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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29화 (129/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29화

그날 밤, 아쉬워하는 지수를 뒤로하고 단솔은 민재의 집으로 향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사를 해야 했다. 숙소도 정해진 이상, 민재의 식구들에게 더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 물론 숙소가 지수의 집과 가깝다는 것도 서두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내일 당장 가? 왜 이렇게 빨리 가?”

“야, 서다솜! 얼른 나가라고 지랄할 때는 언제고? 우리 이제 한강 뷰에 살아.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민재가 만화 주인공처럼 핑그르르 돌면서 인사를 했다. 아직 아기인 다른 동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까르르거리며 신나 했고, 다솜만 분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다솜아, 숙소 정리되면 종종 놀러 와. 아직 본격적으로 앨범 준비할 때까지는 시간 있으니까. 부모님 모시고 와. 알았지?”

그런 다솜을 단솔이 애써 달랬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다솜이 겨우 진정한 사이, 민재가 방에서 무언갈 들고 나왔다.

“푸하하, 서다솜! 너 단솔이 형 좋아하냐? 이름 점친 것 봐!”

“아! 미친 새끼가!”

연습장을 펄럭거리며 도망가는 민재를 다솜이 쫓는 사이, 단솔은 다시 짐 정리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때, 단솔의 짐 사이에서 동그란 구슬이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아, 맞다…….”

아프리카에서 모란에게 받아 온 목걸이에 달려 있던 구슬이었다. 마지막 날 받아먹은 주스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기억이 유독 희미한 단솔이 완전히 잊고 있던 물건이었다. 구슬에는 가죽끈을 끼웠던 구멍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줄이라도 사서 끼워 놔야겠다.”

원래 파란빛을 냈던 것 같은데, 혹시 제 기억이 잘못된 걸까. 에메랄드빛 초록색으로 빛나는 구슬을 단솔은 주머니에 넣었다.

마침,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지수인 걸까. 방금까지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도 단솔은 서둘러 전화를 꺼냈다.

하지만 전화를 걸어온 이는 지수가 아니라 최 PD였다. 괜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단솔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PD님, 잘 지내셨어요?”

―단솔 씨, 오랜만이네요. 연락을 한다는 게 나도 정신이 없었어.

“편집하느라 바쁘실 텐데요. 제가 먼저 안부 전화 드렸어야 했는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문제가 좀 있었거든요.”

―아, 기사 봤어요. 뭐 어떻게…… 도움 필요하면 내가 좀 알아봐 줄 수 있는데.

“아……!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지난 삶과는 다르게 단솔이 힘들 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많았다.

“저희 다른 소속사로 옮겼거든요…… 회사에서 다 알아서 해 주시기로 했어요.”

―우와, 진짜요? 다행이다. 정말 잘됐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첫 방 날짜 알려 준다고 전화해 놓고.

“다큐요? 벌써 날짜가 잡혔어요?”

―응, 생각보다 편집이 잘돼서 2부로 나눠서 방송될 것 같아요. 다음 주랑 다다음 주. 1부는 같이 모니터링할까 하는데. 시간 괜찮아요?

“네……! 다른 멤버들한테도 물어볼게요.”

―이제 좋은 회사 들어가서 바쁠 일만 남았는데, 내가 방해하는 건 아니고?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짓궂게 장난을 치던 최 PD의 전화가 끊기고, 단솔은 생각난 김에 민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떻게 보면 민혁 덕분에 지수를 다시 만나고 계약까지 하게 된 셈이었다. 회사에 대해 미리 말을 안 해 준 건 조금 괘씸했지만, 민혁이 은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형......! 덕분에 저 지수 형이랑 대수 선배님이랑 계약했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이사 준비하느라 바빴어요. 이사만 다 끝나면 한번 찾아갈게요 :)

민혁에게 메시지를 쓰던 단솔은 문득 민혁이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에게 말을 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자연히 민혁을 생각하자 애써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걸 잊다니. 알 수 없는 미래와 반복될지도 모르는 과거 사이에 단솔은 갑자기 공포심이 일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는 진짜 지수였다.

―여보세요? 정리하느라 바쁘지?

“어…… 괜찮아요.”

―그럼 좀 내려올래?

“네?”

단솔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나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까만 차를 타고 왔지만,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세단이 식당 앞에 서 있었다. 단솔은 저도 모르게 활짝 핀 꽃처럼 웃었다.

“잠시만요!”

방금까지도 단솔의 전신을 휘감았던 두려움이 지수의 등장으로 옅어졌다.

어디서 난 것인지 야광 봉을 들고 칼싸움을 하는 멤버들 사이로 코트를 집어 든 단솔이 신발을 끼워 신었다.

“형, 어디 가? 정리해야 하잖아!”

“너희도 정리 안 하고 있잖아. 나는 친구가 이 앞에 와 있다고 해서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나 올 때까지 다 정리해 놔!”

쾅. 어찌나 급하게 나가는지 운동화도 꺾어 신은 걸 보고 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저렇게 티를 내면 어쩌자는 거야. 모르는 척해 주기도 힘드네, 그렇지 않냐?”

“연기 연습이라고 생각해.”

* * *

똑똑.

건물 2층에서 날듯이 뛰어 내려간 단솔이 지수의 차창에 노크를 했다.

그러고 보니 거울도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급한 마음에 차 유리창에 비치는 제 얼굴을 갈무리한 단솔이 철컥 잠금이 풀린 차 문을 열었다.

“어떻게 왔어요?”

“차 타고 왔는데?”

“으…… 아저씨. 이 차는 또 뭐예요? 도대체 차가 몇 대예요 형?”

“글쎄…… 안 세어 봤는데?”

지수의 대답에 단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차 많은 거 싫어? 다 팔아 버릴까?”

“아니요, 많은 게 싫은 게 아니라…….”

단솔은 지수와 저 사이에 자리한 빈부 격차에 한숨이 났다.

드라마를 보면 이럴 경우 집안에서 만남을 반대하고 그러던데. 지수와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문득 두 사람이 아직 사귄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야, 뭔데 말해 줘 응?”

“아무것도……! 푸하학.”

“말해 줘! 말해 줘!”

단솔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자, 지수가 단솔의 코트 속에 손을 집어넣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으아악! 하지 마요!”

“말해 줄 거야?”

“허억…… 그게 아니라…… 으잇.”

어찌나 민감한지 단솔은 지수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자지러질 것 같았다.

“그냥 저 혼자 이상한 생각 했어요.”

“무슨 생각?”

원체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지수는 이런 제 모습이 신기했다. 엉뚱한 상상일지라도, 단솔의 일이라면 다 알고 싶었다.

“형이랑 빈부 격차가 너무 나서…… 형네 부모님이 날 싫어하시면 어떨까 하는…….”

“진짜?”

단솔은 부끄러워 후드티를 뒤집어쓰곤 끈을 조여 숨어 버렸다. 입술만 튀어나온 문어 같은 모습에 지수는 귀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반듯하게 생긴 단솔의 동그란 머리통을 안은 지수가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몇 번의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지더니 이내 차 안은 질척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우웁.”

손에 힘이 풀린 단솔이 후드 티의 끈을 놓치자, 숨겨 놨던 얼굴이 드러났다. 지수는 꼭 크리스마스 선물을 푸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단솔을 바라보았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이미지 메이킹을 너무 열심히 해서 잊었나 본데, 나 10년도 넘게 오메가인 척하고 살았어. 알파 며느리 안 보는 것만 해도 그분들은 감지덕지하실걸? 본가에 갈 때마다 정대수랑 진짜 사귀는 거 아니냐고 얼마나 시달렸는데.”

단솔은 새색시 한복을 입고 절을 하는 대수를 상상했다.

“그건 그러네요.”

“이제 문제가 해결됐어?”

단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 근데 있잖아요―. 또 어떤 엉뚱한 생각을 했는지 말끝을 늘이는 입꼬리가 장난스러웠다.

“네― 말씀해 보세요.”

“저 스물세 살이에요. 아직 결혼하기는 좀 이른 것 같아요.”

그 말에 장난스럽게 받아치려던 지수는 이어지는 단솔의 진심에 입을 다물었다.

“저 성공할게요. 형이 도와준 만큼 성공해서, 형이 아깝다느니 스폰서니 어쩌니 하는 소리 안 듣고 당당하게 결혼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할게요.”

단솔은 지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이 점점 느려졌다. 또 한 번 입술이라도 맞추려나 싶어 기다렸지만, 지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단솔이 지수의 얼굴을 똑바로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형, 울어요!?”

“크흡, 아니야…….”

그 뒤로도 지수는 연신 아니라면서 코를 훌쩍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지수의 모습을 안다는 점에서 단솔은 왠지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최 PD님이요, 다큐 첫 방송 같이 보자고 하세요. 형도 같이 봐요.”

“아, 그래? 벌써 편집이 끝났대? 입국한 지 얼마나 됐다고. 최 PD가 하여튼 일은 잘해.”

“언제 입국했는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형?”

지수는 그제야 제 말실수를 자각했다. 제가 아프리카까지 쫓아간 걸 단솔은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들키면 저를 소름 끼쳐 하지 않을까.

지수는 솔직해지지 못하고 거짓말을 했다.

“어…… 그…… 최 PD랑 연락할 일이 있어서. 딱 연락을 했는데 그…… 입국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더라고.”

다행히 단솔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 듯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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