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15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단솔은 거실에 누워 다큐멘터리 전문 채널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맹수들에게 물어뜯기는 초식 동물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 저런 데 가면……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거 아니야?”
다른 멤버들은 게임을 하거나 방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까부터 민재는 단솔의 옆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그리고 인간은 먹이 사슬의 제일 꼭대기에 있어, 머리만 잘 쓰면.”
“저렇게 빨리 달리면 머리 쓸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난 머리도 나쁜데 어떡하지 형?”
“하…… 불안하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 왜 옆에 붙어서 그러는 거야. 너 안 자면 키 안 큰다?”
“나 이미 형아보다 커…….”
“그래? 언제 그렇게 컸지…… 너 원래 진짜 엄청 꼬맹이였는데.”
“헤헤 나는 형이 리더라서 좋아. 우리…… 진짜 해체되진 않겠지? 그냥 열심히 하라고 대표님이 세게 말한 거겠지?”
아까 길성과의 언쟁이 꽤 충격이었던 듯, 민재가 단솔의 옆에 누우며 말했다.
‘형이 내 인생 망쳤어. 이제 와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회귀 전, 그룹의 해체가 결정되고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수년도 더 지난 일은 이렇게 불쑥불쑥 새로운 얼굴을 하곤 튀어나왔다.
“형! 단톡 봤어?”
“무슨 단톡?”
생각해 보니 핸드폰을 아침에 꺼 놓고 한 번도 켜지 않았다. 민재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어 보였다. 다이노소울 멤버 8명과 길성이 함께 있는 방이었다.
[길성이형 : (사진)]
[길성이형 : 사장님이 오케이 하셨어. 출국할 준비해.]
“예스! 형! 우리도 이제 정규 앨범 나오나 봐!”
질러 놓고도 대표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단솔은 길성이 보낸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형! 이거 진짜야? 우리 정규 앨범 낼 수 있어?”
“야, 그래도 아프리카까지 갔다 와야 해. 그래도 좋아!”
“첫 해외 스케줄이다! 오히려 좋아!”
방에 있던 멤버들이 뛰쳐나와 소리를 질렀다. 그 소란 속에서도 단솔은 재차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큐멘터리에 출연한다는 조건과 다녀온 뒤에 정규 앨범과 정산서를 주는 조건 외에 다른 항목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팀 해체와 관련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형! 뭘 그렇게 열심히 봐. 혹시 뭐 이상한 거 있어?”
“아니! 없어!”
우현의 물음에 단솔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야, 제갈민혁. 너 진짜 솔이랑 연락 안 되는 거 맞아?”
“몇 번을 말해요. 저랑도 안 한다니까.”
“근데 왜 걱정을 안 해?”
“……그건 ……단솔 씨도 다 큰 성인인데. 뭐…… 연락을 안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민혁은 음식 차리고 있는 자신과 달리 아까부터 제 옆에 찰싹 달라붙어 단솔의 소식만 묻고 있는 지수에게 퉁명스레 대꾸했다.
애초에 최 PD의 좌천 파티를 하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이런 걸 하자고 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지수는 뒤늦게 단솔을 찾고 있었다.
“자꾸 집어 먹지만 말고, 지수 씨도 좀 옮기시죠? 대수 선배 혼자 요리하는데.”
“지수 씨? 와 이제 프로그램 끝났다고 막 맞먹네요, 제. 갈. 민. 혁 씨? 근데 왜 정대수는 선배고 나는 지수 씨야?”
지수에게 고백을 하고 돌아온 단솔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아는 민혁은 이제 와서 단솔을 애타게 찾는 지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솔이 애써 다른 사람들의 연락을 전혀 받지 않으려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제 바뀐 연락처를 알려 주지 말라고 부탁한 것도 전부 지수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솔이 회귀자라는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민혁은 고립을 택한 단솔이 걱정돼 꾸준히 연락을 했지만, 오늘 같은 자리를 만들어도 단솔은 한 번도 나오질 않았다.
“선배 노릇을 못 하니까 선배가 아닌 거지. 그나저나 은퇴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한지수 씨?”
핑크색 에이프런을 걸친 대수가 음식을 내오며 일갈했다.
오이를 씹어 먹던 지수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거실에서 강아지와 놀던 태오가 주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은퇴하면 안 되죠. 돈을 얼마나 들여서 만든 이미지인데. 형질 차별 반대 운동의 상징 한지수 선배님……! 전 진짜 솔직히 프로그램 끝나고 지수 형 완전 맛탱이 갈 줄 알았는데…… 와…… 이미지 더 좋아짐. 전 하수였어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지수는 형질 평등을 내세우는 비영리 단체에 알오매치 서바이벌의 출연료 전액을 기부했다. 형질에 관한 발언이 거의 금기에 가까웠던 인터뷰에서도 거침없는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됐다.
그 전까지의 지수가 약간은 껄렁하고 시니컬한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할 말을 다 하는 논객처럼 비치곤 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시점인 걸 감안하면 태오의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미지에 신경을 써요? 형 원래 그런 스타일 아니었잖아요.”
“말하면 네가 알겠어? 넌 하수라며.”
지수는 말해 줄 생각도 없으면서 태오를 놀렸다.
기실 지수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바꾸려 애쓴 건 순전히 단솔 때문이었다.
두현이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면서 다행히 시간을 좀 벌 수 있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단솔이 좋아하는 대상이 전 국민을 속인 사기꾼인 것보다야, 인권 의식이 있는 놈인 게 낫겠지.
정작 그 절절한 마음을 허술하고, 매정하게 걷어찬 주제에, 조금씩 대중의 반응이 달라지자마자 지수는 뻔뻔하게도 단솔을 찾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미 없는 번호가 되어 버렸다는 냉혹한 기계음뿐이었다.
“이야, 살면서 남의 집 가면서 경호를 다 받아 보네, 현관은 그냥 열려 있길래 들어왔는데 괜찮죠?”
그때, 이 파티의 주인공인 최 PD가 들어왔다. 지수는 대답하기도 귀찮은 듯 식탁에 턱을 기대곤, 오른손만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한지수 씨. 이제 망해서 길거리에 나앉을 줄 알았더니, 여전히 부자로 잘사시네요. 존경합니다.”
최 PD가 장난스럽게 인사를 했다.
“오늘따라 한지수 존경한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요.”
“또 누가 있어요?”
눈이 동그래져 묻는 최 PD에 태오가 손을 들었다.
“저요. 안 그래도 지수 형의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에 존경을 표하는 중이었거든요.”
“바퀴벌레, 딱 좋네.”
메인 디쉬를 가지고 나오는 대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오…… 정대수 씨. 앞치마 예쁜데요. 뭐 도울 거 없어요?”
“다 했으니까 그냥 앉아요. 명색이 파티 주인공한테 일 시킬 수가 있나. 소식 들었어요. 좌천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뭐…… 그렇게 됐네요.”
앞치마를 벗은 대수가 최 PD에게 악수를 건넸다. 대수의 농담에 최 PD가 장난스럽게 마른 눈에 눈물을 닦는 포즈를 취했다.
주인공의 도착과 함께 파티를 위한 저녁 상차림이 완성되었다.
사실 최 PD가 괜찮은 척을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알오매치 서바이벌 마지막 회가 방송되지 못한 걸 보면, 유두현과의 합의도 제대로 성사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좌천이면 어디로 가요?”
대수가 저를 바퀴벌레라고 부르든 말든 방울토마토를 집어 먹던 지수가 물었다.
“창사 100주년 기념 다큐요.”
말이 좌천이지, 원래부터 다큐멘터리가 주특기였던 그녀의 입장에선 방송국이 뭐라도 해 보라고 판을 깔아 준 거나 다름없었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말이 도니까 몸을 피해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다큐? 오…… 주제가 뭐예요? 고생 좀 하시겠네요.”
태오가 골고루 잘 익힌 양갈비를 덜어 주며 물었다.
“아프리카로 가서 원시 부족들을 만나 볼까 해요.”
“그런 거 예전에도 있지 않았나?”
“있었죠. 근데 이번엔 그냥 관찰만 하는 건 아니고, 문명인을 투입시켜 볼까 해요. 원시 부족의 삶 방식 그대로 살다 오는 거죠.”
“이야…… 근데 그걸 누가 가려는 사람이 있어요?”
태오의 물음에 최 PD가 입에 한가득 찬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이미 끝났어요, 캐스팅. 그것도 아이돌.”
“헤엑……. 누가 해요? 미친 거 아니야……? 제대로 씻을 수도 없잖아. 피부 다 망가지면 어떡해요? 새까맣게 타면?”
태오의 궁금증에 지수가 코웃음을 쳤다.
“피부가 문제야? 보통 원시 부족들은 옷도 거의 안 입고 생활하던데…… 캡처라도 당해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면 어쩌려고. 이상한 변태 같은 애들이 하도 많아서 편집할 때 그런 것도 신경 많이 쓰셔야겠네요. 근데 그 아이돌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히 성공에 눈이 멀었나 보네.”
“다들 아는 사람인데.”
대수가 만든 음식이 꽤 맛있었던 모양인지, 최 PD가 미간을 찌푸리곤 음~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기를 뜯었다. 입 안에 있는 음식물을 씹느라 그녀의 말이 잠깐 끊겼다.
“다이노소울이요. 단솔 씨 있는 그룹.”
쨍그랑.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지수는 포크를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