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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26화 (126/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26화

“다치진 않아서 다행이네. 잠시만, 양말 가져다 둔 거 있어.”

지수는 멍하니 서 있는 단솔을 자신의 사무실로 끌고 들어갔다.

[대표 한지수.]

그의 책상에 있는 조그마한 아크릴 명패가 낯설었다. 책상 앞 소파에 단솔을 앉힌 지수가 우당탕하고 움직이며 양말을 찾았다. 아직 텅 빈 소리가 나는 서랍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깟 양말이야 버리면 되는데. 단솔은 제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 찐득한 음료 자국이 남는 게 미안했다.

“신발 벗어 볼래?”

마치 하인이라도 된 양 지수가 단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카펫, 좋아 보이는데…….”

신발을 벗지 않고 버티던 단솔의 발목을 지수가 조심스레 잡았다.

여기 올려 주면 되지? 지수는 더럽지도 않은지 단솔의 발을 제 허벅지에 올렸다. 갈색으로 물든 양말을 벗겨 내곤 새 양말을 꺼내 신기는 걸 그저 내버려 두었다.

평소의 단솔이라면 그를 말렸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럴 기운이 없었다.

“신발이 크네.”

“……제이콥이 빌려줬어요. 좋은 신발이 좋은 곳에 데려가 줄 거라고.”

“……슬리퍼가 있을 텐데. 신발은 세탁 맡기고, 이따가 형이랑 사러 가자.”

“이제 뭐라고 해요? 애들이 엄청 기대하고 있을 텐데. 그냥 형들이 장난친 거라고 하면…….”

단솔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실망한 멤버들의 얼굴들, 이제는 과거에 들었던 원망의 말까지 단솔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누가 장난이래.”

“이게 장난이 아니면 뭐예요? 지금 나 놀려요? 형인 줄도 모르고, 흐읍. 어제 밤새워 준비했다구요.”

“왜. 대표가 나면 준비한 거 안 보여 주려고?”

“진짜 왜 그래요! 더 이상 저희 비참하게 만들지 마요. 우리랑 계약할 마음 있는 거 아니잖아요. 저희는 지금 아니면…… 해체될지도 모른다구요.”

결국, 단솔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너무 간절해서, 간절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단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지수가 일어나 단솔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신생아를 안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단솔을 품에 안았다.

“거짓말 아니고, 장난도 아니야. 나 이 회사 너 때문에 세운 거야. 너랑 네 동생들 데려오려고.”

“네!?”

깜짝 놀란 단솔이 고개를 들었다. 뭘 잘못들은 사람처럼 단솔의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제 손등으로 단솔의 눈물을 훔친 지수가 단솔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나 꼭 혼나는 것 같아.”

“형. 저희 동정하지 마세요.”

단솔은 단호하게 말했다. 갈 곳이 없다고 해서 친분을 이용해 지수의 회사에 빌붙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불쌍하고 안타까운 존재로 남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단솔의 어깨를 지수가 붙잡았다.

“하…… 진짜 이렇게 보여 줄 생각은 없었는데.”

아직 정리도 다 되지 않은 사무실 풍경에 지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책상 아래에 쌓여 있는 박스 중에 하나를 꺼낸 지수는 단솔이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로 가져갔다.

“동정 아니고 투자. 나 네 덕분에 다이노소울 덕질 했잖아.”

지수가 꺼낸 것은 다이노소울의 데뷔 초부터의 무대를 나름대로 분석한 파일들이었다. 각 멤버별 장점과 단점, 어필할 수 있는 점을 분석한 자료가 한 박스나 됐다.

그 와중에도 단솔의 이름이 달린 파일이 가장 두껍고 개수도 많았다.

단솔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지수는 부끄러운 듯 붉어진 귀를 만지작거렸다.

“나름 분석해 봤는데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그쪽에서 계약 해지를 했더라고. 너희 꽤 괜찮은 원석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좌절하지 않아도 돼.”

멤버들이 밤새 고민한 자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꼼꼼하게 공들인 것이 보였다.

방금 전 겨우 갈무리한 눈물이 다시 비집고 나올 것 같았다. 단솔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이 없자, 지수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계약 조건 원하는 거 있으면 들어줄게. 연기든 노래든 우리 솔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줘요?”

“응?”

웅얼거리며 꺼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지수가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단솔이 다시 한번 말했다.

“왜 이렇게 잘해 주냐구요, 나한테.”

물기 가득한 단솔의 눈빛은 또 한 번 지수에게 기회를 주었다.

제대로 말을 할 기회.

번번이 그 기회를 놓쳤던 바보 같은 알파에게 단솔은 또 한 번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널 좋아해.”

“하지만 형은……”

단솔의 머릿속에 두현의 얼굴이 지나갔다. 지수 역시 단솔이 제 말에 주저하고 불안해하는 이유를 아는 듯 덧붙였다.

“네가 괜히 나랑 엮이면 네 이미지에 안 좋을까 봐 거짓말했어. 그땐 내 이미지가 말이 아니었잖아. 그리고 나 방송 끝나고 나서 걔랑 한 번도 본 적 없어.”

지수의 낮은 목소리가 단솔의 마음을 둥둥 울렸다. 지수의 올곧은 시선과 단솔의 불안한 눈빛이 얽혔다.

한 번쯤은 속는 셈치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제 마음이 이미 지수를 향해 있는 이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저 역시 지수가 그리웠으니까.

마음의 결정을 내린 단솔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거짓말, 이미 믿고 있으면서.”

단솔은 차마 아니라고는 하지 못했다. 지수는 천천히 다가갔다. 이번에는 몰래 하는 입맞춤이 아니었다. 서로의 눈을 마주한 채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수는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 듯 그들의 입술 사이에 겨우 한 줄기의 숨소리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서야 물었다.

“키스해도 돼?”

“될……걸요?”

단솔은 대답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수의 잇새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귀여운 걸 어떻게 남의 품에 둘 생각을 했을까.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고 사무실에 질척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똑똑.

멀고 먼 길을 돌아 맞붙은 두 사람이 떨어진 것은 기다리다 지친 대수와 현진이 노크를 했을 때였다.

얼마나 서로에게 푹 빠져 있었는지, 여기가 사무실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지수의 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단솔은 저도 모르게 하아 하고 숨소리를 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소파의 끝과 끝에 앉았을 때,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지수는 다리를 꼬고 앉았고, 단솔은 무릎 위에 쿠션을 올려놓고 있었다.

“오빠,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대수 오빠가 배고프대요. 적당히 하고 빨리 나오시라는데요.”

“어? 어…… 다…… 다 했어. 다 했을걸? 그렇지?”

“어. 네, 대표님.”

형이라고 부를 땐 언제고, 이제 와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건지. 지수는 그 호칭에 착실하게 반응하는 제 아랫도리를 보며 스스로가 몹시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 감자탕 가져왔는데요!”

단솔이 꼭 발표하기 위해 손을 드는 초등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어쩜 저 모습까지 저렇게 귀엽지. 감자탕이 아니라 생감자를 캐 먹으라고 해도 지수는 먹을 자신이 있었다.

“오, 저 감자탕 진짜 좋아하거든요.”

“어! 제가 나가서 세팅할게요!”

방금까지 제 목에 매달려 있을 땐 언제고, 단솔은 현진의 뒤를 따라 쌩하니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신발도 신지 않고 새 양말을 신은 채 총총, 발소리도 없이 뛰어나갔다.

쟤는 별게 다 귀엽네. 제가 신데렐라야 뭐야. 지수가 책상에 늘여 놓은 걸 대충 넣고 그 뒤를 따라 나가려고 할 때, 단솔이 총총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다.

“뭐 두고 간 거 있어?”

단솔은 대답도 없이 씩 웃으며 다가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지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방금까지 물고 빨고 하느라 젖어 있는 입술에서 촉 하고 살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뽀뽀 하나에 이렇게까지 사고 회로가 정지되다니. 지수는 그 자세 그대로 멍하니 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신발이요.”

오히려 단솔은 아무렇지 않은 듯 지수가 들고 있던 신발을 빼앗아 들어 척척 신더니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단솔에겐 조금 커다란 신발이 카펫에 직직 끌리며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지수는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지 못했다.

* * *

“지수 오빠는 왜 안 나와요?”

“어…… 조금 이따 나오신대요. 배가 별로 안 고픈가 봐요.”

잔뜩 화난 모습으로 들어갔던 단솔은 어느새 뺨에 발그레한 생기가 돌아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대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아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계약은, 할 거야?”

“어…… 네.”

“조건은 들어 봤어? 제대로 설명 들어. 혹시 헛소리하면 나한테 말하고. 나도 지분 절반 있으니까.”

“안 들어도 돼요. 설마 형들이 저한테 사기를 치시지는 않겠죠?”

헤헤거리는 단솔의 모습에 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지수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단솔에게 조언을 건넸다.

“원래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에요, 특히 돈 관련해서는.”

하지만, 딱 타이밍 좋게 나온 지수가 그 소리를 듣곤 대답했다.

“그래, 원하는 거 있으면 다 이야기해 봐. 내가 계약서에 조항으로 박아 줄게.”

“……켁! 큽!”

이제야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던 단솔이 갑자기 사레가 들렸다. 매운 국물이 코로 들어간 모양인지 콜록거리는 기침이 연신 이어졌다.

“솔아, 괜찮아?”

“그…… 괜찮아요. 계약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급해졌나 봐요, 제가.”

방금까지 입을 맞추다 온 탓인지, 단솔은 별거 아닌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성한 일 이야기를 하는데, 뭐 하는 거야 주단솔.’

단솔은 속으로 음란 마귀가 낀 자신을 원망했다. 지수는 그런 단솔의 속도 모르고 갑자기 사레가 들린 단솔을 걱정했다.

“집에 가서 멤버들이랑 상의해 보고 알려 줘요. 와 근데 이거 진짜 맛있네. 어디서 샀어요?”

현진과 대수가 식사에 집중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크흡, 산 건 아니고. 멤버 어머니가 챙겨 주셨어요.”

“야, 박현진이. 대표는 난데 왜 네가 계약서를 얘기해 이거 월권 아니야? 어떻게 생각해 정 대표!”

지수가 괜히 오버해서 현진을 장난스레 나무랐다. 하지만 대수만큼 지수와도 오래 본 사이인 현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뭐래, 지금 프린트기도 안 와서 어차피 계약서 못 뽑거든요. 계약서를 뽑은들, 찍어 줄 도장은 있고? 이제 소속 가수도 생겼으니까 오빠들도 제발 일 좀 해요.”

“난, 왜.”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던 대수가 억울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 오빠도 맨날 힘쓰는 일만 하지 말고 머리 쓰는 일을 하라고요! 무슨 짐꾼으로 취직이라도 한 거야 뭐야. 빨리 먹고, 빨리 움직입시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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