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10화 (110/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10화

“어…… 뭐지…….”

이상한 꿈을 꿨나.

제 방에서 일어난 단솔은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것 빼고는 잠에 들기 전 입었던 옷차림에 이부자리도 그대로였다.

단솔이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단솔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어젯밤 역할 정도로 나던 페로몬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지수가 단솔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단솔이 일어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듯, 앉아 있는 단솔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안, 노크하고 들어왔어야 하는 건데…… 몸은 좀 어때.”

그의 손에는 물병과 컵이 들려 있었다. 혹시 밤새 저를 간호한 건가.

어젯밤 일이 꿈이었나 잠깐 오해했던 단솔은 제 상태 곳곳을 살피는 지수를 보고 꿈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제가 왜 정신을 잃은 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단솔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몽유병이라도 생긴 건가.

“형…… 어제 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단솔은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몰라 애매한 질문을 했다.

지수는 어제 일을 떠올리자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밤늦게까지 생각을 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페로몬 냄새를 맡고 복도로 나갔을 땐,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후에 카메라에 녹화된 장면을 확인한 스태프에게 듣기론,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 두현이 이연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니 러트 유도제가 든 물을 건네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취해서 판단력을 잃었다고 하기엔, 이미 그런 약물을 갖고 있다는 것부터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평소의 두현이라면 절대 두지 않을 무리수.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어제 일이 기억나?”

“기억은 나는데…… 조금…… 이상해요.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갔는데…… 갑자기 이연 선배가.”

“이이연, 어제 러트였어.”

“네?”

“딴엔 버텨 보려고 제 몸에 상처도 내고 했던 것 같은데.”

단솔은 피 칠갑을 한 이연의 손에 들려 있던 유리 조각을 떠올렸다. 몇 번씩이나 들렸던 파열음이 그가 애써 자신의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한곳에 사는 만큼, 사이클 주기는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메가 페로몬이 느껴졌는데…….”

두현이 약을 먹였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단솔이 중얼거렸다.

단순히 이연의 갑작스러운 러트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알파의 페로몬보다는 더 강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느껴졌었다.

“유두현이야. 이이연이랑 어떻게 해 보려고 약을 먹었나 봐.”

“네? 약이요?”

두현은 이연에게만 약을 먹인 건 아니었다. 술을 마신 몸으로 자신 역시 히트 사이클 유도제를 먹었다.

단솔은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애써 참고 있었는데, 네가 나타나서 이성을 잃었나 봐.”

단솔은 어젯밤 이연의 눈빛을 떠올리곤 왠지 한기가 드는 것 같은 기분에 몸을 웅크렸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다행이었지, 만일 어젯밤 혼자 그를 마주쳤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 단솔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연 선배는…… 지금 어디 있는데요?”

“병원에. 약 기운은 거의 사라진 것 같은데, 손을 좀 다쳐서 치료가 남았나 봐. 너한테 사과하고 싶대.”

“혹시…… 제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뭘 사과하고 싶다는 거지. 단솔은 혹시 제가 정신을 잃어 기억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 단솔의 걱정을 불식시키듯 지수가 단솔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엉뚱한 생각 하지 마. 너한테 허튼짓하는 걸 내가 그냥 두고 봤을까. 페로몬 때문에 기절한 거지 아무 일 없었어.”

지수는 짐승처럼 달려드는 이연을 막기 위해 거의 제 몸을 던져야 했다. 그 바람에 지수가 팔을 조금 다치긴 했지만, 단솔이 다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두현 선배는…….”

궁금증이 다 풀리자, 단솔은 지수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두현의 기행에 그 역시 상처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자식도 병원에 있긴 한데, 아직 의식이 없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생각보다 지수는 멀쩡해 보였다. 애써 멀쩡한 척하는 걸까.

지수는 연신 제 눈치를 보는 단솔을 보곤, 제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두현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어젯밤에 일어난 사고 이후 춘몽각의 카메라가 전부 꺼진 상태라 제가 방심했던 모양이었다.

지수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리를 굴리던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어? 단솔 씨 깨셨네요. 몸은 좀 어때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최 PD였다.

“괜찮아요…….”

그저 기절한 것뿐이었던 단솔은 머쓱한 듯 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매니저분한테 연락해 두긴 했는데, 지방에서 올라오고 있으시다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아……! 진짜요? 그럴 필요 없는데! 제가 연락할게요…….”

안 그래도 지난번부터 이상하리만치 저를 과보호하던 멤버들과 길성이었다. 괜히 걱정을 시킬까 봐 단솔은 애써 더 괜찮은 척을 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네! 저 진짜 괜찮아졌거든요. 근데 핸드폰이…….”

최 PD는 단솔의 핸드폰을 수거한 당사자였다. 민망한 듯 웃은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에 길성의 번호를 길게 꾹 눌러 단솔에게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길성이 전화를 받았다.

―네! PD님! 우리 단솔이한테 또 무슨 일 있습니까?

“형!”

―야, 단솔아! 너…… 너야? 너 괜찮아? 쓰러졌다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형 지금 금방 가니까……!

“오지 마.”

―어? 너 쓰러졌다며! 무슨 페로몬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길성의 큰 목소리가 민망했던 단솔은 서둘러 볼륨을 줄이는 버튼을 눌렀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오지 마. 나 진짜 괜찮아.”

―아니 그래도……!

“형 바쁘잖아. 진짜 오면 나 화낸다? 끊어!”

뚝.

호기롭게 전화를 끊은 단솔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지수와 최 PD의 시선이 민망한 듯 웃었다.

단솔은 제 옷소매에 액정을 문질러 닦아 최 PD에게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었다.

“잘 썼습니다 PD님…….”

“그럼 두 분 다 잠깐 거실로 나오실래요? 이번 일 어떻게든 수습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저희 제작진이 회의를 했는데…… 아무래도 출연자들 동의가 우선이라.”

“네. 나갈게요.”

* * *

지수와 단솔은 사람들이 둘러앉은 거실에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다른 출연자들은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이미 작가들과 이야기 중이었다.

스태프며 출연자며 아무도 잠을 이루지 못한 듯 피부가 까칠하고 눈이 퀭했다. 그 와중에 단솔은 기절하긴 했지만, 혼자 너무 편하게 잔 건 아닐까 퉁퉁 부은 얼굴이 눈치가 보였다.

“단솔 씨, 괜찮아요?”

“네…….”

민혁의 걱정스러운 말에 민망한 듯 단솔이 웃으며 대답했다.

단솔이 자리 잡고 앉는 걸 지켜보던 최 PD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우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점,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사실, 그녀는 잘못이 없었다. 약을 몰래 들여온 것도, 약을 먹인 것도 모두 두현이었지만, 메인 PD의 자리는 그 변수마저 책임져야 하는 자리였다.

“우선…… 유두현 씨께는 하차를 통보했구요. 이유를 막론하고, 그건 저희 프로그램 규칙 위반뿐 아니라 범죄니까요. 선처의 여지는 없습니다만.”

범죄라는 단어에 단솔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두현과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이연 씨가 일을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는 피해자인 이이연 씨의 의견을 존중해 우선 신고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당장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열렬하게 짝사랑하던 사람과 그 사랑을 받던 사람을 칭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단어였다.

“저희가 조기 종영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실 것 같은데 이후에 민사 소송을…….”

“……잠깐만요! 조기 종영이요?”

최 PD의 말에 태오가 물었다. 최 PD가 아차 싶었는지 말을 이었다.

“아, 그 말씀을 먼저 드렸어야 하는데 저도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조기 종영도 선택지 중 하나이긴 합니다. 어차피 2회차밖에 남지 않았긴 하지만, 데이트도 거의 무의미해졌고, 최종 선택 말고는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마저도 오메가 출연자분이 한 분이라 긴장감이 몹시 떨어지겠지만요.”

우스운 꼴이었다. 최 PD도 이례적인 상황에 뭐라고 제대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서…… 새벽에 급하게 매니저님들이랑 통화를 했는데…… 다들 출연자들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셔서 여러분들 의견을 듣는 이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간밤에 일어난 일에 당황한 건 제작진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언제 회사에까지 연락을 한 건지, 최 PD는 출연자들이 염려하고 있는 부분을 꽤 세심하게 살폈다.

역시 최 PD가 괜히 유명한 게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단솔은 지수와 데이트 한번 못 해 보고 조기 종영을 맞이하면 어쩌지 하는 철없는 걱정거리가 생겨났다.

그러고 보면, 다른 알파들과 데이트를 한 번씩 할 동안 정작 지수와는 제대로 시간을 보낸 기억이 없었다.

정말 이대로 프로그램이 끝난다면 영원히 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단솔은 프로그램 종영 후엔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땐 정말 우연히라도 마주칠 수 없을 텐데.

“조기 종영을 하게 되면……그냥 유야무야 끝내는 겁니까? 그럼 시청자 반발이 더 클 텐데요.”

대수가 물었다. 최 PD도 그의 의견에 일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연 씨 측에서도 같은 의견이에요. 조기 종영을 할 경우엔 어쨌든 논란을 피할 수 없고, 이유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파헤치려 들 테니까요.”

이연의 입장에서도 조기 종영은 되레 의혹을 키우는 꼴이었다. 두현과 엮여서 난잡한 소문을 키우는 건 배우로서 치명적인 일이었다.

“여러분들이 동의해 주신다면…… 촬영을 하겠지만…….”

최 PD는 프로그램이 이렇게 좌초되는 마당에, 출연진들이 촬영을 과연 원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되레 계약 위반을 따지고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종 선택은 꼭 하고 싶어요.”

단솔이 용기를 내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말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차피 연예인 생활에는 미련이 없는 단솔이었다.

제 삶이 두 번을 살아도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어차피 망하는 인생, 하고 싶은 걸 해 보고 싶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두현을 선택하려고 했던 지수에게는 최종 선택이 의미가 없어져 버린 상황이었지만, 꽤 간절해 보이는 단솔의 모습에 지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미 단솔의 마음에 민혁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기에 단솔의 태도에 새로이 충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그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다른 분들 의견도 비슷하신 건가요?”

단솔의 의견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 최 PD가 조심스레 다른 사람들의 의사를 물었다.

가장 먼저 답한 것은 태오였다. 태오는 단솔과 함께 붙어 있는 지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가 말했다.

“이왕 시작한 거 마무리는 지어야죠.”

“저도 정대수 씨 의견이랑 비슷해요. 최종 회차만 남기고 그냥 종영하면, 그림이 더 이상해 보일 거예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들끼리 상상을 하고 떠들어 대겠어요.”

민혁 역시, 조기 종영보다는 촬영 강행에 무게를 실었다.

최 PD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이번 시즌은 매 회차가 위기의 연속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출연자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하고, 또 고맙네요.”

원하는 것을 얻고자 출연해 이렇게 고생하는 출연진도 힘들기는 했지만, 정말 힘든 것은 스태프들이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에 연신 사과를 하는 최 PD는 본 중에 가장 지쳐 보였다.

아직도 2층 복도에는 어젯밤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고 있었고, 이연의 소속사는 방송사의 관리 부실을 이유로 들어 소속 아티스트를 다치게 했으니 관련자를 고소하겠다며 법적 대응을 운운했다.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다는 이연 덕분에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긴 했지만,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에게도 실로 큰 위기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최 PD의 전화는 계속 울렸다.

그런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대수가 팔짱을 풀며 말했다.

“최 PD, 사과든 감사든 프로그램 다 끝내고 합시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