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24화
“형! 이거 말고 이거 사! 망고! 500원 더 비싼 거야.”
“아냐, 내가 좀 살아 봐서 아는데 민혁이 형은 망고보다는 토마토를 더 좋아할 거야. 자연 친화적이잖아. 이건 유기농이야.”
“아! 그럼 알로에로 사자.”
단솔은 대형 마트의 음료 코너에서 연신 동생들과 실랑이 중이었다.
민혁의 작업실에 찾아가기로 했다는 걸 안 우현과 민재는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단솔을 이끌었다.
“안 돼, 알로에는 세일 안 하잖아.”
“괜찮아. 내가 살게.”
알로에 음료가 든 박스를 안은 우현이 계산대로 척척 걸어 나갔다. 단솔은 남몰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민혁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정작 제가 그런 염치없는 말을 내뱉을 수나 있을지, 자신도 없는데 동생들은 단솔이 뭐라도 얻어 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형아, 혹시 그 형이 우리가 너무 불쌍해서 버리는 곡이라도 준다고 하면 넙죽 받아 와야 해?”
“민재야 그러면 안 돼. 형 그냥 안부 인사하러 가는 거야.”
“아니…… 혹시나 모르잖아. 진짜 진짜 쓸모없어서 버리는 곡이 있을지도…….”
“아직도 정규 앨범에 미련이 남았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얼마나 기대했는데.”
민재가 정규 앨범을 내면 제가 작사한 곡을 하나라도 넣고 싶다며 밤새워 노트에 가사를 끄적이던걸 단솔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나마 나이가 있는 저나 우현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 조금 빨랐지만, 어린 동생들은 아직 현실적으로 감이 오질 않는 듯했다.
정규 앨범이 문제가 아니었다. 8명 모두를 받아 주는 곳을 찾지 못하면 결말은 하나였다. 그래서 더더욱, 해체만큼은 막고 싶었다.
마트를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내내 우현은 말이 없었다. 덩달아 민재 역시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어 세 사람이 걷는 길에는 달그락거리며 병 음료가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혹시나…… 무시하거나 자존심 상하게 하면 그냥 와.”
“그 형 그런 사람 아니야. 걱정하지 마.”
한참이나 말이 없던 우현이 버스가 1분 후에 도착한다는 알림을 보고 단솔에게 당부했다.
“그런 사람은 없어, 그런 상황이 있는 거지. 괜히 우리 때문에 구걸하듯이 도와 달라고 하지 말고.”
“그런 상황에도 안 그런 사람이야. 진짜 걱정하지 마.”
“형아. 나 아까 했던 말, 장난인 거 알지?”
단솔을 걱정하는 우현의 말에, 민재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방금 전 민혁이 버리는 곡이라도 있으면 주워 오라고 했던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거짓말. 진심이었으면서?”
“아…… 아니야!”
“그럼, 버리는 곡 있어도 주워 오지 마?”
“어……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하면 안 돼?”
푸흐흐. 단솔의 장난에 민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단솔은 장난스레 민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다녀올게.”
“형, 조심히 다녀와.”
“형아 조심히 갔다 와!”
“아, 맞다 이거!”
그때까지도 음료를 안고 있던 우현이 단솔에게 박스를 넘겼다. 생각보다 묵직한 박스가 꼭 제 마음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단솔은 두려웠다. 제 욕심에 고맙고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봐.
민혁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지.
7단솔은 머릿속으로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을 단어들을 골라냈다.
* * *
민혁의 작업실은 지하에 있었다. 이전에 살던 단솔의 숙소와 다른 점은 지하로 들어가는데도 공기가 뽀송뽀송하다는 것이었다.
“같은 지하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르냐…….”
단솔이 작업실 입구에서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안쪽에서 민혁이 문을 열었다.
“단솔 씨 왔어요? 오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아…… 네. 근데 형 저 온 거 어떻게 아셨어요?”
단솔의 순진한 물음에 민혁이 웃으며 현관 입구 쪽을 가리켰다. 보안용 도어록 옆에 작은 카메라가 달려 있었다.
“우와…….”
단솔이 작게 내뱉는 감탄에 민혁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추워요. 얼른 들어가요.”
민혁은 신발장에서 손님용 실내화를 꺼내 단솔의 발치에 놓았다. 그저 실내화일 뿐인데, 부드러운 가죽이 발을 감싸는 촉감에 단솔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서도 단솔의 감탄은 이어졌다. 녹음실처럼 보이는 공간이 여러 곳이었다. 부탁을 하러 온 단솔이 주눅 들 만큼, 민혁의 작업실은 크고 화려했다.
“혹시 그거 나 주려고 가져온 거예요?”
“어, 네…….”
“잘 마실게요. 나 이거 진짜 좋아하는 건데.”
“아, 그거 저희 멤버가 사 줬어요. 우현이라고…….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고.”
“잘 마시겠다고 전해 줘요.”
단솔은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의 작업실에는 자신이 사 온 음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 보이는 음료들이 투명한 냉장고에 일렬종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괜히 무안해진 단솔은 유리병에 붙은 라벨만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어요?”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민혁이었다.
“그냥, 잘 지냈어요.”
구걸하듯 도움을 바라지 말라는 우현의 말이 생각났다. 단솔은 저도 모르게 자존심을 챙겼다.
할아버지의 낡은 시골집에서 봤던 민혁과 서울의 노른자 땅에 작업실을 차린 민혁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소속사랑은…… 어떻게 된 거예요?”
단솔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말을 하면 우스꽝스럽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단솔은 애써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냥…… 끝났어요.”
“혹시 내가 도와줄 만한 일이 있어요?”
하지만 민혁은 그런 단솔의 마음까지 다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단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참이나 입술만 깨물었다.
“멤버들이랑…… 같이 계속하고 싶어요.”
사실 동생들에겐 말을 못 했지만, 단솔에게 개인적으로 접촉을 해 온 소속사는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단솔이 다이노소울 멤버와 다 같이 가는 방향을 이야기하자, 다들 난색을 표했다. 어떻게 돌고 돌아온 삶인데, 또다시 저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 이번에 회사를 차렸는데. 혹시 괜찮으면 한번 만나 볼래요?”
“진짜요? 근데…… 아무래도 저희가 여덟 명이나 되는데…….”
“음…… 그분이 아이돌을 상당히 좋아해요. 특히 다이노소울 팬이라고 하더라고.”
“네? 저희 팬이요?”
“응. 이번에 계약 해지 됐다는 기사 보고 관심 보이더라구요. 약속 잡아 줄게요. 한번 가 볼래요? 근데 회사를 만든 지 얼마 안 돼서…… 시스템이 체계적이고 이런 곳은 아니.”
“괜찮아요!”
단솔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시작을 함께한 멤버들과 다 같이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지방 축제만 뱅뱅 돌아도 좋을 것 같았다.
* * *
“아…… 회사 이름을 뭐로 하지? 수수깡 어때? 악으로 깡으로!”
“아, 그런 건 촌스럽죠. 요즘은 그렇게 악바리처럼 하는 거 안 좋아해요. 수수 감사절 어때요? 풍요로워 보이고.”
“좋은데? 일단 후보에 올려놓을게. 옥수수는 어때 이빨 부자 느낌으로.”
지수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대수의 코디인 현진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수가 책장 위치를 옮기다 말고 목장갑을 벗어 던졌다.
“왜, 차라리 강냉이로 하지? 심심해? 털어 줄까?”
“아, 왜 또 그래 정 대표? 우리 진지하게 회사의 미래에 대한 회의 중이잖아.”
대수는 순간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한지수가 회사를 차려 나온다는 말에 휩쓸려서는 안 됐었는데.
데뷔 초부터 한 회사에만 줄곧 있었던 대수에게 먼저 동업을 제안한 것은 지수였다.
원래 소속사의 매니지먼트에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10년 넘게 활동을 하자,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고픈 욕심이 생겨났다.
다행히도 대수를 아들처럼 여긴 전 소속사 대표가 오히려 대수의 독립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에 더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지수가 저렇게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때 한 번만이라도 저를 말려 주지 하는 원망이 피어오를 지경이었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수수에 집착해. 뇌물 수수라도 할 꿍꿍이야?”
“지수, 대수. 사람들이 우리 보고 수수 커플이라고 하던데?”
“아…… 미친 새끼.”
그럼 그렇지. 저 빈약한 상상력으로 하긴 뭘 한다고.
“수 엔터.”
“어?”
“수 엔터로 하라고 대충 짓고 빨리 이거나 같이 옮겨.”
아이디어를 내놓고 민망한 듯 대수가 다시 책장을 집어 들었다. 그런 대수를 보고 지수가 중얼거렸다.
“오오, 역시 경영학과라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