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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04화 (104/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04화

    어두운 방 안, 단솔의 눈앞에 새빨간 버튼이 놓여 있었다.

    버튼에는 한지수, 정대수, 이이연, 제갈민혁, 마태오의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이곳을 나갈 문은 보이지 않았다. 단솔은 결국 ‘한지수’라고 적혀 있는 버튼을 눌렀다.

    “형, 진짜…… 우리가 형 악플 받는 거 마음 아파서 데이터를 얼마나 쓴 줄 알아? 일부러 제일 빨리 댓글 달려고 속도 빠른 요금제 쓰느라 통신비도 십만 원씩 썼어. 근데 이런 선택을 했다고?”

    “단솔…… 실망이야. 굿 바이. no hope korea anymore.”

    “형…… 나 아이돌 한다고 다른 애들 기초 탄탄 산수 풀 때 춤만 췄어. 구구단도 겨우 외우는데 형 때문에 학교로 돌아가야 해.”

    “야, 서민재. 9×7이 뭐야.”

    “83?”

    “형…… 나 무릎이 너무 시려…… 춤추느라 연골이 다 닳아 버린 것 같아. 다시 택배 상하차 알바 하러 돌아가기 너무 무서워…….”

    다리를 절뚝거리는 연규가 단솔을 쫓아왔다. 단솔은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멤버들이 단솔을 원망하는 소리가 등 뒤에 꽂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암흑 속에서 미친 듯이 달리던 단솔이 커다란 벽 같은 곳에 부딪혔다. 넘어진 채로 뒤로 주춤하던 단솔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잡아챘다.

    그것은 붉은 끈이었다. 끈의 끝자락에는 사람 이름이 적힌 띠가 매달려 있었다.

    ‘마태오’

    쿵, 쿵, 쿵.

    “너, 이 쥐새끼 같은 놈 잘 만났다.”

    그 순간 단솔에게 쿵쾅거리면서 다가온 것은 몸이 집채만큼 커진 대표였다.

    “감히 네깟 게 회사를 망하게 해⁈ 별 같잖은 놈이 감히 제우스를 건드려서 이 사달을 내냐고!”

    잔뜩 화가 난 대표에게서 단솔은 미친 듯이 도망쳤다. 하지만 달리고 달려도 단솔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발밑을 내려다보았을 땐, 단솔을 괴롭히던 악플이 가득 적힌 늪이 보였다. 단솔이 발버둥 치면 칠수록 늪은 단솔을 먹어 치웠다.

    “아…… 안 돼!”

    헉…… 허억…….

    늪에 빨려 들어가 목까지 잠긴 순간, 단솔이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시달린 건지 등에는 땀이 한가득이었다.

    아직 새벽 3시밖에 안 된 시간. 단솔은 다시 잠들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 숨을 가라앉히던 단솔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정말 감이 오질 않았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긴 하는 걸까.

    다시 한번 기회를 얻는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제 몸이 꼭 커다란 강물에 휩쓸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존재감 없이 조용히 프로그램을 끝내는 것도, 제대로 대중에게 제 모습을 각인시켜 호감형 연예인이 되는 것도 실패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숨을 내쉰 단솔이 소파에 찰떡처럼 붙어 누워 있을 때였다.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굴까. 단솔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아! 깜짝이야!…… 이젠 헛게 다 보이나.”

    “헛거 아닌데요. 진짠데요.”

    “……단솔 씨?”

    위에서 내려온 사람은 태오였다.

    단솔은 내심 오메가 숙소 쪽에서 내려온 사람이 두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태오와 그리 편한 사이도 아니면서.

    “이 시간에 왜 내려와 있어요.”

    “잠이 안 와서요……. 태오 씨는요? 운동 가게요?”

    태오는 잠옷 차림이 아니라 운동복 차림이었다. 잠옷을 벗어 던지기에는 꽤 이른 시간이었다.

    “산책 갈 건데. 혹시…… 같이 갈래요?”

    * * *

    잠옷 위에 두툼한 카디건을 걸친 단솔과 운동복을 입은 태오가 나란히 바닷가를 거닐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해야 할 말이 많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 침묵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꼭 이럴 때만 같이 있네요.”

    “그러게요.”

    유독 태오와는 아무도 없는 새벽 시간대나 사람들이 썰물처럼 다 빠져나가고 난 뒤에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태오 씨도 불면증이 있다고 했죠?”

    “아이돌들한테는 머스트 헤브 아이템이니까요. 불면증에 우울증, 공황 장애. 그렇다고 내가 아프다고 빠질 수도 없고. 누구한테 하소연하면 나약하다는 소리만 듣잖아요.”

    단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나가면 잘나가는 대로, 못 나가면 못 나가는 대로 대중에게 비난받는 게 이 일이었다.

    “아까 갑자기 화낸 거 미안해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건 연인이든 아니든…… 기분 별로잖아요.”

    “태오 씨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호텔에서 일도…… 게임 할 때 제멋대로 군 것도 미안해요. 나도 몰랐어요, 내가 이렇게 별로인 놈인지.”

    태오는 단솔만큼이나 자책하고 있었다.

    단솔은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태오를 희망 고문한 제 탓이 컸다.

    “태오 씨가 사과하지 마요. 다 제 잘못인걸요. 태오 씨가 사과를 하면…… 저는 더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아요.”

    “…….”

    “사실 악몽을 꿨어요. 누구를 선택해도 혼나는 꿈이요. 지뢰밭은 나예요.”

    제발 날 좋아하지 마요, 태오 씨.

    단솔은 뒷말을 삼켰다. 갑작스레 태오가 자신을 안아 왔기 때문이었다. 단솔은 금세 태오가 눈물을 가리기 위해 자신을 안았음을 깨달았다.

    “어…… 태오 씨.”

    “좋아하지 말라는 말만 하지 마요. 내 마음은 내 거예요. 단솔 씨 마음 어떻게 해 달라고 안 할게요. 나는 다른 형들이랑은 달라요. 단솔 씨 위해서 숨기고 감추고 이런 게 안 돼요. 자꾸만 감정이 터져 나오는 걸 어떡해요.”

    앞뒤가 안 맞게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단솔은 차라리 이렇게 솔직한 그가 부러웠다.

    차라리 회귀를 하지 않았다면 무모하고 당당하게 나설 수나 있었을까. 젊은 육신에 들어온 영혼은 태오처럼 사랑만 보고 순수하게 나서기에는 너무 낡고 지쳐 있었다.

    단솔은 한참이나 말없이 태오의 여린 등을 토닥거렸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라고.

    태오를 위로하면서 단솔은 스스로를 용서했다.

    * * *

    “킁…… 근데…… 태오 씨. 좀 추운데 우리 이만 들어갈까요?”

    “어…… 네.”

    “팔 좀 풀어 줄래요?”

    “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던 건지 태오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자기도 추워서 콧물을 킁킁거리면서도 태오는 아쉬운 듯 단솔의 어깨에 두른 제 팔을 거뒀다.

    두 사람이 조용히 춘몽각으로 들어섰다. 아직 모두가 자고 있을 새벽 시간이라 문을 여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달그락.

    달그락.

    하지만, 누군가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릇을 닦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 같기도 했다.

    “거기…… 누구세요?”

    “악! 깜짝이야…….”

    태오와 단솔이 주방으로 향했을 때 마주한 것은 그릇에 무언갈 담고 있던 두현이었다.

    “형, 여기서 뭐 해요?”

    두현은 태오와 단솔을 보곤 눈에 띄게 놀란 것 같았다. 그의 뒤로 물병이 엎어진 듯 흥건하게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 흐르는데 도와드려요?”

    “됐어.”

    “이게 다 뭐예요?”

    태오의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단솔이 도와주겠다는 것까지 거절하면서 두현은 축축한 바닥을 옆에 있던 키친타월을 꺼내 전부 닦아 냈다.

    “알 거 없어. 두 사람이야말로 이 시간에 왜 단둘이 있는 거지? 혹시…… 둘이 무슨 사이라도 돼?”

    두현의 반응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온 사람치곤 너무도 방어적이었다.

    혹시나 단솔이나 태오가 캐물을까 봐 먼저 공격적으로 말을 하는 것까지. 꼭 무언가 숨기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허, 잠이 안 와서 같이 산책한 거거든요. 자기도 이 시간에 나와 있으면서 뭘……. 형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사회에선 이런 사이를 ‘친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럼 친구 두 분이서 놀든 잠을 자든 알아서 하시구요. 난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

    분명 두현을 긁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두현은 태오의 말에 상대하지 않았다.

    단솔을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가는 두현이 걸을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닐은 아니고, 그렇다고 종이도 아닌 느낌. 두현은 분명 주머니에 뭔갈 숨기고 있었다.

    “저게 뭘까…….”

    “네?”

    “아, 아니에요…….”

    물컵과 부스럭거리는 소리. 약을 먹으려고 했던 건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뭐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단솔의 혼잣말을 듣고 되묻는 태오에게 단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하지 않은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하암…… 졸리다. 사실 이야기 안 나눴으면 계속 마음 불편해서 못 잤을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저도…… 한결 나아졌어요. 고마워요 태오 씨. 이제 저희 잠깐 눈 붙이러 들어가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태오는 단솔의 소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나는 단솔 씨가…… 후회 없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네? 그게 무슨…….”

    “자꾸 타협을 하면, 그게 두고두고 후회되더라고요. 잘 자요.”

    그 말을 남기고 태오는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 버렸다.

    단솔은 태오의 방문이 달칵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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