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87화
“넘어지면서 팔이 조금 까졌을 뿐이야.”
단솔에겐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였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두현이 제 팔을 깨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싸우느라 두 사람이 잔뜩 뒤엉켰다.
두현은 일부러 보이는 곳은 피해 가며 허벅지나 명치 갈비뼈 쪽을 공략했고, 지수는 방어만 하다 두현의 코를 팔꿈치로 때리는 바람에 두현이 쌍코피를 터트렸다.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왔을 땐, 스태프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었다. 탈락권을 찾느라 넘어졌고, 그 바람에 카메라 메모리도 잃어버렸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스태프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네요…… 병원 갔다고 그래서, 크게 다친 줄 알았어요.”
“그럼, 별일 아니었어. 하하.”
억지로 웃는 지수는 아직도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맞은 건 제가 더 맞았는데, 두현이 코피를 흘리는 바람에 스태프들의 눈초리를 받은 게 아직도 억울했다. 병원에 가 보니 지수의 갈비뼈에 금이 간 상태라는 게 밝혀지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생각할수록 유두현은 영악한 놈이었다.
“근데…… 진짜 여기까지는 웬일이에요?”
지수도 항간에 도는 소문을 모르지 않았다. 병원에서 돌아온 뒤부터 머릿속엔 온통 단솔의 생각뿐이었다. 저를 향한 비난은 당연히 감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전히 제 욕심으로 단솔과 한방을 쓰고, 한 침대에 누워 잤던 일이 단솔에게 독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수는 그런 스스로에게 분노했다. 단솔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지수가 힘겹게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와 미친 시발 진짜 한지수네⁈”
지수의 맞은편, 단솔의 등 뒤에 있는 칸막이 위로 동그란 눈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단솔은 익숙한 일인 듯 고개를 돌려 그 눈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소율아, 안녕.”
“오빠 진짜 저거 한지수 맞아요?”
“아유! 이 계집애가 또! 성구야 미안해. 한지수 씨 미안합니다― 얘는 내가 데려갈 테니까 이야기 나눠요. 지수 씨 나갈 때 알죠?”
묘하게 오늘따라 더 친절한 김미숙 사장은 지수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단솔이 이전에 했던 사인을 가리킨 뒤 주방으로 소율을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 한지수 사인받으면 망할걸? 요즘 알파 고백하고 개망했잖아.”
“그래? 난 왠지 알파라니까 더 좋던데, 섹시하고.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대. 연예인도 똑같아. 망해도 3년 정도는 근근이 인기 있어.”
하지만 두 사람과 멀어지기 전, 미숙에게 소율이 한 말이 지수와 단솔의 귀에도 들렸다.
“하…… 형, 아무래도 장소를 제가 잘못 고른 것 같.”
“아냐, 솔아 괜찮아. 사실…… 그 일 때문에 사과하러 왔어. 나 때문에 괜한 오해 받게 해서 미안해 솔아.”
한지수랑 주단솔 ×××도 하고 ××하는 사이라던데, 우리 언니의 친구의 오빠가 호텔에서 일하는데 주단솔이랑 한지수 한 방에서 나오는 거 봤다더라. 청소하러 들어갔더니 ××랑 ×××다 찢어진 채....
단솔은 지수의 사과에 갑자기 어젯밤 봤던 터무니없는 게시글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사…… 사장님! 여기 맥주 한 잔 주세요!”
도저히 술을 먹지 않고서는 자신이 없었다. 단솔의 주문에 달려온 사장님은 어쩐지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주문을 받았다.
“일찍 갈 줄 알았는데…… 술도 한잔하게?”
“어…… 네…… 안 돼요?”
“그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홀에 단체 손님 예약이 있어서…….”
“아…… 그럼 갈게요. 지수 형, 아무래도…….”
“아니, 아니! 가라는 게 아니라…… 더 프라이빗한 룸으로 모실까 해서…… 한지수 씨도 괜찮죠? 프라이빗 룸.”
‘……여기 그런 데가 있었나.’
* * *
어느새 단솔과 지수는 치킨집 안에 있는 방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사장님이나 가족들이 잠시 쉬는 공간으로 사용되는 듯, 방은 생활감이 가득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 위에 따끈하게 튀겨진 치킨과 치킨 무, 맥주, 그리고 김미숙 사장이 서비스로 내준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이럴 거면 컴컴한 홀이 더 나을 뻔했다. 형광등이 달린 작은 방에 들어오자 바로 앞에 앉은 지수의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소맥 괜찮죠?”
“응…….”
왜인지 어색해진 건 지수도 마찬가지인 듯 지수는 단솔이 커다란 맥주 통에 소주병을 거꾸로 꽂아 휘젓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단솔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위약금은요?”
“……어?”
기껏 할 말을 고민해서 꺼낸 게 위약금 이야기라니. 단솔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론 제 입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수의 부상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새벽에도 기사를 찾아봤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지수가 알파 발표를 한 이후 물어 줘야 할 광고 계약금이 얼마인지, 소속사와의 분쟁에서 패소하면 얼마의 돈이 드는지 같은 경제지 기사뿐이었다.
그런 기사를 한번 읽고 나니 그 뒤론 알고리즘이 비슷비슷한 기사만 추천해 주는 바람에 단솔의 머릿속에 마침 떠오른 이야기가 그런 종류밖에 없었다.
“광고 같은 거 말하는 거지?”
“……네.”
“노래 가사에 그런 말이 있잖아.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건, 네게 그만한 돈이 없어서라고.”
“…….”
“너 지금 좀 재수 없다는 생각했지.”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응.”
“조금?”
단솔의 솔직한 대답에 지수가 피식거리며 웃었다. 복잡한 일들이 꼬여 있긴 했지만, 실력 있는 변호사에게 맡겨 놓은 지수는 그런 일 따위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제 앞에 앉은 단솔의 기분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여전히 방 밖에는 민재의 슬리퍼 한 짝과 제이콥의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그 꼴을 보고 모른 척하기도 지수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별일 아니라고 해도…… 안 믿어 주실 거죠?”
“응.”
단솔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가득 채워 꿀꺽꿀꺽 넘겼다. 지수라면 뭐든 이해해 주겠지만, 이런 꼴을 보이는 건 아무래도 창피했다.
“대표님한테 맞을 뻔했어요.”
“뭐?”
“제가 좀 대들었거든요…… 제 잘못도 있죠. 그렇게 앞뒤 안 보고 달려드는 게 아니었는데.”
한숨을 푹 내쉰 단솔은 또 한 번 술을 잔에 붓고는 마셔 버렸다.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지 오늘따라 술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한편, 단솔의 이야기를 들은 지수는 분노에 들끓고 있었다. 제 눈에 담는 것도 아까운 단솔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요즘에도 그런 놈이 있나. 저 역시 소속사 사장의 횡포로 한참 동안 고생한 기억이 올라와 더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들이닥쳐선…… 야구 방망이로 내려치는데 별수 있나요. 그냥 아무거나 집어 신고 도망쳤죠. 그래도 그 상황에서 신발이라도 신은 게 어디예요. 아, 밥상 하나뿐인데…… 대표님이 올라가서 부서졌어요. 이제 우리 애들 밥 어디서 먹지.”
단솔은 연거푸 마신 술에 취한 듯 해롱거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대표와 함께 남은 멤버들 걱정, 밥상 걱정, 끼니 걱정까지. 도대체 조그만 머리에 뭐가 들은 건지. 단솔은 온통 남 걱정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어, 지수 역시 제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형, 차는요?”
“대리 부르면 돼.”
한 잔, 두 잔. 고삐가 풀린 두 사람은 급기야 소주를 몇 병 더 시키곤 부어라 마셔라,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위한 배려인지, 방바닥이 뜨끈뜨끈하게 난방이 돌아가는 듯했다. 덕분에 취기는 더 빠르게 올라왔다.
“우리 사댱님…… 조폭 출신이라 너므 므서워여…….”
“내가 죽여 줄까, 그 새끼?”
“앙 대여…… 형 안 그래도 욕 많이 먹는데…… 살인까지 하면 진짜 안 되죠…….”
“나 괜찮다니까 그러네.”
“앙 대여 앙 대…….”
단솔의 몸이 스르륵 벽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방바닥이 따듯해서 그런지 단솔은 금세 입을 오물거리며 잠들었다. 바깥엔 근처 조기 축구회의 회식인 듯 시끄러운 아저씨들의 소음이 울렸지만, 방 안은 이질적으로 조용하기만 했다.
단솔의 고개가 불편하게 꺾여 있었다. 지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단솔에게 다가갔다.
“이러고 자면 목 디스크…….”
순전히 단솔이 조금 더 편하게 누웠으면 하는 바람에서 다가온 지수는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어버렸다. 단솔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치킨을 야무지게 먹은 입술은 립글로스라도 바른 것처럼 번들거렸다.
지수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한지수, 정신 차려. 너 진짜 이렇게 쓰레기 새끼야? 잠든 애한테 뭐 하는 짓이야. 얼른 저 45도로 꺾인 목을 누여 주고 코트 꺼내서 덮어 줘.
그 짧은 찰나에 지수의 뇌리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저기…… 단솔아. 자?”
“…….”
제발 무슨 대답이라도 해 주길 바랐지만, 꾹 닫힌 단솔의 눈꺼풀은 들어 올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지수의 눈에는 단솔의 입술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잠시 주춤거렸던 지수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야, 한지수.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적인 놈이었다고.
지수의 입술이 천천히 단솔의 얼굴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단솔의 촉촉한 살덩이를 가볍게 스치곤 물러났다.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마치 제가 압력 밥솥이라도 된 것처럼, 김을 내뿜으라면 내뿜을 수 있을 정도로 제 몸이 뜨거워진 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지수의 마음속엔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저 때문에 단솔이 악플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은 걸까. 단순한 욕정이나 소유욕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저조차 모를 낯선 감정이 지수의 머리를 온통 잠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