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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25화 (125/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25화

    ‘원래 본업이 따로 있는데, 본업을 한 10년 넘게 하다가 갑자기 회사를 차려서 오히려 단솔 씨보다 모르는 게 많을 거예요. 특히 아이돌은 더 모르니까 원하는 거 있으면 얼마든지 이야기해요.’

    본업을 10년 넘게 했다는 말에 멤버들은 단솔에게 홍삼 드링크를 쥐여 주었다.

    같이 가서 이야기하자고 몇 번이나 설득했지만, 다들 자신이 없는지 단솔의 등을 떠밀었다.

    “이번 회사는 괜찮을 것 같아. 본업이 따로 있으면 돈도 많지 않을까?”

    “음…… 아마 그렇겠지?”

    “만약에 형만 받아 준다고 하면…… 형이라도 가.”

    단솔을 배웅하던 우현은 그간 단솔에게 왔었던 연락을 눈치라도 챈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걸 준비한 것 같은데…….”

    단솔은 양손에 들린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다이노소울의 싱글 앨범과 각종 굿즈들, 멤버들의 프로필에, 춤 연습 영상이나 개인기 장면이 담긴 태블릿에, 민재의 어머니가 싸 주신 감자탕, 편의점에서 산 홍삼 드링크까지.

    단솔은 마치 자신이 영업 사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현도 단솔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우면 뭐 하나 뺄까?”

    “아냐, 됐어. 다 들고 갈 수 있어.”

    잘 안되더라도 최선은 다해 봐야지.

    지난 삶에서 가장 후회가 됐었던 건 방송에 출연한 것도, 연예인이 된 것도 아니었다.

    욕을 먹을 때 먹더라도 끝까지 싸워 보지 못한 것.

    사실, 사람들이 두려워 뭐라도 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 숨었던 게 단솔은 가장 후회스러웠다.

    * * *

    단솔은 민혁이 알려 준 주소를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분명 동네도, 건물도 맞는데 그 흔한 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장기 밀매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단솔이 건물 현관에서 기웃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단솔을 톡톡 쳤다.

    동그란 철제 안경을 쓰고 머리를 말아 올린 여자였다. 롱패딩을 입은 여자는 양손에 커피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단솔은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어디 찾아오셨어요?”

    “어…….”

    그러고 보니 회사 이름도, 대표의 이름도 듣질 못했다. 바보같이 기획사라는 말에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여기까지 와 버렸다.

    어딜 찾아왔다고 해야 하나, 단솔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종교 쪽에서 온 것치곤 눈이 참 맑으시네요.”

    “어…… 저는 그게 아니라.”

    “판매? 원래 이런 거 잘 안 사는데 관상이 너무 좋으셔서, 한번 들어와 보실래요? 저희가 그렇게 나쁜 회사는 아니거든요. 까칠한 대표가 두 명이나 있는 게 흠이기는 한데. 마스크 살짝만 내려 보실까요?”

    “어…… 저는 그게 아니라 이 건물에 있는 엔터.”

    “엔터? 연예인 쪽 관심 있으신가? 그럼 저희 회사 찾아오신 것 같은데? 혹시 대표님 지인이세요?”

    “그…… 제가 이름은 잘 모르고.”

    “이 건물 찾아온 건 맞죠? 어차피 이 건물엔 우리 회사 하나밖에 없거든요.”

    대표가 돈지랄이 지나쳐서 외국계 인테리어 업체를 골랐더니 일 처리 속도가 굼벵이보다 느리다는 둥, 자신이 답답한 마음에 며칠 전부터 나와서 셀프 인테리어를 하느라 허리가 아파 죽겠다는 둥.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내내 여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떠들었다.

    직원이 이렇게 편하게 이야길 하는 걸 보면 대표는 좋은 사람일 것 같아 단솔은 슬며시 웃었다.

    공룡 엔터에서는 다이노소울은 물론 직원들도, 연습생도 대표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단솔은 꼭대기 층에 도착해 여자의 손에 이끌려 회사의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지 않은 듯 사무실 안에는 뜯다 만 박스나 비닐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새 물건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대표님! 손님 왔어요! 완전 잘생긴 손님이에요!”

    아이 씨. 어디 갔어, 또. 일단 앉아 계세요.

    단솔을 비닐도 다 뜯지 못한 소파에 앉힌 여자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내밀더니 안쪽에 있는 대표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건가.

    그냥 앉아 있기도 민망해 눈치를 보던 단솔이 일어났을 때, 단솔이 들어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대표실이 있는 복도를 기웃거리던 단솔이 깜짝 놀라 다시 제 짐을 놓아둔 소파에 앉았다.

    “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대수였다. 대수는 단솔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놀란 것은 단솔도 마찬가지였다.

    ‘대수 선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선배님 여기는 어떻게…….”

    그때, 안쪽에서 여자와 대표라는 사람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잘생겼다고? 나보다?”

    “그렇던데요?”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난 살면서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어.”

    대수와의 인사는 별개로 단솔에게는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아! 선배님! 인사는 나중에 드릴게요. 제가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어…….”

    홍삼 드링크를 품에 안은 단솔이 안쪽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90도로 인사를 했다.

    대수는 아까부터 곰이라도 된 것처럼 어, 하는 추임새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는 다이노소울!”

    주단솔인데요…….

    호기롭게 인사를 뱉은 단솔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여자와 함께 나온 사람은 지수였다.

    생각났다, 저 여자. 알오매치 서바이벌을 촬영하며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대수의 코디네이터였다.

    메이크업을 잘 하지 않고, 옷도 대충 운동복만 입는 대수 덕분에 대부분 시간을 차에서 자느라 보낸다던.

    근데, 왜 지수는 여기서 나오는 걸까.

    단솔은 그 짧은 찰나에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다.

    민혁이 말한 그 대표가 공격적 투자로 지수와 대수를 영입했나. 하지만 여자는 대표를 데려오겠다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지수가 나왔다.

    “형…… 왜 거기서 나와요?”

    단솔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민혁은 알고 있었겠지. 왠지 자신의 간절함이 이용당한 것 같아 단솔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저에게 장난을 치려고 이런 일을 꾸민 건 아닐까.

    밤새 영상을 고르고, 프로필을 수정하고, 양손이 무겁게 음식을 포장해 준 민재의 부모님이 떠올랐다.

    ‘솔아, 네가 큰일 한다. 갔다 오면 엄마가 고기 구워 줄게.’

    제 어깨에 놓인 짐은 저 혼자만의 짐이 아니었다. 멤버들의 꿈이고,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희망이었는데. 팀의 존폐가 놓인 문제를 놓고 장난을 치다니.

    눈가가 빨개질 정도로 눈물을 참았지만 소용없었다.

    저에겐 너무도 어려운 일들이 그들에겐 언제나 쉬웠다. 안무 연습도, 새 핸드폰도, 망가진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마저도.

    단솔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졌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스르륵. 단솔의 품을 벗어난 병 음료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지는 소리를 냈다. 깨진 병에서 나는 은은한 홍삼 냄새마저 전부 다 구질구질했다.

    “솔아, 잠깐만 움직이지 마.”

    깨진 유리 조각이 단솔의 발등 위로 떨어졌다. 신발을 신어서 다치진 않았겠지만 축축하게 신발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큰일 났다. 오늘 여기에 온다고 제이콥이 굳이 비싼 신발을 꺼내 신겨 준 것이었다. 원래 제 것이 아니다 보니 제이콥의 신발은 단솔에게 한 마디가 커 헐떡거렸다.

    “왜…… 왜 이런 걸로 장난을 쳐요? 형들은…… 제가 재밌어요?”

    “아니야. 솔아 그런 거 아니니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응?”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전에 들었어요. 형이 그랬잖아요, 내가 불쌍해서 잘해 주는 거라고.”

    지수는 도대체 단솔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게 언제의 일인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럴 리가, 겨우 그따위 마음이었다면 내가 미쳤다고 아프리카까지 널 쫓아갔을까.

    “민혁이 형도 다 알고서 그런 거죠.”

    “아, 그런 거 아니야 솔아.”

    민혁이 개업 선물을 보낸다더니, 이거였나.

    유일하게 그가 단솔과 연락하고 지낸다는 걸 안 것은 아프리카에서였다. 단솔이 정신을 잃은 사이, 핸드폰을 충전시켜 주다가 알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제갈민혁에게 배신이니 어쩌니 떠들어 댄 게 실수였다.

    민혁이 이틀 전 미안함의 표시로 개업 선물을 보내겠다고 한 게 생각났다. 개업 선물이 단솔이었다니. 참으로 고맙고도 괘씸한 선물이었다.

    원래는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단솔을 찾아가 정식으로 제안을 할 계획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었다. 제 욕심을 과연 단솔이 달가워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있는 회사에서 계약 해지를 해 주지 않으면 그 몇 배가 되는 위약금도 물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거의 노예 계약에 맞먹는 계약서를 쓴 주제에 단솔의 회사에서 다이노소울에게 먼저 계약 해지 통보를 하면서부터 생겨났다.

    건물을 매입하고 인테리어 공사가 끝난 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단솔을 데리러 가려 했는데 인테리어 공사까지 지연되면서 점점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지수는 조급했다. 단솔 정도면 다른 회사에서도 눈독 들이는 사람이 많을 텐데.

    기회를 어떻게든 잡아, 제가 만들어 준 울타리 안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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