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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20화 (120/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20화

    “아으…… 머리야…….”

    단솔은 또다시 심한 숙취에 전 사람처럼 일어났다. 벌써 이곳에 온 뒤로 두 번째로 한 기절이었다.

    “형 괜찮아?”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머리가 아팠다. 뇌가 다 녹아서 눈, 코, 입으로 나오는 기분이랄까. 울렁거림과 구역질은 덤이었다.

    “우웁.”

    “오 쉣, 화장실 화장실!”

    다급하게 입을 막은 단솔을 제이콥이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여전히 하쿠카누의 움막에 있다고 생각한 단솔은 무슨 화장실을 찾나 싶었다. 초원에서는 모든 곳이 화장실이 아니었던가.

    단솔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때까지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침대……?

    잠깐만, 여기가 어디야.

    속을 게워 내니 머리가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계속된 구토에도 나오는 것은 아까 전 모란에게 받아 마신 노란 주스로 추정되는 액체가 전부였다.

    “도대체 뭘 준 거야…….”

    머리가 맑아진 느낌에 뒤이어 오한이 들었다. 아무래도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입을 여러 번 헹군 단솔이 욕실을 나섰다. 욕실은 현대식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심지어 단솔도 익히 아는 브랜드의 욕실용품이 어메너티로 비치되어 있었다.

    단솔은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여기…… 혹시 호텔이야?”

    탁 트인 초원이 발코니 밖으로 펼쳐져 있었고, 그 앞에는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

    “내가 여기 왜 있어?”

    “형! 기억 안 나?”

    “형이 미쳐 가지고! 아악!”

    “미안.”

    콘솔 게임을 하던 민재가 단솔을 보고 뭐라 말하려는 걸 우현이 실수인 척 민재의 뒤통수를 가격해 입을 막았다.

    “형이 이상한 거 받아먹고 쓰러져서 이쪽으로 옮겼어. 식중독인 것 같대.”

    “정말 그 주스가……! 그럼…… 촬영은?”

    “끝났어.”

    “어떡해…….”

    단솔의 표정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자신 때문에 촬영을 제대로 못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우리도 할 만큼 했는데.”

    “……그래도 ……이 방은 그럼 최 PD님이 잡아 주신 거야? 우리 올 때만 해도 제작비 많이 없다고…….”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는 지수가 예약한 것이었다. 현지 가이드에게 모란이 건넨 주스가 잠시 환각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일 뿐 몸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는 대답을 여러 번 듣고서야, 그들은 호텔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미친 듯이 텐션이 올랐던 단솔은 건전지가 빠진 인형처럼 축 늘어져 지수의 품에 안겨 들어왔지만, 자신이 지수를 만났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현은 단솔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멤버들에게 지수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혹시, 나 만난 거 기억 못 하면 굳이 말하지 마.’

    ‘예? 형…… 그래도.’

    ‘정말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고. 지내는 동안은 이거 써.’

    지수는 선뜻 환전한 현금까지 우현에게 건네주었다.

    ‘됐어요……!저희도…….’

    저희에게도 돈이 있다고 말하려던 우현이 입술만 깨물었다. 생각해 보니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제대로 짐도 챙기지 못한 멤버들이었다. 심지어 단솔을 포함해 멤버들 모두 하쿠카누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써. 난 급하게 귀국해야 하는데 혹시나 솔이 갑자기 아프거나 할 수도 있잖아.’

    그럴 거면 그냥 고백을 하지.

    지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솔 역시 지수에게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우현은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저 때문에 프로그램을 망쳤다고 울상이 되어 있는 단솔을 달래 주는 일이었다.

    “그래도 찍을 건 다 찍었대.”

    아프리카에 올 때부터 멤버들은 정규 앨범을 발매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덕분에 힘든 일정에도 그 어느 방송보다 열심히 임할 수 있었다. 사냥도 하고 뱀도 잡아먹지 않았던가. 마치 진짜 부족민이 된 것처럼 그들의 삶을 최선을 다해 따라다닌 멤버들이었다.

    물론 최 PD는 그중에서도 하쿠카누의 환각제를 먹고 춤추는 단솔의 모습을 찍었다는 걸 가장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똑똑.

    “들어오세요!”

    “어? 단솔 씨, 일어났네요. 괜찮아요?”

    “네…… 저는 괜찮은데, 촬영을 못 해서 어떡해요.”

    “아, 괜찮아요.”

    최 PD는 손사래를 쳤다. 예능이라면 몰라도 이건 다큐였다. 취재에 실패한다면 실패하는 것조차도 스토리가 된다. 게다가 하쿠카누의 성인식을 보지 못했을 뿐, 베일에 싸인 부족 내부에 들어갔다 온 건 사실이니 따지고 보면 실패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공했으면 짜고 쳤다고들 했을걸요. 이 정도도 충분해요. 귀한 자료도 여럿 건졌고.”

    “근데…… 이 호텔은……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저희 처음에 왔을 때만 해도…… 제작비 모자란다고 쥐랑 바퀴벌레 나오는 데서 잤잖아요.”

    단솔의 순진한 물음에 최 PD가 당황한 듯 과장해서 웃었다.

    “하하하. 단솔 씨도 참, 그…… 한국에…… 제가 아는 분이 다큐 마니아예요. 우리가 하쿠카누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투자를 좀 해 주셔 가지고. 음…… 뭐 남은 시간은 좀 즐기다 오라고 도와주셨어요.”

    일찍이 지수에게 입단속을 당한 최 PD는 지수를 다큐에 미쳐서 제작 지원까지 해 주는 독지가로 둔갑시켰다.

    최 PD는 화제를 돌리려고 서둘러 가지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요. 저희 스태프들 짐도 대부분 거기 두고 와서 저희도 가진 게 별로 없긴 한데…….”

    “그래도 있는 게 어디예요.”

    “맞아, 저희 여권도 PD님한테 안 맡겼으면 싹 다 아프리카 초원에 두고 올 뻔했잖아요. 저희는 진짜 뭐든 입을.”

    하쿠카누의 전통 의상은 치마처럼 늘어져 있어 왠지 밑이 허전한 느낌이었다. 일상복의 소중함을 느낀 멤버들은 최 PD가 가져온 옷이 무엇이든 입을 작정이었다. 게다가 내일모레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쿠카누의 전통 의상을 입고 갔다간 관심에 미친 아이돌로 커뮤니티를 떠돌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입을 준비가 됐던 민재가 옷을 보더니 입을 ‘헙.’ 하고 다물었다.

    노랑, 빨강, 파랑 색색의 티셔츠에 ‘I LOVE KOREA’가 새겨진 티셔츠였다.

    “디자인이 좀…… 그런가요. 하하.”

    원주민들을 만나면 나눠 주려고 들고 온 티셔츠였다. 스태프들끼리 이런 문명의 프린팅이 잔뜩 되어 있는 티셔츠를 들고 가는 게 맞냐 틀리냐, 로 갑론을박을 벌이다 결국 놓고 간 물건이었다.

    “바지는…….”

    “바지는 비교적 멀쩡해요.”

    아프리카의 따가운 태양과 모기의 공격을 막아 주기에 최적화 되어 있는 냉장고 바지였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우현은 재빨리 가장 무늬와 색깔이 덜 화려한 까만색 물방울무늬 바지를 골랐다.

    “아! 우현이 형! 먼저 고르는 게 어디 있어!”

    “나라면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재빨리 고를걸, 이 애송이야.”

    티셔츠까지 짙은 파란색으로 고른 우현이 만족스러운 듯 가장 먼저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단솔은 동생들 등쌀에 못 이겨 가장 마지막에 남은 것을 입어야만 했다. 분홍색 커다란 꽃들을 화려하게 수놓은 바지와 노란색 티셔츠였다. 심지어 티셔츠는 아동용인 것처럼 작아 팔이 껑충 올라와 있어 왠지 더 우스꽝스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 너희한테 이런 부탁한 적 없는데. 다이노소울 리더로서 하나만 부탁할게. 바지만 바꿔 주면 안 될까.”

    어차피 S 사이즈의 티셔츠는 단솔이 아니면 입지도 못할 테지만, 바지 정도는 바꿔 줄 줄 알았는데 멤버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 * *

    의상 때문에 본의 아니게 호텔 안에서만 지낸 멤버들은 모두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단솔이 차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살면서 이곳에 올 일이 또 있을까. 모란이나 마을 사람들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왔다. 주스를 마신 이후로 무슨 일이 있긴 했던 것 같은데 아무도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혼몽한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은데. 단솔은 자꾸만 그 목소리에서 지수를 찾았다. 멤버들에게 물어볼까 고민도 했지만, 혹시나 지수가 왔었냐고 물어봤다간 짝사랑에 빠져 환청이 들리는 사람 취급을 할 게 뻔했다.

    지금 그 누구보다 잘나가는 지수가 굳이 이 아프리카까지 와서 저를 만날 리가 없었다.

    “형, 왜 이렇게 센치해. 혹시…… 아직도 바지 때문에 그래?”

    “아니야, 그런 거.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나름 편해.”

    “그럼 왜 그러고 있는 건데.”

    옆에 앉은 우현이 단솔에게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드디어 정규 앨범을 낼 수 있다고, 어떤 콘셉트가 될지 벌써부터 떠드는 멤버들과 달리 우현은 단솔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냥…… 나는 모란이랑 인사도 못 했잖아. 형, 형 그러는 게 귀여웠는데.”

    귀엽기는 개뿔. 그 자식이 뭘 하려고 했는데.

    우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단솔 대신 이를 박박 갈았다. 우현은 주머니에서 지수가 건네준 목걸이를 꺼냈다. 모란에게 받자마자 단솔의 목에 걸어 주었지만 단솔이 춤을 추는 동안 매듭을 묶어 놓은 가죽끈이 풀리는 바람에 챙겨 놓은 것이었다.

    “이게 뭐야?”

    “모란이 줬어. 선물.”

    “목걸이인가.”

    “어.”

    단솔은 오묘한 푸른빛이 도는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분명 모란이 준 선물인데, 왜 지수가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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