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98화
“허, 그럼 단솔 씨 우리 공방 데이트 어때요? 선캐처나 캔들 같은 것도 좋고…… 뭐 커플링 같은 것도…….”
태오는 지수의 훼방에 아랑곳 않는 듯 또 다른 데이트 코스를 말했다. 아까부터 한참을 고심하더니 레퍼토리를 여러 개 준비한 모양이었다.
“안 돼.”
하지만, 지수는 단솔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공방은 내가 갈 거야.”
“아! 형! 아깐 유람선 탄다면서요!”
“유람선 타기 전에 공방 갈 거야.”
단솔은 못내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보이는 데이트 코스마다 함께 가고 싶은 걸 보면 지수가 두현을 좋아하는 마음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컸나 보다.
“자꾸 뺏지 마요. 아…… 진짜 내가 얼마나 많이 고민한 건데.”
투덜거리는 태오의 말에 단솔이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요.”
순전히 오기였다. 단솔은 지수가 이런 제안 따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
“같이…… 가자고요. 더블데이트.”
“단솔 씨, 진심이에요?”
태오는 차마 단솔이 먼저 한 제안에 좋다 싫다 말도 못 하고 재차 물었다.
“네…… 태오 씨는 별로예요?”
“아뇨…… 저는…… 나쁘지 않네요. 하하.”
네! 별로예요! 태오는 하마터면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프로그램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단솔과 하는 데이트였다. 하지만 단솔이 처음으로 낸 의견에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태오는 지수가 제안을 거절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어…… 난 좋아.”
평소의 지수라면 백 번이면 천 번을 거절했어야 맞았다. 무인도에 들어온 이후로 두현에게 갑자기 마음이 기운 게 아니었나. 태오는 불안해졌다.
“두현 선배한테는…… 형이 물어봐 주세요.”
“어…… 응 그럴게.”
꼭 데이트 신청을 받은 소년 같은 지수의 표정에 태오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 * *
두현은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지수가 갑작스럽게 저와 엮이려고 하는 바람에 단둘이 데이트를 하면 변명도 못 할 것 같아 곤란하던 차였다.
오히려 저와 데이트를 하는 도중에 지수와 단솔이 더 친밀해진다면, 단솔의 이미지를 떨어트리고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였다.
드디어 데이트 날 아침. 네 사람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이동은 각자 해도 된다고 공지를 받았지만, 지수는 꾸역꾸역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며 승합차를 빌렸다.
“……뒷자리 괜찮아? 불편하면 휴게소라도 들를까?”
“아니요…… 괜찮아요.”
지수는 이동하는 내내 룸미러로 연신 단솔을 살폈다.
지난주, 민혁과 함께 시간을 보낸 걸 알고 있는데, 왜 이번엔 데이트 상대로 태오를 골랐을까. 두 사람 사이에도 무언가 있는 건 아닐까.
지수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세 사람이 먼저 도착한 곳은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공방이었다. 지수는 아기자기한 것들을 만들며 두현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도 싫었고, 단솔과 태오가 알콩달콩하게 노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형…… 여기는 너무 본격적인 거 아니에요?”
“공방이 아니고 공장 아닌가…….”
전형적인 데이트 코스를 피하려고 했던 걸 모르는 단솔은 기계톱 돌아가는 큰 소리에 움찔거리며 놀랐다. 지수는 괜히 머쓱해져 두현에게도 물었다.
“넌 어때.”
“음…… 나쁘지 않네요.”
두현은 지수와 괜한 러브 라인을 만들 일이 없을 것 같은 이곳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던 단솔은 그 모습을 보곤 두 사람이 꽤 잘 어울린다는 착각을 했다.
“어이! 예약하신 분들?”
시끄러운 기계의 소음을 뚫고,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나무 톱밥이 잔뜩 묻은 옷을 털면서 걸어오는 남자는 이곳의 주인인 듯했다.
“네!”
“따라와요!”
* * *
남자가 안내한 곳은 커다랗게 천장이 높고 곳곳에 목재와 기계가 잔뜩 쌓여 있는 곳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디 물류 회사의 창고라고 해도 될 만큼 크고 복잡한 곳이었다.
“부부 동반? 그냥 애인?”
“네?”
“어느 쪽이 애인이여?”
남자가 지수와 태오 가운데 서 있는 단솔을 보고 물었다. 두현은 뒤쪽에서 완성된 제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제 앞에 있는 이들이 연예인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사장님! 혹시 티브이 안 보세요? 저희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아! 보지! 왜 안 봐! 나는 야생인이다, 사람 극장, 저녁 마당! 내가 얼마나 테레비를 많이 보는데. 왜? 생긴 게 이래서 집에 테레비도 없을 것 같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저희도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들인데 혹시 모르시나 해서…….”
“아아…… 딱 보니까 너튜버구먼? 어제 새벽부터 카메라 설치한답시고 푸닥거리를 해 쌋고…… 내가 구독과 좋아요 눌러 줄 테니까 다들 가기 전에 아이디 하나씩 적고 가.”
“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제 애인은 이쪽.”
이미 구독자가 우리나라 인구수만큼 있는 태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단솔의 어깨를 감쌌다.
“어어, 그럴 줄 알았어. 이쪽은 딱 보니까 부부네. 요쪽은 커플이고.”
“아닌데요.”
사장은 데면데면하게 서 있는 두현과 지수를 보고 부부로 착각을 했다. 그 말에 지수가 얼른 부정을 했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전혀 듣질 않았다.
“자, 커플은 요쪽에 앉고, 부부는 저짝에 앉아. 의자를 만들 건데 이게 단순해 보여도 막상 해 보면 쉽지 않다고. 옆에서 한 사람은 딱 잡아 주고, 한 사람은 딱 못질하고. 합이 맞아야 해 합이.”
그 뒤로 두현까지도 몇 번이나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저씨는 금세 까먹은 사람처럼 태오와 단솔을 커플, 지수와 두현을 부부라고 불렀다.
그는 그저 수강생들을 편의상 구분하기 위해 자기 멋대로 첫인상을 호칭으로 부르는 듯싶었다.
“어이, 남편분 일로 좀 와 봐요.”
의자의 구조에 대해 간략한 설명이 끝난 후, 커다란 목재를 옮기기 위해 그가 지수를 ‘남편분’이라고 불렀을 때, 지수는 그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귀찮다는 듯 일어나 저벅저벅 다가갔다.
심지어 작업장 한구석에는 지수가 커피를 음미하는 사진이 붙은 커피 믹스 한 박스가 놓여 있었는데도, 그는 지수를 못 알아보는 듯했다.
“이렇게 딱 잡고 어? 한 놈이 망치질을 하면 한 놈이 잡아 주고. 또 한 놈이 톱질하면 옆에서 또 잡아 주고. 이 목공이 부부 금슬 좋아지는 데는 최고여. 거, 작은 신랑도 이쪽으로 와.”
“……저요?”
두현이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허허, 참. 여기 이 양반 신랑이 또 있는가?”
아저씨는 거의 두현을 들어 올리다시피 일으켜 지수의 옆에 앉히곤 두 사람이 다정히 붙어 앉게끔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태오가 슬금슬금 단솔의 옆으로 붙어 앉았다.
“옳지, 이거 딱 안 잡아 주면 허벅지 찍어요. 여기 라인 있제, 연필로 그어 놓은 거. 한쪽이 잡아 주고, 또 한쪽이 톱으로 밀어.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여!”
위이잉.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두현은 지수만 들릴 만한 거리에서 말을 했다. 워낙 주변이 시끄러워 마이크도 무용지물이었다.
“자꾸 이런 식이면 저도 가만히 안 있어요. 저랑 선배랑 엮지 말랬죠.”
“내가 엮었어? 저 아저씨가 마음대로 한 거지. 지금 불쾌한 사람이 누군데.”
인상을 찌푸린 지수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단솔과 태오였다. 똑같이 앞치마를 나눠 입은 모습이 제가 봐도 잘 어울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더블데이트를 하자고 할 때 거절할 걸 그랬다.
잠시라도 단솔을 더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태오와 붙어 있는 꼴을 보니 자꾸만 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수는 한참이나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단솔과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뒤에야 제가 자르고 있는 목재로 시선을 옮겼다.
“망쳤네…….”
이미 전문가가 그어 준 선을 벗어나 나무는 울퉁불퉁 다른 방향으로 멋대로 잘려 있었다.
작업에 영 집중을 못 하는 것은 단솔도 마찬가지였다. 단솔 역시 계속 귓속말을 나누는 두현과 지수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거슬리는 소음과 나무 먼지가 일렁이는 공간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단솔의 눈엔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연인처럼 보였다.
“저 두 사람 은근히 잘 어울리는 거 알아요?”
안 그래도 심란한 단솔의 마음을 모르는 듯, 태오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다.
“아…… 그래요? 전 잘 모르겠는데…… 두현 선배는 이연 선배 좋아하지 않나…….”
“에이…… 짝사랑도 뭐 불쏘시개가 있어야 타죠. 이연 선배가 아예 여지를 안 주는데, 아무리 좋아해도 자꾸 밀어내면 못 버티죠. 싫다는데도 쫓아다니면 스토커지.”
단솔은 꼭 그 얘기가 저를 향해서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제 마음을 자각한 뒤로 단솔의 마음은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꾸만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 몰라준 것에 복수라도 하듯 감정이 자라날수록 상처를 받는 것은 단솔이었다.
지수는 이제껏 저를 동정할 뿐이었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 뾰족하게 단솔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