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12화
대수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단솔이 거실로 내려왔다. 눈가가 촉촉해진 단솔을 반긴 것은 태오였다.
평소와 달리 풀 세팅한 모습의 태오는 소파에 앉아 웃으며 단솔을 반겼다. 단솔은 태오의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오 단솔 씨 지금 되게 연예인 같은 거 알아요?”
“어…… 가죽 재킷 입은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역시…… 한마디를 못 이기네. 괜찮아요.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니까.”
태오는 애써 농담처럼 고백을 했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거 알죠?”
하지만 단솔은 웃을 수가 없었다. 태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저였다.
“미안해요…….”
“아이, 또 그러네! 나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요. 진짜 괜찮다니까.”
“나를…… 여기서 제일 많이 웃게 해 준 사람은 태오 씨였어요.”
늘 시끄럽고 활발하던 태오가 이 순간만큼은 조용했다. 눈물을 삼키는 소리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단솔이 얼른 일어나 건너편 소파로 가 앉았다. 다독여 주는 단솔의 손길에 태오는 서러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 진짜 차여서 우는 거 아니에요…… 크흡. 그냥 단솔 씨랑…… 형들이랑 헤어질 생각 하니까 아쉬워서 그런 거라고요.”
“알아요. 울지 마요 태오 씨.”
“……프로그램 끝나고도…… 꼭 연락하고 지내야 해요. 지난번에 제대로 대답 안 했잖아요.”
한참을 울다가 고개를 든 태오가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단솔이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단솔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안심한 듯 태오가 말했다.
“그럼 됐어요. 다른 형들 기다리겠다. 얼른 가세요.”
“……가 볼게요.”
태오는 끝까지 우는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은 듯 단솔이 일어나는데도 단솔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솔이 현관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태오는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현관문을 닫고 차가운 철문에 등을 기댄 단솔의 귀에도 태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단솔의 시선은 오롯이 불이 켜져 있는 앞마당의 카라반을 향했다.
지수가 저곳에 있다.
단솔은 태오의 울음소리가 꼭 제 마음의 소리처럼 들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온 단솔은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연이 있는 곳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편하게 그를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졌다.
“이연 선배.”
“왔어?”
“……안 추워요?”
전날 그런 일을 겪었는데, 춥지도 않은지 이연은 코트 한 장만을 걸친 단출한 차림새였다. 얼굴이 꽁꽁 얼어 버린 듯한 그가 말을 했다.
“나도 실내로 고를걸……. 날씨가 이렇게 추워진 줄 몰랐어. 마지막 모습은 좀 멋져 보이고 싶었는데.”
“충분히 멋져요.”
빈말은 아니었다. 아이보리색의 롱 코트를 입은 그는 질투가 날 정도로 멋있었다.
“그러면, 준비했던 말을 해야겠지?”
대수나 태오와 달리, 이연은 준비한 고백을 하려 했다. 그 모습이 어색하고 왠지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이런 점 때문에 그를 좋아했었다는 걸 단솔은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좋아해. 네가 나를 거절하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네 모습이 좋아. 이런 감정을…… 진작에 알았다면 아마 난 세상 사람들을 조금 더 친절하게 대했을지도 몰라. 그만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아주 크게 다가왔어, 네가.”
이연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마음이 불편한 쪽은 답을 기다리는 이연이 아니라 답을 해야 하는 단솔이었다.
“어렵네요. 저는 거절만 당해 봤는데…… 거절하는 사람도 꽤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거였어요. 미안해요 선배.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싫지 않으면, 데려다줘도 될까?”
이연이 마당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솔은 그 말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배…… 혹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면 바보 아닌가, 그렇게 티가 나는데. 아마 본인 빼고 다 알걸? 가자. 데려다줄게.”
* * *
카라반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지수는 계속 창밖이 신경 쓰였다. 대놓고 커튼을 걷어서 보고 싶었지만, 단솔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애써 애꿎은 카라반 안의 소품들만 만지작거렸다.
좁은 공간에 달린 여러 대의 카메라가 꼭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티 났어요? 저 나름 숨긴다고 숨긴 건데.”
“네가 티가 난 게 아니라 내가 잘 알아본 거야. 워낙 내가 너한테 관심이 많아서.”
“아…… 선배!”
선배……?
지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단솔과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는데, 앞의 얘기는 잘 들리지 않고 ‘선배’라는 단어만 분명하게 들렸다.
단솔이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럼 민혁이 아닌 걸까. 앞마당을 가로질러 두 사람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연자약하던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먼저 카라반의 문을 두드린 것은 단솔이었다.
“지수 형…… 저 들어갈게요……? 들어가도 돼요?”
지수가 아무 대답이 없자, 단솔이 다시 물었다.
“왜 왔어, 솔아.”
지수의 표정에 실망감이 스쳤다. 단솔은 차마 카라반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표정이 꼭 제게 들어올 틈이 없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앞서 다른 사람들과 헤어질 때도 꾹 참았던 눈물이, 지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터져 나오려고 했다. 단솔은 커다란 구슬을 삼키는 것처럼 울음을 삼켜 냈다.
“저…… 들어가면 안 돼요?”
그 순간, 지수의 귓가에 쿵 하는 북소리가 울렸다. 그게 제 심장이 뛰는 소리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심정으로 널 밀어냈는데, 왜 이제 와서 여길 와.
지수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졌다.
“긴 얘기 아니면 그냥 여기서 하자, 제갈민혁 기다리겠다. 날씨도 추운데.”
지수는 일부러 더 삐딱하게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몸을 문에 기대고 섰다.
제발, 단솔이 제가 생각하는 그 말만은 제발 하지 않기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형, 좋아해요.”
“…….”
하지만, 이제 단솔은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형이랑 나를 두고 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도 알아요. 근데 이제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으려구요. 이번에도 남의 말에 흔들려서 포기하면, 다음은 영영 없을 것 같아요.”
“솔아, 나는.”
“형은 내가 아닌 거 아는데, 이제 더는 못 견디겠어요. 형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이 없어요. 저는 안 보려고 했는데, 자꾸 무의식적으로 형을 봤나 봐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대요. 그런데도 형은…… 몰랐어요?”
몰랐다. 바보같이.
질투에 눈이 멀어 단솔의 마음이 저를 향하는 것도 모르고, 단솔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고민만 했다. 같은 곳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니 보일 턱이 있나.
“솔아, 나는 사랑……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잘해 준 거야.”
지수의 대답에 확인 사살까지 당한 단솔의 꽁꽁 언 볼에 눈물이 흘렀다.
지수는 당장이라도 저 눈물을 닦아 주고 다 내 잘못이라고,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알아요. 그래도…….”
단솔은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입을 삐쭉거렸다. 그 모습조차 귀엽게 느껴져 지수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말지.”
“응?”
“어차피 다 알고 있었다고요. 형은 정말…….”
단솔은 말을 고르는 듯 한참을 뜸을 들였다.
“못되게 말하기 대회 나가면 1등 할 것 같아요.”
“어…… 생각해 볼게.”
“갈게요.”
쾅. 단솔이 카라반의 문을 닫았다. 제 생각보다 더 세게 닫힌 모양인지.
“바람이 불어서 세게 닫힌 거예요!”
밖에서 단솔이 소리쳤다.
저에게 상처 준 알파에게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게 다라니. 단솔이 쌍욕이라도 뱉든가, 한 대 치기라도 하든가 했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 텐데.
지수는 단솔이 귀엽고 어이가 없어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밖으로 나간 단솔은 민혁이 있는 뒷산 계곡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저를 향해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꼭 신발이라도 잃어버린 아이처럼 울면서 오는 단솔을, 바위에 누워 있던 민혁이 벌떡 일어나 맞았다.
“누구한테 맞았어요?”
“크흡…… 그런 거 아니에요.”
단솔은 이제 자연스럽게 민혁이 앉아 있던 바위에 드러누웠다. 어느새 모든 게 익숙해진 곳을 떠나야 하는 마음이 쉬이 진정되질 않았다. 민혁은 그런 단솔 옆에 나란히 누웠다.
“역시…… 날씨가 추워지니까 엄청 차가워요, 여기.”
“마음이 시린 것보다는 몸이 시린 게 낫죠. 추우면 일어나요.”
“그냥 누워 있을래요. 형 말대로 이게 나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