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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95화 (95/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95화

    뚝.

    잘 자라는 인사에 아무 말도 없이 끊긴 전화에 지수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전화가 걸려 와 전화기가 고장 나 꺼졌다고 말해 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진짜 최악이네.”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거실 바닥에 지수가 벌러덩 누웠다. 입고 있는 다이노소울 한정 후드티를 비롯해, 오늘 우현에게 강탈하듯 뺏어 온 단솔의 굿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지수는 그중에서도 단솔을 본떠 만든 봉제 인형을 들어 올렸다. 여름 시즌에 팔다 남은 것인지 몸체에 튜브를 끼고 밀짚모자를 쓴 솜 인형 단솔이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단솔을 똑 닮은 얼굴이 귀여워 웃음이 나는 걸 보면, 저도 참 중증이었다.

    “한지수, 네가 스토커랑 다를 게 뭐냐.”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단솔이 제 팔을 베고 자던 때가 꿈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 * *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어차피 서울 집에 오는 길이었다니까요.”

    민혁이 단솔의 숙소 앞에 트럭을 세웠다. 요즘엔 보기 힘든 수동 기어 차를 모는 폼이 그럴듯하고 멋있게 느껴져 단솔은 면허도 없는 주제에 괜히 허공에 대고 기어 넣는 시늉을 해 보았다.

    “단솔 씨, 이거 들고 가요.”

    “네? 이게 뭐예요?”

    그러다 갑자기 무언갈 내미는 민혁에 놀라 민망한 듯 목을 긁었다. 민혁이 단솔의 눈앞에 건넨 것은 새 휴대폰이었다.

    아까 전 단솔이 민혁의 집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지난 후였다. 거실로 나왔을 때 민혁은 보이지 않았고, 민혁이 차려 준 밥상 위에는 볼일이 있으니 일어나면 먼저 밥을 먹고 있으라는 간단한 내용의 쪽지만 올려져 있었다.

    그 할 일이 핸드폰을 사는 거였나. 단솔은 핸드폰을 받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진짜, 다들 왜 이러는 거지. 정말 제가 불쌍해 보이나. 요즘 저만 보면 더 잘해 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형, 제가 좀…… 불쌍하게 생겼어요? 진짜 진심으로요.”

    “예?”

    늘 웃는 상이던 민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솔은 그 핸드폰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특히 사람에게 상처받은 기억이 많은 단솔은 무언갈 받는 게 싫었다. 그건 원하지 않는데 빚을 지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받으면 갚아야 한다는 게 단솔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명제였고, 늘 갚는 것에는 이자가 붙기 마련이었다.

    “주단솔.”

    민혁이 처음으로 단솔에게 반말을 내뱉었다. 깜짝 놀란 단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민혁이 단솔의 손을 펴서 핸드폰을 얹어 놓았다.

    “사랑이란 게요, 받을 줄 알아야 줄 줄도 아는 겁니다. 받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요. 자, 이건 숙제예요. 마음 편하게 선물 받기.”

    “어……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요.”

    철컥. 민혁은 단솔을 쫓아내듯 조수석 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단솔이 머뭇거리자 민혁이 말했다.

    “단솔 씨가 빨리 내려야 나도 가죠?”

    “아……! 죄송해요!”

    주섬주섬 단솔이 짐을 챙겨 내리자, 민혁이 창문을 열었다.

    “미안해하지 마요. 주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나는 내가, 단솔 씨한테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갈게요.”

    그 말을 남기고 민혁의 트럭은 터덜터덜 언덕길을 내려갔다.

    “저 형님 생각보다 검소한 듯?”

    “아잇! 깜짝이야!”

    한참이나 민혁의 트럭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단솔의 귓가에 불쑥 들려온 민재의 목소리에 단솔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한 시간 전부터? 여기 나만 있던 거 아닌데?”

    민재가 가리키는 쪽에는 다른 멤버들이 병아리들처럼 줄지어 건물 벽 쪽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너희 도대체…… 왜 그러고 있어?”

    “형! 갑자기 변심한 거야? 아…… 지수 형이랑 잘되는 줄 알았는데.”

    “난 저 횽 마음에 들어 off―road truck it’s my style.”

    “아, 무슨 소리야. 그냥 차만 잠깐 얻어 탄 건데! 한지수도 제갈민혁도 아니야. 난 정대수파.”

    “형 자고 온다던 친구네 집이 제갈민혁 형네 집이었어?”

    자기들끼리 누가 나은지 열변을 토하는 멤버들을 뒤로하고 단솔은 숙소로 서둘러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극성 시청자들의 민원은 숙소 안에 들어와서도 계속 이어졌다. 단솔은 이럴 거면 차라리 얼른 춘몽도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형! 길성이 형 왔어.”

    “응? 어…….”

    단솔은 어젯밤 늦게까지 멤버들에게 시달리느라 나갈 준비를 다 하고 나서도 몽롱한 상태였다. 멤버들은 민혁에게 그저 신세를 진 것뿐이라고 아무리 설명해 줘도 믿지 않았다.

    특히 단솔의 새 핸드폰을 발견한 이후부터는 너도나도 목소리가 커져서 옆집에서 찾아올 정도였다.

    “준비 다 했어? 얼른 나와.”

    일찍이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발만 빼꼼 내놓고 누워 있던 단솔은 길성이 오자마자 얼른 몸을 일으켰다.

    단솔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순간, 누군가 단솔의 옷깃을 잡았다.

    “형…….”

    멤버들 중 가장 말수가 없는 연규였다. 얼마나 조용한지 길성이 휴게소에 놓고 온 적도 있어 매번 단솔이 신경 쓰며 챙기던 멤버였다.

    “응?”

    “나는 제갈민혁 씨 괜찮을 것 같아……. 형이랑 제갈민혁 씨랑 손자 손녀 낳고…….”

    “아들, 딸도 아니고 손자 손녀라니 도대체 혼자서 어디까지 상상한 거야.”

    “……상상은 자유잖아.”

    “그렇긴 한데, 헛꿈은 깨. 정말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형 간다.”

    단솔은 또 다른 멤버에게 붙잡힐까 봐 평소보다 더 서둘러서 숙소를 나와 차에 올랐다.

    “너 어제 외박했다며.”

    멤버들의 취조가 끝나고 나니 이번엔 또 길성이 문제인 건가. 단솔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 형도 누구 나랑 잘됐으면 하는 사람 있어? 혹시 그런 꿈이 있으면 당장 접어.”

    “그게 아니고, 어머니 전화하셨더라.”

    “……어? 뭐라고 하던데?”

    “그냥 뭐…… 별말씀은 안 하셨어. 너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물으시더라. 별일 없다고 하긴 했는데. 어머니랑 싸우기라도 했어?”

    “아니.”

    “그렇지? 혹시나 했는데, 뭐 엄마랑 싸우는 것도 좀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거지.”

    길성은 실없이 말을 뱉었다가 금세 자신이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 미안.”

    “됐어, 그게 팩트인데 뭐. 싸운 건 아닌데 앞으로 보지 말자고 했어. 그러니까 형도 엄마 전화 오면 받지 마.”

    “어?”

    길성은 단솔의 말에 놀란 듯 룸 미러에 비치는 단솔의 표정을 연신 살폈다.

    “나 괜찮으니까 앞에 보고 운전해 형.”

    “어…… 어. 그래.”

    “좀 잘게요. 어제 애들한테 시달리느라 잘 못 잤어. 혹시 길 모르면 깨워 줘.”

    “아…… 아니야 자. 하루 이틀 오는 데도 아니고.”

    길성은 전에 없이 단솔을 한 번도 깨우지 않고 춘몽도에 도착했다. 길눈이 어두워도 한참 어두운 그가 익숙하게 올 정도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프로그램이 끝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거의 도착과 동시에 잠에서 깬 단솔은 기지개를 켰다. 단솔이 가장 먼저 도착한 듯 바깥은 아직 조용해 보였다.

    “저…… 단솔아.”

    “어?”

    “오늘 탈락자도 나오는 거 알지?”

    “그래? 몰랐는데…….”

    무인도에서 나오는 데 집중하느라 자신이 데이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새까맣게 잊어버린 단솔이었다.

    탈락자 투표권은 본 적도 없는데, 각자 한 장씩 나눠 주려나, 아니면 게임을 하려나. 탈락권을 갖게 되면 누굴 뽑아야 하지. 단솔의 머릿속엔 온갖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대표님이 아시면 노발대발하시겠지만…… 나는 네가 지금이라도 떨어졌으면 좋겠어.”

    길성의 말에 단솔이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길성의 모자 쓴 옆모습만 보일 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왜……?”

    “그냥…… 괜히 내보냈나 싶기도 하고. 너 이 프로그램하면서 좀…… 달라진 거 알아?”

    그거야, 이 프로그램에 나오기 전날 회귀했으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해맑고 열정 넘치던 23살 주단솔이 아니라, 전 국민의 미움을 받다가 비참하게 죽은 주단솔이라는 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늘 같이 있던 길성에게는 알게 모르게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좀…… 우울해진 것 같아. 약간…… 그냥 내 기분이 그렇다고. 너무 신경 쓰지는 마. 그냥 네가 좀 힘들어 보여서.”

    “나 괜찮아. 형, 내가 잘할게. 걱정 마.”

    “그러니까…… 내 말은 혹시 떨어져도 괜찮다고. 여기까지 온 것도 진짜 잘한 거 알지?”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도 아닌데, 길성은 단솔이 혹시나 탈락하게 돼서 실망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단솔은 그 순간, 제가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회귀 전에 단솔은 최종 선택 직전에 떨어졌었다. 그게 운명이라면 이번 주에 단솔이 떨어지는 게 맞았다. 갑자기 익숙했던 춘몽도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까. 탈락자 발표할 때까지 앞에서 기다릴게.”

    “응. 알겠어.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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