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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28화 (128/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28화

“계약금이랑 계약 기간부터 확인해. 숙소는 이렇게 제공될 거고, 연습 일정이랑 트레이너는 이렇게. 아, 연습실이랑 녹음실도 보고 갈래?”

계약 조건을 이야기하는 지수는 일주일 만에 제법 대표다운 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가 대표인 줄도 몰랐던 멤버들은 회사에 도착하고서부터 얼음처럼 꽝 얼어 있었다.

“카페테리아가 들어오긴 할 건데, 아직 인테리어 공사가 남아서 시간이 좀 걸려. 그때까지는 그냥 카드로 써. 한도 같은 거 없으니까 마음껏 먹어도 되는데, 부었느니 살쪘느니 하는 소리 들리면 바로 식단 조절 시작할 거니까 조절해서 적당히 먹어.”

단솔이 이전 소속사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 때문에 지수는 꽤 괜찮은 조건들을 내밀었다.

실은 더 많은 걸 넣고 싶었는데 그러면 멤버들이 의심할 거라는 단솔의 말에 이것저것 빼고 난 후였다. 그마저도 지난 소속사에서 제시한 조건에 비하면 파격적인 조건들이라, 까불면서 좋아할 줄 알았던 멤버들이 반응이 없자 지수는 눈썹 부근을 매만졌다.

“왜 다들 말이 없어? 혹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말해. 지금이라도 바꿔 줄 테니까.”

단솔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대형 기획사와 비교해 봐도 계약 기간이나 계약금 등이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여덟 명이 함께 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표정을 굳힌 채 말이 없었다.

“나…… 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 혹시 뭐 이상한 거 있어?”

“이상해.”

침묵을 지키던 우현이 입을 열었다.

“어? 어떤 부분이……?”

“계약 조건이 너무 좋잖아. 지수 형, 무슨 자선 사업 같은 거 해요?”

단솔의 귓가에 연규가 속삭였다.

“요즘 너무 이미지 관리에 심취해서…… 저러시는 걸까? 저러다 거지 되면 어떡해…… 형이 좀 말려 봐.”

귀가 밝은 지수에게도 그 소리가 다 들려왔다.

“이 정도로 거지 안 돼. 계약서 보면 알겠지만, 공동 대표라 나 혼자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지수의 말에 민재가 먼저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갑과 을이 어쩌고, 전속 계약이 어쩌고, 어려운 말을 전부 넘긴 민재가 제일 마지막에 있는 서명란을 읽었다.

“정대수? 이 정대수가 그 정대수예요?”

“그래, 인마. 불만 있어?”

TV에 나오는 사람을 보듯 대수의 이름을 막 부르던 민재가 당사자의 등장에 입을 헙, 하고 다물었다. 대수는 마침 현진과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 아니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안 그래도 조용한 사무실이 대수의 등장으로 더 조용해졌다. 멤버들이 움직이길 기다리며 단솔이 커다란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걸 보고 있던 지수가 입을 열었다.

“더 검토하고 싶으면 가져가서 보고 오던가. 여기서 밤새울 거야?”

“아, 그냥 해요. 형, 아니 대표님 나중에 무르기 없기예요? 서, 선배님도 동의하신 거 맞죠?”

우현이 용기를 내어 대수에게 물었다. 팔짱을 끼고 앉은 대수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 먼저 사인을 하자, 다른 멤버들도 펜을 들었다.

“단솔이 형, 안 해?”

제이콥이 단솔에게 물었다. 단솔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이미 아까 했는데…….”

지수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계약 조건은 보지도 않고 사인을 한 뒤였다.

단솔은 여전히 모르고 있지만, 아프리카에서의 일련의 사건을 아는 멤버들은 잔뜩 경계의 눈빛으로 지수를 쳐다보았다.

그들 눈에 지수는 어린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보일 뿐이었다. 어쩐지 시댁 식구가 일곱 명이나 생겨 버린 기분에 지수는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어, 눈 온다.”

“집에 어떻게 가지…….”

단솔이 중얼거렸다. 버스를 타고 꽤 먼 길을 온 멤버들이었다. 아직까지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 잘 알아보는 사람이 없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내 차랑 쟤 차로 나눠서 태워 줄게.”

지수가 대수를 가리켰다. 현진은 사색이 된 다이노소울 멤버들을 보고 키득거렸다.

“어째, 오빠 차는 아무도 타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그럼 걸어가라고 해.”

“매니저는 구해지는 대로 붙여 줄게. 면접 보고 있긴 한데,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네.”

“저! 아는…… 분 있는데.”

단솔이 지수의 말에 손을 번쩍 들었다. 집에서 놀고 있는 길성이 떠오른 것이었다. 취향이 까다로운 지수가 구해 주는 매니저라면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할 거라는 건 알지만, 그간 다이노소울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해 온 사람은 어찌 보면 길성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야?”

일은 좀 못 하지만, 다이노소울에게 길성만큼 편한 사람이 없었다. 단솔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웃었다.

“그럼 오라고 해.”

“면접 보러요?”

“아니, 일하러. 네가 추천하는 사람인데 굳이 면접까지 볼 필요는 없지.”

“그. 그래도…….”

세상에 둘만 남은 양 서로 집중한 모습에 멤버들도, 현진도, 대수도 이상함을 느꼈지만, 굳이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사는 언제 할 거야?”

“아 맞다 숙소……!”

“집에 가기 전에 한번 둘러보고 가자, 필요한 가구도 뭐가 있는지 봐야 하고.”

* * *

새로운 숙소로 향하는 길, 대수의 차를 기피하는 멤버들 덕분에 대수의 차에는 단솔과 대수 단 두 사람만 탄 채였다.

다른 사람 무릎에 앉아서 가는 한이 있어도 지수의 차를 타겠다는 멤버들 덕분에 대수의 기분이 불쾌할까 봐, 단솔은 지수의 간절한 시선을 모른 척하고 대수의 차에 올라탔다.

“이런 일 해 본 적 없어서 부족한 게 많을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그런 거 없어요. 지금도 충분한데요. 꼭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라도 신은 것 같아요.”

단솔의 웃는 모습에 대수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이 와서 그런지 차가 많이 밀리고 있었다.

“이렇게 첫눈을 맞이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올해 첫눈이네. 저희 한창 더울 때 만났는데.”

단솔은 대수와의 첫 만남, 첫 촬영일을 기억해 냈다. 땡볕에 서 있는 단솔에게 기꺼이 제 그늘을 내주던 그때만 해도 이렇게 제 소속사 사장님이 될 줄은 몰랐는데.

“지수한테 들었어.”

대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단솔은 그의 표정만으로도 지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

“내 앞에서는……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혹시나 그 자식이 잘못하면…….”

대수는 말을 골랐다. 단솔은 신호 대기 중인 차의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다.

“혼내 줄게. 정신 차리라고.”

때마침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단솔에게는 적절한 타이밍에 바뀐 신호가 반갑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탄 차는 대수와 지수가 사는 주상 복합 건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선배…… 여기는……?”

두 사람의 집에 와 본 경험이 있는 단솔이 입을 쩍 벌렸다.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낸 단솔이 다시 배정된 숙소 주소를 확인했다. 아까는 어련히 나쁘지 않은 숙소일 거라는 생각만 하느라 미처 동네를 확인하지 못했다.

대수와 지수가 각각 차지한 펜트 하우스를 제외하더라도, 애초에 부자들만 사는 아파트였다.

“한지수 집 바로 아래층이야. 한 대표가 애인이랑 멀리 떨어져 사는 게 싫다고 우겨서.”

“……죄송해요.”

“죄송할 거 없어. 그 집 어차피 한지수 거였으니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소음도 싫다고 비워 둬서 애초에 계속 공실이었거든.”

단솔은 짐짓 표정이 심각해졌다. 도대체 이 형들은 돈이 얼마나 많은 걸까. 갑자기 느껴진 빈부 격차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 * *

“단솔이 형! 여기 왜 바다 있어?”

“제이콥! 저건 바다가 아니라 한강이라는 거야 han river.”

“Oh my god. That’s han River? really?”

“맞아 바로 그 한강이야. 형 큰일 났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미 성공한 기분이 들어.”

“민재야 진정해.”

멤버들이 호들갑을 떠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지수와 대수는 방 여기저기를 살피며 필요한 가구를 세기 시작했다.

“큰 방이 네 개, 작은 방이 하나니까 한 명은 혼자 자고 나머지는 길성이 형이랑 두 명씩 자면 되겠다!”

집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민재가 외치는 소리에 지수가 난처한 듯 턱을 쓸었다.

“그 생각을 못 했네, 미안. 필요하면 리모델링을 해서라도.”

“우와 대박……! 두 명이 한방? 미쳤어…… 너무 좋아!”

“와! 여기 화장실이 우리 방만 해!”

벽을 쳐서라도 1인 1실을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간 네 명이서 작은 방을 나눠서 써 온 멤버들은 마치 운동장에라도 온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그들의 귀에 지수의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날마다 이런 상태라면 층간 소음 때문에 미쳐 버리는 게 아닐까. 지수의 표정이 점점 살벌하게 굳어지던 그때, 단솔이 조용히 지수의 옆에 다가와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종종 형 집에…… 놀러 가도 돼요? 저 혼자서요.”

지수는 당장이라도 단솔의 손목을 붙들고 제집으로 올라가고 싶은 걸 참느라 손톱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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