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92화
민혁의 할아버지 댁에 도착한 단솔은 입구에서부터 저를 반기는 고양이들과 마구 놀아 준 뒤에야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저 오래된 시골집을 생각한 단솔은 제 생각보다 큰 집의 풍광에 왠지 기가 눌리는 기분이었다.
“안녕하세요오…….”
신발장에서 조심스레 인사하는 단솔을 보며 민혁이 피식피식 웃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어요. 나밖에.”
“진짜요?”
“여긴 식구들 사는 집이 아니거든요. 그냥 별장. 나중에 단솔 씨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에이― 누가 집을 빌려줘요!”
“여기 있죠? 단솔 씨라면 언제든 빌려줄게요.”
“전 괜찮아요. 아! 근데 진짜 신기하다…… 형 없으면 저 진짜 거기서 죽을 뻔했어요 길 잃어버려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지…….”
“내가 말했잖아요, 우리는 운명이라고.”
또 그 소리. 지금의 멀쩡한 모습과 달리, 무인도에 있었을 때가 떠올라 단솔은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어 버렸다.
“왜 웃어요?”
“그때 생각났어요. 무인도 때.”
“아아…… 잊어 주면 안 돼요?”
“그걸 어떻게 잊어요! 크큭…… 형 도둑질한 와중에 진짜 뻔뻔했어요. 덕분에 난 고마웠지만.”
“단솔 씨가 좋았으면 뭐…… 전 목적 달성이네요. 저녁 준비 좀 할게요.”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 쪽으로 향하는 민혁에 단솔이 도우려고 따라갔지만, 그냥 집 구경이나 하고 앉아 있으라는 축객령에 단솔은 주방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머쓱해진 단솔이 거실을 기웃거리다 민혁의 가족사진을 발견했다. 식구가 옷을 차려입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형적인 가족사진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이는 민혁이 한 귀퉁이에서 개구쟁이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볼살이 포동포동한 게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 옆에는 민혁을 닮은 부모님이 서 있었다. 신기하게도 코를 기준으로 위쪽은 아버지, 아래쪽은 어머니를 닮았다.
다음 사진에서는 돌아가신 민혁의 아버지가 어린 민혁의 볼을 장난스럽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 어찌나 애정이 어려 있는지, 단솔은 못내 부러워졌다.
“형은 어머니랑 친하세요?”
“글쎄요…… 가족끼리 친하고 말고가 있나요?”
“……저는 안 친해서요. 사실 오늘 엄마 만나고 왔어요.”
“음…… 사춘기 지나고부터는 조금 어색해진 것도 같네요. 근데 단솔 씨는 왜요?”
민혁은 그제야 단솔이 이 먼 곳까지 와서 만난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함께 카페에 갔다고 하니, 혹시나 몰래 연애라도 하는 걸까 걱정했는데 어머니라니.
혹시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하지만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어머니를 만나고 온 얼굴이 그렇게 상처받은 모습이어서야.
“저기…….”
단솔은 한참이나 말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민혁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잔잔하고 일정한 파도 위에 몸을 맡긴 사람처럼. 그의 평온함이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이런 걸 물어봐도 될까.
“괜찮아요. 단솔 씨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요?”
“……형도, 제가 불쌍한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녁 준비를 위해 재료를 다듬던 민혁이 손에 있던 걸 내려놓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가족사진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단솔의 양어깨를 붙잡아 눈을 맞췄다. 공허한 단솔의 눈빛과 달리, 민혁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민혁이 형도 당황할 때가 있구나. 그 순간 제가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는지 몰랐던 단솔은 오히려 당황한 민혁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정말…… 무슨 일 있었어요?”
* * *
“왜 전화를 안 받아…….”
얼마 만에 단솔이 제게 먼저 건 전화인데, 아까 그냥 그렇게 끊어 버린 게 마음에 걸렸던 지수가 일찍이 대표를 내보내고 계속 전화를 걸어 봤지만,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딱딱한 소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지이잉―
손끝에 느껴지는 진동에 지수가 본능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솔아?”
―아닌데요. 형도 단솔이 형이랑 같이 없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우현이었다.
“단솔이 집에 없어? 아까 전화 오긴 했는데 내가 바빠서 나중에 통화하자고 했거든.”
―그게 몇 시쯤인데요?
지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곤 단솔이 전화했던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아, 그럼 이미 헤어졌을 시간인데…….
“뭐? 누구랑 헤어져.”
―됐어요.
도대체 뭐가 됐다는 건지, 자기 궁금증만 해결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우현을 지수가 붙잡았다.
“야! 야! 네 용건만 해결하면 다야? 솔이가 누굴 만나러 갔는데.”
―……아! 그건 당사자한테 물어보세요.
“당사자가 연락이 안 되잖아 지금.”
―……단솔이 형 엄마 만나러 갔어요. 그러니까 더 캐묻지 마세요.
그 소리에 지수의 마음이 덜컹하고 떨어졌다. 단솔이 힘들게 연습생 생활을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부모님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는데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었던 걸까. 단솔을 좋아한다면서, 정작 단솔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잠깐! 잠깐! 어머니 만났으면 하루 자고 올 수도 있는 거 아냐? 식사가 길어질 수도 있고…… 왜 이렇게 걱정하는데?”
못 본 지가 오래됐으니 할 얘기가 많을 수도 있지 않나. 지수는 애써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고 했다. 부모님을 만나러 간 다 큰 성인 남성을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이유가 뭘까.
―아…… 단솔이 형 엄마랑 단솔이 형은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자꾸 묻지 마세요……. 그리고 솔이 형한테 저한테 들었다는 말도 하지 마시구요. 끊을게요.
뚝.
지수는 제 마음대로 끊겨 버린 전화에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그 멍청한 대표 자식만 아니었어도.
혹시 무슨 일이 생겨서 전화를 걸었던 걸까. 지수는 초조한 마음에 단솔이 전화를 걸었던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 *
“무슨 일…… 무슨 일은 항상 있었어요.”
민혁의 성화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단솔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멤버들이 악성 댓글마다 답변을 달아 준 일부터, 대표가 자신을 찾아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고, 지수와 술자리를 갖고, 어머니의 연락을 받은 일까지도.
“제 가장 어린 기억은 유치원도 가기 전이었어요. 엄마 아빠가 싸웠고, 이혼이라는 단어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이혼이 뭔지도 몰라서 이튿날 어린이집에 가서 선생님한테 물어봤던 생각이 나요.”
깜짝 놀란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모양이었다. 그걸 본 엄마는 단솔이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망신을 줬다며 회초리를 들었다. 어린 단솔은 제가 왜 맞는지도 모르고 맞았다.
단솔의 이야기를 듣는 민혁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단솔은 그런 모습에 장난을 치듯 말했다.
“아주 나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냥 저한테는 조금 무관심했을 뿐이지. 그래도 지금 있는 자식들한테는…… 아주 잘하더라구요.”
“제 귀에는 그게 더 나쁜 사람처럼 들리네요.”
“크큭……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어요.”
단솔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민혁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계속 혼자만 앓고 있다간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단솔의 하소연이 싫을 법도 한데, 민혁은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단솔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근데 이제 알았어요. 부모님은…… 내가 연예인이 된 걸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는걸.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인정하기 싫었던 거지.”
민혁은 숨을 죽였다.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단솔은 이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값싸게 날 팔아넘긴 거예요. 이 잔인한 곳에. 심지어 이상한 루머를 듣고 와서는…… 나보고 진짜냐고 묻더라구요.”
민혁이 아무리 자연에 파묻혀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한들 세간에 퍼져 들려오는 소문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최근 들어 단솔을 향한 댓글이나 무분별한 소문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어린애들이 쓴 장난 같은 글이나 짜깁기일 뿐, 딱히 근거가 있거나 믿을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그런 걸 보고 자기 자식을 다그쳤다니. 단솔의 부모는 단솔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듯했다.
“이젠 정말 엉망진창이에요. 이상한 루머라서 대응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진짜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잖아요. 심지어 날 낳아 준 사람까지도…….”
“그건 단솔 씨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이 괴롭다면…… 그냥 괴로워해요. 두렵고 싫은 걸수록 자꾸 마주하고 직면하다 보면 좀…… 시시해지거든요.”
“정말 그럴까요……? 이런 일에도 익숙해질까요?”
“내가 매번 운명이니 뭐니 얘기하지만, 사실 난 그런 거…… 안 믿어요. 그보다는 나를 믿지. 운명이 그게 아니라면 그냥 싸우면 되는 거 아닐까요. 그건 안 보이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단솔은 그 순간, 왠지 민혁이라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다.
단솔의 마음은 불이 붙은 공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형…… 혹시 전생 같은 걸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