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100화
“태오 씨 이것 좀 놔줘요…… 아파요.”
단솔은 온천 입구에 다다랐는데도 제 팔뚝을 강하게 잡고 놔주지 않는 태오에게 말을 했다.
“아, 미안해요.”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단솔의 팔뚝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단솔은 지금이라도 당장 지수에게 달려가 맞은 곳은 괜찮은지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앞서서 걷는 지수를 향해 걸음이 빨라지려는 걸, 또 한 번 태오가 붙잡아 속도를 늦추었다.
“아, 왜 그래요 태오 씨?”
“가지 마요.”
“네……? 온천에 오자고 한 건 태오 씨잖아요.”
그 말에 태오의 표정을 쳐다본 단솔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오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태오는 복도에 있는 비상계단으로 단솔을 끌고 들어갔다. 온천으로 들어가는 복도는 하나뿐이었는데, 스태프들은 방송 준비로 다들 정신이 없어 두 사람이 계단 쪽으로 사라지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내 말은…… 지수 형한테 가지 말란 소리였어요.”
계단참으로 들어오자, 태오는 그제야 단솔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형이 다친 것 같아서.”
“나도 다쳤어요.”
그의 말이 맞았다. 태오는 심지어 제 실수 때문에 다친 것이었다. 단솔은 그제야 태오에 대한 제 배려가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요. 많이 아팠어요?”
단솔은 쪼그려 앉아 태오의 발을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단솔의 양어깨를 잡은 태오가 단솔을 불쑥 일으켰다.
“발이 아니라 마음이요. 도대체 이럴 거면 날 왜 데이트 상대로 지목했어요? 단순히…… 한 번도 데이트를 안 해 본 게 불쌍해서예요?”
단솔은 그제야 자신이 태오에게 잔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고백까지 거절한 이후였다. 이쯤이면 마음 정리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 건 제 오만이었다. 정작 자신은 불쌍하다는 소리를 직접 듣고도 오히려 지수에 대한 마음을 키워 가지 않았던가.
단솔은 제 불찰에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아니라는 말도.
이미 서로의 마음이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이상 단솔의 입에서 나올 말은 태오에게 상처가 되는 얘기뿐이었다.
“…….”
단솔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차라리 태오를 좋아했다면, 저 역시 조금은 편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와중에도 단솔은 제 눈앞에 상처투성이가 된 태오나, 이미 너덜너덜해진 제 마음보다 취객에게 얻어맞은 지수의 가슴팍이 더 신경 쓰였다.
“단솔 씨, 정말 나빠요.”
태오가 그런 단솔의 마음을 읽은 듯 그 말 한마디를 내뱉고 비상계단 문을 열고 사라졌다.
정말 이번 생에는 미움받고 싶지 않았는데, 저는 여전히 나쁜 사람이었다. 사람 마음이 뜻처럼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상처 줄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단솔은 계단에 주저앉아 한참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 * *
노천탕에 도착한 지수는 태오와 단솔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뒤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했던 단솔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지수가 먼저 나서려고 했던 그때, 스태프가 급하게 노천탕 문을 열고 들어왔다.
“촬영 시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마태오 씨는 아까 다친 곳이 아무래도 너무 안 좋다고 숙소로 먼저 들어가신대요!”
“단솔이는요?”
“뭐…… 같이 가시지 않을까요?”
지수는 일순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명색이 커플 데이트인데, 저와 유두현이 있는 곳에 단솔이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다.
“촬영 시작할게요!”
* * *
멍하니 생각을 하느라 뒤늦게 나온 단솔이 비상계단에서 나오자마자 스태프 한 명과 마주쳤다.
“어머, 단솔 씨! 숙소로 가신 거 아니었어요?”
“아뇨……? 잠깐 태오 씨랑 얘기를 좀…….”
“태오 씨는 갔는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간다길래 당연히 단솔 씨도 같이 가는 줄 알았어요. 혹시 둘이 싸웠어요? 아까 태오 씨도 표정 안 좋던데.”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단솔이 잘못을 한 게 맞았다. 그렇게 가 버렸다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커플 데이트인데 두 사람 사이에 끼는 것도 우습고, 돌아가서 태오의 얼굴을 볼 엄두도 나질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계속 있는 것 아닌 것 같았다.
“……싸운 건 아니에요. 저도 숙소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어쩌죠, 지금 태오 씨 데려다주는 차 외에는 저희 지금 이동 가능한 차량이 없어서요…… 다들 장비랑 소품 옮긴다고…….”
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스태프만큼이나 당황한 것은 단솔도 마찬가지였다.
“아…… 그럼 저희 스태프 룸에서 조금 대기하실래요? 장비 가지러 간 차량 오면 바로 데려다 드릴게요. 어차피 지금 사람들 다 바빠서 아무도 안 들어갈 거예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각종 장비나 스태프들이 들고 온 짐을 갖다 둘 곳을 따로 잡아 놓은 모양이었다. 단솔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스태프의 뒤를 따라갔다.
온천씩이나 와서 수영복을 입어만 보고 온천에는 발 한쪽도 담가 보지 못한 채였다.
“좀 어지럽죠. 하하.”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정말.”
“아유, 뭘요. 차량 오면 바로 데리러 올게요.”
“감사합니다!”
단솔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나가는 스태프에게 연신 90도로 인사를 했다. 하마터면 지수와 두현 사이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거나, 탈의실에서 하염없이 촬영이 끝나길 기다릴 뻔했다.
다행히 침대 위에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아 단솔은 자연스레 창가에 있는 침대 쪽에 몸을 뉘였다.
태오와는 어떻게 이 앙금을 풀어야 할지. 단솔은 생각이 많아졌다.
지지직.
그때였다. 단솔이 누워 있던 쪽에서 무슨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단솔이 주변을 살펴보자, 스태프들이 쓰는 무전기가 근처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장비가 연신 지지직거리더니, 온천에서 한창 촬영 중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전원 버튼이 보이지 않았고, 사실 이걸 꺼도 되는지조차 확신이 서질 않았다.
무슨 폭탄이라도 된 듯 무전기를 올려놓은 단솔은 가만히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온천은 진짜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데뷔하고 나선 찜질방도 못 갔는데.
―오, 그런 데도 갈 줄 아나 봐?
―허, 저도 한국 사람이거든요?
그건 아래에 있는 노천탕에서 들려오는 지수와 두현의 대화 소리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말을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단솔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저도 모르게 그 소리에 집중을 하느라 멀찍이 밀어 놨던 무전기를 손에 쥐고는 제 귀에 가까이 댔다.
―나, 네가 좋아졌어.
―갑자기요?
―어.
―나랑 만나자. 잘해 줄게.
쿵. 지수의 고백이었다. 단솔은 저도 모르게 무전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 충격인지, 떨어지면서 무전기의 전원 버튼이 눌린 건지, 급하게 다시 집어 들어 봤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 * *
진심이라곤 1그램도 찾아볼 수 없는 지수의 고백에 두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금 지수는 분명 연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수를 마주 보고 있는 저밖에는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중은 몰라도 배우들끼리는 저게 연기인지 아닌지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장난치지 마요.”
“장난 아니야. 난 진심인데?”
당장 1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단솔의 손가락이 조금 다친 걸 두고 자신이 더 안절부절못하던 지수였다.
“선배 진짜 이럴 거예요?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내 진심이 너한테는 그렇게 못 견딜 정도야?”
노련한 지수의 말에 두현이 연신 카메라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제아무리 영악한 두현이지만, 지수를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지수는 아까 취객을 만난 뒤로 생각이 많아졌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솔에게 이미 시장에서 쓸 만큼 쓰고 버려질 일만 남은 제가 붙어서 좋을 게 없었다.
두현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차피 두현도 데뷔 초부터 포스트 한지수니, 한지수의 절친한 동생이니 하며 제 이름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고 다니지 않았던가.
지수가 주연하는 작품에 끼워팔기로 몇 번이나 캐스팅됐으니 이 정도는 그에 비하면 값싸게 빚을 갚는 셈이라고 지수 혼자 합리화를 했다.
어차피 그렇다고 두현이 지수를 택할 일도 없었고, 민성처럼 열애설로 인지도를 높여야 할 때도 지났으니.
“아…… 씨발…… 진짜. 적당히 좀 해요.”
하지만, 두현은 생각보다 더 지수를 거부했다. 그저 장단만 맞춰 주면 될 일 아닌가.
두현이 회귀자라는 것도, 과거의 일 때문에 제 이미지 관리에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것도 모르는 지수는 그런 두현의 지나친 반응에 의문이 들었다.
“저, 이건 편집해 주세요. 네?”
급기야, 두현은 온천에서 나가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신도 욕설을 내뱉은 장면을 없애 달라는 두현의 부탁에서는 어쩐지 절박함마저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