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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91화 (91/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91화

당당하게 문을 나온 단솔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버스 정류장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사실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버스가 오긴 오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올 때 내렸던 곳에서 반대편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카페 근처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한참 멀리 떨어진 외딴 버스 정류장까지 발길을 옮긴 것이었다.

정류장은 아무도 찾지 않은 지 오래된 것처럼 낡고,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너덜너덜한 시간표를 보니 그것도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단솔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미 사용하지 않는 버스 정류장이라, 아무도 제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밀려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흐읍…… 여기가 어디야…….”

한참을 울었을까, 한껏 멋을 낸다고 얇게 입은 옷 탓에 추워지기 시작했지만, 서둘러 돌아가기보다 누구에게라도 전화해 잔뜩 하소연하고 싶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단솔은 핸드폰을 들어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떠올렸다. 길성에게 전화했다간 대표의 불호령을 들을지도 몰랐고, 동네 친구들이라면…… 목소리를 듣자마자 겨우 멈췄던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멤버들에겐…… 더 이상 신세를 지는 게 미안했다. 어젯밤 저를 향한 악플에 일일이 반박해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수 형……?”

단솔이 지수를 떠올렸다. 사실, 그날 이후 엄마와 만남을 준비하면서도 내내 지수의 입맞춤이 어떤 의미일까 곱씹었다. 지수는 선물을 보내는 와중에도 한 번도 먼저 전화한 적이 없었다.

형…… 식탁 왔어요. 애들이 좋아하는데 이런 거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너무 비싼 것 같아요.

한지수 선배님

별로 안 비싸

보내오는 선물에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도 한참 만에야 짧게 오곤 했다. 단솔은 그런 지수의 기본 프로필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수 형?”

―……어 ……응, 그래.

누가 들어도 떨떠름한 반응에 단솔이 당황하며 지수의 번호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전화 괜찮아요?”

―미안, 형이 지금 좀 바쁜데.

“어…… 네, 그럼 다음에 할게요.”

―급한 일은 아니지?

“네…… 아니에요.”

―그래, 나중에 통화하자.

“……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싶어 하는 지수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건 단솔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단솔은 지수가 보냈던 운동화가 생각나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아직 지수가 전화를 끊지 않아 급하게 단솔이 말을 하려던 그때,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지수 착한 척하는 것 봐. 혹시 너 걔 좋아하냐.

―어리고 불쌍해서 잘해 주는 거지.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뚝.

단솔은 너무 놀라 급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날의 입맞춤은 지수에겐 그저 술에 취해 벌어진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 정도는 기억도 못 할지도.

자꾸만 지수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단솔은 텅 빈 정류장에서 그 뒤로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 * *

한편, 지수는 제 소속사 대표와 만나고 있었다.

“한지수 착한 척하는 것 봐. 혹시 너 걔 좋아하냐.”

“어리고 불쌍해서 잘해 주는 거지. 하던 얘기나 마저 해.”

얍삽한 새끼가 누굴 입에 담아. 그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지수는 누가 봐도 자신의 의중을 떠보고, 단솔을 약점으로 잡으려는 대표의 뱀 같은 속내를 간파했다.

해서, 일부러 단솔의 전화를 떨떠름하게 받고, 귀찮은 일인 양 연기했다.

처음 함께 일할 때만 해도 지수는 라이징 스타였고 그는 로드 매니저에 불과했다. 지수는 이제 불뚝 나와 버린 대표의 뱃살을 쳐다보았다.

“옛날엔 참 날렵하고 빠른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 얼굴엔 탐욕이 가득해 보였다. 그 역시 지수의 시선을 느낀 듯 거의 반쯤 눕다시피 한 몸을 일으켜 배에 힘을 줬다. 하지만 이미 살쪄 버린 뱃살은 숨길 재간이 없었다.

“아, 그런가…… 뭐 알잖아. 영업하고 그러니까.”

“배가 불러도 너무 불렀지.”

“뭐?”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고 이제 우리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이 왜 갑자기 딱딱하게 말하고 그래, 우리가 그동안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옛날에 내가 알던 사람이랑 다른 분 같아서요. 그러게, 돈으로 해결하자고 했을 때 정리했으면 좀 좋아.”

처음 계약 해지를 했을 때만 해도, 지수는 위약금을 물어 주고 깔끔하게 끝낼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앞에 있는 대표는 무슨 욕심이 들었는지 지수에게 소송을 걸었고, 조직적으로 여론을 몰아 지수의 이미지를 떨어트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단솔과의 스폰서 설이 더욱 구체적인 정황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아니 그러니까…… 지수야. 원하는 게 뭐야? 응?”

급기야 대표는 소파에서 내려와 지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이렇게 간절했으면 그런 치졸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지수가 경영에 워낙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표는 지수가 알고 있는 자신의 비행이 극히 일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리 허술한 인간이 아니었다.

수년간 차곡차곡 그의 횡령, 탈세, 주가 조작 혐의에 관한 자료를 모은 지수가 대표의 사무실로 사본을 보냈다.

그뿐인가, 그가 다양한 성매매 업소를 다니며 외도한 흔적도 깡그리 모아 와이프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보내 버렸다. 물론, 다른 가족들이 보기 전에 그가 중간에 가로챘지만.

어찌나 바쁘게 업소를 오가는지, 일주일만 사람을 붙였는데 10년간의 탈세 자료와 분량이 맞먹을 정도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냐고?”

“그래……! 내가 다 해 줄게! 제발 말해 줘. 그리고 이 자료 검찰에만 넘기지 말아 주라. 아, 우리 마누라한테도…… 알지? 우리 마누라 임신한 거.”

대학생일 때부터 만나 함께 고생해 온 그의 부인은 지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임신한 줄은 몰랐는데, 미친 새끼. 임신한 부인을 두고 어떻게 그런 짓을.

지수는 대표가 조금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자수해.”

“어?”

“자수하시라고요. 내가 원하는 건 그건데?”

* * *

단솔은 해가 지고 나서야 정류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멤버들에게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으니, 걱정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답을 하려고 화면을 켜자 핸드폰은 완전히 먹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낡은 기종에 추운 데서 오래 있어서 그런지 밧데리가 남아 있었는데도 켜지질 않았다.

이젠 택시도 부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카페에서부터 얼마 걷지 않은 줄 알았는데. 감정이 격해져서 걷는 것과 우느라 힘이 다 빠진 채로 걷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던 걸까.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 단솔이 길을 잃었다는 걸 자각하게 된 건 해가 다 져 버린 후였다. 가로등 불빛도 드문드문 보이고, 서울 외곽의 경기도 지역이라 그런지 아까는 보이지 않던 논이나 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뭐야…… 무서워…….”

컹컹 개 짖는 소리와 깍깍 기괴하게 우는 철새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단솔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때, 단솔의 앞에 아주 낡은 1톤짜리 트럭 한 대가 털털거리며 멈춰 섰다.

그게 누구든 살려 달라고 외칠 작정이었던 단솔은 운전석에 탄 사람을 보자마자 바보같이 음 이탈을 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혁이 형⁈”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단솔은 뛸 듯이 기뻤다.

“형! 민혁이 형!”

“우와…… 여기서 단솔 씨 만나니까 되게 반갑네요. 근데 여기서 뭐 해요? 운동하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도대체 어딜 보고 그런 추측을 하는 건지, 어머니를 만난다고 잔뜩 차려입고 머리까지 셋팅한 단솔을 보고 민혁이 말했다. 역시 좀 사회와 동떨어진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단솔의 눈에는 그가 백마 탄 왕자요, 잔뜩 칠이 벗겨져 녹슨 1톤 트럭이 황금 마차였다.

“저…… 길 잃어버렸어요. 진짜 이런 말 드리기 창피한데요……. 형 저 좀 살려 주세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단솔의 모습에 민혁이 얼른 조수석에 있는 짐들을 뒤로 치웠다. 조수석에 단솔이 올라타자, 그가 무릎 담요 하나를 내밀었다.

“그래도 그건 오늘 빤 거예요.”

그 말만은 진짜인지, 흙먼지 가득한 차 안에서 빨간색 체크무늬 담요만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형은 근데…… 여기서 뭐 해요?”

“아아…… 농사지어요. 이쪽에 할아버지 댁이 있어서. 주말이나 속 시끄러울 때마다 내려와서 쉬거든요. 그런데 어쩌다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민혁의 물음에 단솔은 부끄럽지만 오늘 갔던 카페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을 잃었다는 단솔의 말에 민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카페 거리인지 뭔지 만든다고 갑자기 우후죽순 카페들이 생기긴 했는데, 어거지로 만든 거라 주변에 뭐가 없어요. 조금만 걸어 나오면 계속 논인데 다들 똑같이 생겨서 사람들이 방향을 못 잡아요.”

“그렇구나…….”

“단솔씨 혹시 배 안 고파요? 한참 걸었을 텐데.”

“어…….”

배고프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음…… 혹시 저녁 전이면 나랑 저녁 먹고…… 좀 놀까요?”

“네?”

“할아버지 집 구경 시켜 줄게요…… 고양이도 있는데…….”

“어…….”

지금 출발해도 서울까지 가면 막차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단솔이 고민하자 민혁이 궁색하게 말을 덧붙였다.

“군고구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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