었구요.

    “거기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근데 그 연습생이 튀었답니다.

    “예?”

    ―헤비메탈이 싫어졌다네요. 참, 나……. 그래서 투자금 20퍼센트도 채 못 받고, 위약금만 좀 받아 냈나 봐요.

    어이없는 전개에 지수가 실소를 터트렸다.

    “아니, 박필구 사장이 그렇게 헤비메탈에 진심인 줄은 몰랐네요. 투자자 딸이 다른 걸 하고 싶어 하면 들어주면 그만 아닙니까.”

    ―그게, 그냥 헤비메탈이 싫어진 게 아니라 가수를 안 하겠다고 했답니다. 수능 봐서 의대에 가겠다고요.

    “그러니까, 애새끼 장난에 지금…… 하…….”

    지수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었지만, 어린애 변덕에 다이노소울 멤버들이 계약 해지를 당하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미는 지수였다.

    ―그나마 그 자식 유일한 수익원이 다이노소울이었으니까, 이제 와 아쉬운 거겠죠. 투자금이랑 위약금으론 그동안 벌여 놓은 일 수습하기도 벅찰 테니까요.

    “돈이 얼마 들어도 좋으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봅시다. 그런 자식은 아예 이 업계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간만에 피가 끓는 의뢰네요.

    “아무리 피가 끓어도 잠은 좀 주무시고요. 끊습니다.”

    * * *

    헉…… 허억…….

    단솔은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냥 고집을 부려서라도 지수의 집에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대수의 관리도 겸하는 트레이너라길래 그저 실력이 좋은 줄로만 알았다. 대수가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자, 쉬면 안 돼요. 쉬면 운동 효과 떨어져요. 하나, 둘.”

    “저……! 선생님!”

    “단솔 씨, 쉬면 안 된다니깐요.”

    “화…… 화장실이요. 운동을 너무 갑자기 했더니 화장실 가고 싶어요.”

    “하…… 그럼 빨리 갔다 오세요. 다른 멤버들은 계속 자세 유지하고 원, 투.”

    PT실에서 비틀거리면서 나온 단솔은 눈앞이 팽팽 도는 게 느껴졌다.

    밤새 지수에게 시달리고도 춤 연습을 할 정도로 체력은 자신 있었는데, 매번 운동한다는 핑계를 대 놓고 멤버들 중에 제일 빨리 지쳐서 조금 창피했지만 지금은 체면보다는 목숨을 지켜야 할 타이밍이었다.

    “단솔 씨?”

    정수기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물을 질질 흘리며 마시는 단솔의 등 뒤로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씨?”

    태오가 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로 잔뜩 젖어 있는 단솔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헬스장 여기 다녀요?”

    단솔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태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연락을 못 했다는 것도 결국엔 다 변명에 불과했다.

    “……네 ……오늘부터.”

    “대수 선배도 여기 다니잖아요.”

    “네…… 대수 선배가 끊어 주셨어요.”

    “왜 연락…… 아니…… 기사 봤어요. 나랑 연락할 틈이 없었겠지, 바쁘겠지,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랑은 다 연락……하고 있었나 봐요?”

    지수와 대수가 운영하는 소속사에 들어가, 민혁이 새 앨범의 프로듀싱을 한다는 것까지 기사가 난 뒤였다. 단솔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태오는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상처받은 표정을 한 태오가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도 잘됐네요. 걱정 많이 했는데.”

    “저…… 태오 씨, 잠깐 이야기할 시간 돼요?”

    * * *

    운동복 차림 그대로 헬스클럽 안에 딸려 있는 카페테라스에 나온 단솔과 태오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표면에 송골송골 물이 맺혀 컵 홀더가 눅눅해질 정도였지만, 늘 먼저 분위기를 풀어 주던 태오는 아무 말이 없었고, 단솔은 먼저 이야기를 하자고 해 놓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럴 때면 단솔은 참 말주변이 없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저기.”

    “단솔 씨.”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양보를 한 것은 태오였다.

    “먼저 말해요.”

    “어…….”

    더 이상 그의 시간을 빼앗는 건 민폐였다. 단솔은 그가 뭐 때문에 서운한지 잘 알고 있었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해요. 근데…… 저는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알아요. 뭐…… 속 시끄러운 사정이 있었다는 거. 바쁘면 그럴 수도.”

    “바쁜 거, 아니었어요.”

    단솔은 애써 단솔을 이해해 보려는 태오의 말을 끊었다.

    “프로그램 끝나고 바쁠 일이 없었어요. 물론 지방 행사 같은 데는 다니긴 했지만, 불러 주는 데도 그리 많지 않았고. 사실, 연락…… 못 한 거 아니에요. 안 한 거예요.”

    태오는 단솔의 고백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친구도 하기 싫다는 건가. 실망한 태오의 낯빛에 단솔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태오 씨를 보는 게 다른 형들 보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너무 비교되잖아요.”

    태오는 차마 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태오가 당황한 듯 답했다.

    “그럼 나한테 도와 달라고.”

    “도움을 받는 게…… 더 싫었어요. 물론 지금도 형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고 있긴 하지만……. 사실 공항에서 제우스 본 적 있어요. 태오 씨랑 마주칠까 봐 숨어서 태오 씨는 저를 못 봤겠지만. 그때 저는…… 짐을 다 잃어버려서 완전 거지꼴이어서…….”

    단솔은 노란 티셔츠에 꽃무늬 바지를 입고 공항에서 길성을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태오는 그 얘기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값싼 동정처럼 들리지 않을까 신중히 말을 고르는 사이, 유리창 너머로 단솔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지수가 보였다. 운동을 하러 온 것은 아닌 듯 긴 롱코트 차림이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마주하는 거…… 그거 되게 거지 같은 기분이겠네요.”

    태오는 그제야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단솔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마음이 편해지면, 그때 한번 연락 줘요. 단솔 씨 사장님이 단솔 씨 잡으러 왔어요. 전 이만 가 볼게요.”

    태오가 오른쪽 눈을 찡긋거리며 창밖을 가리켰다. 길쭉길쭉한 키를 숨길 수도 없는 사람이 불투명한 시트지가 붙어 있는 PT실의 틈새를 염탐하듯 보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지 고개까지 꺾어 가며 열심이었다.

    “고마워요.”

    지수를 보자마자 보는 사람마저 밝아질 정도로 환하게 웃는 단솔의 모습에 태오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어야만 했다.

    “아, 잠시만요 단솔 씨.”

    뒤돌아 가던 태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와 단솔에게 물었다.

    “네?”

    “혹시 유두현……한테 연락 왔어요?”

    “아뇨? 아…… 아시잖아요. 저랑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 아니라는 거.”

    “아…… 그렇구나.”

    “왜요?”

    “아니…… 얼마 전에 연락이 왔었는데, 다짜고짜 단솔 씨 핸드폰 번호를 아냐고 하더라고요.”

    ‘유두현이 나를 왜…….’

    단솔은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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