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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11화 (111/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11화

    “데이트까지는 아니어도 카페나, 어디든 앉아서 대화할 시간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어요.”

    “카페는 너무 흔한 장면 같은데.”

    “야외는 추워. 그럼 넌 헬스장에서 하든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태오의 말에 대수가 반박했다. 하지만 대수의 반박은 지수에 의해 금방 막히고 말았다.

    이연과 두현을 제외한 출연자들은 거실에 모여 최종 화를 어떻게 꾸밀지 이야기 중이었다. 매번 제작진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던 그들에게 최 PD는 최종 선택만큼은 출연진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노라 선언했다.

    이런저런 의견을 낼 수 있게 되면 좋을 줄로만 알았는데, 의견을 모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진짜 이제 스태프들이 좀 존경스러울 지경인데요…… 어떻게 매 회차마다 게임을 만든 거지.”

    “저 좋은 데 알아요.”

    “제갈민혁은 이 사안에 대해서 발언 금지야.”

    민혁이 말했지만, 한방 능이 백숙을 파는 계곡과 버섯전골을 파는 버섯 농원을 의견이랍시고 제안한 뒤로 그는 아예 발언권을 빼앗긴 후였다.

    최종 선택 장소 하나만 놓고도 벌써 1시간째 이야기 중이었다. 사실 매번 집과 촬영장만을 오가는 삶을 산 그들의 입에서 새로운 공간에 대한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솔아, 네 생각은 어때?”

    그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던 단솔에게 지수가 물었다.

    “네? 저요?”

    “응. 최종 선택을 어디서 하면 좋겠어?”

    혹시나 다른 사람들의 등쌀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걸까 봐 지수가 단솔을 배려해 물었다.

    “저는…… 여기……서 하고 싶어요.”

    “응?”

    “춘몽도에서요…….”

    어쩌면 그들의 추억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단솔은 몇 년 후면, 아니 당장 프로그램만 끝나도 이곳이 관광지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는 지금의 조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을 터였다.

    “여기서 추억이 제일 많으니까…… 각자 제일 좋아하는 곳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괜찮네.”

    멀리 가기 귀찮은 건 아니고? 단솔의 의견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대수가 그답지 않게 농담을 던졌다.

    “그럼 나도 찬성.”

    “저두요!”

    “저는 아무래도 한방 능이 백숙이…….”

    * * *

    “다녀왔습니다.”

    “이연 선배……!”

    그날 저녁엔 병원에서 이연이 돌아왔다. 혼자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단솔은 본의 아니게 가장 먼저 이연을 맞이했다.

    하룻밤 새에 그는 꽤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제대로 면도도 하지 못한 듯, 늘 깔끔하고 단정하던 그의 턱에 파르라니 수염이 올라와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단솔은 저도 모르게 그의 다친 손부터 만지작거렸다. 붕대를 감은 손이 척 보기에도 꽤 아파 보였다.

    “괜찮아요. 단솔 씨는, 몸 좀 어때.”

    생각해 보니 그의 페로몬 향을 맡은 후였다. 단솔은 왠지 이연의 비밀을 강제로 알게 된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어…… 저는…… 괜찮아요…….”

    “그날은 미안했어.”

    “아…… 아니에요! 선배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때, 위층에서 태오가 내려왔다. 태오는 이연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이연이 형! 형 괜찮아요?”

    “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해요.”

    “그게 왜 형 때문이에요! 그건 두……. 죄송해요…… 형.”

    이연이 머쓱한 듯 사과를 했다. 태오가 그런 그를 위로하려다 하마터면 두현의 이름을 뱉을 뻔했다. 촬영장에서 두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어느새 금기 사항이 되어 버렸다.

    “이제 사과는 그만하고 이이연 씨도 최후를 맞을 장소를 고르도록 해.”

    “아! 지수 형……! 그러니까 무슨 세상 멸망하는 것 같잖아요.”

    지수의 말에 태오가 펄쩍 뛰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한 모습에 이연도 살포시 웃었다.

    “각자 최종 화 촬영할 장소 고르기로 했어요. 춘몽도 안에서요. 원하는 소품 있으면 제작진이 준비해 준다고 해서…… 다들 고민하고 있어요.”

    “아…… 그래서 밖에…….”

    “밖에 뭐가 있어요?”

    이연의 말에 지수가 마당으로 향한 창의 커튼을 열었다. 마당엔 개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장미꽃을 실은 트럭이 들어오고 있었다.

    “참, 나……. 누군지 몰라도 드럽게 촌스럽기는.”

    “뭐, 어쩌라고. 넌 얼마나 세련됐는지 보자.”

    “저 장미꽃 대수 형 거예요⁈”

    트럭이 들어오는 소리에 내려온 대수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기와 달리 대수는 항상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저것도 형 거예요?”

    태오가 장미꽃 트럭 뒤로 들어오는 거대한 곰 인형을 가리켰다. 장정 네 명이 달려들어 겨우 들어 올릴 정도로 커다란 놈이었다.

    “왜, 불만 있냐.”

    “아니요? 너무 멋져서요……. 와 진짜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지…….”

    대수가 살벌하게 물어보자, 태오는 솔직한 감상을 내뱉지 못하고 연신 영혼 없는 엄지손가락을 날렸다.

    “촌스럽다, 촌스러워. 왜, 아예 촛불로 길 만들고 그러지.”

    “그것도 있는데. 왜 너도 같이 태워 줄까?”

    “태워야 할 건 네 촌스러운 취향이 아닐까 싶은데…….”

    “이 자식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웃던 단솔은 저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는 이연과 눈이 마주쳤다. 이연의 손에 감긴 붕대만 아니었다면,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 * *

    하지만, 단솔은 그날 저녁. 금방 현실을 자각해야만 했다.

    “단솔 씨, 준비됐어요?”

    “네!”

    최종 선택을 앞두고 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단솔은 어색함에 제 얼굴을 매만졌다. 메이크업을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두껍게 발린 화장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최종 선택은 오메가 출연자가 단솔밖에 남지 않아, 단솔이 각 장소에 기다리고 있는 알파 중 마음이 있는 상대에게 찾아가 고백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회귀 전에는 최종 선택 직전에 떨어진 단솔은 이번 촬영이 처음인 셈이었다. 방송으로 볼 때는 로맨틱하기만 했는데, 실제로는 카메라도 평소보다 많고, 조명도 잔뜩 있어 꼭 영화 촬영장처럼 느껴졌다.

    “테라스부터 거실, 뒷마당, 앞마당 카라반, 해변, 계곡에 있는 바위까지 다녀오시면 돼요.”

    단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준비를 하는 걸 구경하느라, 어디에 누가 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곳도 있었다.

    “아, 참. 한지수 씨는 앞마당 카라반에 있는데 그냥 지나치셔도 돼요. 지수 씨는 두현 씨 뽑으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최종 선택 대신 인터뷰만 땄거든요.”

    최 PD는 애초에 단솔이 지수를 선택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음의 준비 되시면, 문 열고 나오시면 됩니다. 이따 뵐게요.”

    “네…….”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인 기분이 이런 건가. 본의 아니게 지수가 누굴 선택하려고 했는지 들어 버린 단솔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얼른 방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발길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지수를 선택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쩌면 그 선택이 이런저런 소문을 더 키우거나, 회귀 전처럼 잔뜩 욕만 먹고, 연예인 커리어뿐 아니라 삶 전체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제대로 된 해답을 찾지 못한 단솔은 결국 방문을 열었다. 복도에는 아까 전 대수가 말했던 촛불이 단솔의 방문 앞부터 테라스까지 깔려 있었다.

    조용히 테라스 문을 열었을 땐, 중간중간 꺼지는 불을 다시 켜려는 듯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선배님…….”

    “어⁈ 어……! 벌써 왔어? 아니 나는…… 오는 줄 모르고…… 미안.”

    단솔을 발견한 대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사이 불편해서인지 재킷도 벗고, 넥타이도 셔츠 틈새로 넣어 놓았는데, 하필이면 이때 나올 줄이야.

    헐레벌떡 재킷을 입고 단솔 앞에 선 대수의 뒤로 장미로 뒤덮인 테라스가 보였다.

    “우와…… 이거 정말…… 멋지네요.”

    “……촌스럽지 않아?”

    아닌 척해도 지수의 말을 담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솔이 웃으며 답했다.

    “아뇨? 엄청 멋있어요. 클래식이 원래 베스트잖아요.”

    단솔의 칭찬에 대수가 괜히 제 목뒤를 쓸어 올렸다. 준비한 말을 해야 하는데, 단솔이 들어온 순간부터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사이 단솔은 커다란 곰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선배님, 그거 아세요?”

    “……어?”

    “선배님은 진짜 포근하고 따듯한 분이에요.”

    “…….”

    대수는 자꾸만 아래로 처지는 입꼬리를 애써 위로 올려야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지만, 누군갈 거절해야 할 때는 단 한 가지의 이유만 있어도 상대를 거절할 수 있었다.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서.

    단솔의 그 한마디만 들어도, 대수는 그게 거절의 뜻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다들 날 무섭다고 하던데.”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계속 겪어 보니까 아니었어요. 첫날…… 햇빛 가려 주셔서 감사해요.”

    혹시나 회귀 전에도 대수가 이런 사람인 걸 알았었다면, 우리의 결말이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단솔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열없는 상상을 했다.

    대수는 그제야 단솔과의 첫 촬영 날을 기억해 냈다. 유난히 내리쬐던 햇빛을 가려 주자, 단솔이 되레 황당한 대답을 해서 당황했던 기억에 대수가 푸스스 하고 웃었다.

    “별걸 다 기억하네.”

    “그거 말고도…… 제 보호막이 되어 주신 거 알아요.”

    대수는 단솔이 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 카메라를 가려 주거나, 단솔이 넘어지려고 할 때마다 붙잡아 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단솔을 선택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아는 사실이었다. 단솔은 대수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기 전에 먼저 거절을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단솔을 배려했다.

    “저…… 선배.”

    “춥다, 들어가자.”

    단솔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테라스 문을 열고 사라졌다.

    고백도, 거절도 없는 심심한 장면이었지만, 그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최선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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