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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88화 (88/150)
  •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88화

    “우리 슈퍼스타님들― 더 필요한 건 없고?”

    드르륵.

    불시에 열린 방문에 지수는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우뚝 멈춰 섰다.

    “어유, 완전 뻗었네.”

    “예…… 술을 좀……. 피곤했나 봐요.”

    단솔에게 억지로 술을 먹인 것도 아닌데 지수는 미숙의 눈초리에 왠지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순전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에 가까웠지만.

    “대리 불러드려?”

    “……아뇨. 저, 사장님. 여기 배달도 되죠?”

    “치킨집에서 배달 안 하면 뭐 먹고 살라고. 한 마리? 두 마리?”

    지수는 머릿속으로 다이노소울의 멤버들을 헤아려 보았다. 지난번에 마주쳤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거기서 거기였다.

    “여덟, 아니…… 열 마리요. 주소는…….”

    * * *

    지수는 단솔을 업고 다이노소울의 숙소로 향했다. 대리운전을 부르면 코앞이었지만, 일부러 고생길을 자처한 건 이런 핑계로라도 단솔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술에 잔뜩 취한 모양인지, 단솔은 지수에게 업혀 있는 지금까지도, 눈 한번 뜨지 않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 나이 먹고 도둑 키스나 하다니. 단솔의 눈을 보고 나면, 지수는 제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자각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단솔의 동그란 눈을 마주하면, 진실을 말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았다.

    한순간이라도 더 붙어 있겠다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수고를 감수한 주제에, 얼굴을 마주 볼 용기도 없다니. 이렇게 비겁한 사람이 또 있을까.

    모자를 푹 눌러쓴 지수가 느릿느릿 길을 걸었지만, 단솔의 숙소는 치킨집에서 너무도 금방이었다. 건물 앞에 다다른 지수는 두리번거리다 계단을 내려갔다. 숙소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반지하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게 기억났다.

    마침, 지하층 두 개의 문 중 더 안쪽에 위치한 오른쪽 문이 벌컥 열렸다. 지난번에 봤던 그 거슬리는 멤버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뭐예요?”

    “……안녕?”

    “그쪽이 왜 솔이 형이랑 오냐고요.”

    우현이었던가, 현우였던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는데, 우현이 금방이라도 싸우려 들려는 사람처럼 지수에게 말했다.

    성질머리 하고는.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수는 자신이 우현의 나이였을 때 어땠는지를 떠올리곤 화를 가라앉혔다.

    “같이 술 한잔했어.”

    “그러니까요. 당신이 왜……! 됐고, 얼른 솔이 형 이리 주고 가요.”

    우현은 단솔을 마치 짐짝 대하듯 했다.

    “단솔이 형! 일어나, 집이야.”

    “침대 어디야. 애 깨우지 마.”

    “들어오지 마요, 남의 숙소에.”

    “왜? 내가 너희 숙소에서 훔쳐 갈 거라도 있을까 봐? 솔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빨리 문 열어.”

    “지금 걱정한다는 사람이 그래요? 진탕 술 마시고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우현은 너덜너덜하게 쪼개진 낡은 밥상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곤 급기야 지수의 등 뒤에 코알라처럼 매달린 단솔을 잡아당겼다. 지수는 더 고집을 피우고 싶었지만, 단솔이 다칠까 봐 서둘러 단솔을 내려 부축했다.

    단솔이 현관문 뒤로 사라지자, 지수는 그제야 복도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와 쓰레기가 모여 있는 빌라 옆 주차장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건물 앞엔 허접한 세간살이들이 다 나와 있었다. 밥상뿐만이 아니라 멀쩡해 보이는 것들도 군데군데 깨져 있고, 유리가 깨진 쓰레기도 잔뜩이었다.

    그 착한 단솔이 무슨 일로 대표에게 대들기까지 한 건지.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온 것부터 수상했다. 더 캐물으면 상처가 될까, 조심스러웠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저도 한 대만 빌려줘요.”

    우현은 지수가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말을 덧붙였다.

    “미성년자 아니거든요, 스무 살이에요. 정 의심스러우면 검색해 보시던지.”

    그 말에 지수도 안심한 듯 제 담배 한 대를 꺼내 우현에게 내밀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제가 스무 살이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형 진짜 알파예요?”

    “……어.”

    올 게 왔구나. 연신 툴툴거리는 우현을 하찮게 봤던 지수는 이제 취조당하는 범죄자가 된 것처럼, 성실하게 우현의 물음에 답했다.

    “단솔이 형은 몰랐어요?”

    “응. 내가 속였어, 다들.”

    “잘도 속이셨네요.”

    “오랫동안 그랬으니까 익숙해진 거지.”

    “근데 왜 이제 와서 밝히는 건데요?”

    “당당하고 싶어서. 속이기 싫어서.”

    “누구한테요?”

    우현의 스무고개 같은 질문은 꽤 예리했다. 이미 제 행동에서 단솔을 향한 마음이 읽혔겠지.

    “알잖아. 너도.”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저는 확실한 대답이 필요한 거거든요. 그쪽은 잠깐 갖고 노는 마음이라도.”

    “누가 그래.”

    “네?”

    “누가 잠깐 갖고 노는 마음으로 평생 일군 커리어를 태워. 비겁하게 피하려는 거 아냐. 네가 솔이 아끼는 마음은 알지만, 당사자한테도 못 한 고백을 한집 사는 동생한테 할 순 없잖아.”

    입 밖에 내기에 너무 큰 마음이라서 아껴 두었을 뿐, 지수는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설프게 굴어서 단솔에게 상처 주는 일도 만들고 싶지 않았고.

    아직은, 아직은 마음을 고백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건 그러네요…….”

    우현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어?”

    지수는 단솔의 과거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떻게 연애를 했고, 이별을 했는지.

    음험한 질투심을 넘어서 혹시 그때의 일로 갖고 있는 트라우마나 상처가 있는 건지. 가끔 한없이 풀어지다가도 어느새 보면 멀어져 있고, 방어적으로 구는 게 과거의 연애사와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아뇨, 그런 거 없어요. 솔이 형 모태 솔로거든요.”

    “아…….”

    단솔에게 상처를 준 사람 중 혹시나 제가 아는 이름이 나오면 그놈을 뭉개 버릴 생각을 했던 지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귀찮은 일을 하나 줄일 수 있게 됐다.

    “제가 말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그래.”

    지수의 진심을 어렴풋이 알게 된 우현이 경계가 허물어진 듯,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우현이 말해 주지 않았어도 지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아냈을 테지만.

    “대표님이 왔었어요. 형이랑 솔이 형 떠도는 이야기 말이에요.”

    제가 알파라는 걸 고백한 뒤로 수많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중 어떤 걸 말하는 건지. 지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스폰…… 이요. 그거 때문에 저희 요즘 행사 안 잡힌다고 난리였거든요. 멤버들은 안 그래도 쉬고 싶어서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집을 다 부숴 놓는다고…….”

    지수의 시선 끝에 다이노소울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며, 머그잔들이 깨진 채 버려진 모습이 보였다.

    “처음엔 야구 방망이로 단솔이 형 때리려고 했어요. 도망쳐서 다행이지만……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다 부순 거예요.”

    “아주 무식한 인간이네.”

    지수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단솔이 맞을 뻔했다는 소리에 이성적으로 사고가 되질 않았다. 요즘에도 그런 양아치 같은 인간이 있다니.

    계약 조건이 뭔지, 위약금은 얼만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이랑 계약을 한 건지. 지금이라도 계약서를 살펴보고 변호사를 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 역시 소속사를 잘 못 만나 지금껏 고생을 하고 있으니 지수는 더 신경이 쓰였다.

    당장이라도 숙소로 찾아갈 기세인 지수의 표정에 우현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 멤버들은 형 안 좋아해요. 특히 제이콥은 형 마주치면 죽이겠다고 난리니까 빨리 가세요.”

    “왜?”

    “솔이 형이 도망칠 때 제이콥 신발 신고 갔거든요. 어학원 아르바이트한 걸로 어렵게 돈 모아서 샀는데 한 번밖에 안 신은 거라서 아까부터 ‘이게 다 한지수 새퀴 때문이햐!’ 하면서 노발대발 난리 났어요. 가세요.”

    우현은 단호한 표정으로 제이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그 신발이 뭔데. 아니, 걔 발 사이즈 어떻게 돼.”

    “290…… 아니 그건 왜요?”

    “핸드폰 좀 줘 봐.”

    지수가 우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들더니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오늘 부서진 물건, 망가진 신발 다 변상하게. 어쨌든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탁.

    방금까지 지수에게 꽤 우호적으로 굴었던 우현이 신경질적으로 제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우리 거지 아니거든요?”

    누가 단솔과 같은 멤버가 아니랄까 봐. 우현은 쓸데없이 씩씩하고 자존심이 셌다.

    “나이 어려도 알 거 다 알아요.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가 어디 있어요. 그딴 거 주고 스파이 노릇 시킬 생각인 거죠?”

    “누가 대가가 없대?”

    * * *

    때마침 도착한 치킨을 우현의 손에 쥐여 보내고, 지수는 차에 앉아 대리 기사를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 쇼핑몰을 뒤졌다. 부서진 밥상을 대신할 식탁과 머그잔, 대표가 집어 던져 버렸다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담았다.

    그것도 모자라 멤버들이 먹을 식재료와 위급할 때 쓸 만한 방범용 도구, 멤버들에게 줄 운동화까지 잔뜩 주문한 지수는 우현이 입고 있던 다이노소울 한정판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잠깐 팔았다가,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물건이라 온라인에서는 품절된 지 오래였다. 정대수도 갖지 못한 레어 템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지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셀카를 찍어 대수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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