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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13화 (113/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13화

    마지막 촬영이 끝난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날 단솔은 퉁퉁 부은 눈으로 춘몽도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매번 늦던 길성이 어쩐지 그날만큼은 춘몽각 앞에 차를 대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운도 따라 주었다.

    “형…… 우리 다음부턴 우리 돈 보태서 ktx 타자…… 이게 웬 고생이야 새벽부터.”

    “ktx가 얼마나 비싼데…… 그나마 인터넷에 우리 사진이 안 올라오는 건…… 우리가 무궁화호를 타기 때문이야.”

    “어차피 형 말고는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

    투정이 섞인 민재의 말에 단솔이 기차 시간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방송이 끝나면 세상이 변할 줄 알았다.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거나, 지난번 삶처럼 국민의 역적이 되거나.

    하지만 이번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방송이 끝나고도 다이노소울은 망한 아이돌이었고,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심지어 대표가 자신의 차를 바꾸겠다며 두 대 있던 승합차 중 한대를 팔아먹는 바람에 일하기 위해 지방 행사에 가는데도 대중교통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우와, 한지수다.”

    “어디, 어디! 아이, 씨…… 그냥 광고판이잖아!”

    민재의 말에 윤성이 두리번거리다 대형 광고판을 보고 실망한 듯 버럭 화를 냈다. 단솔은 지수의 이름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가 청량리역까지 올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언제 만들었는지, 김미숙 간장 치킨집 앞에 놓인 실물 크기의 지수 입간판을 보고도 깜짝깜짝 놀라는 바람에 치킨집을 피하려고 멀리 돌아서 다니는 단솔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 형이 되게 가깝게 느껴졌는데. 우리한테 치킨도 사 주고.”

    “애초에 우리랑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인데 뭐. 형질 속였다고 할 때는 다들 죽이려 들더니만, 저것 봐 공익 광고까지 찍는 거. 기부도 엄청 많이 했대.”

    “그럼 우리 굿즈 사 간 것도 일종의 기부…… 그런 거였나?”

    “야, 그럼 미쳤다고 한지수가 우리 굿즈가 필요해서 가져갔겠냐. 그것도 죄다 실용성도 없어서 안 팔리는 걸로만.”

    지웅이 가리킨 곳에는 포멀한 정장을 입은 지수가 아이들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지수의 얼굴에 홀려 멤버들이 뭐라고 떠드는 말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광고판이 얼마나 높이 걸려 있는지, 단솔은 고개를 드느라 목이 당길 지경이었다.

    「형질이 미래의 가능성을 막는 세상이 되지 않게.」

    어느새 지수는 형질 차별에 저항하는 깨어 있는 연예인이 되어 있었다.

    “형, 근데 알오매치 서바이벌 마지막 회는 진짜 방송 못 하는 거야?”

    단솔이 홀린 듯 지수가 있는 광고판을 올려다보는 사이, 우현이 물었다.

    그날 단솔의 눈물 젖은 고백은 결국 방송이 되질 못했다. 지레 겁먹은 유두현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방송사와 진흙탕 싸움 중이었다.

    “아마 못 나가지 않을까?”

    “아…… 아쉽다.”

    “뭐가 아쉬워…… 어차피 최종 선택밖에 없는 회차였다니까.”

    “형, 진짜 누구 선택했는지 얘기 안 해 줄 거야?”

    “……기차 시간 다 됐다.”

    단솔은 괜히 모자를 푹 눌러쓰곤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민혁이 형

    단솔 씨, 이번 달 말에 최 PD 좌천 파티 하기로 했는데 진짜 안 올 거예요?

    차마 민혁이 준 핸드폰으로 그의 연락처를 차단할 수 없었던 단솔은 나머지 멤버들의 연락처는 전부 지웠지만, 민혁과는 종종 연락을 하고 지냈다.

    승진도 아니고 좌천을 무슨 파티씩이나…….

    바라는 사람이 없는데도 일부러 민혁이 이런 자리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위 높은 광고판에 붙어 있는 그들과 무궁화호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가서 겨우 행사 하나를 뛰는 저는 너무도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제 초라함만 선명하게 느껴질 게 뻔했다.

    아시잖아요 형. 전 괜찮아요.

    민혁이 형

    최 PD 이번에 해외 촬영 가서 못 돌아올지도 몰라요. 완전 목숨 걸었대요.

    그 PD님 어차피 매번 목숨 거시잖아요......

    민혁이 형

    ㅎㅎ 그러네요......

    그 메시지를 끝으로 단솔은 핸드폰을 껐다. 회귀를 한 뒤로 생긴 습관이었다. 인터넷을 보다 보면, 자꾸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게 되곤 했다.

    알오매치 서바이벌에서 만난 이들의 소식을 연예 뉴스 면에서 보는 것도 꺼려졌지만, 핸드폰을 이렇게까지 피했던 건 우연히라도 제게 달린 악플을 볼까 봐 두려운 마음이 제일 컸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로 사실상 소속사의 지원이 거의 다 끊겨 버려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오늘처럼 종종 나가는 지방 행사가 스케줄의 전부였는데, 이름도 모를 인터넷 신문사들은 다이노소울의 지방 행사 영상들을 캡처해 퍼다 나르며 ‘사라진 반짝 스타 주단솔, 영월군 강변에서 발견.’ 따위의 헤드라인으로 조회 수를 뽑아 먹었다.

    그 아래에 달린 댓글이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걸 보느니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는 게 심신 건강에 훨씬 좋았다.

    “형, 근데 우리 사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하지 않아?”

    “왜 또, 하루 이틀이냐.”

    “형 아직 못 들었구나? 우리는 차도 없어서 기차 타고 다니는데, 새로 걸그룹 런칭한대.”

    “뭐? 무슨 돈이 있어서? 아니 그럴 거면……!”

    차, 숙소, 식사. 모자란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 달라고 해야 할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식대라도 조금 올려 달라고 하면 매번 돈 없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그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 새로 걸그룹을 런칭하겠다는 건지.

    길성이 요즘 다이노소울에 소홀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단솔은 배신감이 들었다.

    “그 걸그룹…… 리더 아빠가 부자래.”

    “……뭐 부자면 얼마큼 부잔데?”

    “1집 앨범을…… 헤비메탈 콘셉트로 낼 만큼? 망해도 상관없다고 했대. 자기가 다 내 준다고.”

    조용히 있던 연규가 말을 했다. 부모님이 대 준다는데 그걸 누가 말려. 돈은 있어도 감각은 없는 부모인 듯했다. 그 돈이면 차라리 회사를 새로 차리지, 왜 감 떨어진 이 회사를 고른 건지.

    지금보다 더 찬밥…… 아니 쉰밥이 되어 버릴 신세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장의 생계를 생각해야 하는 저와 파티에 입고 갈 옷을 고민하고 있을 지수와의 거리가 기차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저희는 다이노소울입니다!”

    “…….”

    “하하, 저희 잘 모르시겠지만…… 손주들 재롱 본다고 생각하시고 많은 박수 부탁드릴게요!”

    짝짝짝, 희미한 박수 소리 뒤로 무슨 소여? 하고 의문 섞인 말소리가 오가는 게 들렸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반응이었다. 지역 축제를 즐기는 어르신들이나, 어린아이들은 다이노소울을 전혀 몰랐다. 그나마 학교에 안 가고 축제장에 놀러 온 10대 몇 명이 핸드폰을 들고 있을 뿐, 호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멤버들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무대를 준비했다. 제대로 된 노래라고는 한 곡밖에 없고, 나머지 두 곡 역시 다른 아이돌의 무대를 커버한 곡 하나, 발라드곡 하나였다. 기껏 기차까지 타고 와서 남의 노래를 부르고 가야 한다니. 오늘따라 멤버들도 기운이 영 없어 보였다.

    그렇게 힘없이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천막으로 만들어진 간이 대기실에 누군가 찾아왔다.

    “오랜만일세.”

    “어……? 도사님?”

    단솔을 찾아온 사람은 해명 도사였다. 국회 의원들이 줄을 서도 못 본다는 사람이 저를 찾으러 왔을 리는 없고.

    “여긴 어쩐 일이세요?”

    “무당이 무당질하러 왔지 뭐 하러 왔겠어. 원래 나는 굿 같은 건 잘 안 하는데 여기가 내 고향이라.”

    가끔씩 지역 축제에 만신 굿을 하는 경우가 있다던데, 그 일 때문에 온 모양이었다.

    “아…… 오랜만에 뵈니까 되게 반갑네요.”

    “자네는 한 번쯤 찾아올 줄 알았는데, 안 오더구먼.”

    단솔이라고 제 앞날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또 다른 회귀자가 누군지 역시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단솔이 해명 도사를 찾아가지 않았던 것은 사실 돈 때문이었다. 듣기로는 그의 복채가 어마어마해 한 번 점을 보면 수백만 원을 줘야 한다는 소리도 있었다.

    “……그게…….”

    “복채는 안 받을 테니,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하세.”

    그는 단솔의 속을 꿰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짐 챙기고 있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솔은 해명 도사의 뒤를 따라 나왔다. 무대 뒤편이라 시끄러웠지만, 덕분에 사람들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포기하지 말라 했더니, 겨우 이러고 사는 거야?”

    나오자마자, 저를 꾸짖는 말에 단솔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매만졌다.

    “이게 뭐 어때서요…… 저 포기 안 했어요. 포기했으면 여기까지 와서 공연도 안 했죠.”

    “자네는 가진 팔자에 비해 그릇이 너무 작아.”

    “네?”

    “용을 어떻게 종지에 담느냐 이 말이야. 그릇을 좀 키워! 혹시…… 이번 달에 물 건널 일 있으면, 무조건 가. 알았어?”

    “물…… 물을 건너요?”

    “해외 말이야. 외국 갈 일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 그냥 가! 가란 말이야!”

    “아! 알았어요! 왜 화를 내고 그러셔…….”

    “내가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얼른 가!”

    갑자기 역정을 내는 통에 단솔은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 보내면 또 언제 이런 얘기를 들을까 싶어 다시 해명 도사를 붙잡았다.

    “아! 근데 저 도사님! 하나만! 아니 두 개만요! 네? 아 왜 맨날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져요! 궁금한 거 좀만 알려 주시고 가면 안 돼요?”

    “네가 궁금하다고 해서 답이 척척 나오는 줄 아냐. 다 타이밍이 있는 거야.”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아휴 답답해. 해명 도사는 가슴을 퍽퍽 치더니 자신의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주었다.

    “전화해!”

    “……헙……! 이거 진짜 도사님 번호예요? 전화하면 뭐 해 주시는데요? 전화로 사주 보고 이런 건가…….”

    해명이 명함을 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단솔이 재차 물었다. 높으신 분들도 받을 수 없다는 개인 번호가 적힌 명함이었다.

    “내가 남의 번호로 명함 파고 다닐 사람으로 보이냐?”

    “아…… 그런 건 아니구요…… 그럼 연락드릴게요…… 근데…… 전화로 하면 복채는……?”

    “안 받아! 빨리 가 이 녀석아! 굿하러 가야 해.”

    “네! 아 갈게요! 가요!”

    단솔이 자꾸만 질척거리자, 급기야 해명 도사는 한복 자락을 붙잡은 단솔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쫓아냈다.

    이리저리 그의 발을 피하면서도 단솔은 명함을 손에 꼭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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