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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103화 (103/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03화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다.

쪽지의 구석엔 이 질문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의 숫자가 찍혀 있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 한 번에 읽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단솔이 이 이야기를 꺼내 주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음…… 캐스팅은 저도 궁금하긴 했어요. PD님 말씀으로는 제가 나왔던 일일드라마를 보셨다고…… 제가 거기서 되게 사랑받는 막내아들로 나왔거든요.”

그렇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중산층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4형제 중 막내아들.

철딱서니가 없는 듯해 보이지만 극 중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면 늘 화해를 주도하는 역할이었다.

작은 역할이지만, 단솔은 꼭 제 삶과 정반대인 것 같은 그 배역이 참 좋았다.

“근데 실제로는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아서 많이 후회하셨을 거예요. 하하.”

방금까지도 웃던 사람들이 다 진지하게 단솔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수는 급기야 이런 질문을 제대로 걸러 내지 않은 제작진이 있는 쪽을 살벌하게 노려보기도 했다.

“어…… 제가 많이 부족한 건 계속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수준 차이는…… 뭐…… 어떤 부분에서 물어보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다……. 전부 다 차이가 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단솔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답을 했다. 실력인지, 재력인지, 외모인지. 질문자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제가 입고 있는 옷만 하더라도 다른 출연자들이랑은 0 하나가 더 차이 났다.

그마저도 단솔이 아예 인지도가 없었던 때와 비교하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좋아진 편이었다.

―곤란한 질문이었을 텐데, 단솔 씨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느낀 건지, 스태프는 급하게 게임을 진행시켰다.

―이번엔 서로에게 질문을 하나씩 하는 건 어떨까요. 마태오 씨, 주단솔 씨에게 평소 궁금했던 게 있었나요?

자신의 차례가 지나고 한참이나 긴장을 놓고 있던 태오가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데이트를 다녀온 이후로 부쩍 어색해진 두 사람은 아직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궁금한 게 뭐가 있을까. 단솔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 단솔 씨 마음이…… 지금이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어…… 어떤 의미인지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저희 시청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태오는 단솔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는지 가장 먼저 눈치챘다. 이곳에서 저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단솔과 태오뿐이었다.

“그러니까, 단솔 씨 마음에 있는 그 새끼 말고 날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있냐구요. 지금이라도.”

―자…… 잠깐만요 마태오 씨!

“내가 더 잘해 줄게요. 네?”

단솔이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태오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알파들의 표정이 제각각 어두워졌다.

스태프들도 계속 촬영을 해도 되는 건가 싶어 자꾸만 최 PD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정리시켜야 할 메인 PD는 마치 월척을 잡은 어부처럼 빙그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제가 왜 이렇게까지…… 어설프게 구는지 모르겠어요. 진실 게임 같은 건 그만할래요. 죄송하지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최 PD가 움직인 건 태오가 자리를 털고 춘몽각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였다.

“PD님…… 어…… 어떡할까요? 계속 진행해요?”

방송을 통해 목소리를 전달해야 할 스태프가 조심스레 미진에게 물었다.

“애들 표정 제대로 땄니?”

“어…… 네…….”

“그럼 이만 접자.”

* * *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스태프들이 앞에 세팅해 놓은 박스를 치우는데도 사람들은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이 모든 소동의 중심인 단솔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두현도 단솔을 뒤따라 오메가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알파들은 모두 소파에 흘러내린 사람들처럼 멍하니 불꽃이 타오르는 것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굴까요, 그 새끼.”

카메라가 철수할 때까지 기다리던 이연이 스태프들이 사라지자마자 태오의 말을 인용해 물었다.

이연은 일찍이 단솔이 자신을 멀리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를 딱히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방심했던 차였다.

“나도 몰라. 야, 한지수. 넌 알 거 아냐.”

“어…… 뭐,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

팔짱을 끼고 있던 대수가 지수의 말에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뭐, 왜. 오지 마.”

“누구야 그 새끼.”

“오우, 씨…… 누군지 알면 죽이겠다? 난 누군지 알아도 말 못 하지.”

지수가 기지개를 켜면서 민혁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일제히 알파들의 눈이 민혁을 향했다.

“저…… 저요?”

방금까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한숨을 내쉬던 민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니에요!”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민혁의 표정엔 ‘혹시 나인가?’ 싶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아닌데 왜 웃어.”

“어어…… 민혁 씨 진짜 이상하네. 지금 되게 수상한 거 알죠?”

“아…… 아니라니까요! 한지수 씨는 왜 갑자기 생사람을 잡고 그래요!”

나라 잃은 백성만큼이나 의욕 없는 표정을 한 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솔이도 알아요? 민혁 씨가 이렇게 비겁한 사람인 거. 두 사람 지난주에도 같이 있었잖아요.”

“뭐?”

“진짜예요⁈”

대수의 솥뚜껑 같은 손이 민혁의 늘어난 티셔츠의 목 부분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민혁도 나름 운동선수 출신인데, 대수의 손에 힘없는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켁…… 켁…… 잠깐…… 잠깐만여. 대수 씨…… 이거 좀.”

“그것도 1박 2일로.”

얄밉게 지수가 손가락을 펴 가며 1박 2일을 강조했다. 대수의 손 악력에 더 힘이 들어갔다.

“제갈민혁 씨! 이거 반칙 아니에요?”

애초에 룰을 정한 적 없는 게임에서 이연은 규칙을 따져 묻고 있었다. 민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제 위에서 멱살을 잡은 대수를 뿌리쳤다.

“아! 이것 좀 놔 봐요! 잠깐! 잠깐 타임! 해명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뭔데, 해 봐. 잘 생각하고 말해. 그게 네 마지막 유언이 될 수도 있으니까.”

대수의 엄포에 민혁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민혁은 이내 지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연이었어요. 정말, 정말로 우연히 저희 할아버지 동네에서 길 잃은 단솔 씨를 만난 것뿐이라고요.”

“허, 그게 말이 돼? 단솔이가 바보도 아니고, 핸드폰도 있는데 길을 잃었다고? 거기가 어딘데?”

“경기도 한라시 행복면 정포 2리. 근처 카페에 아는 분 만나러 왔다가 핸드폰이 망가져서 길을 잃었대요. 저 없었으면 아마 단솔 씨 길에서 헤매고 추워서 얼어 죽었을지도 몰라요.”

구체적인 정황에 이번에는 대수와 이연이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단솔 씨…… 진짜 핸드폰 바뀌긴 했더라고요.”

이연은 촬영 시작 때쯤 스태프에게 핸드폰을 제출하면서 단솔의 휴대폰이 최신형으로 바뀐 걸 본 기억이 났다.

기세가 한껏 누그러진 두 사람의 분위기에 민혁이 반격을 하듯 지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한지수 씨. 지수 씨는 단솔 씨가 저랑 같이 있었던 걸 어떻게 아셨죠?”

“어?”

대수와 이연의 시선이 그때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소파에 눕듯이 앉아 있던 지수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지수는 순간, 맹수에게 쫓기는 초식 동물의 기분을 느꼈다. 지수의 온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튀어야 한다. 그것도 빨리.

* * *

밖에서 무슨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단솔은 계속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제게 오만 정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한 태오는 갑자기 남들이 다 있는 곳에서 고백을 해 왔고, 그런 고백을 듣고도 저는 지수의 표정만 살폈다.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더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커져 가는 걸 느꼈다.

자신이 이렇게나 감성적인 사람이었나. 지수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꼴이 우스웠다.

사실, 태오가 제게 했던 질문은 제가 지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혹시 마음이 바뀔 수는 없냐고, 나를 그렇게 아껴 주었으면서 왜 이제 와 내가 아니라 두현이냐고 묻고 싶었다.

“욕먹겠지 아마…….”

이미 이연을 사이에 두고 두현과 싸우느라 한 번 말아먹었던 인생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삶을 망칠 순 없었다.

무너지는 건 저 혼자만이 아니었다. 제게 달린 악플에 일일이 댓글을 다느라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멤버들의 얼굴이 천장에 둥둥 떠다녔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다른 누군가를 고를 수도 없었다.

단솔은 태오의 상처받은 얼굴이 생각났다. 이미 태오도 눈치를 챈 상황에서 다시 거짓말을 해 누군가를 상처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단솔은 어릴 때 했던 게임이 생각났다. 토끼가 달리기를 해서 결승점에 골인을 해야 하는 게임이었는데, 곳곳에 구덩이가 있었다.

토끼는 구덩이를 밟으면 넘어져 다쳤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구덩이는 커졌고 많아졌다. 커다란 구덩이에 빠지면 그 안에서 우느라 게임이 끝날 때까지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단솔은 지금 그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도 최종 라운드만을 앞둔 힘없는 토끼.

단솔의 앞날에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구덩이가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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