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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08화 (108/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08화

어제 늦은 시간까지 이연과 대화를 나누고 들어온 단솔은 중요한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후련한 기분으로 거실에 앉았다.

오늘 아침밥을 먹으면서부터 태오가 얼마나 남의 데이트를 구경하는 게 재미있는 줄 아냐며 호들갑을 떠는 통에 단솔은 모니터가 설치되기 전부터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단솔 씨, 왜 이렇게 일찍 나와 있어요? 이연 씨는 아직 나가지도 않았는데.”

마치 재밌는 영화를 보는 사람처럼 기대하고 있는 단솔에게 민혁이 물었다.

“태오 씨가 하도 자랑을 해서, 제일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려고 미리 기다리고 있어요.”

예전의 단솔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한때는 이연과 두현이 붙어 있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저리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뜨겁게 좋아하던 사람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걸 보면, 연애 감정은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재밌긴 하더라구요. 고등어 머리 잘 어울리던데요. 다음 앨범 콘셉트 어때요? 노량진소울즈.”

“형 진짜 그러실 거예요? 저희는 제우스랑 다르다구요. 이번에도 망하면, 다음은 없어요.”

단솔의 장난에 민혁은 짐짓 표정이 진지해졌다.

“진짜요?”

“아니요. 저도 몰라요. 하하.”

“아, 놀랐잖아요……!”

민혁은 아직 세팅을 하느라 분주한 스태프들의 눈치를 살폈다.

“해명 도사 말고도 유명한 무속인들 리스트 받아 놨어요. 혹시 단솔 씨 종교 같은 거 있어요?”

“……아뇨.”

“종교계 쪽에도 퇴마 의식 해 본 분들로.”

“잠깐만요……! 형, 저는 빙의 같은 게 아닌데요.”

“어…….”

민혁이 마치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비슷한 맥락…… 그러니까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됐어요. 고마워요, 형. 나중에 거기 어딘지 꼭 알려 주세요.”

단솔과 민혁이 속닥거리고 있을 때, 샤워를 막 끝내고 내려온 지수가 그 모습을 발견했다. 역시 단솔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민혁인 걸까.

“무슨 얘길 그렇게 재밌게 해?”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단솔은 갑자기 들어온 지수의 물음에 우뚝 굳어 버리고 말았다. 혹시 듣지는 않았겠지?

민혁과 달리 지수가 회귀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저를 정신 병원에 데려가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말고 나도 좀 알려 줘. 무슨 얘긴데.”

지수는 괜한 심술이 났다. 이 섬에 있는 놈들 중에 고르라면 그래도 민혁이 제일 나은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만, 제 커리어를 포기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썸 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건 꽤 괴로운 일이었다.

“단솔 씨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하기 싫다는 거구나.”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니까요?”

“어어…… 알았어.”

지수가 민혁을 높이 평가하는 것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런 점이었다. 민혁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이연과 두현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단솔은 차라리 두 사람이 즐겁게 데이트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수가 조금이라도 단념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똑바로 쳐다볼 용기도 없어서 단솔은 힐끗거리며 아직 켜지지 않은 모니터에 비치는 지수를 구경했다. 역시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데이트하는 걸 즐기는 변태가 어디 있겠어.’

그래도 마지막 데이트인데, 이연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회귀 전 방송이 끝나고 진짜 연인으로 발전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연은 그런 단솔의 기대를 와장창 무너뜨렸다.

* * *

“형! 이거 좋아하신다고 그래서…… 여기 예약하느라 진짜 힘들었어요.”

“어…… 그래. 고마워.”

“저희 이제…… 최종 선택까지 일주일도 안 남은 거 아세요? 안 끝날 줄 알았는데, 진짜.”

“아, 그렇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낡은 고무줄처럼 뚝뚝 끊기다 못해 바스러질 정도였다. 보는 사람이 숨 막히게 어색할 정도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단솔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지수의 표정은 역시나 좋지 않았다.

“와…… 이연 선배 철벽 디펜스…….”

“이렇게 보니까 이연 씨도 생각보다 독한 사람이네요. 그래도 마지막 데이트인데 눈길 한 번을 안 주고…….”

단솔의 옆자리에 앉은 민혁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지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눈길을 왜 줘. 마음에도 없는 사람한테.”

그 순간, 지수의 머릿속에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다가 단솔을 등한시하는 민혁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수의 예민한 반응에 대수가 지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미쳤어? 너 왜 그래?”

“지수 형, 질투해요?”

“뭐?”

태오의 말에 지수가 머뭇거렸다.

질투라면 질투였다. 다만 두현이 아닌 단솔을 향한 질투였을 뿐.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절로 몸과 마음이 전부 단솔을 중심으로 흔들렸다.

* * *

“하…… 그만 들어가자.”

“네?”

“너도 재미없잖아. 지금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끝나고 나서도…… 우리 그냥 좋은 선후배 사이로 지내면 좋겠어.”

식사를 하고 카페에 앉아 있는 동안, 이연은 한 번도 두현에게 먼저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두현이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대화는 두 사람 모두를 즐겁게 하지 못했다.

“어제랑 많이 다르시네요.”

좋은 선후배 사이. 흔하고도 분명한 거절이었다.

애초에 이연에게 수도 없이 받아 본 거절이었다. 그럼에도 더 뼈아프게 느껴지는 건 어제 단솔과의 데이트를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단솔에게는 묻지도 않은 가정사까지 늘어놓는 그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카메라 없는 데서 둘이 얘기 좀 할까.”

“네……? 네…….”

매니저가 가져온 이연의 개인 차량에 올라탈 때만 해도, 두현은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바보 같은 기대는 금방 산산조각 났다.

“우연히 전화하는 걸 들었어.”

두현은 무의식중에 몰래 숨겨 놓은 핸드폰이 들어 있는 주머니 위를 더듬었다.

“네가 단솔이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

“형, 나는.”

두현은 하마터면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이연에게 말할 뻔했다.

내가 어떻게, 어떤 취급을 받고 죽었는데,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단솔이 괴롭히지 마.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난 제일 먼저 널 의심하게 될 거야. 널 미워하고 싶지 않아.”

“……꼭, 협박처럼 들려요.”

말투만 다정한 협박이었다. 이연은 두현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한 번도 궁금한 적 없어요? 제가 주단솔을 왜 미워하는지…….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잖아요.”

“궁금하지 않아. 내가 알 필요도 없고. 그리고…… 나를 향한 집착도, 그만했으면 해.”

차 안에는 한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두현은 울먹거림이 섞여 바보 같은 소리를 낼까 봐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그게 사랑이라곤 생각 안 해 봤어요? 한 번도?”

“내가 찍었던 영화를 돌려 볼 일이 있었어. 관객 수가 집계도 안 되는 작은 영화들까지. 네가 있더라, 신기하게. 이것도 사랑이니?”

처음엔 우연이었다.

친구와 함께 엑스트라로 촬영을 하러 갔을 때, 이연을 처음 만났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는 학생 영화에 출연하기에는 너무도 빛나는 얼굴에 분위기.

두현은 첫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는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영화마다 엑스트라 아르바이트 모집에 지원했다.

그것 외에는 그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대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저예산에 어렵사리 찍은 영화들은 개봉을 못 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고등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엑스트라로 출연해 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요.”

“싫다는 사람 따라다니는 건, 집착이고 괴롭힘이야.”

“와 줘서 고맙다고 했어요. 매번 챙겨 줘서 고맙다고. 됐어요, 형한테는 그게 기억도 안 날 만큼 안 중요한 기억이었겠죠.”

두현은 이연을 만나기 위해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한 지 1년쯤 됐을 때를 떠올렸다.

이연의 첫 상업 영화였다. 독립 영화와는 비교도 안 되는 촬영장 분위기에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나간 것이었다.

그동안 말도 못 붙이고 멀찍이 서 있었던 게 답답했던지, 친구가 이연이 지나갈 때쯤 두현을 데리고 말을 걸었다.

“형! 얘가 형 팬이래요!”

“어? 아…… 나 알죠? 우리 자주 봤는데.”

“어…… 팬이라서…… 자주…… 배우님 촬영하시는 작품마다 아르바이트로 지원했어요.”

“오…… 진짜요? 영광이네요. 내 팬이 촬영장에 같이 있다니까 왠지 좀 든든하네. 사실 이 영화는 좀 규모가 커서 나 지금 되게 긴장하고 있거든요.”

“엄청…… 잘하시던데요.”

“진짜요? 아 진짜 고맙네……. 사인이라도 해 줄까요?”

“……네⁈ 진짜요?”

“그게 뭐 어렵다고, 잠시만.”

심지어 그날 이연은 직접 펜과 종이를 챙겨 와 사인을 해 주었다.

제가 아직도 그걸 얼마나 소중하게 갖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두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듯, 아니 기억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 이연의 모습에, 결국 참아 온 눈물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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