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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34화 (134/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34화

    “형…… 제가 잘못했…… 헉.”

    단솔은 놀랐지만, 준비한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걸 기다려 줄 새가 없었다.

    단솔의 모습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방금까지도 영상으로 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제 앞에 서 있는 게 꿈일까 봐 냉큼 제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그런 말 하지 마, 형 창피해. 다 내 잘못이야.”

    단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지수가 주문을 외듯 사과했다.

    그 진동이 못내 간지러워 단솔이 푸스스 웃었다. 단솔의 몸이 부서져라 안고 있는 지수의 팔을 푼 단솔은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지수의 눈앞에 내밀었다.

    “형, 이거 뭔지 알죠.”

    모란이 주었던 구슬이었다.

    “어. 글쎄…… 추운데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수가 단솔을 이끌었다. 힘없이 딸려 간 단솔이 거실에 들어섰을 때, 지수는 그제야 자신이 알오매치 서바이벌의 마지막 회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의 한쪽 벽에 커다랗게 개인 인터뷰를 하는 단솔의 얼굴이 떠 있었다.

    “와…….”

    단솔이 갑자기 등장한 자신의 얼굴에 놀라자 지수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봤지. 나 너랑 절대 못 헤어져. 너한테 미쳤어, 나.”

    “저도요.”

    소파에 앉은 단솔이 제집인 양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지수가 마치 대단한 그림을 보는 듯 황홀한 표정으로 단솔의 옆에 앉았다.

    “이렇게 풀릴 거 왜 싸운 거야 우리?”

    “싸운 거예요? 형이 혼자…… 화낸 거지.”

    뾰로통하게 튀어나오는 입술이 귀여워 지수가 쪽, 하고 뽀뽀했다.

    “미안해. 화내서.”

    “……사실 화낼 만했어요.”

    자신을 애착 인형처럼 끌어안은 지수의 팔을 풀고 마주한 단솔이 결심을 한 듯 말을 이었다.

    “형, 나 병원 갔던 거…… 한쪽 귀가 잘 안 들려서 간 거예요.”

    “어, 언제부터, 응?”

    놀란 마음에 다짜고짜 언제부터냐고 물은 지수가 아차 싶었는지 단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듯 물었다.

    “근데 왜 숨겼어…… 안 무서웠어?”

    “말하려고 했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형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안 들리기 시작한 건…….”

    단솔은 잠깐 고민했다. 회귀 전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하지만 오늘 다 털어놓기엔 너무 많은 짐 덩어리라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오매치 서바이벌 촬영 들어가기 직전부터예요. 딱히 이유는 없고 심인성이래요. 약도 받아 왔으니까…… 빨리 나을게요.”

    “하. 그런 줄도 모르고.”

    소파에 등을 기댄 지수가 마른세수했다. 자신이 화를 낸 것에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제, 형이 말할 차례예요. 아프리카 왔던 거 왜 숨겼어요?”

    곤란해 보이는 지수와는 달리 단솔은 재밌는 퍼즐을 본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처음엔 그냥 보고 싶어서 갔어. 마주칠 줄 몰랐는데…… 아니 솔직히 알았어. 가 봤자 관광객들이 갈만한 데가 고만고만해서.”

    이야기하는 내내 지수는 단솔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단정한 손톱을 매만지다가, 손등을 쓸어내리다가. 마치 눈치를 보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에 단솔이 깍지를 껴 지수의 손을 붙잡았다.

    “형이 지독한 스토커라고 해도 도망 안 갈 테니까, 다 말해 줘요.”

    “후…… 차마 그 부족 근처까지는 못 갔어. 평야라서 숨을 데도 없고, 근처 마을에서 기다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최 PD가 왔더라고, 그 여자 진작에 눈치채 놓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을에 도착해 보니 단솔이 묶여 있었고, 눈이 돌아 모란을 쥐어 팬 이야기까지, 지수는 고해성사하듯 풀었다.

    “근데 너 춤 잘 추더라. 아무래도 아이돌이니까 춤 선이…….”

    “으악! 내가 춤을 췄어요? 진짜?”

    “그렇다니까? 춤추면서 걔들 집 다 부쉈어.”

    “말도 안 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오늘 확인해 볼까?”

    지수는 무방비하게 앉아 있는 단솔의 무릎 뒤와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더니 번쩍하고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렸다.

    “어어! 형 잠시만!”

    “응응, 알겠어. 방에 가서 이야기하자.”

    * * *

    다음 날 아침, 단솔은 지각해 연습실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멤버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옷을 갈아입고 가느라 지수의 차를 타고 가면서도 서둘러야 했다.

    “아직 안무도 없는데 무슨 연습을 그리해? 우리 회사 그렇게 빡센 곳 아니야. 그러지 말고 우리 어디서 좀 쉬었다가 갈까?”

    “사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매번 놀 궁리만 해요? 안무 없어도 기본기를 잘 닦아 놔야죠. 그러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연습은 해야 하고. 자꾸 쉬면 관절이 안 돌아간다고요.”

    “쳇, 너 방금 한국대 수석 합격자 같았어. 알아? 기본기에 충실하게, 매일 조금씩 공부했어요. 한 열두 시간?”

    지수가 놀리듯 하는 말에 단솔이 까르르 웃었다.

    “형 저희 망돌인데요?”

    “아이…… 그런 말 하면 안 돼. 요, 입.”

    차가 신호에 걸리자, 지수가 장난스레 단솔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오리처럼 툭 튀어나온 입술이 탐스러운 열매 같았다.

    “이제 흥돌 할 거야. 나만 믿어.”

    “우웅…… 아파요.”

    단솔의 아프다는 말에 얼른 손가락을 떼었다. 그러자 지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단솔이 말했다.

    “어제는 누구 때문에 콘셉트 바꿔야 한다면서요?”

    “……그랬지 ……그랬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지수가 민망한 듯 전방을 보며 차를 출발시켰다. 저렇게 민망해할 거면서 도대체 왜 자꾸 못된 말을 하는 건지.

    제 입이 아니라 지수의 입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단솔이었다.

    * * *

    단솔이 마치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난 것처럼 꾸민 내용의 기사가 뜬 이후로 지수는 기존에 생각한 귀여운 콘셉트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기존에 다이노소울의 음악이 다 그런 풍이긴 했지만, 다른 회사에서 입혔던 옷을 그대로 가져올 생각을 했다니, 자신이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솔의 기사에는 아직도 좆소니, 망돌이니, 몸을 팔아서 소속사를 갈아 치웠니 하는 저급한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열락에 들떠 기절하듯 잠든 단솔을 옆에 두고 지수는 밤새 새로운 콘셉트를 고민했다.

    “몸을 팔긴 누가 팔아. 내가 매달리는구먼.”

    * * *

    “형! 왜 이렇게 늦었어!”

    “어…… 나는 그게.”

    급하게 쫓아오느라 마땅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지 못한 단솔이 당황해 있을 때, 민재가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아? 새벽에 응급실 갔대서 진짜 놀랐어. 얼굴이 아직도 안 좋아 보이는데 좀 쉬지.”

    “병원에서는 뭐래? 연습해도 된대?”

    “어…… 그냥 약 먹고 밥 잘 먹으면 낫는다고. 콜록콜록.”

    우현이 대신 거짓말로 둘러댄 모양이다. 단솔은 결백을 주장하듯 애써 멀쩡한 목으로 기침을 해 보였다.

    “응? 장염이라며. 뭐 먹어도 돼?”

    “어.”

    “요즘 감기가 장염 증상을 동반한다네. 그래서 잘 먹어야 낫는대.”

    말문이 막힌 단솔 대신 우현이 변명해 주었다. 역시나 단솔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우리도 컨디션 엉망이야.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응? 무슨 일 있었어?”

    어제 단솔이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멤버들이었다.

    “아니, 윗집에서 새벽에 얼마나 쿵쿵거리던지. 나는 내 방에서만 들리는 줄 알았는데 형들도 다 들었대. 무슨 가구 옮기는 소리가 나던데. 야반도주라도 하나?”

    “어……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하하.”

    워낙 고급 아파트라 층간 소음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지난밤을 보낸 단솔이었다.

    집을 부수니 마니 하더니, 간밤의 행위가 그 정도로 격렬했나 하는 생각에 단솔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좋은 아파트라고 다를 거 하나 없네.”

    “맞아. 윗집 장씨 아저씨네 부부만큼 시끄러웠어.”

    장씨 아저씨네 부부는 하루가 멀다고 부부싸움을 해 댔던 지난번 숙소 윗집 부부였다.

    ‘그 정도로 시끄러웠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 떠올라 이제는 얼굴이 완전히 토마토 색깔이 되어 버린 단솔을 구해 준 것은 유리문을 두드리는 청량한 노크 소리였다.

    똑똑.

    어차피 투명한 벽으로 되어 있어 다 보이는데 굳이 지수는 노크하고 연습실에 들어왔다.

    “회의실보다는 여기가 편하지? 콘셉트 회의할 거야.”

    지수의 뒤로 길성과 대수, 현진이 줄줄이 커피와 빵을 들고 나타났다. 아침부터 나오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멤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무래도 장정 8명에 대수와 지수 현진과 길성까지 들어가기엔 사무실보다는 연습실이 훨씬 편했다.

    “아, 이럴 땐 맛있는 거 함부로 받아먹으면 안 되는데.”

    누구보다 얻어먹는 일에 진심이었던 민재가 미심쩍은 듯 간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어쭈, 그간 받아먹은 건 기억도 못 하지? 먹으면서 편하게 들어. 편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수는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여러 권 내려놓았다.

    “이번 앨범 참고 자료야. 돌아가면서 봐.”

    그중에는 지수가 초창기에 찍었던 화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솔은 낯선, 어린 시절의 지수를 보는 재미에 금방 빠져들었다.

    자신의 애인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음…… 앨범 콘셉트가 뭔데요? 잘 모르겠는데. 새까만 건가.”

    화보 속 모델들은 전부 카메라를 잡아먹을 것처럼 서 있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

    “이번 콘셉트는 셀럽. 너희가 아무리 망돌이라고 욕해도 우리는 잘 먹고 잘산다. 근데 섹시하게. 우리 이제 귀여운 거 안 할 거야. 헐벗어야 하니까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는 몸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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