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30화
“와…… 제가 태어나서 아이돌 숙소를 다 와 보네요.”
최 PD가 양손에 휴지와 세제를 들고 다이노소울의 숙소에 나타났다. 아프리카에 함께 갔던 몇몇 스태프들도 함께였다.
“최 PD님 머릿수가 몇 갠데 양손이 너무 가벼우신 거 아니에요?”
최 PD의 방문에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반겨 준 사람은 지수였다.
“……한지수 씨?”
두 사람이 단솔을 두고 뒤에서 얼마나 많은 협작을 꾸몄는지 꿈에도 모르는 단솔은 그저 알오매치 서바이벌 촬영 때부터 자주 부딪힌 지수와 최 PD가 싸울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게다가 최 PD는 알오매치 서바이벌의 마지막 방송에서 제가 지수에게 고백한 걸 아는 사람 중에 한 명이기도 했다. 단솔이 지수와 붙어 있는 걸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저…… 저희 대표님이에요! PD님, 놀라셨죠?
단솔은 최 PD가 묻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와우, 드디어 해냈네요 한지수 씨가.”
최 PD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지수가 여유 있는 척을 하며 웃었다.
“그렇죠. 자기 회사 차리는 건, 모든 배우의 꿈이니까요.”
“그 꿈, 응원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다이노소울을 미리 잘 섭외했네요. 이미지 메이킹을 이렇게 잘하시는 대표님을 만났으니 이제 다이노소울이 톱스타 되는 건 시간문제 아닌가요?”
“우리 최 PD님이 편집을 잘해 주셔야 우리 애들이 빛을 보죠. 그런 의미로 오늘 방송 기대해도 되겠죠?”
두 사람이 이를 악물고 애써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단솔은 언제 두 사람이 저렇게 사이가 좋아진 건지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거, 계속 인사만 할 거면 둘이 나가든가.”
거실에 앉아 기다리던 대수가 외쳤다.
“정대수 씨도 와 있었네요. 다들 제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그보다는 소속 가수한테 관심이 많은 대표 둘로 해 놓죠.”
“와…… 설마 동업?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엠바고 걸어 놨어요. 내일 보도 자료 나갑니다.”
예능판 떴다고 소문이 이렇게 느려지나. 최 PD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와, 여기 한강도 보이네요.”
아프리카에 함께 갔던 VJ 중 한 명이 거실 전경을 보고 감탄했다. 제집이 아니라 숙소일 뿐인데도 괜히 뿌듯해서 민재가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렇죠, 엄청 예쁘죠! 저도 꿈만 같아요. 그래서 맨날 밤에 야경 보고 자요. 헤헤.”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훨씬. 보기 좋네요. 다들.”
최 PD가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만 하더라도, 다이노소울은 빈말로도 연예인 태가 나질 않았다.
가지고 있는 본판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일반인보다도 꾸밀 줄 모르는 모습과 고생에 찌든 표정들이 그러했다.
그나마 방송 물을 조금 먹은 단솔을 제외하면 다들 땟국물 흐르는 어린애들 같았는데, 그사이 관리를 받은 모양인지 제법 알파 태가 나는 멤버들도 있었다.
“이번 거 시청률 잘 나오면 코멘터리 찍어 주기예요.”
최 PD가 지수의 옆으로 가 조용히 읊조렸다.
“얼마 주시는지 보고요. 우리 애들이 좀 비싸서.”
“허, 이러기예요 우리 사이에?”
“우리가 무슨 사이씩이나 됐나요?”
멀찍이 떨어져 두 사람을 지켜보는 단솔은 왜인지 질투가 났다. 최 PD와 지수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지수가 다른 사람과 친한 모습을 보이면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거렸다.
단솔의 표정은 다큐멘터리의 첫 방송이 시작한 이후에도 풀어지질 않았다.
“솔아, 어디 아파?”
“아니요.”
“얼굴이 안 좋은데? 들어가서 좀 쉴래?”
“……괜찮아요.”
단솔은 저도 모르게 단답형으로 대답이 튀어 나갔다. 지수가 연신 단솔의 기분을 맞추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듯 툴툴거렸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무안한 듯 단솔의 어깨를 쓰다듬은 지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다큐멘터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 번 더 물어봤으면 풀어 주려고 했는데…….’
이번엔 단솔이 지수의 눈치를 살폈다. 멤버들이 티브이 화면을 보고 웃는데도 단솔은 그사이에 섞이지 못했다.
그렇게 단솔이 입술만 깨물고 있을 때, 지수가 또 한 번 최 PD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최 PD는 바닥에 앉아 핸드폰으로 실시간 반응을 보면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저 장면 너무 야한 것 같은데요.”
“다들 목말라서 헉헉거리는 장면이요?”
“네, 헉헉거리는 소리가 너무 선정적인 것 같아요.”
“……너무 개인적인 감상 아닙니까?”
화면에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단솔이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재방송 때는 자르면 안 됩니까? 하…… 옷 갈아입는 것도 찍었어요?”
“단솔 씨는 저 때 기절해 있어서 다른 데 누워 있었습니다만.”
“아, 그건 다행이네요. 그럼 이 장면은 살립시다.”
두 사람 간에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를 모르는 단솔은 지수와 최 PD의 뒤통수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릴 리 없지만, 프로그램보다 그쪽으로 자꾸만 신경이 쏠렸다.
* * *
“이 정도면 반응이 꽤 괜찮은 것 같아요. 어차피 메인 시간대도 아니니까. 이제 와서 인사하니까 좀 민망하지만, 다들 고생했어요.”
“에이, 편집하느라 PD님이 고생이셨죠.”
너도나도 감사를 표하는 멤버들 사이에서 단솔은 그답지 않게 뚱하니 서 있었다.
“시간이 늦었네요. 이제 슬슬 일어나시죠.”
“그렇게 안 쫓아내도 갈 거예요.”
그런 단솔의 눈치를 살피던 지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제 어린 애인이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은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대표님은 안 가세요?”
최 PD와 스태프들을 보내고, 방으로 향하는 단솔의 뒤를 따르려던 지수를 우현이 붙잡았다.
“어…… 나는.”
“뭐 해, 나와. 집에 가게.”
머뭇거리는 지수를 대수 역시 채근했다. 대수는 분명 지수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아는 눈치였다.
차마, 멤버들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었던 지수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옆 동으로 가야 하는 대수와 한층 위로 올라가야 하는 지수가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다.
지하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며 대수가 말했다.
“티 좀 그만 내지. 동네방네 소문내려고?”
“원래 사랑이랑 기침, 가난은 숨길 수 없어. 넌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많은가 봐?”
“관심 있는 게 왜 네 쪽이라 생각해?”
“뭐 이 새끼야?”
대수가 단솔을 좋아했었다는 게 못내 신경 쓰였는데, 대놓고 이렇게 말을 하니 지수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대수가 유유히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기 전 대수가 지수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좋아하는 티 내지 말라고.”
지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제가 회사를 차린 걸 후회했다. 지금도 이렇게 인기가 많은 애인을 세상 밖에 내놓으면 또 얼마나 날파리가 꼬일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터져 나왔다.
* * *
제가 먼저 방으로 들어오면 당연히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던 지수가 들어오질 않자, 단솔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면 지수가 최 PD와 대화를 나누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수는 소속사의 대표였고, 최 PD는 PD니까.
지금은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에 메여 있지만, 실력이 있는 감독이니 조만간 대형 프로젝트로 복귀할 가능성이 컸다.
단솔은 제 옹졸한 마음에 혹시 지수가 화난 건 아닐까, 제 방문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았다. 욕실로 가던 지웅이 단솔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형, 뭐 해?”
“어? 아니…… 아무것도 안 하는데?”
“되게 수상했어. 자기 방인데 꼭 도둑질하는 사람처럼 살금살금.”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근데 대표님들은 어디 갔어……?”
대수나 지수가 있었으면 거실이 이렇게 시끄러울 리가 없는데, 단솔은 지수만 물어보면 혹시나 들킬까 봐 일부러 ‘대표님들’을 강조해서 말했다.
“집에 가셨지.”
“뭐!?”
“아우! 깜짝이야…… 형 아까 없었나? 최 PD님 나가고 거의 바로 가셨는데? 걱정하지 마 어차피 우리 사람 많아서 한두 명 빠져도 모르실걸?”
지웅은 급격히 어두워진 단솔의 표정을 보곤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대표가 가는데 인사를 하지 않아서 하는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단솔은 제가 화가 난 걸 알면서도 그냥 가 버린 애인을 향한 설움이 치밀었다.
로맨스 드라마에 단골손님처럼 나오는 질투 따위는 유치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제가 연애를 해 보니 뭣도 아닌 일에도 마음이 제멋대로 튀어 올랐다.
쾅.
단솔이 마치 위층에 들리라는 듯, 제 방문을 요란하게 닫고 들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단솔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부터 켰다. 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지수의 연락 대신 민혁의 메시지만 와 있었다.
민혁이 형
단솔 씨, 방송 잘 봤어요. 재밌게 잘 나왔던데요.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나랑 어디 좀 갈래요?
형, 고마워요 ^0^ 근데 어디를 가는데요?
민혁이 형
지난번에 알아 놓은 곳 몇 군데 있다고 했잖아요. 더 바빠지기 전에 가요. 점집 투어.
점집 투어라니. 단솔은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을 불안해하면서 지낼 순 없었으니까.
지수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다 큰 성인이 돼서 민혁을 만나는 일에 미주알고주알 허락을 받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연락이 안 오면 그냥 바쁜가 보다 생각하면 되는 거야. 난 어른이니까. 이런 사소한 일에 감정 소모하면 안 돼.’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단솔은 1초에 한 번씩 메시지 함을 들락날락했다. 이렇게 있다간 온종일 지수의 연락만 기다리는 강아지 신세가 될 것이 뻔했다. 단솔은 약간은 충동적으로 민혁에게 답장했다.
좋아요, 형. 말 나온 김에 오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