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89화 (89/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89화

    “야! 아무나 좀 나와 봐!”

    “단솔이 형 술 마셨어?”

    “오…… 단솔……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신을 거면 양쪽 같이 신지 한쪽만 더러워졌어 갓뎀…….”

    “제이콥 형! 아까부터 계속 진짜……! 형은 솔이 형보다 신발이 더 중요해?”

    단솔은 멤버들 손에 이끌려 제 방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술 취해서 정신이 없는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술은 진작에 깬 지 오래였다. 그저 방바닥이 너무 따듯했고, 단솔은 너무 피곤했을 뿐이었다. 조금 알딸딸하긴 하긴 했지만 그냥 졸렸을 뿐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얼른 집에 가서 대표 새끼가 부숴 놓은 밥상도 치우고, 가는 길에 애들한테 줄 치킨도 포장해 가야겠다.

    하지만.

    말랑.

    말랑하고 촉촉한, 알코올 향이 나는 무언가가 단솔의 입에 닿았을 때 그 모든 생각은 휘발되고 말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게 지수의 입술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

    단솔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그때부터 술에 취해 잠든 사람처럼 굴었다.

    ‘같이 술 한잔했어.’

    ‘그러니까요. 당신이 왜……! 됐고, 얼른 솔이 형 이리 주고 가요.’

    지수가 우현과 실랑이를 하는 것도 다 들었다. 정말…… 지수가 저를 좋아하는 걸까.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단솔이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으…… 머리 아파.”

    지수가 저에게만 잘해 주는 이유를 단솔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그저 후배를 챙길 줄 아는 그의 성품인 때문인 줄 알았고, 후에는 특별히 제게만 이렇게 살갑게 군다는 걸 알았지만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제 어림짐작으로는 룸메이트니까? 겨우 그 정도의 시시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수가 알파라는 걸 알았을 때 그 모든 신뢰가 무너져 내렸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이미지 관리를 위해 저를 이용한 게 아닐까 잠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게 사실은 나를 좋아해서라면……?’

    생각보다 문제가 간단해진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지수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단솔은 술기운 때문인지 지수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하나 남았다.

    “지수 형 같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애를…….”

    단솔이 지수를 마주했던 순간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첫 촬영 날을 제외하면 늘 울고 있거나, 땟국물이 줄줄 흐르거나, 오늘처럼 나사가 하나 빠진 상태였다. 제가 생각해도 지수가 저를 좋아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단솔이 거실로 나갔을 때, 우현이 손에 치킨을 바리바리 들고 들어왔다.

    “어! 우현이 형! 치킨 사 왔어? 방금 나가지 않았어?”

    “……어…….”

    우현은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단솔과 마주치자 당황했다.

    “배고파서 달려갔어? 되게 빨리 다녀왔네.”

    지수는 그 치킨의 출처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우현아…… 나랑 얘기 좀 해.”

    “형! 치킨 먹고 해!”

    “난 됐어 너희끼리 먼저 먹어.”

    단솔이 방으로 우현을 데리고 들어왔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본 우현이 작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머리를 숙였다.

    “너 거기 앉아 봐.”

    “응.”

    아무래도 서서 얘기하면 제가 목이 부러질 것처럼 올려다보아야 하기 때문에 전략상 단솔은 우현을 제 맞은편 침대에 앉혔다.

    “지수 형이랑 무슨 얘기 했어?”

    “뭐…… 사람 사는 얘기?”

    우현이 애매모호하게 답을 했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우현은 연신 문 쪽만 쳐다보았다.

    “저런 거 받아 오지 마.”

    “어떤 거?”

    “치킨…… 같은 거? 안 그래도 지수 형이랑 나 사이에 이상한 소문 도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우현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스폰이 이것저것 다 사 준다지만, 김미숙 간장 치킨으로 스폰을 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지 않지 않을까, 형.”

    “그…… 그래도! 조심하자는 거지! 서로서로…….”

    듣고 보니 우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수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단솔은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받다 보면 저도 모르는 새에 마음이 휩쓸려 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형이 잘못 생각하는 게 있어.”

    “뭔데?”

    “저건 그냥 준 게 아니야. 그 형이 내 것 중에 좀…… 탐나는 물건이 있대서 바꾼 거야. 일종의 물물 교환이랄까.”

    “그게 무슨 물건인데?”

    “몰라도 돼. 이건 내 프라이버시니까.”

    졸지에 쓰레기장에서 후드티를 벗어 주고 반팔만 입은 채로 집에 들어온 우현은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 단솔에게 지수가 다이노소울 한정판 후드티를 받아 갔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우현이 밖으로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민재가 방으로 들어왔다.

    “형아, 무슨 이야기 했어?”

    “애기들은 몰라도 돼.”

    “흥, 됐어. 우현이 형한테 물어보지 뭐.”

    형들이 하는 건 뭐든지 듣고 싶은 민재였다. 평소라면 제가 먼저 나서서 민재를 챙겼겠지만, 오늘은 제 일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표님한테 혹시 너나 다른 애들이 맞지는 않았지?”

    “응. 나 사실 아까 대표님 말리는 척하다가 한 대 쳤어. ‘누구야!’ 이랬는데 모르는 척했다?”

    “잘했어. 아니…… 그래도 어른 때리고 그러면 안 돼.”

    민재가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눈빛이 총기를 잃은 걸 보니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응. 아! 형아 이거 주려고.”

    “뭔데?”

    민재가 내민 것은 단솔의 오래된 핸드폰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핸드폰을 들고 가는 것도 까먹었다. 지갑도 뭣도 없었는데 지수 덕분에 무사했던 하루나 다름없었다.

    “오늘 온종일 울렸어.”

    “대표님 전화야?”

    “아니, 대표님 건 자꾸 울려서 진즉에 차단해 놨고…… 어머니…… 시던데?”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려던 단솔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우뚝하고 멈췄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한층 더 꼬이는 기분이었다.

    “난 나가서 치킨이나 먹어야겠다. 전화하고 형도 나와…….”

    민재는 단솔이 고민하고 있자, 눈치 좋게 문을 열고 거실로 비켜 주었다.

    방에 혼자 남은 단솔이 몇 번을 머뭇거리다 끝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부재중 전화가 열 개도 넘게 찍혀 있는 걸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여보세요?”

    ―단솔이니? 바빴니?

    “아…… 네 오늘 좀.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어…… 다른 건 아니고. 그냥 잘…… 지내나 해서.

    “전 괜찮아요.”

    ―사실…… 애들이 보여 줘서…… 인터넷을 좀 봤는데. 아니지?

    도대체 뭘 보고 이렇게 연락하신 걸까. 지수와의 스폰서 설? 조폭 연루 설? PD에게 뇌물을 줬다거나 성 상납을 했다는 걸 보셨나.

    하도 터무니없는 말들이 오가서 단솔 조차도 무슨 소문이 어떻게 도는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어차피 다 사실이 아니기에 자신만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엄마는 제가 그런 일들을 해서라도 뜨고 싶어 한다는 생각을 한 걸까. 단순한 걱정으로 치부하기엔 아직 회귀 전 외면당한 상처가 단솔을 짓누르고 있었다.

    “아닐 거예요. 뭘 보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 엄마는 걱정이 돼서.

    그 걱정이 저를 위한 걱정이 맞는 걸까. 단솔은 의심이 들었다. 단솔이 가장 힘들어할 때 이복동생들이 단솔의 존재를 알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오히려 단솔을 외면한 사람이었다.

    ―혹시 시간 되면 언제 한번 보자.

    그녀는 전화할 때마다 저런 인사를 붙였다. 안 본 지 너무 오래돼서 그게 진담인지 아닌지도 헷갈렸다. 아니, 사실 헷갈리는 이유는 온전히 단솔의 기대 때문이었다.

    저런 소리는 아주 오랜만에 필요에 의해 연락한 지인에게나 하는 소리였다. 악덕 소속사에 자식을 버리듯이 두고 간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단솔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늘.

    “저 이번 주에 시간 되는데, 어떠세요?”

    단솔은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인사치레로 다음을 기약하는 엄마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엔 빈번하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이곤 했다. 그때는 그저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에 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다.

    ―어? 이번 주……? 어…… 내가 일정을 좀 확인하고…….

    엄마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도 있지만, 회귀 후와 달라진 사람들, 달라진 상황을 마주하고 나니, 엄마를 꼭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 후 되찾은 삶이 두려워 숙소와 춘몽도 이외엔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챙겨 주고 아껴 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이미 오래전 접었다고 생각한 기대감이 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엄마도 멤버들이나 춘몽도에서 만난 사람처럼 달라졌을까.

    “확인하고 연락 주세요.”

    ―그…… 그래…….

    어차피 온갖 풍문 때문에 자잘한 게스트 섭외나 행사 요청도 끊겼을 테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단솔은 다시 섬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한 번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다.

    애매모호한 답변이었지만, 단솔은 어머니가 시간이 되지 않는다면 직접 근처까지 찾아갈 자신도 있었다.

    만약 이번에 어머니를 만나면, 회귀 후엔 처음이었다. 회귀 전, 다이노소울이 해체하고 나서부터는 간간이 이어지던 연락도 뚝 끊겼다. 통장에 입금되는 약간의 생활비가 단솔의 부모가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단솔은 최대한 그 돈만큼은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었다.

    자존심을 부린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은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린 죄책감이 그 돈을 쓸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들은 제가 유명한 연예인이 되는 걸 바라기보다는 그들을 대신해 저를 돌봐 줄 사람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런 그들에게 제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토록 죄인처럼 살았는지.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긴 했을까.”

    그래도 자식인데 조금은 슬퍼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과 이미 새 가정을 꾸려 자식까지 낳은 입장에서 귀찮은 혹이 떨어져 나갔다며 기뻐하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서로 교차했다.

    그 어느 쪽을 상상하든, 단솔에게는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