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14화
“형아, 왜 동네마다 빵 이름만 다르고 맛이 다 똑같을까? 저번에 경주 가서 먹었던 첨성대 모양 빵이랑, 오늘 안동에서 받은 이 참마 빵 맛이 똑같아.”
민재의 물음에 우현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야, 우리 한민족이잖아. 입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 그런 거겠지.”
“아니야 계속 씹다 보면 달라. 첨성대 빵은 옥수수빵이고, 이건 보리 빵이야. 풍미와 쫄깃함이 조금씩 다르다고. 이 맛알못들아.”
음식에 진심인 윤성은 자기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았다. 그래 봤자 빵은 빵일 뿐이었다. 주최 측에서 준 기념품 빵으로 점심을 대충 때운 멤버들은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단솔은 아직도 아까 전 해명 도사가 한 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형! 단솔이 형! 주단솔!”
“어? 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아…… 그게 아니라…….”
단솔은 우현이 내미는 빵을 받아 들었다. 우물우물 빵을 씹으면서도 해명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기차가 마침 얕은 강물 위를 지나갔다. 완연한 겨울이라 그런지 강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말라 있었다.
물을 건너는 일이라…….
“우리 혹시 해외 스케줄 있나?”
단솔의 말에 멤버들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형…… 꿈꿨어? 귀신 꿈 뭐 그런 거?”
“이 형 요즘 눈 뜨고 자나 봐…… 국내 스케줄도 없는데 해외 스케줄이 어떻게 있어!”
단솔의 말에 다들 한마디씩 하는 걸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서 해명 도사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단솔, 힘내. 나 단솔이 느끼는 감정. 뭔지 알고 있어.”
그런 단솔의 어깨를 감싸며 제이콥이 말했다.
“뭔데?”
“그거 연예인 병이야. 아주 심각한 병. 제이콥도 그거 걸려서 아주 고생했어. 단솔이 유명해지면 제이콥도 유명해질 줄 알고 한정판 신발 여러 개 샀다가 카드값 갚느라 좆 빠지는 줄 알았어.”
“뭐…… 뭐가 빠져? 제이콥. 너 그 말 누가 알려 줬어.”
“이거 민재가 알려 줬어.”
“야! 서민재!”
* * *
무대 의상이 걸린 옷걸이를 하나씩 들고 멤버들이 언덕길을 터덜터덜 거의 다 올라왔을 때, 집 앞엔 오랜만에 본 길성이 있었다.
평소에 담배를 잘 피우지 않는 그가 오늘은 웬일로 줄담배를 피웠는지 발아래에 꽁초가 여러 개였다.
“어! 길성이 형이다!”
“형!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들어가 있지 않구. 담배는 또 뭐야…… 안 어울리게.”
어딘지 길성의 얼굴에 그늘이 져 보였다. 단솔이 말을 걸어도,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다시 표정을 굳혔다.
“안 들어가?”
“어…… 어…… 들어가 있어. 형은 그…… 전화 한 통만 하고 들어갈게. 너희한테 할 말도 있고.”
“할 말? 무슨 할 말?”
“어…… 그 있어…… 일단 들어가.”
“빨리 들어와!”
단솔은 길성을 한 번 더 재촉하곤 문을 열고 들어갔다.
* * *
한참 만에야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밴 길성이 들어와 입을 열었다.
“다들 모여 봐.”
평소의 길성답지 않게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 멤버들은 쭈뼛거리며 거실에 모였다.
“그…… 스케줄 하나가 들어왔는데 우리 멤버들을 다 출연시키고 싶다네…….”
“오! 나 할래!”
“야! 너는 뭔지 들어 보지도 않고 한다고 그러냐.”
“지금 찬 라이스 더운 라이스 따질 때야?
오랜만의 스케줄에 흥분한 멤버들과 달리 길성의 표정은 전쟁터라도 끌려가는 사람처럼 침잠해 있었다.
“뭔데 도대체. 형 표정이 그러니까 나 좀 무섭네…….”
그나마 멤버들보다는 방송 경험이 많은 단솔이 가장 먼저 불안감을 느꼈다.
“해외 촬영인데…….”
“허! 해외 촬영! 진짜?”
길성의 말에 민재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단솔을 쳐다보았다.
“단솔이 형…… 작두 타도 되겠다. 혹시 아까 그 도사가 형한테 신내림 받으래? 소질 있다고?”
우현의 물음에 단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신내림? 도사? 무슨 얘기야.”
“아, 별거 아니야. 애들이 오해한 거야.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는데?”
길성에게 해명 도사 이야기를 꺼내기 싫었던 단솔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길성은 또다시 잔뜩 뜸을 들였다.
“그게…… 들어 보고 일단,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우리도 거절하면 되니까.”
“아! 형! 도대체 거기가 어딘데! 답답하게 왜 그래 진짜? 알았어 들어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거절할게! 어딘데!”
“탄…… 탄자니아.”
“거기가 어딘데?”
“아프…… 아프리카…… 는 알지?”
아직 자신들 앞에 놓인 카드가 팀을 살릴 카드인지 죽일 카드인지 판단하지 못한 멤버들에게 길성이 덧붙였다.
“단솔이 너…… 최미진 PD가 좋게 봤나 봐. 하하…… 그 PD님이 이번에 원시 부족 만나는 다큐를 찍는다고…….”
그 순간, 단솔은 오늘 아침 받았던 민혁의 문자를 생각해 냈다. 최 PD의 좌천 파티.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던…… 그…….
“나 안 해.”
“아니, 단솔아 그 뭔지 들어만 보고…….”
최 PD의 이름을 듣자마자 불쑥 일어나는 단솔의 바짓가랑이를 길성이 붙들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며?”
“아니 안 해도 되긴 하는데…….”
“뭔데! 형 진짜 제대로 말 안 하면 나 이거 절대 안 할 거야.”
우물쭈물하는 길성의 태도에 단솔이 이번엔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길성이 항복하듯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알았어! 알았어, 말할게. 다 말할게.”
그런 그의 말에 방문을 반쯤 열었던 단솔도 벽에 기대 팔짱을 꼈다.
평소엔 어린애 같아도 이럴 때 보면 딱 리더의 모양새라 길성은 한참 어린데도 단솔을 어려워하는 구석이 있었다.
“너희 이거 안 하면, 사장님이 해체시키겠대…….”
“뭐!? 해체!?”
그때까지만 해도 길성과 단솔의 싸움을 넋 놓고 바라보던 멤버들이 합창을 하듯 말했다. 평소랑 비슷하게 티격태격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이노소울이 뭐 수익이 따로 나오는 데가 없으니까…….”
“그거야 회사에서 지원을 안 해 줘서 그런 거지. 싱글 몇 장에 OST 한 곡으로 수익을 어떻게 내? 정규도 한 장 없는데.”
우현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지웅이 덧붙였다.
“어차피 우리 쓰는 돈도 없잖아. 그래 봤자 여기 월세, 밥값, 요즘엔 스케줄도 대중교통 타고 다니잖아!”
“애초에 너희 지난 싱글 낼 때부터 우리 회사 빚더미였어. 미안하다, 나도…….”
사실, 길성에게 따져 물어서는 답이 나오질 않는 싸움이었다. 길성 역시 이대로 다이노소울을 해체시키고 싶지 않아서 저런 스케줄이라도 잡아 왔을 게 뻔했다.
“딱 보니까 아무도 안 한다고 해서 우리한테 돌아온 거네. 얼마 준대?”
“아무래도…… 장기 촬영에…… 험한 데로 가니까 많이 주긴 주지.”
단솔의 물음에 길성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돈도 돈이지만, 팀의 해체를 막는 게 급했다.
“여기 다녀오면 진짜 해체 안 시키는 거 맞아?”
“그럼! 당연하지 인마!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형 말고 대표님이 하는 건 많이 봤는데…….”
평소에는 말이 많지만, 이번엔 조용히 잠자코 있던 민재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민재는 아직 16살밖에 되지 않았다. 단솔은 그들이 마주한 현실의 벽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럼 우리도 조건이 있어.”
“어?”
“우리도 정규 앨범 내 줘. 다녀오면.”
단솔은 단호하게 말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별다른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었다. 이미 회귀 전부터 쓴맛을 너무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달랐다. 회귀 전, 그 일이 있고 나서도 멤버들은 방송계에 남았다. 한때는 식구처럼 지냈던 단솔을 팔아서라도 방송에 나오고 싶었을 것이다.
단솔 역시 예전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러고 싶었으니까.
꿈이라는 놈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그걸 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때 피해 의식에 절어 그들을 원망했던 이유는 멤버들의 모습이 그토록 단솔이 원하고 꿈꾸었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단솔아 그거는 알다시피 우리 회사 사정이.”
“신인 그룹 만든다며.”
“……어? 어떻게 알았어 그걸…….”
“매번 돈 없다고 하는 거 거짓말이잖아. 무슨 헤비 메탈……! 됐고, 다녀오면 우리 정산 내역, 플러스가 됐든 마이너스가 됐든 딱 뽑아 주고 정규 앨범 내 줘.”
“아니 그거야 너희가 인지도 높아지고 프로그램 떡상하고 그러면 당연히 해 달라고 안 해도.”
“형도 대표님 닮아 가? 애매하게 그런 말 안 통하니까, 가서 대표님한테 계약서 받아 와.”
“야! 주단솔!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냐!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단솔의 단호한 태도에 길성은 상처받은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단솔은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번엔 물러설 수 없었다.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물을 건너라는 해명 도사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다이노소울의 해체가 필연적인 사건이라면, 단솔은 온몸으로 부딪쳐서라도 그걸 막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번만큼은 팀을 살리는 리더가 되고 싶었다.
“계약서만 받아 오면, 아프리카 갈게. 군말 없이.”
“……다른 애들 얘기도 들어 봐야지.”
“우리는 단솔이 형이 하자는 대로 해. 그렇지?”
“어.”
다들 합창하듯 대답을 하자 길성이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듯 제이콥에게 물었다.
“제이콥, 너도 다 알아들은 거 맞아?”
“길성, 제이콥 바보 아니다. 우리 하나야. 다른 멤버들이 오케이 하면, 제이콥도 오케이야.”
그 말에 길성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들어올 때보다 더 그의 얼굴빛이 흙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