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94화
민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불안해요. 정말 이대로…….”
“찾아가 봐요, 우리.”
민혁은 ‘우리’라는 단어에 힘을 줘 말했다. 자꾸만 불안한 말을 하는 단솔 때문에 저야말로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진짜라면, 그 사람, 해명 도사를 찾아야만 했다.
“어딜요?”
“해명인지 뭔지 그 도사 말이에요.”
이제껏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날은 정신이 없어서 묻지 못한 것들이 많았지만, 해명 도사는 뭔가 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다못해 또 다른 회귀자의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에게 죽음이 정해져 있다는 확답을 받게 된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
“같이 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넋을 놓고 죽을 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혁은 그런 단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러면…… 형을 너무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비밀 이야기해 준 값으로 쳐요, 그럼.”
민혁은 미안한 마음에 우물쭈물하는 단솔에게 일부러 장난처럼 말을 했다.
“배고프죠?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러고 보니, 저녁 준비를 하다가 이야기가 길어져 이렇게 앉아 있었다. 이미 시간은 늦은 저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형, 죄송한데 저 핸드폰 좀 빌려주시면 안 돼요?”
“아, 이거 써요. 왜요? 핸드폰 고장 났어요?”
“네…… 원래 좀 기다리면 켜졌는데 이번엔 아예 맛이 갔어요.”
단솔은 제 오래된 핸드폰을 툭툭 쳐 보았다. 핸드폰은 간헐적으로 번쩍거리며 켜졌지만, 또 금세 꺼지고 말았다. 어차피 3년이나 시간을 거슬러 왔기 때문에 핸드폰이 신형이든 구형이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단솔이 회귀 전 쓰던 핸드폰마저도 3년 뒤에나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23살의 단솔이 쓰고 있는 핸드폰은 민혁의 눈에도 너무 구형이었다. 민혁은 단솔의 너덜너덜한 핸드폰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단솔은 우현의 번호 11자리를 거침없이 눌렀다. 외박을 하게 되면 꼭 연락을 주기로 약속을 했다. 다 큰 성인인데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건지. 단솔을 향한 이상한 루머가 생긴 뒤로 멤버들의 과보호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어, 우현아.”
―형! 왜 전화를 안 받아!
“어……?”
다짜고짜 흘러나오는 우현의 화난 목소리에 단솔이 앞에 서 있는 민혁의 눈치를 봤다. 민혁은 민망한 단솔의 마음을 아는 듯 눈치 좋게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 화를 내……?”
―아이 씨…… 누가 화를 냈다고 그래.
분명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우현은 아니라고 잡아뗐다.
―그래서, 지금 어딘데. 왜 안 와?
“어…… 나 지금 그냥 친구 집 와 있어.”
―형 친구 없잖아.
“야! 나도 친구 있어! ……많지는 않지만…….”
자기가 말해 놓고도 단솔은 궁색한 사족을 덧붙였다. 친했던 친구 몇 명이 있지만 단솔은 자신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니 언제부턴가 친구들을 자꾸만 피하게 됐다. 못난 모습도 한두 번이지. 얻어먹는 일도 갚을 수 있을 때나 받아야 기쁜 법이었다.
그러니 쉬는 날에도 숙소를 지키는 단솔을 지켜봐 온 우현이 친구가 없을 거라고 추측하는 게 과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 오는데?
“어…… 오늘 못 가. 자고 갈 것 같아.”
―그럼 진작 연락을 해 줬어야지! 실종 신고할 뻔했잖아!
“야 내가 애냐…… 핸드폰이 고장 났어. 미안해.”
―그 걸레짝 같은 핸드폰 좀 바꾸라니까!
“아…… 알았어. 바꿀게…… 미안.”
―보급형 말고 제대로 된 걸로 사!
“……응…….”
우현의 외침에 수화기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단솔은 주방 쪽을 힐끗 보면서 음량 버튼을 잔뜩 낮췄다.
아무리 제가 지킬 만한 체면이 없대도 동생한테 이렇게 혼나는 꼴을 보이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워낙 소리가 커서 민혁은 엿듣고 싶지 않아도 단솔의 통화 내용을 다 들을 수 있었다.
―내일 아침에 와?
“어…… 아마도?”
끊을 듯 말 듯 한 전화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뒤로도 우현은 친구의 집이 어느 동네인지, 아침 몇 시에 도착하는지, 뭘 타고 오는지 등. 꼬치꼬치 캐묻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취조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단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사물 드라마라도 본 것일까. 평소 우현이 단솔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가 요즘 들어 동생들 걱정을 많이 시키긴 한 모양이었다.
* * *
“됐죠?”
우현은 숙소 앞까지 찾아온 지수에게 단솔과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내용을 들려주었다.
아무리 늦어도 12시 안에는 들어오던 사람이라 조금 더 기다려 보자는 우현에게 지수는 무서운 말을 잔뜩 늘어놓으며 실종 신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코웃음 치던 우현도 자꾸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당장 경찰서로 출발하려던 그때, 단솔의 전화가 온 것이었다.
하마터면, 5분만 늦었어도 지수와 단솔을 둘러싼 세간의 소문에 보탬이 될 뻔했다.
“아니, 아직 안 됐어.”
제 말이 맞지 않냐며 으스대려던 우현을 지수가 막아서는 바람에 우현의 말투가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뭐가 또 남았어요?”
지수는 그런 우현의 태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우현의 핸드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번호. 단솔이가 전화 건 번호 좀 줘. 혹시 모르니까.”
하아. 우현은 제가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귀찮게 굴 줄 알았으면 단솔을 찾기 위해 지수에게 전화를 거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하, 여기요. 단솔이 형도 알아요? 형이 이렇게 집착 쩌는 거.”
“집착이 아니고 걱정. 근데 이렇게 내가 걱정이 많은 건 모르지, 알면 도망갈걸.”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냐. 우현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번호를 찍던 지수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 지수는 단말마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010 뒤로 이어지는 숫자를 누를 때마다, 지수의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연락처가 뜨며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11자리 숫자를 전부 눌렀을 때, 딱 한 사람의 연락처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제갈 민혁.
* * *
“어! 켜졌다!”
후식으로 군고구마까지 든든하게 먹고 자리에 누운 단솔은 고장 난 핸드폰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한 채였다. 충전기를 이렇게도 껴 보고 저렇게도 껴 보고 해도 안 되던 게 자려고 누우니까 번쩍하는 빛을 내면서 켜진 것이었다.
단솔이 핸드폰이 켜지자마자 확인한 것은 부재중 전화였다. 우현과 지수가 번갈아 가면서 찍혀 있었다. 바빠서 나중에 한다더니, 단솔이 받지 않자 여러 번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단솔은 쪼그려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눈을 감으면 지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조심스러운 입맞춤. 도대체 뭐가 그의 진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불쌍하다고 입을 맞추나.
단솔은 비 맞은 고양이나 강아지를 생각했다. 불쌍해서 안아 주고는 싶지만, 입을 맞추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이랑 동물은 다르다. 애초에 배가 부르고 잠이 몰려와 들었던 헛된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수를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솔은 한숨을 길게 내쉬곤 통화 버튼을 길게 눌렀다.
―여보세요?
“형…… 전화 많이 하셨네요. 제가 핸드폰이 고장 나서 이제 확인했어요.”
―응, 아까 그렇게 끊어서 미안. 손님이 와 있어서.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
“어…… 뭐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제 괜찮아요. 해결된 것 같아요.”
단솔은 거짓말을 했다. 이제 와서 다시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 놓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에 쓸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이 있다면, 단솔은 오늘 그 모든 걸 소진하고 난 후였다.
―아…… 그래? 지금 혹시 어디야? 형이 갈게. 잠깐 볼까?
“아!…… 오늘은 조금…….”
―혹시 지금 밖이야?
“아뇨? 숙소예요. 그……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아…… 그렇구나.
지수가 이미 숙소에 다녀왔다는 걸 꿈에도 모르는 단솔은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우연히 길을 잃었는데 민혁을 만나 그의 할아버지 댁에 와 있다는 말은 제가 들어도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단솔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단솔은 지수와 조금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지금은 너무 가까워서 그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모습이 지수의 본모습인지 알고 싶었다.
“형…….”
―응, 말해 솔아.
“이제 찾아오지 마세요, 숙소 앞에요.”
―……왜.
지수는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그냥…… 오해 살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도 저희…… 이상한 소문도 돌고 그러는데. 굳이 사적으로 자꾸 만나고 그러는 게…… 부담스러워서요. 애들한테 선물도 보내지 마세요. 우현이 말로는 뭘 바꿨다고 하던데. 제가 알기론 저희 숙소에 그 정도로 값어치 있는 물건이 없어서…….”
그 순간, 지수는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온종일 어디에 박혀 있는지 연락도 없다가, 이제야 전화를 해 한다는 소리가.
도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그 낡아 빠진 숙소에서 지수가 탐내는 유의미한 것이라고는 단솔 하나뿐이었다.
―굳이 찾아오지 말라고.
지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했다. 제갈민혁의 집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단솔이 저에게 이런 냉정한 말을 내뱉는 건지.
단솔이 수화기 너머로 제가 대표에게 한 말을 들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지수는 갑자기 단솔이 자신을 멀리하는 이유를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네.”
지수는 말이 없었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침묵 속에서 갑자기 거리감이 느껴졌다. 함께 있을 땐 언제나 대화가 끊이질 않았던 두 사람이었다.
―그래, 네 마음 알겠어.
지수의 대답에 단솔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왠지 모를 공허함이 단솔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솔은 지수의 말을 듣자마자 괜한 소리를 한 건가 후회가 됐다. 상처받은 것 같은 목소리에 단솔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단솔의 핸드폰이 또다시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