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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86화 (86/150)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섬에 떨어지다니 86화

“#86화

단솔도 대표와 제대로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위협용으로 들고 온 줄 알았던 야구 배트가 공중을 가르기 전까지는.

“대표님! 제 얘기를 좀!”

“얘기는 무슨 얘기! 이 자식들이 아직 내 성질머리를 못 봤지⁈”

쉬익―.

콰직.

대표는 날아오는 야구 배트를 간신히 피하고 거실로 나간 단솔을 쫓아 숙소에 하나뿐인 밥상을 밟고 뛰어올랐다. 다행히 낡은 밥상이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면서 단솔은 현관으로 도망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형! 도망가!”

제대로 넘어지고도 성질을 이기지 못해 쫓아오려던 대표를 말린 것은 멤버들이었다.

다른 애들까지 두들겨 패는 건 아니겠지.

단솔은 숙소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지만, 제가 들어가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게 뻔했다. 워낙 공사다망한 인간이니 단솔이 돌아오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차를 타고 떠날 게 분명했다.

갑자기 뛰쳐나오느라 단솔은 잠옷 위에 후드 집업을 입고, 제이콥이 어렵사리 돈을 모아서 산 커다란 운동화 한 짝과 민재의 슬리퍼 한 짝을 신고 나온 상태였다.

터덜터덜 걸어 동네에 하나 있는 공원으로 향하는데, 근처 초등학교의 하교 시간인 모양인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돈은 없는데 얼굴만 알려진 건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단솔은 힐끗힐끗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곤 후드 집업을 뒤집어썼다.

“솔아, 안녕.”

제대로 앞도 보지 않고 걷던 단솔의 앞에 익숙한 신발이 나타났다. 방금 사 온 것처럼 깨끗한 명품 구두. 긴 다리 때문에 늘 살짝씩 보이는 복숭아뼈.

“지수…… 형? 형이 여긴 웬일이세요?”

왜 그는 항상 제가 이런 꼴일 때 나타나는 걸까. 단솔은 슬리퍼를 신은 발을 290㎜의 조단 농구화 뒤에 애써 숨기며 말했다.

“음…… 우연히, 걷다가?”

까만색 모자에 목도리까지 두른 그는 코트 차림이었다. 지수는 생각보다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 보였다. 강 건너 저편에 사는 그가, 서울 끄트머리 산자락에 붙은 이 동네에 볼일이 있을 리가.

“그럼 계속 걸으세요.”

단솔은 그 순간, 괜히 두현을 데리러 간 지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지수가 자신을 보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단솔은 자꾸만 그 사실을 모른 척하고 싶어졌다.

단솔 스스로도 그 마음이 납득이 가질 않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솔아, 얘기 좀 해. 사실 너 보려고 온 거야.”

“무슨 얘기인데요? 저 연습 가야 해요.”

궁색한 변명이었다. 제 발을 훑는 지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발목도 안 좋은데 신발은 왜 짝짝이로 신었어. 이러다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

“이게 요즘 유행이거든요.”

불퉁하게 튀어 나간 말에 단솔은 금방 후회했다. 지수는 아직 공개되지도 않은 다음 시즌 명품 옷을 미리 받아 보는 사람이었다. 이딴 게 유행이라는 말을 믿어 줄 리가.

“그래? 미안 몰랐어. 그래도 신발은 발에 맞게 신어야 해. 이렇게 큰 거 신고 다니면 다쳐.”

지수가 무릎을 굽혀 커다란 신발의 신발 끈을 꽉 잡아 묶어 주었다. 제이콥이 봤다면 기함할 일이었지만, 그렇게 꽉 묶었음에도 신발은 여전히 커서 헐떡거렸다.

“됐어요. 그러는 형도 다쳐서 병원 갔다면서요…… 몸은 좀…… 괜찮아요?”

지수의 행동에 민망해진 단솔이 운동화를 신은 발을 뒤로 무르며 딴소리를 했다. 여태 단솔이 냉랭하게 굴어도 표정 변화 하나 없던 지수가 푹 눌러쓴 모자 밑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 * *

지수가 두현을 데리러 산에 올라갔던 건 순전히 단솔 때문이었다. 괜히 두현에게 일이 생겨 단솔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상황이 벌어질까 봐.

해가 지면 저 알아서 내려올 것이지.

이연 때문인지, 전부터 두현이 단솔을 못마땅해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산을 오른다고 할 때부터 불안했었는데.

지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금세 단솔과 두현이 헤어진 자리까지 올라왔다. 졸지에 지수 덕분에 등산을 두 번이나 하게 된 스태프 두 명은 아까보다 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여기서 더 올라갔겠네. 빨리 갑시다.”

“허억…… 선배님…… 저 더는 못 올라가요…… 우욱…… 토…… 토할 것 같아요…….”

“후으, 나…… 나도……. 한지수 씨…… 아니…… 선생님…… 못 갑니다. 귀에 이명도 들리고 막…….”

“아이 씨.”

알파가 득시글한 소굴에 단솔을 맡겨 놓고 어떻게 돌아섰는데, 산 중턱에서 시간을 끄는 스태프들에게 지수는 잔뜩 화가 났다.

욕을 짓씹는 지수의 표정과 들어 올린 손을 보고 스태프는 눈을 질끈 감았으나, 이미 몸은 녹초가 된 지 오래라 움직이지 않았다. 때릴 테면 때리라지. 차라리 날 죽여라. 하고 누워 있을 때, 지수의 손이 스태프의 손에 들려 있던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혼자 갔다 올 테니까 여기 있어요.”

실눈을 뜬 스태프는 그제야 지수 혼자 산길을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카메라 장비를 손에 들고 각도를 맞추는 지수에게 말했다.

“한지수 씨……! 고맙습니다……! 사실, 정상에 탈락자 투표권이 있어요……. 아까 유두현 씨한테 귀띔해 줬는데 아마 그거 찾으러 올라간 게 아닐까…….”

그 말을 들은 지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거, 단솔이한테도 말했습니까?”

“아…… 그게 제가 실수로 말한 거라…….”

“실수로 말했으면, 단솔이한테도 말해야 형평성이 맞지 않나요. 대놓고 누구 편을 들어 주려고 한 게 아닌 이상.”

“뭔가 오해를.”

“됐고, 여기서 기다려요. 데려올 테니까.”

지수는 스태프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않고 정상 쪽으로 향했다. 실수는 개뿔, 두현이 있는 소속사의 돈이 꽤 깊은 곳까지 흘러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 바닥 굴러가는 모양새가 다 거기서 거기지. 탈락자 투표권이 있다는 정보를 두현만 알고 있다면, 두현이 가장 먼저 떨어트릴 사람은 누구일까.

지수는 가장 먼저 단솔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 안 되지.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거지 같은 섬에 또 들어왔는데.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더 빨라졌다.

* * *

“일단 차에 타. 연습실로 데려다줄게.”

“그…….”

단솔은 더 이상 변명이 나오질 않았다. 이대로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연습실로 가면 잔뜩 성이 난 대표와 마주칠 확률이 있었다.

“형…… 사실 연습 없어요.”

“알아.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하자. 혹시 아는 곳 있어?”

* * *

지수와 단솔은 김미숙 치킨집의 칸막이 쳐진 낡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사실, 단솔은 이 동네에서 이곳 말고는 마땅히 갈 곳이 생각나질 않았다. 칸막이가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과 배달 주문을 주로 해서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홀까지.

저야 모자를 눌러쓰면 대충 가려진다고 하더라도, 지수의 큰 키와 비율을 숨기기에 적당한 곳은 이곳뿐이었다.

“그냥…… 차에서 이야기할 걸 그랬나 봐요.”

하지만, 막상 지수를 데려다 놓으니 치킨집이 이렇게까지 초라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치형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두서없이 그려진 칸막이와 수많은 사람이 오간 탓에 푹 꺼져 버린 의자의 쿠션, 곳곳에 스며든 튀김 기름 냄새가 지수와는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난 좋은데?”

지수는 그런 단솔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김미숙 사장님이 갖다주신 뻥튀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나 이거 진짜 오랜만에 먹어 봐.”

“형도 그런 거 먹어요?”

유기농이나 유명 호텔 출신 셰프가 운영하는 파인다이닝에서 나올 법한 음식만 접할 것처럼 생긴 지수는 의외로 소탈한 구석이 있었다.

“왜, 나도 예전엔 호프집 같은 데 가서 기본 안주에 어묵탕 하나 시켜서 소주만 잔뜩 먹고 그랬어.”

“형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술 한잔할래? 시간이…… 좀 이르긴 한데.”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단솔에겐 지금이 아침처럼 느껴졌다. 점심시간을 지나긴 했지만,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요. 형 차도 가지고 왔잖아요…… 그리고, 다친 데도…… 형 도대체 어딜 다친 거예요?”

지수는 단솔의 물음에 애써 웃어 보였다. 코트 안에 가려진 왼쪽 팔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 * *

지수가 정상에 올라갔을 때, 두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욕을 짓씹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아씨! 놀라라…… 아…… 지수 선배?”

정상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캡슐이 매달려 있었다.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캡슐 속에 있는 탈락자 투표권을 찾으라는 히든 미션이었나 보네. 이런 장관을 준비해 뒀는데 민성과 단솔이 일찍이 문제를 풀어서 얼마나 김빠졌을까. 상상도 못 한 상황에 지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탈락권은 좀 찾았어?”

“……선배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직 못 찾았나 보네.”

지수는 두현의 물음에는 일부러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무의 높이가 꽤 높았다. 단솔과 키가 비슷한 두현의 손이 닿는 높이에 있는 캡슐들은 이미 다 땅바닥에 버려진 지 오래였다. 아직도 두현이 캡슐을 꺼내고 있는 걸 보면, 탈락자 투표권을 얻었다고 해도 과반수는 안될 거라고 짐작했다.

지수는 선뜻 높은 곳에 있는 캡슐에 손을 뻗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지수가 처음 꺼낸 캡슐에서 탈락자 투표권이 나왔다.

“여기 있네.”

“어!”

지수가 종이를 내밀자, 선뜻 두현이 종이를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두현의 손끝이 종이에 닿기 전, 지수가 휙 하고 종이를 가로챘다.

“어딜. 이건 내가 딴 건데?”

“아…… 선배 그건 아니죠. 제가 아까부터 여기서.”

“정상엔 누구나 올라올 수 있는 거 아니야? 넌 늘 그런 식이더라. 먼저 오면 임자, 뭐…… 그런 생각인가. 인생이 선착순이야?”

“……기분 탓인가 ……말에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거예요, 선배님?”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은. 아…… 카메라 있어서 그래? 이거 아까 전부터 꺼져 있었는데.”

지수는 그 말을 끝으로 아예 카메라의 메모리 칩을 빼서 던져 버렸다.

“이럼 됐지?”

“하…… 그나마 그거라도 있어서 예의 지킨 건데 무모하시네요, 선배님.”

“무모해? 누가 무모해? 내가?“

“그럼 여기 누가 또 있어요? 오메가 행세하다 걸린 주제에 자숙 기간도 없이 기어들어 온 사람이? 선배 이미지 박살 났고, 이제 회생 불가인 거 온 세상 사람이 알아요. 무모한 거야, 멍청한 거야. 죄송한데 저랑 한 프레임에 엮일 생각 마세요. 누구 이미지 망치려고.”

“그래? 나랑 한 프레임에 들어가기 싫으면 네 소원대로 해 줄게.”

지수는 두현을 비웃듯 나무에 기어 올라가기 위해 도약했다. 하지만 이를 먼저 눈치챈 두현이 지수의 허리춤에 매달리면서, 두 사람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어딜 가요! 여긴 내 거라니까!”

“이 미친 새끼가! 먼저 찾는 놈이 임자지!”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임자지! 절대 못 가!”

“아악!”

지수가 두현을 엎어치기 하듯 내팽개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땅에 처박힌 게 꽤 아팠는지 비명을 질러 대던 두현이 지수의 팔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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